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창 : 문화의 수용과 창조 (문화의 수용과 창조)
문화나 역사와 관련된 직업을 그렇게 바라지만, 정작 ‘문화’라는 것에 대해 나 자신이 어떻게 정의내리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아, 얼마 전부터 ‘문화’에 관한 책을 어떤 종류든 찾아 읽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만난 이 책은 나에게 조금 특별한 책이 되었다. 몇 권 읽어보진 못했지만 문화 관련 도서들이 대부분 생각보다 지루하고 딱딱하게 쓰여져 있는 책들이 많아 실망했었는데, 이 책은 문화의 정의부터 우리가 앞으로 문화를 어떻게 ‘수용’하고 또 궁극적으로는 ‘창조’해내야 하는지, 그리고 문화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아름다운 것인지 이 한 권을 통해 세심하게 풀어내고 있다.
첫 장에서 저자는 ‘문화의 힘’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가장 먼저 나오는 한 마디는 바로 “문화란 무엇인가?”였다. 그만큼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에 대한 우리의 정의가 첫 번째로 중요하다는 것 같았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이, 문화는 어릴 적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듣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와 이야기 같은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당시의 일들을 함께 떠오르게 하는 노래는 소리 이상의 그 무엇을 지금까지 전해주고 있다. 저자는 바로 이러한 것이 문화의 힘일 것이라고 말한다. 지친 우리의 삶을 일으켜 세워주는 힘, 이웃과의 다툼을 누그러뜨리는 힘, 물질적으로는 가난할지언정 정신적으로는 풍요를 안겨 주는 그런 힘, 말이다. 그런 문화에 대한 정의는 시대마다, 학자마다 다 다르게 세워져 왔다. 물론 문화가 모든 것을 다 대변하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문화는 어떤 대상을 개선된 상태로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한 사회를 만들고 유지시키는 보이지 않는 힘이자 그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이라는 점에서 인류 역사의 발전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보통 문화의 의미를 사전적으로 ‘인류의 지식, 신념, 행위의 총체’라고 규정하지만, 나는 문화의 다양함 만큼 문화의 정의도 다양하고 사람마다 문화라는 것을 생각하는 방법도 다 다른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21세기는 정보의 홍수의 시대이자 세계화, 민주화의 시대이다. 정보화를 통해 대량의 정보가 유통되고, 세계화를 통해 다양한 문화가 교류되며, 민주화를 통해 개체의 가치와 개성이 중시되고 있다. 저자는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문화의 양이 아니라,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주체인 ‘나’라고 말한다. 나는 그 말이 정말 인상 깊게 다가왔다. 많은 양의 문화를 동시에 받아들이는게 중요한 것인지, 적은 양의 문화와 정보라도 내가 중심이 되어 받아들여야 하는지 의문이 있었는데, 그 의문에 시원한 답이 되었기 때문이다.
경복궁과 자금성의 크기의 차이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것이 작더라도 그 작은 것이 지닌 아름다움, 적은 것의 가치에 대해서도 논리와 가치를 개발하는 것, 객관적 사실을 근거로 우리의 논리를 세우는 것, 세계사를 시야에 넣고 우리 역사를 정확히 인식해서 자학적인 자기비하의 역사관에서 탈피하여 양적으로 우세한 나라보다 질적으로 풍성한 나라, 작은 산하지만 넓은 마음을 가진 나라, 적은 국민이지만 알찬 국민이 살고 부강한 나라보다 아름다운 나라를 꿈꾸는 것, 그리고 그런 나라가 되는 것, 그것이 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세상은 그렇다 치고, 우리는 어떤가? 나는 어떠한가? 계속해서 나 자신을 돌아보며 나에게 물음을 던져야 한다. 그럴 때 세상이, 다수가 생각하는 것에 맹목적으로 치우치지 않고 내 논리와 가치관이 생기고, 결국 주체적으로 문화를 변별하여 수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그러나 ‘왜’라는 질문에서 멈추지 않고, 우리는 ‘어떻게’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왜’라는 질문과 ‘어떻게’라는 구체적 행동이 결합되었을 때, 하나의 가시적인 창조물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가 알고 있던 것에 대해서도 정말 잘 알고 있는 것인지 의문해보고, 더하여 남들이 그리고 내가 항상 그렇게 보아왔던 것을 보던 습관에서 벗어나, 다른 각도로 세상을 바라보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나는 여기서 ‘연습’이라는 말이 와닿았다.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가 되었다.
나는 고등학생 때, 선생님들로부터 ‘시야가 좁다’는 조언을 많이 들었다. 늘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틀리지 않았고,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가 없다고 생각했으며 멀리까지 내다보며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던 나에겐 그 말들이 굉장한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그런데 그분들의 말씀이 옳았다는 것을 나는 ‘연습’을 하면서 깨닫게 되었다. 처음엔 무안하기도 하고 내 시야가 좁고 융통성이 없다는 것이 인정이 되지 않아 화도 났다. 그런데 그분들의 조언대로, 그리고 친언니의 도움으로 내 시야를 넓히기 위해 처음으로 뉴스 기사와 시사를 매주 세 번씩 읽으며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주도 까먹지 않고 2달 정도가 지났을 때부터 변화가 조금씩, 서서히 나타났던 것 같다. 큰 변화는 아니었지만 어떤 기사를 찾아 읽을 때, 한 부분만 생각하거나 한 면만 보기보다 동시에 여러 요소와 배경들을 고려하고 생각하며 읽게 되었고, 그래서인지 가짜 뉴스나 자극적인 기사 제목에 더 이상 속지 않고 분별할 수 있었다. 또 흑백논리로 생각하던 습관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아무리 지식이 높고 풍부하다 해도, 그것을 제대로 받아들여 이용할 수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한다. 지식을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는 것은 결국 내 자신에게 달려있다. 그렇게 느리더라도 무언가를 바라보는 나의 시야가 조금씩, 조금씩 확장되는 것을 느꼈던 ‘연습’이었다. 지금도 매주는 못하지만 한 번씩 인터넷 기사와 뉴스들에 관심을 가지고 내게 필요한 정보들을 선택해 읽으며 그 연습을 계속해서 이어나가고 있다.
내가 수 년간 생각해왔던 습관에서 벗어나는 것, 늘 가던 길이 아닌 조금 헤매더라도 새로운 길을 택해서 가보는 것, 그것이 바로 궁극적으로는 문화를 주체적으로 내가 중심이 되어 수용하고, 결국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낼 수 있는 밑바탕이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문화의 수용과 창조, 무엇보다 이 정보의 홍수 속에 휩쓸려 내려가지 않으려면 깨어 내가 중심이 되어 문화를 주체적으로, 분별하여 수용하고 새로운 방법으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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