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는 곳으로 (최진영 장편소설)
손다혜
코로나19와 같은 팬데믹의 발생은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뿌리 깊게 바꿔두었다. 사태가 진정되고 일상을 회복 중인 지금에도 사람들은 그때의 습관을 기억하고 이어 나가는 경우도 많다. 이렇듯 질병이나 자연재해와 같은 거대한 재난은 인류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며 그 영향은 결코 단기적이지 않다. 만약, 이러한 재난이 전 세계적으로 발생하여 인류를 절멸에 가까운 상태로 몰고 간다면 어떻게 될까? 사실 이러한 질문을 가진 작품은 많다. 질병이나 재해가 덮친 뒤의 세계를 서술하고, 망가져 가는 인간성을 부각하는 아포칼립스 세계관은 이젠 흔한 소재가 되었고 책뿐만 아니라 그림, 음악과 영화 등 다양한 매체에서 수도 없이 시도되었다. 하지만 해가 지는 곳으로 가 그중에서 선택될 가치가 있는 책이 될 수 있는 것은 재앙으로 망가진 세계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시작은 지구에 퍼진 이름 모를 바이러스로 멸절해 간 인류의 이야기를 하며, 그 결과 끈질기게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비축된 물자들이 줄어가니 살아남은 사람들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잔혹하고 가차 없어진다. 그 결과 삶은 척박해지는 것을 넘어 가혹해질 뿐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인간성을 포기한 인물들도 늘어간다. 최진영 작가의 다른 작품인 구의 증명도 그렇듯, 저자의 작품은 절대 단순하거나 가볍지 않고, 어둡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희망 없는 세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불신과 생존 욕구만이 앞서 있는 세계에서 남편과 딸을 잃었으나 남은 아이를 지키려는 류, 가족과 함께 피난 여정 나선 지나와 건지, 홀로 버텨내기도 쉽지 않은 세계에서 동생을 지키려는 도리까지. 이들은 모두 인간성을 조금만 포기해도 나아질 수 있는 상황이 닥쳐도 그들은 쉬운 길을 걷지 않으며 고난이 있더라도 자신과 타인을 포기하지 않는다. 믿음과 감정을 잃은 세계에서 사랑을 잃지 않는 일은 얼마나 고될까? 인물들의 선택을 응원하면서도 나는 과연 그런 상황에서 ‘나’임을 포기하지 않는 선택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었다.
이 책을 덮고 나서 나는 작가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끝도 없는 불행을 쓰는 것은 쉽다. 인물들의 상황을 최악으로 몰아넣고 벗어날 길을 주지 않고 방관하는 것은 생각하기 쉬운 법이니까. 하지만 불행과 비탄이 가득한 세계에서 다시 일어날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렵다. 사람의 마음은 여리고 나약하니 쉬운 길을 걷고 싶어하고, 자신을 위해 선을 등지는 선택을 하는 것은 불행을 이겨내는 것 보다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진영 작가가 쓴 이 이야기에서 인물들이 선의와 인간성을 잃지 않고, 괴로워 하면서도 결국 사랑과 헌신을 지켜내는 모습은 고되나 아름다운 이야기라며 책을 덮을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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