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한 결정
손다혜
특별히 두드러지는 고통도, 유혈도 없이 고요하게 멸망하는 세계가 존재할 수 있을까? 오가와 요코의 은밀한 결정은 질문에 대해 지극히 담담하게 대답했다. ‘충분히 가능하다,’라고.
완벽한 이상향을 뜻하는 유토피아의 대척점에는 디스토피아라는 단어가 존재한다. 현실 비판적인 목적으로 사용되는 단어인 만큼 이런 세계관에는 억압과 강제가 거의 필수적으로 등장한다. 은밀한 결정에서 등장하는 ‘섬’의 분위기 또한 비밀경찰이라는 사람들에 의해 관리되고 각종 통제를 받으며 살아가는 사회로 묘사되었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섬에는 아주 평범하고 소시민적인 사람들이 살아간다. 특별한 대의를 품거나 개척할 것 없이, 주어진 삶에 만족하고 순응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이야기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제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보통이다. 설령 자기 신체의 존재가 소멸하여도 말이다.
이 작품의 주요 소재는 존재의 소멸이다. 섬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어느 날 전조도 없이 ‘소멸’한다. 일상적인 아침, 눈을 뜨면 공기의 흐름으로 인해 사람들은 소멸을 인식한다. 소멸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그 대상에 대한 감정과 기억까지 모두 빼앗기고 마음에 절대 채워지지 않는 상실을 겪게 된다. 향수는 더 이상 어떤 향기도 가져다 주지 못하는 액체에 불과해지고 리본은 의미 없이 흔들리는 끄나풀이, 모자는 머리에 얹어지는 알 수 없는 물체가 된다. 그 존재에 어떤 추억이 있었든 얼마나 각별한 추억이 있었든 관련 없이 모두 공평하게 아무런 감정도 일으키지 못하는 물질로 변해버린다는 건 평범한 생각으로 어떤 기분일까? 어제까지 즐겁게 감상했던 소설이나 어린 시절 추억의 물건을 아무리 돌아보아도 어떤 기억도 추억도 떠올리지 못하게 되는 것은 서글프게 느껴질 것 같다는 짐작이나 겨우 해 볼 수 있다. 다만 이 세계관에서의 소멸은 그런 감상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소멸한 것은 사라진 존재이므로 남아있는 사람들에겐 어떤 감정이나 기억도 남기지 않는다. 즉, 소멸한 것을 추억할 기회조차 박탈해 간다는 점에서 단순히 잊어버리는 것보다 깊은 마음의 구멍을 남긴다.
소설이 진행되면서 사라지는 것들은 더욱 많아진다. 주인공인 ‘나’는 새가 사라짐으로써 들새 연구자였던 아버지와의 추억을 강탈당하고, 성인이 되고 소설가가 된 후 소설이 소멸하자 직업도 잃는다. 다행이라면 이 세계에서 이렇게 직업을 잃는 것은 흔한 일이기 때문에 곧 새로운 직업을 구하고 쉽게 적응한다. 나는 이 지점이 더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소멸에 익숙해진 탓에 어떤 저항도 하지 않은 채 받아들이는 모습이 고요하게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데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진행되며 사라지는 것은 점점 더 일상 깊은 곳으로 다가오는데도 사람들은 그것이 당연한 양 아무렇지 않게 소멸의 재앙을 맞이한다.
이 작품에는 풀리지 않은 것들이 많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용이 주인공의 일인칭 시점으로 전개되기에 ‘나’로 표기된 주인공의 이름이 어떤지 알 수 없는 것, 소멸은 어떤 이유로 발생했다거나 비밀경찰들의 존재에 대한 의문점이나 그들이 어째서 소멸한 것들의 잔재까지 전부 소멸시키려 하는지, 책의 종장 부분에서 그 소멸 이후에도 그들은 왜 영향받지 않고 기억을 잃지 않는 사람들은 왜,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등 책을 전부 마무리 지었음에도 풀리지 않는 의문점들이 곳곳에 존재한다. 나는 상상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어느 정도 궁금한 점은 해결될 수 있기를 바라는 편이라 이런 마무리가 아쉽게 느껴지긴 했지만, 주인공과 동일하게 사라진 것들은 알 수 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책이 전하고자 하는 맥락에 비추어 보면 이런 결말이 어울리는 것 같다. 만일 진부한 재앙으로 인해 멸망하는 전개에 질려버린 독자들이 있다면 이 책을 한 번 권해보아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