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인생론 (자신의 길 을 찾는 등대! 독일이 낳은 위대한 철학자!)

  이 책을 읽게 된 건 한참 삶이 지치고 힘들어 심적으로 방황하던 시기였다. 
많이 힘들어서 그 당시 마음을 달래줄 만한 책은 모두 읽었다. 좋은 문구, 내가 듣기에 좋은 말이 담긴 책은 수두룩하게 있었지만 정작 인생을 정확하게 관통하는 문장은 없었다.
나는 사람의 배신에 지치고 또 외로워하며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힘들어하였다. 할 일은 많았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으나 그 모든 것을 성인이 된 지 1년도 체 안되서 모두 해내려니 버겁고 힘들었다. 근본적으로 듣기 좋은 말을 듣는다고 힘내는 성격도 아니어서 이 책을 읽고 내 마음에 많은 숨구멍이 생겼다. 
 이 책은 절대 듣기 좋은 위로를 해주지 않는다. 정확하고 면밀하게 인간의 삶과 현실을 관통한다. 하지만 그 직관적인 시각이 오히려 회피하려던 나 자신을 현실로 끌어다 앉혀놓았다. 모든 목차가 가슴을 울리기에 충분하지만 당시 나의 상황과 맞아들어 가장 감명 깊었던 부분을 말하고 싶다. 당시 친구 관계에 마음이 많이 지쳐있었고 이 책 내용에서도 진정한 친구는 없다고 목차의 제목부터 강경하게 알려준다. 우리가 희망하는 이상적인 친구 관계는 이른바 서로를 아낌없이 응원하고 심적으로 큰 의지가 되어주며 또 외로울 수 있는 길에 동료가 되어주는, 혹은 내 마음 속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으며 언제 어디서든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다. 고등학교 때 까지만 나는 내 친구들과 그런 친구가 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고 또 현재진행형이라고 착각했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 몸이 멀어지며 마음도 자연스레 멀어지고 또 텍스트만으로 오고가는 대화 속에 무미건조함이 속상하게 다가왔다. 성인이 되며 자신의 가치관이 뚜렷해진 친구는 극단적인 성향으로 치달아 더 이상 자연스런 대화가 어려울 지경이였다. 
 친구란 속마음을 다 털어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 책에선 친구가 내게 본모습을 보인다면 혐오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내가 친구를 의지한다는 이유로 내 모든 모습을 허물없이 보여준다해도 똑같다. 친구는 친구일뿐, 언젠가는 경쟁자가 될 거고 또 본래 남이였던 관계였기에 당연한 것이다. 사실은 당연한 말인데 이 말을 믿는 순간 이때까지 내가 해온 관계가 잘못된 것만 같아 인정할 수 없다가도 많이 지친 그 당시의 나에겐 진실로 다가왔다.
 좋은 친구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 난 이 말을 성인이 되고 한참 지나서 최근에서야 느끼고 있다. 어른이 되었지만 다양한 실수를 하는 우리들에게 서로의 실수를 파헤치기보다는 침묵으로 일관하며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면 모르는 척 한다. 친구의 삶에 깊게 관여해봤자 직접 그 삶을 살아야하는 당사자는 내가 아니기에 좋은 말의 위로는 의미 없단 생각이 들었다. 또 관대해진 점도 있다. 삶 하나를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생스럽고 고민스러운지 알기에 그 실수들이 이젠 커다란 도화지에 티끌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건 지금의 sns만 봐도 확연히 이 세상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 중 하나다. 자신보다 더 못한 삶은 사는 이를 기어코 파헤치고 안도한다. 
살면서 징크스처럼 여기는게 한 가지 있는데 위 내용이 나와 어쩌면 인생의 참된 진실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 징크스는 말 그래도 남의 불행에 들뜨는 마음을 가졌다간 꼭 나에게 똑같은 일이 생겼다. 하지만 전체적인 인간의 삶을 들여다보면 한번쯤 일어나는 일인데, 나에게도 당연히 일어날 일을 상대에 먼저 닥쳤다고 기뻐하는 무지한 행동을 한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평등을 지향하는 버릇이 있다고 하는데 난 이 말이 참 맞다고 생각한다. 정서적, 사회적, 물질적 모두 우린 평등함을 외친다. 하지만 남의 불행은 평등하게 느끼고 싶지 않아한다. 난 이런 인간의 우스운 점이 신기하다.
이 책에 목차들을 읽으며 내 삶에 대입하고 생각해본다면 재미있는 유사점을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일종의 현타가 올 수 도 있는데 너무 낙담해서는 안된다. 우린 인간으로서 당연히 삶에 남겨야 할 오점을 남긴 것이고 또 남의 오점을 관대하게 받아들여 줄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한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마음의 위기를 다스리는 철학 수업)

인생에 대한 고찰이 필요할 때면 어김없이 도서관에서 서적을 뒤적거린다. 삶의 지혜와 마음 챙김의 갈망할 시점에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가 눈에 밟혔다. 난 스물 둘이니까 18년은 앞서게 되어 얼마나 럭키비키한지 모른다.

“삶은 진자처럼 고통과 무료함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데, 우리의 인생이란 이 두 가지 사이를 오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가장 많이 고민했던 주제이자 나의 두뇌가 복잡했던 요소의 일부분이다. 결핍과 과잉, 궁핍과 안전은 상대적이면서 한 쪽을 피해가면 다른 쪽이 다가온다. 영원한 충족과 행복감이 지속되지 않는 이유도 이 속에 담겨 있을 거라 생각되는데, 배고파서 굶주린 고통도, 과도하게 폭식한 포만감도 불쾌를 불러일으킨다. 그렇기에 행복과 불행은 인간의 변덕스러운 감정에 달려 있다고 본다. 그만큼 본인이 지닌 것의 가치를 바라보는게 아니라 욕망과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끊임없이 손을 뻗으며 달려나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이어지는 관련 사례로 신제품 광고 및 마케팅, 자극적인 SNS의 해악을 들 수 있을거다. 한때 호기심 가득하고 새로운 것을 지향하며 추구하던 그때, 남들보다 앞서나가고 과시하고 싶었던 순간이 떠올랐다. 하지만 발전적이면서 진취적인 면모를 올바르게 해소하고 나아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이는 불안과 근심에서 파생되었다. 채워지지 않는 공허한 마음이라고 칭해도 무방했고 소유물에 관한 결핍의 존재를 직면하고 나니까 비로소 알게 되는 자아를 마주한 것만 같았다.

가끔은 그럴듯하게 글을 작성하고 무엇인가 증명해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스물스물 올라오는데, 저자는 자신을 위해 기록하라는 말을 건넨다. 자기만족이 타인의 시선에 조금이라도 걸쳐져 있진 않는지, 희생하면서까지 호의를 베푸는 미움 받을 용기가 없는건 아닌지, 내면을 돌봐야 한다는 인지조차 못하고 있진 않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행복의 본질에 다가가려는 사색으로 진정한 나를 드러내기 위해 어떤 일생을 남길지 지속적으로 탐구하고 인격을 도야하고 싶다.

어른의 행복은 조용하다

행복은 선언이다.

어른이 된 무렵 내가 서 있는 이 기로에는 양갈래가 나오며 핑크빛 하늘과 어두컴컴한 잿빛 바닥 중 선택 해야 하는 순간이 주어진다.

너무도 많이 쏟아지는 정보화 시대에서 내가 분별해서 습득하는 능력을 강화해야 하는 이유는 나의 행복을 위해서다. 살다보니 돈 명예 부를 이루는 획일화된 성공을 향해 달려가고 만족감을 얻는 양상을 띄는 것은 아닐까? 싶을 때 돈이 전부라는 단순한 논리에서 벗어나려면 기준을 두고 불행으로부터 마음을 지킬 수 있는 태도를 지닐 수 있어야 한다. 한편으론 너무 많은 걸 보지 않는 방안도 존재한다. 아는 것이 방대할 수록 우린 질투심이 마음속에 피어나며 타인의 소식에 괜찮았던 기분이 비루해질 때가 있다.

결국 마음가짐을 달리하면 일상에서 받은 작은 사랑을 떠올릴 수 있고 내가 쥐고 있었던 값진 것의 가치를 되새기게 된다. 공들여 웃고 감사하는 자세로 물든 인생은 쉽게 무너지지 않고 여백에 미소가 채워질 것이다.

채식주의자 (한강 소설ㅣ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창 노벨 문학상 수상으로 우리나라 국민들이 모두 기뻐하고 있을 때 정작 나는 이 책을 찾지 못했다.
엄청난 인기에 모든 서점에서 품절이었고 그나마 e-book으로 나왔길래 뒤늦게 읽어볼 수 있었다. 사실 한강 작가님의 작품은 한 권도 읽어본 적 없었고 노벨 문학상 수상 책조차 처음 접근하는거라 많은 기대와 함께 책의 내용이 많이 낯설며 어쩌지 했다. 소문으로 여러 이들의 평을 들었지만 모두 해괴하고, 난해 하며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읽는 내내 나의 기분은 묘했다. 이 책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노벨문학상에 대한 의문점이 생길 것 같았다. 책의 내용이 담고 있는 의미를 모두 깨우쳐야 한다는 것인데 그렇게 생각하면 노벨문학상의 가치가 있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 읽는 것이 문학일 때도 있지만 그 속에서 진정한 의미와 숨은 뜻을 찾아내는 것도 문학을 즐기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초입 내용은 신비로우면서도 거무튀튀한 현실 냄새가 풍겼다. 누리끼리한 필름에나 나올 것 같은 고전 독립 영화 같은 그림이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축축하고 비 냄새 가득할 것 같은 소설 속 도시는 주인공 영혜의 첫 인상은 채식주의자라고 느껴졌다. 채식주의를 하는 사람이 주변에 몇 명 있었는데 조용히 자신만의 가치를 추구하는 이가 있다면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가치가 아니라 그 가치를 지켰을 때 ‘ 나 ‘ 의 모습에 취한 이도 있었다. 나는 후자의 사람을 정말 싫어하기에 영혜의 그 초입 부분에서 나오는 모든 행동들이 솔직히 조금 호들갑 이라고 느꼈다. 어떻게 보면 영혜 남편의 기분이 무척 이나 잘 이해되고 공감 되었다. 결혼하기 전부터 그런 사람이었다면 결혼조차 하지 않았겠지만 갑자기 하루아침에 사람이 변한 그런 황당한 기분을 느끼지는 않았을 거다. 하루아침에 내가 알던 사람이 다른 사람이 된다는 건 정말 불편하고 억지스러워서 짜증 난다. 하다 못해 집안에서만 그러는 것도 불편한데 공석에서도 자신의 가치를 우기며 나를 창피하게 하다니 끔찍하다. 
 하지만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하루아침에 변했음에 짜증이 나면서도 굉장히 슬퍼 했을거다. 이때까지 나와의 모든 삶은 거짓말이었나 하고 배신감이 들기도 하고 또 어디가 아픈 건 아닌지 내가 진심을 다해 사랑했는데 저 사람을 놔줘야 하는건지 두렵고 화가 났을거다. 영혜 남편이 정말 영혜를 사랑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맺은 가족이 이렇게 쉽사리 알 수 없는 이유로 무너진다면 영혜 남편도 위의 기분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영혜 집안 내용에서 아버지는 굉장히 엄하다. 엄한 가정에서 자라온 딸아이는 굉장히 소극적이고 위축되어 있으며 또 순종적일 확률도 높다. 영혜는 따라야만 하는 삶이 답답했을까? 그래서 마음 속 묵혀왔던 고통들이 그렇게 채식주의로 터져 나온걸까 싶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에 병이 생기면 언제나 각자의 방식으로 표현을 한다. 그 병은 가정폭력으로 생긴 걸수도 있고 사람간의 관계에서 얻은 트라우마로 생길 수도 있으며 각각의 이유가 있다. 표현 방식은 제각각이지만 폭력에 고통 받았던 이들은 폭력으로 표현할 때가 많다. 하지만 영혜는 폭력에 지쳐 그 폭력조차 표현하기 무서운게 아닐까 싶다.
 중반 내용은 내게 굉장히 부정적이었다. 그 의미를 파악하고자 노력해야 하는데 의미를 찾기엔 변태 행위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그 속에서 또 폭력을 저지르기 싫다던 영혜가 불륜을 저지르며 또 다른 폭력을 낳는 것을 보며 인간은 하지 않고자 해도 폭력을 저지르는 존재인가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조심하고자 몸을 웅크려도 웅크린 팔 아래로 또 누군가 피해를 입을 때가 있다. 우리가 조심하고자 무언가를 금지하고 피하면 또 그곳에서 피해가 생기고 소리가 나온다. 우리 인간이란 존재는 지구에서도 늘 그런 존재다. 태어나고 존재 자체가 죄악인 것 처럼 이 지구 위에서 저지른게 너무 많아서 이제는 조심하고자 해도 그마저 피해를 일으킨다. 이 모습을 채식주의자라는 영혜를 이용해 비웃는듯 했다.
지금 사회의 갖가지 폭력을 이 책이 말하는 거라면 나는 이해된다. 폭력에 폭력을 낳고 폭력을 하지 않고자 해도 그마저 폭력인 존재 자체가 민폐인 인간의 삶, 우리는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환경에 민폐를 끼치고 함께 사는 세상이라며 사회성을 기르고 모든 생명과 공존해야 한다고 하지만 서로를 헐뜯고 미워하는 세상, 그 누구보다 세상에서 우리를 서로가 미워할 수 있을까. 해결 할 수 없어도 이런 우리의 모습을 깨닫기라도 해줄 수 있는 책이다. 

백광

이 책은 한 아이의 죽음을 둘러싼 사람들의 관계를 중심으로 그린 이야기다.
한 집안의 아이가 앞마당에서 시체로 매장된 체 발견되며 가족들과 그 주변인들에 대해 조사가 시작된다.
자신의 일과보다 서로의 일과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들은 어찌 보면 과할 정도로 잘 알고 있기까지 한다. 
인묻들의 관계와 알리바이를 따라가다 보면 드는 생각은 ‘ 그래서 누가 범인인데?’ 이다. 새로 떠오르는 알리바이는 또 허무하게 끝나며 다음 사람의 알리바이로 연결된다. 그러나 전혀 아이와의 죽음과는 연관이 먼 것처럼 보이는 어른들 간의 증오,미움,결핍이 가득한 관계가 수면 위로 차츰 윤곽을 드리우고 결국 그것이 사실은 아이의 죽음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집안의 증오와 미움은 오랜 세월에 걸쳐 내려왔다. 새로운 관계가 생길수록 미움이 싹트고 대화로 해결 한다 같은 쉬운 시도 없이 침묵과 혼자만이 끌어가는 것으로 마음의 병이 된다. 모든 가족이 그 병을 마음에 짊어지고 있었다. 

 살면서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한 명은 꼭 있다. 그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미워한 건 아니다. 사람 간의 불화는 당연히 생기지만 그것을 말로서 풀어내지 못 했을 때 용서할 수 없는 미움이 된다. 시도를 했지만 실패 할 수도 있고, 시도조차 하지 않고 혼자 생각하다 진실에서 멀어져 더 깊고 짙은 미움으로 변질된 걸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남과의 대화를 통해 객관적으로 깨닫기 전까지는 그 미움의 진실을 들여다 보려 하지 않는다. 왜냐면 내 미움에는 틀림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혹은 사회에서 비난 받을 정도의 큰 잘못을 한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죄 값을 충분히 받거나 혹은 굳이 내가 아니어도 다른 사람들도 미워할 것이 분명하기에 미움의 정도가 짙지 않다.
 이 책에서도 사회에서 비난 받을 관계가 있고 그에 분노하는 사람이 있다. 유키코와 히라타,류스케 이 세 명은 불륜 관계이다. 엄연히 따지면 유키코라는 여자 하나가 두 명의 남자와 바람을 피운 것이다. 본 남편인 다케히코는 그 관계를 알고 있음에도 말하지 않고 분노하는 사람이다. 그 마음이 얼마나 문드러졌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그 관계에 분노함에도 자신이 지켜야 하는 ‘ 가족 ‘ 이라는 관계를 위해 말하지 않은 것이다. 사토코 또한 류스케의 불륜을 알고 있음에도 발설하지 않는다. 그녀 또한 자신이 발설하기 전까지는 ‘ 가족 ‘ 이라는 관계가 흐트러지지 않을 것을 알기에 괜히 평화로움을 깨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짐작한다. 다케히코는 불륜을 저지르는 본처에 이미 마음이 뜬지 오래였고 본처에 비해 조신하고 조용한 사토코를 마음에 둔다. 사람의 관계에 있어 사랑은 제어할 수 없는 감정이지만 관계에 한정되면 드러낼 수 없는 감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를 주저없이 드러내고 행동한 이들과 또 이를 여러 이유에 있어 드러내지 않은 이로도 나뉜다. 

 그들은 왜 그렇게 되었을까? 왜 이런 관계가 되어야만 했을까, 혹은 조금 더 좋은 방법으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을까? 라는 의문도 들었지만 애초에 처음부터 서로가 원하는 연인이 아닌 상태였다 해도 지금의 어지러운 불륜 관계가 되지는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가진 마음을 온전히 다 드러낼 수 있는 사회라면 얼마나 속 편하고 좋을까. 하지만 어린아이들은 그렇게 할 수 있을지언정 우리는 사회 속에서 자라나며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함을 배운다. 마음을 온전히 드러내는 자가 약자고 패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충분히 알고 있는 이 어른들은 드러내고, 행동하며, 서로의 관계가 어떤 상황을 초래할 것인지 예상치 못한다. 그 밑에 본인들이 저질러 놓은 생명체들이 어떻게 꿈틀거리고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관심이 없는 것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 문화 센터 ‘ 의 기능도 관심을 주는 척 하는 이들의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문화 센터를 데려간다는 이유로 나는 충분히 아이에게 배울 기회와 놀 기회를 주고 있고 부모로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걸 보여주며 실제론 머릿속에서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거다. 

 이런 어른들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온전한 환경에서 자랄 수 없다. 기괴하고 오싹한 미움이 가득한 집안에서 보이지 않더라도 분명 아이들은 그 기운을 알았을 것이다. 아이들은 순진하기에 우리보다 더 근원을 잘 들여다보며 더욱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니까 그 어른들의 기행이 눈에 보였던 것이다. 아이들은 미움 받고 싶지 않지만 잘 미워한다. 감정에 도달하기 까지 갈림길이 없고 일직선만 있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잘 미워하는 시기의 어린 아이들에게 미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 또 미워하기 전 까지의 수많은 선택지와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도 알려주어야 한다. 그걸 알아야지 아이들은 서로가 밉더라도 한번의 기회를 줄 수 있는 아이가 되고 자신이 싫어하는 부분을 이야기해서 사과를 요구하는 소통을 할 줄 아는 아이가 되는 것이다. 이 소설 속 아이들은 어땠을까? 나오코와 가요는 두 엄마의 관계 아래로 어쩔 수 없이 같이 다녀야 하고 매 시간 붙어 있는다. 가요가 나오코를 싫어하는 이유에 대해 어른들처럼 복잡한 사정은 없다. 어린아이기에 싫어하는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가오는 나요코가 매장되어있던 흙 위에 올라서며 그 밑에 살아있는 생명을 끝내 확실하게 짓밟았다. 보통의 아이들은 할 수 없는, 자신이 미워하기 때문에 사라져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의 손녀인 나오코의 목을 졸라 죽이고 매장을 한 게이조. 그는 이 소설에서 불행의 시작이라 말 할 수 있다. 오래전 전처에게 배신당한 기억에 괴로워 하며 섬에서 소녀를 죽인 것을 숨기고 재혼을 하고, 괜찮은 척 하지만 가면을 쓴 체 시작한 이 가정은 결국 불행을 맞이한 것이다. 아들의 불륜을 책임지고 벌해 달라는 처의 말에 괴로워하며 결국 온전치 못한 정신 속에서 일을 저지른 것이다. 사토코는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게이조에게 나오코에게 해를 가할 것을 재촉하고 아이의 죽음을 외면한 사람. 불행의 끝이라 할 순 없지만 결국 나오코의 죽음으로 집안의 불행이 확실하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 소설을 읽고 많은 생각을 하며 나는 어른과 아이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봐야 했다. 우리는 언제나 말해 온 것이 있다. 가정 교육을 잘 시켜야 한다. 아이를 부모가 잘 가르쳐야 한다. 부모가 아이를 잘 통제 해야 하며 올바르게 키워야 한다고 말이다. 아이의 잘못은 모두 부모의 잘못이라고 말한다. 어른도 한 때 아이였을 거고 그들도 그런 어른이 되고자 하고 된 것이 아닐 거다. 그 어른들이 어린이였을 때 또 그때의 어른들이 일 순간의 무관심과 방치가 결과를 만든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즈음에 완벽한 아이를 완벽한 어른으로 만들 수 있을까? 그건 알 수 없고 기약할 수도 없다. 그 어떤 무지막지한 신기술이 나오고 효율적인 교육 방법이 나온다고 해도 될 수 없다. 우리 사회는 그런 아이도, 그렇게 잘 크지 못한 어른도 모두 마음 넓게 포용해주고 다독여줄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서로의 잘못과 실수를 다독여주고 기회를 줌으로서 그들에게도 용서할 수 있는 용기를 주어야 한다. SNS 속에서 서로의 잘못을 뼈가 드러나고 그 사람이 생을 마감 할 때까지 헐뜯고 물어 뜯는 지금의 사회는 분명 부드러워져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다. 우리들이 서로의 잘못에 빠져 그것을 묵인하고 혹은 미워하며 우리의 미래가 될 아이들을 방치하고 있지는 않은지, 또 그런 잘못을 한 어른과 아이들에게 너그러워질 수 없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뇌는 행복을 기억하지 않는다 (뇌파 실험으로 밝힌 불편한 감정의 비밀)

행복하기에도 모자른 하루에, 행복을 기억하지 않는 뇌라…
스트레스와 부정적 생각에는 쉽게 반응하는 뇌가 긍정적 생각과 행복에는 둔감한 뇌
그런 상황에서도 뇌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긍정적 자극을 줘야겠다, 이쁜 것만 바라보며 나아가야겠다 다짐한 !!
왜냐면, 행복한 생각만 하기에도 하루는 짧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