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죄와 벌 1 - 상상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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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1

죄와 벌 1

도스토옙스키민음사2012년 3월 30일
양정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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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을 완독했다. 시험기간을 포함하여 거의 한달 반가량 붙잡고 있었지만 나름 처음 읽어낸 장편이라 뿌듯하기도 하다. 이 책은 나의 인생책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재미있었다. 어떤 것에 흥미를 쉽게 잃는 편인 나는, 단편 소설도 한 번 질리면 바로 덮어버린다. 그런 내가 이 길고 긴 <죄와 벌>을 읽을 땐 단 한번도 흐름이 끊기는 일이 없었다. 매 순간이 몰입의 연속이었다. 누가 나에게 소설을 추천해달라고 하면 무조건 <죄와 벌>을 읽으라고 할 것이다. 다만, 러시아 문학 특유의 긴 이름과 다양한 별명에 더해 도스토예프스키 특유의 장광설 때문에 읽기 힘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살면서 한번쯤은 시도해볼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죄와 벌>은 살인자의 심리를 비추는 심리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살인자의 이성주의적 사상을 기반으로, 그가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종국적으로는 인간 영혼의 아름다움, 사랑, 고뇌를 그린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심리묘사, 구원, 이성주의에 대한 지적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그럼 내가 느낀 이 소설의 주요 포인트를 몇 가지 이야기해보겠다.

심리묘사

이 소설이 내 인생작품이라고 생각하게 된 계기 첫 번째가 바로 ‘심리묘사’이다. 나는 소설의 심리묘사를 참 좋아하는데, 감정이 빨려 들어가 마치 다른 세계로 인도된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또한 묘사가 극적일수록 심연의 느낌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이 작품은 그러한 심리묘사에 아주 능통하다. 라스콜니코프가 격정, 소냐의 순수한 마음, 스비드리가일로프의 광기와 절망 등 심오하면서도 양극단의 감정들을 한 작품 안에서 느낄 수 있다. 

작품을 읽어 본 사람은, 인물의 대사가 과하게 긴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이 들었을 수 있다. 이게 바로 도스토예프스키 작품 특유의 장광설인데,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부분이다. 난 이 장광설을 매우 좋아하는데, 이를 통해 문제 상황과 인물 심리에 깊이 빠져들 수 있기 때문이다. 너무 몰입하면 마치 트랜스 상태처럼 종종 숨 쉬는 것을 잊을 때도 있는데, 그때 나는 문학 읽기의 쾌락을 느낀다. 특히 심리를 묘사하는 부분에 있어서 작가의 장광설은 최고의 몰입도를 선사한다.

이성주의 지적

나는 라스콜니코프의 사상이 이성주의 혹은 계몽주의와 비슷하게 보였다. 그의 사상을 두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하나의 악으로 수천의 선을 얻을 수 있다면 악을 행해도 좋다.’, ‘세상엔 비범한 사람과 평범한 사람이 있는데, 비범한 인물은 죄를 넘어선다.’ 라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며, 자신은 비범한 사람인지 평범한 사람인지 확인하고 싶어 두 사람을 살해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고, 그 사실을 깨닫자 고통스러워한다. 그러한 그는 그럼에도 소냐의 사랑으로 구원받게 되는데, 저자는 “변증법 대신에 삶이 도래했다.” 라고 언급한다. 나는 이 대목을 보고 저자가 ‘이성주의(계몽주의)에 대한 경계’를 암시하고 있다고 느꼈다.

사실 라스콜니코프의 이론에 어느 정도 공감이 된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잘못된 일이 맞지만, 그는 법과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가치를 추구했다. 그 점이 내가 공감하고 배우고 싶은 점이다. 사회에 얽매이는 자만이 존재한다면, 누가 이 세상을 다음 단계로 이끌 수 있을까. 또한 이성과 감성에 대해 나는 그 둘의 적절한 조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성주의와 휴머니즘 그 사이 어딘가. 그곳에서 세상을 발전시키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삶의 소중함

주인공인 라스콜니코프는 삶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 감옥에서 인생의 의미를 자문하지만, 결국 자살하지 못한 것을 자책하기도 한다. 그는 스스로 깨닫기 전까지, 외부에 대해 귀를 닫고 자기기만의 늪에서 혼자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삶에는 미래가 있었고, 소냐의 사랑 덕분에 그 미래에 발을 딛게 되었다. 주인공을 심문했던 포르피리의 ‘삶을 소중히 하라’는 조언도 생각난다. 이를 통해 작가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는 질문에 “삶은 소중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알게 될 것이다.”라고 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이 생각에 동의하는데, 사람의 인생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후기

요즘 자주 듣는 스월비(Swervy)의 January Embers라는 노래가 생각났다. Ember가 ‘잉걸불’이라는 뜻인데, 다 타지 아니한 장작불을 의미한다. 라스콜니코프의 삶, 다 타버려서 회색으로 죽을 뻔 했던 그의 삶이 다시금 타오르기 시작하면서 대단원의 막이 내린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삶이 잉걸불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우리 모두 잉걸불 같은 삶을 살고 있지 않나? 우리는 여기저기에 치이고, 지치며 다 타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삶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를 더 타게 해줄 어떤 것을 만나게 된다. 그렇기에 삶이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