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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위 (꿈에서 달아나다)

몽위 (꿈에서 달아나다)

온다 리쿠노블마인2017년 9월 25일
박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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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에는 잠꼬대에 답을 하면 깨어나지 못한다는 미신이 있다. 잠꼬대는 이 세상의 말이 아닌 피안의 언어라는 말도 있다. 이러한 미신은 인간이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무의식에 대한 공포로부터 비롯된다. 몽유에 대한 두려움, 무의식에 잠식당하는 것에 대한 공포이다. 이러한 공포는 가위눌림이라는 형태로도 나타나며, 우리 주변에 흔히 편재되어있는 공포 중 하나이다. 온다 리쿠의 몽위는 이런 인간의 잠재의식에 대한 공포를 판타지 소재를 사용하여 풀어낸다. 작품의 배경은 미래의 일본, 꿈을 영상으로 읽어낼 수 있는 몽찰이 보편화된 시대이다. 주인공은 이 몽찰을 읽는 일이 직업인 사람이다. 주인공이 사랑했던 여성은 유이코라는 인물로, 예지몽을 꾸는 걸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큰 사고 후 홀연히 사라진 유이코는 몇 년 후 꿈을 통해서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주인공이 타인의 꿈과 자신의 꿈을 통해 유이코의 자취를 쫓아가는 것이 작품의 큰 흐름이다. 작중에서 묘사되는 꿈에 대한 공포와 초월적인 능력을 읽으며, 꿈의 정체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자신이 자각할 수 있는 한계인 의식보다 깊은 잠재의식을 인간은 늘 두려워하면서도 숭배, 혹은 동경해왔다. 그 예로, 이전에 뇌를 100%사용하는 방법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뇌를 100%쓰는 사람에게 일종의 초능력이 발현된다는 일종의 이다. 틀린 이론이라고 증명되었지만, 일부 사람들은 아직도 믿고 있다고 한다. 전생 체험 또한 마찬가지이다. 어떤 이에게 최면이라는 가수면 상태를 만들어두고 말을 걸어 전생이라고 생각되는 내용을 듣고 전생이라고 생각되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이 전생체험이나 100%사용법은 세기말이라고 칭해지는 90년대에 특히 크게 유행했다. 종말론의 대두와 함께, 저항할 수 없는 힘을 극복하고자 하는 심리에서 비롯된 현상인 듯 보인다. 이 두 이야기는 모두 인간이 자각하지 못한 무의식 영역을 통제함으로써더 높은 영역의 자기 통제력을 가지게 되는 결과를 갖기 때문이다. 해몽 또한 같은 맥락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무의식의 통제를 통해 과거, 현재, 미래를 초월하는 것이다.

 

 소설 내용 중에 꿈은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 걸까, 라는 질문이 있다. 먼저 꿈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따져보면 다음과 같다. 과학적으로 꿈은 체험이 무의식 속에서 재구성되는 현상이다. 얕은 수면, 즉 렘수면 상태에서 인간은 학습된 상징을 바탕으로 과거의 경험을 재구성하여 꿈을 만들어낸다고 한다. 의식적으로 통제하지 못할 뿐인, 일종의 오해나 상상인 셈이다. 이 무의식적 상상은 오랜 시간 창작자들에게 좋은 소재로 기능해왔다. 장자의 호접지몽도 이러한 꿈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이황의 몽중작은 꿈속에 선경에 도달한 이황이 그곳에 가 살고 싶다는 내용이다. 사임당이나 황진이도 이런 꿈에 대한 시를 지었으며, 이 몽위라는 소설도 꿈이 소재가 된 소설이다. 비단 동양뿐만 아니더라도 서양에도 꿈에 관련한 다양한 설화나 창작물이 많이 존재한다. 크게 흥행한 놀란의 영화 인셉션 또한 꿈을 다루는 작품인데, 꿈 속에 녹아들거나 꿈을 받아들이는 동양의 많은 창작물과는 달리 꿈을 통해 현실을 바꾸는, 위에서 언급한 무의식의 통제와 초월에 대한 내용을 다룬다.

 

 그렇다면 꿈은 어디로 가는 걸까, 꿈은 자신의 과거에서 와서 미래에 반영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지몽과 태몽, 인터넷에 흔하게 볼 수 있는 꿈 해석이 그 대표적 예이다. 이러한 꿈들은 과거의 경험이 재구성된 것이지만, 꿈의 해석을 통해 자기암시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을 믿는 사람은 그 암시에 따라 행동하게 되고 결국 이것이 미래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 예로 꿈자리가 사납다는 말이 있다. 좋지 못한 내용의 꿈을 꾼 사람이 행동을 조심하여 나쁜 일을 피하거나, 그런 꿈을 꾼 후에 똑같이 생활하다가 불운을 겪는다면 그 꿈은 예지몽이 된다. 태몽도 마찬가지이다. 무언가 길한 꿈을 꾼 후 주변사람 혹은 본인이 임신을 하면 그것은 태몽이 된다. 이러한 꿈 해석은 한중일과 같은 동양에 아주 흔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일본소설인 몽위 또한 그런 심리의 반영으로 전개된 것으로 보인다. 꿈에서 달아난다는 제목을 보며 꿈과 현실을 혼동하는 호접지몽의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내용을 예상했지만, 예상과는 달리 인물들은 결국 꿈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달아나다는 뜻의 위는 꿈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위가 아니라 꿈속을 통해 달아난다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작품 속의 은 실체가 있으며 현실에 직접적 영향을 끼친다. 꿈을 통해 달아나던 인물들은 결국 꿈 안에 잡혀버리고 만다. 마치 우리 사이에 흔히 받아들여지는 태몽처럼 현실과 꿈, 즉 무의식이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무의식을 통해 현실을 초월하는 인물을 그린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인간은 무의식을 통해 미래를 볼 수 있는 것일까, 정말 볼 수 있다면 어디까지 볼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노스트라다무스, 바바반가, 탄허스님 등 유명한 예언가들은 무의식을 초월하여 미래를 예지한 것일까. 결론부터 적자면, 나는 예지라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데자뷰라는 현상이 있다. 어디서 본 듯한 상황, 한번 겪었던 듯 한 이미지. 사람들은 이것을 꿈에서 본 듯하다.”라고 표현한다. 나는 데자뷰란 실제로 그 상황을 겪은 적이 없음에도, 비슷했던 일을 무의식중에 재구성하여 그런 느낌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지 또한 마찬가지로, 어디선가 본 듯한 일을 간략하게 서술하면 그것이 해석을 통해 재구성되어 후세에 예언이라고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몽위라는 작품을 읽으며 꿈에 대한 인식과 그 사용법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꿈의 초월적 능력, 그리고 현실과의 밀접한 관계를 일본소설 특유의 섬세함으로 풀어낸 좋은 작품이다. 하지만 소름이 돋거나 하는 일 없이 나는 이 내용이 완전한 판타지로 받아들여졌다. 꿈이란 심리테스트와 마찬가지로, 받아들이기 마련이다. 해석하기 나름이며, 끼워 맞추면 들어맞는다. 어떤 꿈을 꾸든지, 그 꿈을 통해 자기암시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미래는 달라질 것이다. 꿈이란 결국 과거의 기억조각을 모아 예쁘게 만든 스테인드 글라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