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받을 용기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아들러의 가르침)
미움받을 용기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아들러의 가르침)
지구 끝의 온실 (여름 에디션,김초엽 장편소설)
일방통행로 사유이미지
소위 영감을 떠올려보는 체험이 그렇다. 고심 끝에 마치 하늘에서 무엇인가 번개처럼 뚝 떨어져 생각의 흐름이 명료해지고 그럼으로써 기존의 문제를 해결해줄 실마리를 마침내 잡았다는 기쁨에 도취한 것이 무색할 만큼, 직감했던 귀중한 진리를 막상 구체적인 글로 옮겨보려고 하면 그 잠깐 사이에 영감이 제대로 살아나지 않아 내가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 것인지 종종 쉽게 잊어버리곤 한다.
이토록 머리 속에는 분명 풍부한 착상들로 가득차 있건만 이 착상들은 마치 거품과도 같아서 시간이 지나면 금방 사그라지며, 그래서 아무리 신속히 담아보려고 해도 집중하는 순간 그 중 건져내는건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와 같이 우리가 평소 인지하지 못하는 시간의 느슨한 흐름은 정신의 응축된 기억을 아주 흐릿한 파편들로 분해할 뿐더러, 이 남은 파편들마저도 제대로 간수하지 않으면 그 속에 담긴 소중한 기쁨들이 어느샌가 형체 없는 기류로 웃도는 지경에까지 이르기도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런 고통을 방지하고자 글을 쓰기 시작하고, 더 나아가서는 시적인 언어로 하여금 우리 감각에 되새겨 놓기도 하는 것이다.
20세기 초 독일 철학자이자 문예 비평가인 발터 벤야민은 바로 앞서 서술한 ‘영감에 대한 기억’이라는 문제를 깊이 사유했던 인물 중 하나였다.
벤야민의 사상은 당시로선 잘 주목받진 못하였으나 비교적 최근 들어서야 인문 분과의 여러 지식인들로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했던 만큼 오늘날에도 꽤나 현대적인 스타일을 지니고 있다해도 과언은 아니다. 달리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벤야민의 글은 지금 봐서도 무척 난해하고 심오하기 짝이 없을 그런 초현실적인 문체를 자랑한다고도 얘기할 수 있다.
물론 벤야민의 이런 성향이 결코 아무 이유없이 그런 것은 아니다. 그의 사상은 겉보기에 아주 비일관적이고 체계적이지 않아 접근하기 까다롭지만, 주의깊게 반복적으로 읽다보면 나름대로 벤야민이 완고하게 의도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는 대강이나마 파악할 수 있다.
『일방통행로』는 그와 같은 벤야민 특유의 수수께끼 같은 문법이 잘 드러나고 있는 텍스트 중 하나이다. 책은 일상생활 속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단어들을 모티브로 한 여러 소제목들이 붙여진 수십가지의 길고 짧은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으나, 대충 훑어만 보기엔 아주 낯선 은유들로 가득찬 문단들이 무정형하게 나열되어 있어 조금은 다른 방식의 독해법을 요한다.
소위 ‘몽타주식 글쓰기’라고 일컬어 불리는데 그 내용은 대체로 갖가지 학술적 · 문학적 · 정치사회적 비평 외에 꿈, 여행기, 일상적 경험, 공상, 내면 관찰 등의 여러 사소하고 지엽적인 주제들까지 아우르면서 거기에 벤야민 자신의 주관이 덧붙여지는 양식이다.
『일방통행로』의 서두를 장식하는 다음 구절을 읽어보도록 하자.
<주유소>
“삶을 구성하는 힘은 현재에는 확신보다는 ‘사실’에 훨씬 더 가까이 있다. 한 번도, 그 어느 곳에서도 어떤 확신을 뒷받침한 적이 없었던 ‘사실’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진정한 문학적 활동을 위해 문학의 테두리 안에만 머물라는 요구를 할 수 없다. 그러한 요구야말로 문학적 활동이 생산적이지 못함을 보여주는 흔한 표현이다. 문학이 중요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은 오직 실천과 글쓰기가 정확히 일치하는 경우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포괄적 지식을 자처하는 까다로운 책보다, 공동체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더 적합한 형식들, 예컨대 전단, 팸플릿, 잡지 기사, 포스터 등과 같은 형식들이 개발되어야 한다. 그와 같은 신속한 언어만이 순간 포착 능력을 보여준다. 사람들의 견해란 사회생활이라는 거대한 기구에서 윤활유와 같다. 우리가 할 일은 엔진에 다가가서 그 위에 윤활유를 쏟아 붓는 것이 아니다. 숨겨져 있는, 그러나 반드시 그 자리를 알아내야 할 대갈못과 이음새에 기름을 약간 뿌리는 것이다.”
여기서 벤야민이 말미에 거론하고 있는 “기름”이란 “윤활유”로 상징되고 있는 사회적 통념 및 단편적인 지식정보들과는 다른 새로운 표현 양식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로 따지면 예를 들어 짧은 시간 안에 심도 깊은 내용들을 집약적으로 볼 수 있는 각종 뉴미디어 매체가 그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요컨대 즉각 명료하게 알아차릴 수 있는 사실들로만 조직되고 작동하는 사회인 만큼, 더이상 장대한 규모의 서사적 표현이나 사변적인 논증은 많은 이들에게 먹혀들지 않는다. 기껏해야 교양이라는 소비재로 활용되는 것에 그칠 뿐이다. 벤야민에 따르면 한마디로 “설득은 비생산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이제는 “설득”이 아닌 ‘생산적인 사실’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인간이 진실로 희망할 수 있는 참된 ‘진실’을 감각적으로 함축한 ‘이미지’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골동품> ― ‘기도바퀴’
“의지에 생생한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것은 표상된 이미지뿐이다. 그에 반해 단순한 말에서는 의지가 너무 지나치게 불붙어 이내 훨훨 타버릴 수 있다. 정확하게 이미지로 표상하는 일이 없이 건전한 의지란 있을 수 없다. 신경감응이 없이 표상이란 없다. (…)”
이러한 관찰은 어쩌면 지금처럼 미디어의 찬란한 광휘들로 굽어치는 고차적인 현 단계의 정보화 사회에야말로 가장 들어맞는 내용이 아닐까 싶다. 그렇기에 만약 우리 중 누군가라도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희망을 지니고 있다면, 이를 실현시킬 힘은 벤야민이 우리에게 남겨준 심대한 고찰 속에서 무언가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바로 벤야민이 주창했던 “실천과 글쓰기가 일치하는 경우”에 진정으로 해당된다고 볼 수 있겠다.
미움받을 용기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아들러의 가르침)
성숙한 어른이 갖춰야 할 좋은 심리 습관 (하버드대 심리학 박사가 권하는 매일 3분 습관)
변신
회사원인 그레고르는 어느 날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 보니 크고 흉측한 벌레가 되어있었다. 그러자 가족들은 그레고르의 방문을 잠가버리고, 그의 존재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누이동생이 그레고르를 보살펴 주지만, 그녀마저도 실제 벌레를 대하는 듯한 모습을 그에게 보여준다. 시간이 경과할수록 그레고르에 대한 가족들의 혐오는 점점 치솟아 그의 아버지는 사과를 마구 던져 그에게 상처를 입히고, 누이동생마저 그를 죽이기 위한 계획을 세우자는 말까지 한다. 결국 그레고르는 사과에 맞은 상처가 악화하여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레고르의 죽음 이후 가족들은 이사하면서 ‘벌레’에게 벗어나 희망찬 미래를 꿈꾸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벌레로 변신한 자기 모습을 확인한 와중에도 회사에 더 이상 다니지 못할 것만을 걱정하는 그레고르처럼 우리 주위에도 벌레가 되었을 때 자신이 다니던 회사에 가지 못할 것부터 걱정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 같다. 일을 해서 돈을 벌지 못한다면 극단적인 경우에는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이 현대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가 굉장히 씁쓸하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돈이 많다고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 삶을 영위할 만한 최소한의 돈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면, 행복해질 기회조차 없는 것이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