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편의점 (김호연 장편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장편소설)
<한 남자의 삶과 노동, 그리고 고독에 대하여>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체코의 국민작가로 불리는 보후밀 흐라발이 1980년도에 쓴 소설이다. 그는 대학생 시절, 독일군에 의해 학교가 폐쇄된 후 철도원, 보험사 직원 등 수많은 직업을 거친 후 중년의 나이에 등단한 소설가이다. 그는 서민과 예술가, 노동자들의 삶을 자신만의 상상력을 통해 그려내며 현대 유럽 소설의 거장으로 떠올랐다. 그의 소설은 대부분 경험담으로 이루어지는데, <너무 시끄러운 고독> 또한 그가 제철소에서 일하다가 크게 다친 후 폐지 꾸러미를 수거하는 일을 할 때의 경험이 녹아들어 있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책과 공상을 사랑하는 폐지 압축공 ‘한탸’의 삶과 고뇌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탸는 지난 35년 동안 쉬는 날 없이 냄새나는 지하실에 박혀서 일했지만, 자신의 직업을 그 누구보다 사랑한다. 하루종일 압축기의 버튼을 누르며 쓸만한 책을 고르고, 칸트, 예수와 노자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그에게 더없이 충만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탸가 스스로 만든 이 안전한 생활은 새로운 압축기의 등장으로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 은퇴 후 모은 돈으로 압축기를 사고 모아온 책들을 전시하겠다는 꿈 또한 좌절된다. 한탸의 느린 일처리 속도를 못마땅해했던 소장이 한탸를 해고시킨 뒤 기존 압축통을 치워버리겠다고 통보했기 때문이다. 실의에 빠진 한탸는 가진 책들을 기증한 후, 스스로 압축통 안에 들어가 사랑하는 책들과 함께 생을 마감한다.
작중 한탸는 이젠 만날 수 없을 젊은 날의 사랑을 회상하며 아래와 같이 생각한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그래도 저 하늘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연민과 사랑이 분명 존재한다. 오랫동안 내가 잊고 있었고,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삭제된 그것이.” (<너무 시끄러운 고독> 발췌.)
이 책은, 부품처럼 녹슬면 버려지는 산업화 속 한 인간의 비극을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사는 세상이 원하는 것은 이제 인간의 정신이 아니라 기계의 효율이다. 그래서 그가 보는 지하실 밖 세상은 온통 암흑이다. 그가 진짜로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은 다 지하실에 있다. 고뇌할 때만 진정으로 살아숨쉬는 한탸에게는 이 적막의 세계야말로 가장 시끄럽고, 자유로운 공간인 것이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이라는 이 책의 제목 또한 그러한 한탸의 내면 세계를 압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이 이야기는 연민과 사랑을 찾아 헤메는 한 남자의 정신적 표류기로, 인간다움을 잃은 사회에서 연약하지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마음을 기억하자는 작가의 메시지가 담겨져 있다.
이 책은 등장인물이 많지 않고, 뚜렷한 기승전결이 없는 동시에 상당히 비참한 내용이기 때문에 로맨스나 서스펜스와 같은 흥미진진함을 기대하는 독자들에게는 부적합하다. 하지만 바쁘게만 흘러가는 현대 사회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싶은 독자는 이 책을 꼭 읽길 바란다.
어른의 문답법 (개싸움을 지적 토론의 장으로 만드는)
말의 품격 (말과 사람과 품격에 대한 생각들)
말의 의미를 곰곰히 생각해 본 경험이 있는가? 우리는 자신의 의사를 직·간접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타인과 친밀감을 쌓기 위해, 그 밖의 다양한 이유로 말을 내뱉는다. 도서 <말의 품격> 에서는 ‘말’의 다양한 성질을 분석하고 우리가 구사하는 말에서 개인의 품격을 엿볼 수 있음을 흥미로운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
이 책에서는 말을 이청득심(들어야 마음을 얻는다), 과언무환(말이 적으면 근심이 없다), 언위심성(말은 마음의 소리다), 대언담담(큰 말은 힘이 있다)의 4가지 특성으로 분류하여 우리가 하는 말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말의 성질 중 ‘인향’이라는 성질이 있다. 말에서 그 사람의 성품이 드러난다는 뜻이다. 필자는 무심코 내뱉은 누군가의 말에 상처를 받기도 했지만 응원해주고 지지해주던 친구들과 가족들의 말에 용기를 얻고 어렵게만 보이던 일들을 성취해냈던 경험이 있다. 그만큼 말은 행동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쓸모없어 보일지 몰라도,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의 위로와 공감만으로도 우리는 다시 힘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개 매사에 부정적이고 짜증을 내는 사람보다 긍정적이고 밝은 말을 하는 사람들을 선호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말은 주변에 많은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실제로 비속어와 듣기 싫은 말을 내뱉었던 쌀밥은 썩었던 반면 긍정적인 말을 내뱉었던 쌀밥은 오래 보존이 되었던 한 실험이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우리가 하는 말이 상대를 불편하게 하는 화살이 될지, 상대를 보호해주는 방패가 될지는 어떤 의미를 담은 말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앞으로 우리 사회가 ‘소음’, 즉 뾰족하고 시끄러운 소리보다는 상대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진정성 있는 말들이 오고 갈 수 있는 따뜻한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기묘한 이야기 (최초의 의심 | 그웬다 본드 장편소설)
브라질에 비가 내리면 스타벅스 주식을 사라 (경제의 큰 흐름에서 기회를 잡는 매크로 투자 가이드)
피프티 피플 (정세랑 장편소설)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이도우 장편소설)
죄와 벌 1
<죄와 벌>을 완독했다. 시험기간을 포함하여 거의 한달 반가량 붙잡고 있었지만 나름 처음 읽어낸 장편이라 뿌듯하기도 하다. 이 책은 나의 인생책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재미있었다. 어떤 것에 흥미를 쉽게 잃는 편인 나는, 단편 소설도 한 번 질리면 바로 덮어버린다. 그런 내가 이 길고 긴 <죄와 벌>을 읽을 땐 단 한번도 흐름이 끊기는 일이 없었다. 매 순간이 몰입의 연속이었다. 누가 나에게 소설을 추천해달라고 하면 무조건 <죄와 벌>을 읽으라고 할 것이다. 다만, 러시아 문학 특유의 긴 이름과 다양한 별명에 더해 도스토예프스키 특유의 장광설 때문에 읽기 힘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살면서 한번쯤은 시도해볼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죄와 벌>은 살인자의 심리를 비추는 심리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살인자의 이성주의적 사상을 기반으로, 그가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종국적으로는 인간 영혼의 아름다움, 사랑, 고뇌를 그린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심리묘사, 구원, 이성주의에 대한 지적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그럼 내가 느낀 이 소설의 주요 포인트를 몇 가지 이야기해보겠다.
심리묘사
이 소설이 내 인생작품이라고 생각하게 된 계기 첫 번째가 바로 ‘심리묘사’이다. 나는 소설의 심리묘사를 참 좋아하는데, 감정이 빨려 들어가 마치 다른 세계로 인도된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또한 묘사가 극적일수록 심연의 느낌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이 작품은 그러한 심리묘사에 아주 능통하다. 라스콜니코프가 격정, 소냐의 순수한 마음, 스비드리가일로프의 광기와 절망 등 심오하면서도 양극단의 감정들을 한 작품 안에서 느낄 수 있다.
작품을 읽어 본 사람은, 인물의 대사가 과하게 긴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이 들었을 수 있다. 이게 바로 도스토예프스키 작품 특유의 장광설인데,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부분이다. 난 이 장광설을 매우 좋아하는데, 이를 통해 문제 상황과 인물 심리에 깊이 빠져들 수 있기 때문이다. 너무 몰입하면 마치 트랜스 상태처럼 종종 숨 쉬는 것을 잊을 때도 있는데, 그때 나는 문학 읽기의 쾌락을 느낀다. 특히 심리를 묘사하는 부분에 있어서 작가의 장광설은 최고의 몰입도를 선사한다.
이성주의 지적
나는 라스콜니코프의 사상이 이성주의 혹은 계몽주의와 비슷하게 보였다. 그의 사상을 두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하나의 악으로 수천의 선을 얻을 수 있다면 악을 행해도 좋다.’, ‘세상엔 비범한 사람과 평범한 사람이 있는데, 비범한 인물은 죄를 넘어선다.’ 라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며, 자신은 비범한 사람인지 평범한 사람인지 확인하고 싶어 두 사람을 살해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고, 그 사실을 깨닫자 고통스러워한다. 그러한 그는 그럼에도 소냐의 사랑으로 구원받게 되는데, 저자는 “변증법 대신에 삶이 도래했다.” 라고 언급한다. 나는 이 대목을 보고 저자가 ‘이성주의(계몽주의)에 대한 경계’를 암시하고 있다고 느꼈다.
사실 라스콜니코프의 이론에 어느 정도 공감이 된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잘못된 일이 맞지만, 그는 법과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가치를 추구했다. 그 점이 내가 공감하고 배우고 싶은 점이다. 사회에 얽매이는 자만이 존재한다면, 누가 이 세상을 다음 단계로 이끌 수 있을까. 또한 이성과 감성에 대해 나는 그 둘의 적절한 조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성주의와 휴머니즘 그 사이 어딘가. 그곳에서 세상을 발전시키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삶의 소중함
주인공인 라스콜니코프는 삶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 감옥에서 인생의 의미를 자문하지만, 결국 자살하지 못한 것을 자책하기도 한다. 그는 스스로 깨닫기 전까지, 외부에 대해 귀를 닫고 자기기만의 늪에서 혼자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삶에는 미래가 있었고, 소냐의 사랑 덕분에 그 미래에 발을 딛게 되었다. 주인공을 심문했던 포르피리의 ‘삶을 소중히 하라’는 조언도 생각난다. 이를 통해 작가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는 질문에 “삶은 소중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알게 될 것이다.”라고 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이 생각에 동의하는데, 사람의 인생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후기
요즘 자주 듣는 스월비(Swervy)의 January Embers라는 노래가 생각났다. Ember가 ‘잉걸불’이라는 뜻인데, 다 타지 아니한 장작불을 의미한다. 라스콜니코프의 삶, 다 타버려서 회색으로 죽을 뻔 했던 그의 삶이 다시금 타오르기 시작하면서 대단원의 막이 내린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삶이 잉걸불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우리 모두 잉걸불 같은 삶을 살고 있지 않나? 우리는 여기저기에 치이고, 지치며 다 타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삶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를 더 타게 해줄 어떤 것을 만나게 된다. 그렇기에 삶이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