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과거
고정윤
<빛과 그림자>
지난 사건에 대한 완전히 객관적인 시각은 존재 할 수 없다는 걸 우리는 이미 익히 알고 있다. 역사에 기록된 사건들 또한 무수한 사건들 중에서 선별되어 적혔기에 역사 자체가 이미 거대한 주관이다. 적히는 순간 역사가 주관이 되었다면, 기억은 적히지 않았기에 주관의 정도가 더 심하다. 이미 선별되어 저장된 기억은 그 안에서도 편의에 따라 왜곡되고 삭제된다. 그리하여 기존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새롭게 변모하고, 이 변모는 좀더 구미에 맞는 방향을 찾아가며 끊임없이 수정을 거듭할 것이다. 이렇게 따지고 들면 인간의 인식안에서 객관적 사실이라는건 성립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켜져야 할 진실이란 분명히 존재한다.
77년도의 대학생활을 17년도에 대학생이었던 사람의 시점에서 보자면 ‘이렇게 까지 다르다고’ 와 ‘별반 다르지 않네’ 의 반복이다. 그 시대의 차별과 폭력은 요즘의 상식과 많이 어긋나는지라, 다른 나라의 일처럼 느껴질 정도다. 사소한걸 하나 찝어보자면 이성과 잠자리한게 들키면 기숙사 퇴출이라니. 심지어 기숙사에서 한거도 아니다. 근처 숙박시설에서 했다. 개인의 사생활이 물리적인 불이익으로 돌아온다니. 하지만 또 잘 생각해보면 오늘날의 차별과 폭력은 좀 더 온건한 포장지를 썼을 뿐 그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대 기숙사생의 1등 신붓감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생리대를 멀리 실어다 버린다고 투덜대는 기숙사 사감의 대목에서, 얼마전에 본 생리대의 티비 광고가 생각났다. 광고 모델은 하얀 원피스를 입고 거리를 거닐다가 몸에 달라붙는 레깅스를 입고 운동을 한다. 생리대는 생리혈이 아니라 세제같은 파란 액체를 흡수했다. 성녀와 창녀로 이분화되던 여성성 판타지는 여전히 대세에 머물러 브라운관으로 송출된다.
별반 달라지지 않은 것도 있다. 남학생들의 태도이다. 예의를 모르는 사람처럼 처음보는 여자를 잡아끌고, 순위를 매기고, 가르치려든다. 40년의 간극에도 그 태도가 오늘날까지 유지될수 있는 건. 사회가 여자와 남자를 구분하여 바라보는 시선이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욕망에 솔직할 수 있는건 남자 뿐이며 여자는 여전히 판타지의 성별이기에 가장 기본적인 욕구조차 숨겨야 하는 처지다.
이 소설은 여러 간극을 가로지른다. 과거와 현재, 여성과 남성, 빈과 부, 개인과 단체, 순종과 저항, 지방과 서울.
과거와 현재를 제외하면 그 간극들을 만들어낸건 권력이다. 그 당시 대학생들은 위에서 일어나는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지만 정작 그들은 곁에 있는 약자를 돌아보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약자끼리도 연대하는 법을 모른다. 그 증거로 김유경과 김희진은 친구라고는 하지만 오래도록 서로 반목하고 있다.
이 두 사람은 같은 사건과 인물에 대해 전혀 상반된 시각을 보여준다. 전개를 이끌어 가는 것이 김유경이기에 처음에는 김유경의 입장에 이입하며 글을 읽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초반 김희진은 전형적인 악역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다 읽으면 그녀는 결코 악역이 될 수 없다는걸 알게된다. 그녀도 김유경과 같은 그 시대의 가장 낮은 곳에 있던 개인일뿐이기 때문이다. 가난하고 지방출신이고 여성이다. 그녀의 자기중심적인 권력주의도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다. 그리고 그녀의 퇴사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사소한 권력은 사회의 진짜 권력앞에선 연약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차라리 욕망에 솔직한 김희진의 태도는 약점을 핑계로 자기연민에 빠져 현실을 회피하는 김유경보다 나아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현재의 김유경 또한 그 사실을 인정하며, 스스로를 무고한 피해자 취급하던 본인의 기억이 다분히 자의적임을 새삼 깨닫는다.
김유경의 약점인 말더듬은 곧 벙어리의 상태와도 같다. 드라마에서 부자집 고용인들을 부러 말 못하는 언어장애인으로 설정해놓는 경우가 종종 있다. 비밀을 누설하지 못하고 부당한 일을 당해도 함구할 수 밖에 없는 벙어리의 상징성때분이다. 물론 그녀의 말더듬은 장애 축에도 못낀다. 그럼에도 그녀는 사회적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여 본인을 피해자의 영역에 밀어넣고 체념했다. 그녀에겐 얼마든지 기회가 있었지만 잠을 깨우려는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안주했다.
개인적으로 은희경의 소설은 ‘새의 선물’ 이후 두번째다. 이 책의 화자인 김유경도 새의 선물의 화자처럼 관찰을 통해 본질을 읽어내는 시니컬한 논조를 이어받았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그런 예리한 시선에 대해서조차 비판적인 태도를 갖는다. 대상과 거리를 두고 관조하는 행위도 실은 회피라는 거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한 상황에서의 중립이 방조죄가 될 수 있듯이 말이다.
이 소설에는 드라마틱한 극복이 없다. 그래서인지 사건들이 거듭 우연성에 의해 연결되어도 그리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죽어가고 있는 것이라는 비관적인 말도 있다. 김유경은 연애에 실패하고 결혼에 실패하고. 현실을 관조하거나 몰두하는 회피를 통해 현재에 이르렀다. 절벽에서 떠밀리는 추락은 없더라도 하루하루 조금씩 노화하듯, 서서히 하강했다. 하지만 극복이 없다고 성장이 없는 것은 아니다. 77년도의 말더듬이 김유경과 달리 17년도의 김유경은 개인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좀더 객관적이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보게 됐다. 최소한 ‘성의 정치학’ 을 읽으며 ‘낭만적 사랑’ 이나 ‘정서적 조작’ 따위에 집중하진 않을 것이다. 김유경은 이제 개인성이라는 안대를 벗어내고 전체를 본다. 개인사적 비극이 아니라 공동체적 비극을 볼 수 있다.
객관과 주관을 떠나 반드시 지켜져야할 진실이란 권리이다. 인간이 인간이라는 사실만은 시간이 지나 역사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약점이라는 사회가 만든 족쇄에 스스로 매인 탓에 김유경은 자기를 자기로 만드는 권리와 욕망을 포기했다. 말을 더듬지 않으려 내가 좋아하는 사람보다 발음이 쉬운 사람에게 연락하고, 눈앞의 부정도 바로잡지 않은 채 도망치기 급급하다. 물론 김유경의 처절한 주변의식과 자기검열은 그녀 개인의 탓만은 아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불합리한 주변이나 상황탓만 하고 있다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77년도의 여성은 권리가 없었기에 기실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 시대의 청춘들은 여느 시대의 청춘들이 그렇듯 반짝였다.
과거에 몰두하는건 움직일 수 없도록 발이 매이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과거는 필요하다. 반짝이는 것과 그림자가 공존하는 과거의 명암을 빠짐없이 직시해야한다. 오답노트가 없으면 배움이 없고,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그 빛을 현재까지 이어온다면 비로소 미래까지 비출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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