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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소설가 (1991이상문학상수상작품집)

우리시대의 소설가 (1991이상문학상수상작품집)

조성기문학사상사1991년 9월 1일
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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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 소설도 환불이 되나요?

 

우리는 사이즈가 맞지 않거나 박음질이 잘못된 옷을 자연스럽게 환불한다. 요구하는 사람도, 판매했던 사람도 어색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소설은 어떨까. 소설을 읽고 내용이 부실하다면 작가에게 환불을 요구할 수 있을까? 1991년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조성기의 <우리 시대의 소설가>가 던지는 질문이다. 

강만우 씨는 소설가다. 상업화가 진행 중인 동네에 살고 있다. 그는 공장과 레스토랑이 들어서는 걸 보며 소설가가 살 만한 동네가 아니라고 푸념한다. 주변 집들이 상가로 변하고 있지만 자신의 집만큼은 옛날 모습을 유지하려 한다. 소설가라면 상업적인 행위, 이윤을 추구하는 행위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신문의 광고면을 들어내버린 뒤 ‘신문다운 신문’이 된 것 같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 강만우에게 독자 민준규가 전화를 걸어 책의 환불을 요구한다. 강만우는 거절하고 전화를 끊지만 민준규는 계속해서 전화를 걸거나 찾아와 끈질기게 책 값 3천500원을 돌려달라고 한다. 이 과정에서 강만우의 모순적인 삶이 폭로된다. 

강만우는 인당 25만 원 그러니깐 150만 원이 들어오는 과외비에 문학 그룹 과외를 수락한다. ‘소설 창작을 지도하고 지도받고 하는 것보다 더 웃기는 일도 없죠’라는 자신의 말과도 정면으로 반대되는 행동이다. 또한 작가인 자신에게 환불을 요구하는 민준규에게 출판사가 더 많은 이윤을 가져가니 환불은 출판사에 요구하라고 한다. 또한 환불을 해준다 하더라도 책이 팔렸을 때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윤만큼만 환불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작가의 양심이나 책무를 중요시 여기는 듯 말하다가도 환불해달라는 말에는 이윤을 따져 대답한다. 이처럼 강만우는 상업적인 행위를 비판하는 동시에 자본의 논리를 내면화 한 이중적인 인물이다. 

강만우의 모순적인 모습은 작품에 대한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쓰고 있는 소설에서 세르베투스는 “‘영원한’ 하느님”이냐 “하느님의 ‘영원한’ 아들”이냐를 두고 논쟁을 벌이다 화형을 당한다. 단어 하나가를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버린다. 하지만 소설과 달리 강만우는 자신이 산 책이 『염소의 노래』인지 『염소의 배꼽』인지도 모른다. 심지어 주인공 이름도 기억하지 못한다. ‘간택’이라는 단어를 쓴 김수옥 여사에게 단어의 뜻을 알고 쓰는지 의아해하던 모습과 달리 말이다. 자신의 책을 환불해달라는 독자를 설득하려 나간 자리에서 책 내용도 모르고 있다는 건 작가로서 최소한의 책임의식마저 결여된 상태임을 의미한다.

반면 독자 민준규는 책도 경제 구조 내에서 판매되는 하나의 상품으로 여긴다. 그렇기에 환불 요구 또한 정당한 것이 된다. 그러나 독자들의 눈치를 보는 작가의 자세에는 비판을 가한다. 신문 연재도 안 할 수 없냐 묻는다. 신문 연재는 구독률과 독자의 반응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민준규가 책을 꼼꼼히 읽고 비평하는 자세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단순히 좋다 나쁘다 식의 인상 비평이 아닌, 작가가 소신을 지키지 못하고 작품에 시대를 반영하지 못하며 작품을 관통하는 세계관 또한 구축하지 못했기에 『염소의 노래』가 불량 작품이라는 논리를 펼친다. 책이라는 상품 자체를 구매하고 환불을 요구하는 소비자로서의 권리와, 책을 읽고 의견을 제시하며 논쟁을 펼치는 자세는 독자의 바람직한 모습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실제 작가가 생각하는 소설이란 무엇일까. 명확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여러 번 등장하는 ‘신문’을 통해 추측이 가능하다. 첫째, 강만우가 처음 젖은 신문을 집어 들어 광고면을 떼어버리는 장면이다. 소설의 작품성이나 내용이 아닌 광고와 마케팅에 의존하는 방식을 비판하는 장면이다. 둘째, 남녀 상봉 지사를 넣어달라는 문화부장의 전화에 ‘아, 네’ 하고 대답하는 강만우와, 이야기를 지지부진 늘어놓는 신문 연재를 그만 두라 말하는 민준규가 등장하는 장면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신문의 본문과 광고란 사이에 해당하는 배꼽 부분에 연재소설이 위치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문학성과 상업성 사이에서 고민할 수밖에 없는 작가의 고뇌를 표현한 것이다.

작품과 작가, 문체와 내용, 완성도와 소설의 주제가 완벽히 일치하는 건 힘든 일이다. <팔 없는 사람의 명상>처럼 명상과 행동 사이의 모순은 소설가에게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필자는 상업성과 문학성을 함께 가져갈 수 있다고 본다. 그러기 위해 둘 사이의 균형을 잘 잡아가는 게 소설가의 역할이다. 그러기 위해서 작가는 자기 작품에 대한 평가와 비판에 귀를 기울이되 휩쓸리지 않을 정도의 자기 객관화가 되어 있어야 한다. 독자의 주장이 터무니없는 것이라면 마르셀 푸르스트처럼 철저히 개인성을 유지할 필요가 있고, 부족한 점이 있다면 독자의 의견을 적극 반영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갖춰야 한다. 문학이 상업성과 작품성이라는 두 다리를 딛고 서있기 위해서는 작품의 완성도와 문학성에 대한 고민을 놓지 않으면서도 창작 또한 노동이자 생계수단이라는 걸 존중하는 사회적 문화가 조성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