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수용소에서 (죽음조차 희망으로 승화시킨 인간 존엄성의 승리)

2025학년도 1학기 독서클럽(27) 테마도서 서평

작성자

김민철

도서명

죽음의 수용소에서

학번

2071166

저자명

빅터 프랭클

서평 내용 (개별항목 및 항목별 분량은 자유롭게 조정가능, 1,000자 이상 작성)

도서 선정 이유 (이 책을 선택한 계기나 흥미를 끈 이유) *100자 내외

이 책을 포함하여 지정 테마에 기재되어 있는 책들의 줄거리 요약을 찾아보았는데 어려운 내용을 설명하는 다른 책들과는 달리 수용소 생활 중에 저자가 겪은 다양한 상황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읽고 체험해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이 책을 고르게 되었다.

주요 내용 요약 *300~400

이 책은 저자가 수용소 생활 중에 겪었던 열악한 상황들이 드러나는 전반부와 이 경험을 바탕으로 정신과 의사로서 그가 고안해낸 로고테라피에 대한 설명이 담긴 후반부로 이루어져 있다. 수용소에서 저자는 연이어 끔찍한 광경을 목격하면서 심경이 변해가는 와중에도 의미 부여를 통해 시련으로부터 가치를 창출할 수 있으며 자유를 억압받는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태도와 행동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후반에서는 로고테라피를 통해 환자를 치료한 몇 가지 사례를 들며 아무리 큰 고통이라도 그 속의 의미를 찾으면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한다.

느낀점 및 인상 깊은 부분 *400~500

나는 이 책에서 저자가 의미 부여를 통해 시련으로부터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고 말하는 부분이 가장 인상 깊었다. 그 이유는 시련을 단순한 고통만으로 여기지 않고 가치를 부여한다면 이를 극복하였을 때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계기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는 있어도 자신의 행동과 태도를 결정지을 자유만큼은 빼앗을 수 없다는 내용이 기억이 남았는데 이를 읽는 순간 일제에게 보복 받을 수도 있는 상황 속에서도 나라와 민족을 지키기 위한 행동을 주저하지 않았던 독립운동가들이 떠올랐다. 이 두 문장을 통해 아무리 힘든 상황을 겪더라도 의미 부여를 통해 행동에 가치를 부여하고 억압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을 뚜렷한 목적의식이 있다면 아무리 힘든 시련이라도 이를 버티고 이겨내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라 느꼈다.

도서 추천 여부 및 이유 *100자 내외

나는 삶의 의미란 자신의 앞날을 지속적으로 이어나가게 해주는 원동력이라 생각한다. 요즘 세상은 과거보다 물질적으로 매우 풍요로워졌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이전보다 공허한 것 같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의미에 대해 떠올려보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서평 첨삭 및 제출 방법]

서평 작성 스마트자기관리시스템 [사고와 표현 과정] 내외국인 표현능력상담 프로그램 신청 첨삭내용 토대로 내용 수정 서평 본문 및 첨삭과정(상담 신청 캡쳐, 첨삭메일 등)PDF파일 1개로 합쳐 E-CLASS 커뮤니티 제출

브로콜리 펀치 (이유리 소설집)

일상을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크고 작은 상처를 마주하게 된다. 약으로 낫는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렇지 않은 아픔을 겪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럴 때 문학은 뜻밖의 치료제가 될 수 있다. 이유리 작가의 소설집 『브로콜리 펀치』도 그렇다.
 
아픔을 말하는 낯선 방식
책은 일상의 상처를 비일상적인 방식으로 풀어내는 작가의 독특한 시선을 보여준다. ‘브로콜리 펀치’에서는 적성에 맞지 않는 일에 대한 좌절을, 브로콜리와 손이라는 기묘한 조합으로 묘사하면서 인물의 내적 갈등을 엉뚱하면서도 감각적으로 표현한다. ‘손톱 그림자’ 역시 사고로 세상을 떠난 연인을 손톱이라는 신체적 상징을 통해 그려내, 감정의 깊이를 보다 낯설고 강렬하게 전달한다. 작가는 익숙한 감정을 낯선 이미지로 보여주는,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이야기들을 능수능란하게 풀어낸다.
 
너와 나를 위로하는 이야기
‘왜가리 클럽’과 ‘이구아나와 나’는 2030 세대의 불안과 희망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현실은 고단하고 미래는 불투명하지만, 인물들은 주변 인물(동물)에게 기대어 삶을 조금씩 견뎌간다. 같은 시대를, 비슷한 나이로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이 인물들이 더욱 가까이 느껴질테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작지만 단단한 유대에 위로받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구아나와 나’의 마지막 장면, 주인공이 이구아나의 엽서를 보고 삶의 다른 순간으로 나아가는 모습은 더없이 각별한 감동을 준다. 책에 실린 이야기를 가만히 읽어가다 보면, 이토록 현실은 고단하지만. 그럼에도 희망의 실마리를 놓지 말라고, 다 괜찮다고 작가는 말하는 듯 하다.
 
책 브로콜리 펀치는 익숙한 아픔을 낯설게 풀어내며, 그 안에서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책이다. 비현실적인 상상과 현실적인 감정을 자연스럽게 어우르는 수록작들을 읽으며 독자는 다시금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작가의 속삭임을 들을지도 모른다. 힘들어도 괜찮다고, 우리에겐 서로가 있다고.

브로콜리 펀치 (이유리 소설집)

『브로콜리 펀치』는 자존감이라는 주제를 섬세하게 풀어내며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 자존감은 단순한 자기확신이 아니라, 개인이 내면의 진실을 마주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과 연결되어 있다. 토론에서도 자존감에 대한 이야기가 큰 의미를 가지며 다뤄졌다는 점에서, 이 작품이 독자에게 어떤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작가는 일상의 사건과 초자연적인 요소를 연결하며 인물들의 내면에 집중하고, 그들이 안고 있는 응어리를 풀어나가는 과정을 통해 현대인들의 마음을 위로한다. 주인공 남자친구 원준이와 할머니가 산에서 응어리를 푸는 장면은 마음속 상처를 해소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보여주며,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치유의 메시지를 전한다.

또한 도림천으로 나가 각자의 상처를 극복해나가는 인물들의 모습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지지하는 따뜻한 연대를 보여준다. 특히 왜가리가 물고기를 잡는 장면에서 실패와 성공을 동등하게 받아들이는 태도는, 나 역시 그동안 성공에만 집착하며 살아온 삶을 돌아보게 했다. 반복된 실패에 집착하고 과거를 곱씹는 태도가 회복을 더디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소설 속 왜가리의 마인드처럼 실패에도 담담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을 기르고 싶어졌다.

다른 단편들도 인상적이었다. ‘평평한 세계’에서 투명인간이 되어 평평함을 말하는 인물의 고백은 그동안 그가 얼마나 외롭고 고통스러웠는지를 절절히 느끼게 한다. ‘판판한 세계’를 투명, 반투명으로 구분하는 설정은 처음엔 낯설었지만, 점차 인물의 내면이 반영된 은유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구아나’에서는 브로콜리처럼 독특한 소재를 통해 불안정한 현실을 보여준다.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발밑이 낭떠러지였다”는 문장에서, 나 또한 대학교 편입을 겪으며 느꼈던 불안과 공포가 겹쳐져 강하게 공감됐다. 도태된다는 감정이 얼마나 외롭고 무거운지, 작가는 이를 이구아나라는 상징을 통해 섬세하게 그려냈다.

이처럼 『브로콜리 펀치』는 다양한 이야기 속에서 현대인의 내면을 진솔하게 비추며, 치유와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는 작품이다.

이중 하나는 거짓말 (김애란 장편소설)

처음 『이중 하나는 거짓말』을 펼쳤을 때는 낯설고 쉽지 않았다. 문장 하나하나가 묵직했고, 작가 특유의 문체는 섣불리 감정을 이입하게 두지 않았다. 하지만 읽을수록 느껴졌다. 이건 단순히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곱씹고 되새겨야만 하는 이야기라는 것을. 특히 인물들이 그러했다. 내 주변 어디에도 없을 것 같지만, 이상하게도 익숙하고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누군가를 직접 닮은 건 아니지만, 그 감정이나 상황, 말투, 공기 같은 것들이 내 일상 속에서 느껴본 것들과 꼭 닮아 있었다. 그 지점에서 나는 감명받았다. 김애란은 이번 작품에서도 특유의 따뜻하면서도 냉철한 시선으로, 평범한 인물들의 복잡한 내면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결국 이 이야기는 진실과 거짓, 그 사이에 놓인 인간의 불안과 고독에 대한 깊은 통찰이었고, 덕분에 나는 한동안 그 여운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특히 마지막 장을 덮을 때 느꼈던 정적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문학이 주는 힘이란 바로 이런 순간에서 비롯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죽음조차 희망으로 승화시킨 인간 존엄성의 승리)

‘죽음의 수용소’를 읽고
 책의 내용은 로고테라피를 창시한 빅터 프랭크가 아우슈비츠라는 최악의 평을 지닌 수용소에서 겪은 이야기를 다룬 내용이다. 처음 책을 읽기 전 죽음의 수용소라는 책의 제목은 알고 있었지만 줄거리와 내용을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책을 읽고 아우슈비츠라는 최상 최악의 수용소에서 겪은 생생한 내용을 보았을때 매우 흥미를 느꼈었다. 나에게 아우슈비츠라는 존재는 과거 안네의 일기라는 책을 읽고 들어가면 무조건 죽으며 결국 굶주림과 가스실로 인해 죽는다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었다. 하지만 주인공이자 이 수용소를 겪은 빅터 프랭크의 정신과 내용을 보면서 아무리 호랑이 굴이라도 정신과 생각만 강하게 먹는다면 죽음의 수용소인 아우슈비츠라는 곳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다시한번 삶의 의미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아우슈비츠라는 수용소는 흔히 유태인을 학살한 장소로 알고 있어 당연히 수용소안에 최악의 대상자는 나치들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런 혹독한 환경에 처한 상황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배신한 자신과 같은 혈족인 유태인이라는 점에서 매우 놀랐으며,  니체의 명언인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들은 더욱 더 나를 강하게 만든다’라는 말처럼 아무리 삶이 힘들고 괴로울지라도 내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아야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비상문

  책에 관심도 없이 살던 18년의 마지막 달 <비상문>의 한 구절을 접해 이 책 만큼은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서 <비상문>을 시작으로 책을 읽었다. 책을 읽기 시작하자 ‘삶’이 ‘삶’으로 느껴졌다. 그 시작은 최진영 작가님의 <비상문>이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할 수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평생 경험하지 못 한다고 말하는 우울. 나는 그 언저리에 걸쳐진 채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죽음과 거리가 멀다. 죽음은 병원에서나 경험할 수 있는 사건에 가깝고, 병원은 특히나 내게 가깝지 않았다. 감기가 걸려도 병원에 가지 않았고, 아무리 아파도 하루를 통으로 뜨거운 이불 속에서 보내는 거로 병을 나았다. 그러는 사이 서서히 우울이 덮쳐 만조를 이루었다. 깨닫지도 못한 채.
  <비상문>의 어느 구절과 마주쳤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 구절을 보고 언젠가 읽으리라고 책 제목과 작가를 기록해 놨다. 고등학교 3학년, 동생을 따라 우연히 들어 간 도서관에서 익숙한 제목이 눈에 밟혔다. 동생의 양해를 구하고 동생의 이름으로 구립 도서관에서 <비상문>을 빌려 읽었다. 왜 기록해 뒀는지 읽으면서 깨달았다. 동생의 유서나 징후가 없던 자살을 겪은 형의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동생이 살아 있을 적 살갑게 굴지 않았던 형의 후회가 담겨 있는 것처럼 읽히기도 하고, 실은 마음 깊은 곳에서 동생을 아꼈던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
  본문 12페이지에 “층이 바뀔 때마다 비상문 표시가 나타났다. 그 표시를 따라 계속 오르다 보니 정말 대피하는 기분이엇다. 그 끝에 희망이 있다는 표시 같았다. 끝에 다다라 비상문을 열었다. 옥상이었다. 그다음엔?”라는 문구가 있다.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견월망지(見月忘指)가 계속 떠오른다. 우리는 목표를 향해 달린다. 예를 들어, 한때 나의 목표였던 공무원을 통해 보자. 중학교 3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난 돈을 많이 벌 생각이 없었다. 그저 대충 벌고 편하게 살 목적으로 공무원을 준비했다. 그러나 갑자기 찾아온 회의감에 나는 나를 놓쳐버렸다. 공무원이 된 다음에, 그다음에 나는? 잘못된 성취감을 이루기 위한 과정을 밟고 있었다. 나를 위해 살고 있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2년을 준비했던 공무원 공부를 그만두고 늦게나마 대학 입시를 준비했다. 이 과정도 견월망지, 거기에 그쳤을지도 모르지만 대학에서 시간을 벌겠다는 목적이 있었다. 어떤 게 좋은 성취감인지 찾고 싶었다. 손가락이 아니라 달에 다다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장 직업을 구할 게 아니라 시간이 필요했고, 그 목적에 적합했던 게 대학이었다. 우리는 쉽게 목표를 잊어버린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돈. 우리의 목표는 돈인가, 아니면 돈으로 얻을 수 있는 궁극적인 편안함 또는 명예인가? 명예는 어떠한가? 손가락을 바라봐선 안 된다. 그 끝에 가리키는 달. 달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본문 마지막 내용인 주인공인 ‘형’이 상상 속 동생 ‘신우’에게 말한다. 형의 상상 속 신우가 나무의 노폐물인 단풍을 보고 예뻐하는 사람들에게 왜 한창 살아 있는, 푸르르고 시끄럽게 외쳐대는 살아 있는 함성을 지르는 때 아름답다고 하지 않냐고 묻는다. 형은 그런 신우에게 너도 시끄럽고, 푸르고, 아름답다고 말한다. 나는 나의 죽음을 여러 시뮬레이션을 굴려가며 나의 노폐물을 상상하곤 했다. 주로 그 상상이 내 삶을 가득 메웠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마지막 장면을 읽으면서 엉엉 울며 책도 덮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난 나의 노폐물을 열심히 그리고 있었고, 내 삶을 돌아보지 못했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시끄럽고, 푸르고, 아름답다고 살아 있다는 함성을 내지르며 삶을 이어나가고 있다.<비상문>을 접하지 않았다면 난 여전히 내 노폐물을 그려다가 내 삶을 완전히 무너뜨렸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직도 가끔은 노폐물을 무시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비상문>이 생각난다. 자주 읽고, 또 읽고, 계속 읽는다. 내 삶은 시끄럽고, 푸르고, 아름답다고 스스로에게 계속 외친다. 내가 나에게 해 주는 말이 가장 효과적일 테니까.
  마지막으로, 신우의 형과 어머니, 아버지, 이재영 씨, 반지, 그리고 이 삶이 힘겨움에도 분명히 또 선명하게 살아가고 있는 분들에게. 푸르르고 아름답게 빛나고 있습니다. 빛이 사그라들지언정 스스로 그 빛을 저버리지 않길 바랍니다. 나는 내가 사랑해 줘야 한다는 걸 잊지 말아 주세요.

죽음의 수용소에서 (죽음조차 희망으로 승화시킨 인간 존엄성의 승리)

제목: 인간 존재에 대해 가장 근원적 물을에 답하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나약하고 동시에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책의 저자인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라는 지옥 같은 현실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성과 삶의 의미를 지켜낸 정신과 의사이자 철학자다. 그는 인간이 극한의 상황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단순히 생존 본능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의미를 찾아내려는 깊은 내적 의지 때문이라고 말한다. 
 책의 전반부는 수용소 체험기의 생생한 기록이다. 가족과 헤어지고, 이름 대신 번호로 불리며, 굶주림과 추위, 폭력이라는 환경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낸 이야기는 나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그러나 프랭클은 단순히 비극적 사건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수용소 안에서도 인간다운 삶의 흔적을 찾아낸다. 죽음을 앞둔 동료가 별빛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누군가는 마지막 남은 빵 조각을 이웃에게 나눠주며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끝까지 지킨다. 이 모습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단순한 동물적 생존 본능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고귀한 무엇임을 증명한다.
 책의 후반부에서 저자는 자신이 창안한 로고테라피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는 방법을 제시한다. 로고테라피는 인간이 고통 속에서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삶을 견뎌낼 수 있다는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닥치더라고, 그 상황에 어떻게 대응할 것이나는 언제나 우리의 자유 영역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유효한 메세지이다. 물질적 풍요, 과잉정보, 끝없는 경쟁 속에서 삶의 방향을 잃고 허무와 공허에 시달리는 현대인에게 프랭클의 목소리는 강렬하게 다가온다.
 결국 이 책은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질문 앞에서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를 스스로 묻고 답을 찾아가게 만든다. 삶이 나에게 무엇을 주었는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삶에 무엇을 줄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한다. 수용소라는 극한의 상황에서조차 인간이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자유 만큼은 빼앗을 수 없다는 프랭클의 말은 진리로 다가온다. 우리는 고통을 없앨 수는 없지만, 고통을 대하는 태도는  바꿀 수 있다. 그것이 인간의 존엄이며, 인간다움의 근원임을 이 책은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단순한 생존 기록을 넘어선 철학적, 인문학적 고전이다. 고통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프랭클의 외침은 어느 시대, 어떤 개인에게도 결코 낡지 않을 질문이자 응답이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오늘을 견디고 있는가. 이 책은 바로 그 질문 앞에 독자를 세운다.

니체 인생론 (자신의 길 을 찾는 등대! 독일이 낳은 위대한 철학자!)

  이 책을 읽게 된 건 한참 삶이 지치고 힘들어 심적으로 방황하던 시기였다. 
많이 힘들어서 그 당시 마음을 달래줄 만한 책은 모두 읽었다. 좋은 문구, 내가 듣기에 좋은 말이 담긴 책은 수두룩하게 있었지만 정작 인생을 정확하게 관통하는 문장은 없었다.
나는 사람의 배신에 지치고 또 외로워하며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힘들어하였다. 할 일은 많았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으나 그 모든 것을 성인이 된 지 1년도 체 안되서 모두 해내려니 버겁고 힘들었다. 근본적으로 듣기 좋은 말을 듣는다고 힘내는 성격도 아니어서 이 책을 읽고 내 마음에 많은 숨구멍이 생겼다. 
 이 책은 절대 듣기 좋은 위로를 해주지 않는다. 정확하고 면밀하게 인간의 삶과 현실을 관통한다. 하지만 그 직관적인 시각이 오히려 회피하려던 나 자신을 현실로 끌어다 앉혀놓았다. 모든 목차가 가슴을 울리기에 충분하지만 당시 나의 상황과 맞아들어 가장 감명 깊었던 부분을 말하고 싶다. 당시 친구 관계에 마음이 많이 지쳐있었고 이 책 내용에서도 진정한 친구는 없다고 목차의 제목부터 강경하게 알려준다. 우리가 희망하는 이상적인 친구 관계는 이른바 서로를 아낌없이 응원하고 심적으로 큰 의지가 되어주며 또 외로울 수 있는 길에 동료가 되어주는, 혹은 내 마음 속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으며 언제 어디서든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다. 고등학교 때 까지만 나는 내 친구들과 그런 친구가 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고 또 현재진행형이라고 착각했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 몸이 멀어지며 마음도 자연스레 멀어지고 또 텍스트만으로 오고가는 대화 속에 무미건조함이 속상하게 다가왔다. 성인이 되며 자신의 가치관이 뚜렷해진 친구는 극단적인 성향으로 치달아 더 이상 자연스런 대화가 어려울 지경이였다. 
 친구란 속마음을 다 털어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 책에선 친구가 내게 본모습을 보인다면 혐오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내가 친구를 의지한다는 이유로 내 모든 모습을 허물없이 보여준다해도 똑같다. 친구는 친구일뿐, 언젠가는 경쟁자가 될 거고 또 본래 남이였던 관계였기에 당연한 것이다. 사실은 당연한 말인데 이 말을 믿는 순간 이때까지 내가 해온 관계가 잘못된 것만 같아 인정할 수 없다가도 많이 지친 그 당시의 나에겐 진실로 다가왔다.
 좋은 친구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 난 이 말을 성인이 되고 한참 지나서 최근에서야 느끼고 있다. 어른이 되었지만 다양한 실수를 하는 우리들에게 서로의 실수를 파헤치기보다는 침묵으로 일관하며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면 모르는 척 한다. 친구의 삶에 깊게 관여해봤자 직접 그 삶을 살아야하는 당사자는 내가 아니기에 좋은 말의 위로는 의미 없단 생각이 들었다. 또 관대해진 점도 있다. 삶 하나를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생스럽고 고민스러운지 알기에 그 실수들이 이젠 커다란 도화지에 티끌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건 지금의 sns만 봐도 확연히 이 세상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 중 하나다. 자신보다 더 못한 삶은 사는 이를 기어코 파헤치고 안도한다. 
살면서 징크스처럼 여기는게 한 가지 있는데 위 내용이 나와 어쩌면 인생의 참된 진실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 징크스는 말 그래도 남의 불행에 들뜨는 마음을 가졌다간 꼭 나에게 똑같은 일이 생겼다. 하지만 전체적인 인간의 삶을 들여다보면 한번쯤 일어나는 일인데, 나에게도 당연히 일어날 일을 상대에 먼저 닥쳤다고 기뻐하는 무지한 행동을 한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평등을 지향하는 버릇이 있다고 하는데 난 이 말이 참 맞다고 생각한다. 정서적, 사회적, 물질적 모두 우린 평등함을 외친다. 하지만 남의 불행은 평등하게 느끼고 싶지 않아한다. 난 이런 인간의 우스운 점이 신기하다.
이 책에 목차들을 읽으며 내 삶에 대입하고 생각해본다면 재미있는 유사점을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일종의 현타가 올 수 도 있는데 너무 낙담해서는 안된다. 우린 인간으로서 당연히 삶에 남겨야 할 오점을 남긴 것이고 또 남의 오점을 관대하게 받아들여 줄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한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마음의 위기를 다스리는 철학 수업)

인생에 대한 고찰이 필요할 때면 어김없이 도서관에서 서적을 뒤적거린다. 삶의 지혜와 마음 챙김의 갈망할 시점에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가 눈에 밟혔다. 난 스물 둘이니까 18년은 앞서게 되어 얼마나 럭키비키한지 모른다.

“삶은 진자처럼 고통과 무료함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데, 우리의 인생이란 이 두 가지 사이를 오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가장 많이 고민했던 주제이자 나의 두뇌가 복잡했던 요소의 일부분이다. 결핍과 과잉, 궁핍과 안전은 상대적이면서 한 쪽을 피해가면 다른 쪽이 다가온다. 영원한 충족과 행복감이 지속되지 않는 이유도 이 속에 담겨 있을 거라 생각되는데, 배고파서 굶주린 고통도, 과도하게 폭식한 포만감도 불쾌를 불러일으킨다. 그렇기에 행복과 불행은 인간의 변덕스러운 감정에 달려 있다고 본다. 그만큼 본인이 지닌 것의 가치를 바라보는게 아니라 욕망과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끊임없이 손을 뻗으며 달려나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이어지는 관련 사례로 신제품 광고 및 마케팅, 자극적인 SNS의 해악을 들 수 있을거다. 한때 호기심 가득하고 새로운 것을 지향하며 추구하던 그때, 남들보다 앞서나가고 과시하고 싶었던 순간이 떠올랐다. 하지만 발전적이면서 진취적인 면모를 올바르게 해소하고 나아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이는 불안과 근심에서 파생되었다. 채워지지 않는 공허한 마음이라고 칭해도 무방했고 소유물에 관한 결핍의 존재를 직면하고 나니까 비로소 알게 되는 자아를 마주한 것만 같았다.

가끔은 그럴듯하게 글을 작성하고 무엇인가 증명해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스물스물 올라오는데, 저자는 자신을 위해 기록하라는 말을 건넨다. 자기만족이 타인의 시선에 조금이라도 걸쳐져 있진 않는지, 희생하면서까지 호의를 베푸는 미움 받을 용기가 없는건 아닌지, 내면을 돌봐야 한다는 인지조차 못하고 있진 않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행복의 본질에 다가가려는 사색으로 진정한 나를 드러내기 위해 어떤 일생을 남길지 지속적으로 탐구하고 인격을 도야하고 싶다.

어른의 행복은 조용하다

행복은 선언이다.

어른이 된 무렵 내가 서 있는 이 기로에는 양갈래가 나오며 핑크빛 하늘과 어두컴컴한 잿빛 바닥 중 선택 해야 하는 순간이 주어진다.

너무도 많이 쏟아지는 정보화 시대에서 내가 분별해서 습득하는 능력을 강화해야 하는 이유는 나의 행복을 위해서다. 살다보니 돈 명예 부를 이루는 획일화된 성공을 향해 달려가고 만족감을 얻는 양상을 띄는 것은 아닐까? 싶을 때 돈이 전부라는 단순한 논리에서 벗어나려면 기준을 두고 불행으로부터 마음을 지킬 수 있는 태도를 지닐 수 있어야 한다. 한편으론 너무 많은 걸 보지 않는 방안도 존재한다. 아는 것이 방대할 수록 우린 질투심이 마음속에 피어나며 타인의 소식에 괜찮았던 기분이 비루해질 때가 있다.

결국 마음가짐을 달리하면 일상에서 받은 작은 사랑을 떠올릴 수 있고 내가 쥐고 있었던 값진 것의 가치를 되새기게 된다. 공들여 웃고 감사하는 자세로 물든 인생은 쉽게 무너지지 않고 여백에 미소가 채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