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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허블2019년 6월 24일
고정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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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가까운 SF >
SF(science fiction) 라는 장르에 막연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동안 어깨 너머로 보아온 SF장르에서는 로봇이 반란을 일으키고, 외계인이 쳐들어오고, 우주에 버려지는 등. 손쓸 수 없는 거대한 재앙과 마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판타지 속 드래곤과 싸우는 얘기랑은 또 좀 다른 게, 판타지는 단어 그대로 비현실을 표방한다. 그에 비해 SF는 몇 광년씩이나 떨어져 있는 다른 은하처럼 나의 현실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데 그럼에도 과학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아주 현실감이 없지는 않아서 불쾌감이 들었다. 공포영화를 보더라도 어디 멀리 시골에 있는 폐가에서 나오는 귀신보다는 세면대 밑처럼 생활감 있는 장소에 웅크리고 있는 귀신이 제일 무섭듯 말이다. 하지만 김초엽의 소설은 그동안 내가 멋대로 판단한 SF의 정의와는 정반대의 글이다. 따뜻하고 밀접하다.
7편의 이야기 모두 현대 사회의 문제들을 똑바로 바라본다. 미래를 배경으로 현재를 이야기하고, 과학의 탈을 쓰고 인문사회적 풀이를 제시한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장애는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짧은 글을 봤다. 장애라는 단어가 사전에서 사라질 수 있도록 기술을 발전시켜야 하며 그것이 인류가 짊어진 숙제라고 설명했다. 좋은 취지로 쓴 글 같기는 한데 어딘가 아다리가 안맞는 기분이었다. 첫 번째 단편인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를 읽으니 장애는 눈에 보이는 현상 그 자체로 성립하는게 아니라 사회적 인식에 따라 결정된다는게 분명해졌다. 장애는 기술 발전만으로는 사라질 수 없다. 유전자 편집 기술로 모두가 아이큐 300으로 태어나는 세상에서 아이큐가 130인 사람은 장애인일 것이다. 소설 속 지구로 순례를 떠났던 순례자들은 그들의 고향인 차별이 없는 유토피아인 ‘마을’로 돌아오지 않고 차별과 폭력이 존재하는 지구에 남는다. 이는 세계가 양분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 디스토피와와 유토피아. 지옥과 천국. 장애인과 비장애인. 흑과 백. 케이크 가르듯 세계가 이분된다는건 지옥이 두군데 생긴다는 걸 의미할 뿐이다.
세계는 단순하지 않다. 얼핏 보면 발전의 순기능으로만 보이는 유전자 편집 기술도 차별을 야기하는 여러 문제를 낳는다. 변이 범위를 어디까지 설정해야 할지 기준도 모호하고, 현재의 문제인 의료 혜택 불평등은 당연히 유전자 편집 기술에도 이어질 것이다. 심지어는 왜소증이나 다운증후군에 환자들에 대한 제노사이드(집단 학살) 까지 가닿는다. 완벽한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곳에 가까워지기 위한 노력으로 우리는 상생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두 번째 단편인 “스펙트럼”은 종이 다른 외계 생물과의 공존을 그린다. 여타 동물들이 인간보다 멍청하다고 여겨지는건 그들의 지능을 인간의 잣대로 측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반대로 동물의 입장에서 보면 물속에서 십분도 버티지 못하고 초음파도 알아듣지 못하는 인간을 무능하게 여길 것이다. “스펙트럼”의 주인공은 낯선 행성에 떨어져 제 손으로는 끼니도 해결하지 못하는 상태로 오로지 외계인들의 이타성에 기대 살아간다. 주인공은 끝내 외계인들과 의사소통하지 못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함께할 수 있었다. 하나 하나 현미경을 대고 분석하고, 잣대를 들이대 우열을 갈랐다면 절대 쌓을 수 없을 우정이었다. 타자를 온전하게 받아들이려면 섣불리 알아내려 하기 보다는 존중하는 태도가 우선이다. 반려동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언어나 소통은 관계에서 생각보다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도 있다.
이타성은 양육강식의 법칙 속에서 살아가는 다른 동물들과 인간을 구분 짓는 특징으로 꼽힌다. “공생가설” 에서는 외계 생명체가 수만 년 전부터 신생아의 머릿속에서 공생하며 도덕, 윤리, 이타성 등 인간의 긍정적인 특성으로 꼽히는 것들을 가르치고 부여했다고 한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었던 이유는 미지의 외계 생명체와의 공생 덕분이었던 것이다. 머릿속에 사는 미지 생명체는 아니더라도 우리들이 인간답게 사는 것은 타인과 교감하고 소통하며 공생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요새 n번방과 같은 비인간적인 혐오 범죄가 많아지는 것은 기술 발달이 빚어낸 사회적 단절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인간의 껍데기만 뒤집어쓴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감정의 물성”은 내 것이지만 소유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것에 대해 얘기한다. 어떻게 해도 기분이 좋아지지 않아 당혹스러웠던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그럴 때 밥을 먹으면 기분이 나아지는 경우도 간혹 있다. 우울증도 약을 통해 어느정도 해결 되니까 인간의 감정은 물질과 연관이 깊다. 그럼에도 사실 당연하게도 수학공식을 도출하듯 답을 낼 수 없는게 인간의 감정이다. 화자는 인간이 느끼는 감정은 맥락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감정의 물성’ 이라는 제품을 통해 맥락없이 주어지는 인공적인 감정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의미를 도출하는건 이성적인 사고의 결과물이고, 감정은 이성의 대척점에 있는 감성의 결과물이다. 감정은 합리와 가장 거리가 먼 단어겠다. 합리와 효율은 경제에서 많이 따지는 단어다. 악플 때문에 자살한 연예인들 생각이 났다. 연예인이 버는 높은 수입을 운운하며 이정도 욕은 먹어도 된다고 함부로 키보드를 놀리던 악플러들은 타인의 고통을 별거 아니라 치부했던 거다. 우울증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우울증 환자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듯이 타인의 사정을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우울증에 대한 우리나라의 사회적 분위기는 개인의 고통을 일반화하여 폄하한다. 아직도 우울증을 엄살이라 생각하는 풍조가 만연하다.
여섯 번째 단편인 “관내분실”은 “감정의 물성”과 대칭적인 부분이 있다. 분명히 내 것인데 내 뜻대로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이 있다면, 분명히 내 것이었는데 나도 모르는 새 모래알처럼 손아귀를 빠져나가버린 삶도 있다. 여성의 출산 후 경력단절은 너무 고질적이어서 아직 해소돼지 않았음에도 진부해져버린 사회문제중 하나다. 국가가 져야할 사회적 책임을 개인에게로 돌린 결과는 요즘의 출산율이 말해준다. 여성은 개인의 삶을 갈아 넣어야만 엄마로써 작동할 수 있었고 그렇기에 많은 여성들은 더 이상 출산을 원치 않는다. 개인의 삶과 2세의 양육.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어느 한쪽에 가치를 더 둘 수도 있고, 둘을 동등하다 가늠할 수도 있지만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를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사회는 건강하지 않다. 강탈된 삶을 양분으로 삼아 태어난 자식과의 관계가 순탄하기란 쉽지 않다. 지민은 본인이 엄마가 되면서 은하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지민의 이해는 은하뿐만 아니라 시스템의 모든 피해자들에게로 확장되는 속성을 가진다.
김초엽의 단편들은 모두 소외된 약자들을 주목한다. 주인공들의 성별이 대부분 여자인 것도 그 이유에서일거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에서는 사회가 여성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게이는 여성스럽고, 동양인은 수학을 잘한다. 소수자에게 프레임을 씌우는 것은 흔한 폭력이다. 나이든 동양인 여성인 재경은 사회가 부여한 이분법적인 프레임인 기대와 증오(영웅주의와 혐오)를 모두 벗어던지고 깊은 바닷속으로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가윤은 재경과 친혈육이 아니다. 하지만 재경이 프레임을 전부 심해로 끌고 들어가준 덕분에 가윤은 홀가분한 마음가짐으로 자신의 길을 나아갈 수 있다. 이런 핏줄을 초월한 세대간의, 젠더간의 연대는 분명한 희망을 제시한다.
과학만큼 자본집약적인 산업도 드믈다. 자본이 만드는 빠른 흐름은 편리함을 낳지만 그 이면에는 분명 기술 발전으로 인해 일어나는 소외도 있다. 무인주문기앞에서 헤매고 있는 노인들의 모습은 자주 봤을 것이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안나도 자본에 소외된 인물이다. 사회는 경제성을 명목으로 그녀에게 져야할 책임을 회피해서 그녀는 가족을 잃었다. 개인의 아픔을 보듬어주려 하지 않고 시간이 흘러가기만을 기다리는 사회의 예는 우리 가까이에 있다. 이산가족이 그렇고 위안부 피해자들이 그렇다. 딥프리징 기술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안나가 노인으로 설정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안나는 작은 비행선에 의지해 은하로 뛰어들며 의지를 관철한다. 가능성이 보이지 않더라도 여정을 시작하는 그녀의 행보가 시사하는 바는 명확하다.
살아있는 동안 사회가 좋은 쪽으로 변하는 과정을 목도할 수 있으리란 희망은 희박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안나처럼 계속 나아가야 한다. 희망은 아직 작은 불씨다. 불어오는 돌풍이 거칠어도 꺼트려선 안된다. 그래야 언젠가 큰 불꽃으로 모두가 온기를 나눌 수 있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에서 재경의 불씨를 이어받은 가윤처럼 말이다.
김초엽의 소설은 SF 라는 장르에 충실해 딥프리징이나 마인드업로딩같은 새로운 과학 기술이 많이 등장한다. 그것들은 이야기에 없어서 안되는 양념이지만 본질은 다른 곳에 있다. 사회가 묵인해온 아픔이 그녀의 소설에는 구체적인 형태로 오롯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그녀가 제시한 것은 인간성이다. 정복하고 발전하려는 근대적 인간성이 아니라 이타성을 기반으로 상생하고 연대하는 유기론적 인간성이다.
세계는 연속성을 가지며 축적된다. 그렇기에 현재가 튼튼하지 못하면 미래는 모래성처럼 쏟아져 내리고 만다. SF는 미래를 배경으로 현재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장르라는걸 이 소설을 읽으며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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