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친화력으로 세상을 바꾸는 인류의 진화에 관하여)

나는 부제가 있는지 모르고 책을 선택했었다. 단순한 인문학책인줄 알았고, 필독서라는 말이 있어 읽어보았다. 
처음엔 당황스러웠다. 계속 실험 얘기가 나왔기 떄문이다. 
보노보, 개, 침팬치 등 동물들에 대한 실험이 나왔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라는 생각이 들때 쯤 인간이 지닌 협력의 능력과 타인을 배려하는 다정함이 다른 동물들과 다르게 더 발전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를 알려주었다. 
저자는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 결론적으로 인간이 더 나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할지에 대해 알려주고 있다. 바로 “민주주의”이다.
이 책은 과학자가 어떻게 자신의 근거있게 주장하면서 세상을 알게해주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책이었다. 

디자인과 도덕

디자인을 전공하는 학생으로서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가야할 방향성과 길을 여러번 생각해 보아야한다고 느낀적이 많다. 그런 상황에서 디자인과 도덕이라는 책에서 말하는 디자인의 도덕성, 착한 디자인에 대한 가치관과 의견 등을 지은이의 이야기를 통해 들으니 흥미로웠으며 디자이너가 가져야할 다양한 생각과 사고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었다. 다양한 디자인의 도덕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디자인이 사회에서 지속가능성을 가지고 살아가려면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또 어떠한 이념이나 가치관으로 착한디자인을 해결할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해가 지는 곳으로 (최진영 장편소설)

 ‘해가 지는 곳으로는 바이러스에 뒤덮인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가정이 무너지고, 일상이 무너진 혼란의 세계 속에서 도리와 지나는 사랑을 한다. 최근 사람들을 극한의 상황에 몰아넣고 반응을 관찰하는 서바이벌이나, 재난 상황에서 인간의 본성의 악함을 보여주는 드라마나 영화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아득바득 살아남으려는 참가자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일종의 도파민을 제공하기도 하고 불쾌감을 제공하기도 한다. 극한의 상황에서 인간의 본능에 충실한 모습은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저자 최진영은 그럼에도 사랑을 좇는 사람들에게 집중한다.

소중한 사람을 미뤘다. 내일이 있으니까. 다음에 하면 되니까. 기나긴 미래가 있다고 믿으니까. 이젠 그럴 수 없다.’

미루는 삶은 끝났다. 사랑한다고 말해야 한다.’

이 소설에서는 사랑과 동시에 미뤄둔 것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다. 도리는 대출금을 갚기에 바빠서 자신의 삶을 미루고 있었고, 류와 단은 사랑을 미루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재난이 닥치고 일상을 잃고 나서야 도리는 지나와 함께하는 일상을 꿈꾸고 그런 미래를 희망하게 되었다. 류 역시 재난이 닥치고 일상을 잃고 나서야 미뤄뒀던 사랑을 말하게 되었다. 해민에게 미루지 않고 사랑을 가르치기로 다짐하며, 단에게 물어보지 못하고 묻어두었던 질문을 하게 되었다. 지나와 도리를 만나고 둘의 사랑을 바라보며 류는 죽음을 각오하고 자신의 작은 기적인 해민과 함께 단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 떠난다.                                         소설에서는 재난 영화나 소설에서 다뤄지는 흔한 이성 간의 사랑뿐만 아니라 동성 간의 사랑, 가족 간의 사랑, 인류애, 우정의 사랑 등 사랑을 다양한 형태로 보여준다. 도리의 엄마에게서 아빠에게로, 아빠에게서 도리로 이어진 사랑은 결국 미소에게 이어지고 그렇게 이어진 사랑은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재난으로 일상을 잃어도 사랑하며 해가 지는 곳으로 나아가는 지나와 도리, 미소, 그리고 사랑을 품은 채 따뜻한 바다로 향하는 건지의 모습은 재난 상황에서 보이는 인간의 잔인함과 욕구 속에 조용하게 존재하는 인간의 본성을 다시금 상기시켜 준다

디자인과 도덕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글쓴이를 의심했다. 단순히 국민대 대학원생이 자신의 의견을 마구 써둔 책인 것 같았다. 
다소 화난 말투와 자신의 강한 의견을 내뱉고 주입 시키듯이 말한 내용들은 책에 대한 신뢰감을 많이 떨어트렸다. 
읽으면서도 고개가 갸웃거리는 듯한 내용도 실제로 많았다. 
하지만 그 안에 전달하고자 하는 의견과 주장들이 점차 이해 가기 시작되었다. 
어투는 강했지만, 그 안에 내용이 진실 되게 느껴지는 순간이 왔었다. 
디자인 전공을 하고 단순히 기술적인 부분, 미적인 부분에 대해서만 생각하게 되는데, 
자신의 디자인 가치관이나 얻는 가치에 대해서 생각해 보야한다고 한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디자인, 디자인의 정의와 가치 등등 
당장은 필요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자신만의 디자인 색이 생기려면 꼭 해야 한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사실 지구를 구할 수 있는 제품이라고 하더라고, 제품은 결국 쓰레기를 만든다’라는 문구다. 
제품 디자인을 진로로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환경을 생각하는 제품 및 친환경 디자인 등등의 방향을 생각해 보게 되는데, 이러나저러나 
결국 모든 제품은 쓰레기가 된다는 점에서 머리가 땡 하고 울렸다. 
단순히 디자인에서만 환경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생산 시스템 그 체계 자체와 전 세계 사람들의 인식이 개선되어야 한다.라는 점이 
이 책의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었는데, 나 또한 공감한다. 
디자인에 관련된 여러 전공서적을 많이 읽은 사람들에게 한 번쯤 추천한다.

디자인과 도덕

  디자인과 도덕을 읽으며 평소 생각하지 못했던 디자인과 도덕이라는 그 관계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책에서 핵심적으로 다루는 도덕에 대한 단어는 바로 ‘착한’이라는 단어이다. 처음 책을 읽었을 때는 ‘착한 디자인’이라는 단어 자체에 매우 불만을 갖고 있는 지은이에 대해 나는 오히려 조금씩 짜증이 났던 것 같다. 나는 착한 디자인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디자이너들이 착한 디자인을 하기를 원하기도 했으며 이를 지향하기를 바랬다. 왜냐하면 지금 환경 오염은 너무 심하고 기후 위기는 이미 우리 앞까지 다가왔기 때문이다. 근데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왜 지은이가 그렇게 말하는지 알게 되었다. 세상에 착한 디자인이라는 이름으로 만든 것들이 실상을 보게 되면 그 뒤에 또 다른 오염을 불러오고, 더 많은 자원을 낭비하는 경우가 한 두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착한 디자인이라는 이름으로 겉보기만 그럴듯하게 하는 사례도 많이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 얘기를 하며 꺼낸 지은이의 세월호 얘기는 정말 인상 깊었다. 세상이 이렇게 발달했지만 2016년에 창창한 아이들이 그렇게 죽어갈 때 그렇게 발전한 제품과 기술이 이 아이들을 한 명도 살리지 못했던 그 사실과 오히려 잠수부들이 배를 꺼내려 쓴 도끼가 가장 큰 역할을 한 그 시대에 맞지 않는 모순적인 현실이 지은이에게 있어서 정말 충격적이고 실망스러웠다고 한다.
   나도 최근 들어 환경에 더욱 관심이 많아지고 더욱 심각성을 느끼고 있는데, 그 와중에 읽은 지은이의 이러한 의견과 시선은 나에게 있어 정말 인상 깊게 다가왔다. 그리고 책의 막바지로 가며 이 책의 핵심을 뚫는 문장을 읽게 되는데, ‘디자인으로 세상을 바꾸자고 주장하기보다는 시스템을 바꿀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라는 문장이었다. 세상의 생산과 소비가 반복되며 쓰레기가 쌓기만 하는 이 최악의 시스템과 우리의 근본적인 인식이 변화해야 하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느낀 것은 지은이가 ‘착한 디자인’이라는 단어에 그렇게 불만을 가지며 글을 쓰는 것은 착한 디자인이라는 단어 자체가 디자이너에게 세상의 문제를 바꿀 책임을 넘겨버리는 것만 같아서 그 말을 싫어했다는 것이었다. (물론 실제로 이미 그렇게 쓰시기도 했다.) 그래서 지은이는 디자이너만 생각하고 고민하는게 아니라 모두가 고민하고 함께 변화시키려 해야 한다며 말을 마무리 했다. 책을 마무리 지으며 나도 지은이의 생각과 나의 생각을 잘 맞출 수 있었고, 뭔가 지은이와 화해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디자인과 도덕을 함께 생각하며 우리가 결론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바로 우리 모두가 세상의 시스템을 점차 변화해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18세기의 세책사 (소설 읽기의 시작과 유행)

18세기에 나타난 세책문화의 역할과 현대적 의의

18세기의 세책사를 읽고

 지난 학기에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책을 읽었다. 전기 소설의 대가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마리앙투아네트는 신선하게도 혁명의 대상이 되는 왕과 왕비의 입장에서 혁명을 바라본다. 지루하지만 진지한 연구서보다는 사료에 섬세한 상상력을 더해 소설처럼 풀어쓴 전기 형식이었지만 혁명이 원하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혁명에서 기득권 층과 비 기득권 층의 역할이 각각 무엇이었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18세기라는 시대의 특수성에 특히 눈길을 두게 되었다. 당시는 중세에서 근대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시기이지만 여전히 중세의 흔적들이 짙게 퍼져있었다. 그리고 당시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계몽주의의 흔적 속에선 당시에 반영된 중세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었다.

 나에겐 이 점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중세를 비합리와 야만이 지배하던 머나먼 과거이며 현대와 관계 없는 역사로 여겼었기 때문이다. 마리앙투아네트를 읽으며 중세가 현대 사회에 분명히 영향력을 행사하는 의미 깊은 시간대로 인식하게 되었다. 

 중세에 대한 인식의 전환은 현대 사회의 어떤 것이 계몽주의 이전의 것이고 어떤 것이 그 이후의 것인지 살펴보는 것을 즐겁게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중세와 현대를 연결하는 18세기의 사회와 변화에 관심이 생기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러한 관심 속에서 18세기의 세책사라는 제목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또한 평소 문헌정보관리에 대한 관심과 세책이라는 들어본적 없는 개념에 대한 호기심도 도서의 매력을 더해 주었다. 이렇게 독서클럽에서 18세기의 세책사를 읽기로 하였다. 

 마리앙투아네트를 읽으며 계몽주의 전과 후를 비교해볼 수 있었던 경험을 18세기의 세책사에도 적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8세기라는 과도기 속에 세책은 어떤 수요에 응답하기 위해 등장하였는지 파악하고 어떤 환경 속에서 등장할 수 이었는지, 당대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지 영향은 무엇인지 살펴보자. 


 세책이란 돈을 내고 일정 기간 책을 빌려보는 것을 말한다. 18세기에는 인쇄술의 발달로 책의 생산이 증가하였다. 그러나 대증에게 있어 다양한 서적을 구매하는 것은 여전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세책업은 이러한 틈새 시장을 노려 등장하였다.

 세책점에서 인기 있는 장르는 흥미로운 통속 소설이었다. 오늘날 드라마와 웹소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낭만적인 로맨스,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영웅서사 등이 그러한 종류이다. 이러한 작품들을 소비하며 초기 세책업의 성장을 견인한 주요 고객층은 여성 독자들이었다. 현대의 드라마도 보통 여성들이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음을 생각해보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성이 흥미로운 스토리에 빠르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어온 셈이다.

 그러나 서사에 대한 욕망은 여성의 것만이 아닌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 인지심리학에서는 사람이 스토리텔링을 통해 세계를 인식한다고 주장한다.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그렇게 파악한 원인과 결과를 한 덩어리로 인식한다. 또한 인간은 즐거움을 선하게 여기고 추구하는 특성이 있는데, 이 두가지 특성이 맞물려 서사 컨텐츠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를 만들어낸다. 

 실제로 소설의 대중화 이전에도 이야기꾼, 연극 등이 성행하였고 소설의 대중화 이후에도 영화, 게임과 같이 더욱 생생하게 이야기를 누릴 수 있는 미디어로 대중들의 관심이 옮겨 갔다. 스토리텔링에 대한 수요는 시대와 지역, 성별을 뛰어넘어 존재해온 것이다.

 한편 18세기에는 인쇄술이 보급되며 책을 생산할 수 있는 기술적 환경이 갖춰졌다. 종이를 묶어 만든 책은 라이트 미디어로 과거의 헤비 미디어와 대조된다. 바위와 돌판, 양피지 같은 헤비미디어는 기록의 매체가 무겁고 대량생산이 힘들다. 따라서 많은 내용을 전달하려면 시와 같이 함축적인 글을 주로 작성하였다. 반면 종이로 대표되는 라이트 미디어는 가볍고, 저렴하게 더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었기 때문에 더 생생한 서사 체험을 제공할 수 있도록 세세하고 긴 내용도 담을 수 있었다. 

 또한 18세기부터 널리 퍼지기 시작한 계몽주의는 사람들의 관심을 기존의 신과 종교에서 세계와 사람으로 옮겨 놓았다. 로맨스와 영웅서사와 같은 인간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관심을 끌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스토리텔링에 대한 근본적인 욕구, 이를 충족시킬 수 있는라이트 미디어의 등장, 사회적 관심의 이동이 소설의 수요를 이루었다. 

 하지만 책은 여전히 대중에게 생소한 미디어였으며 여전히 비싸 접근성이 높지 않았다. 이 수요와 공급의 엇갈림을 조율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세책업이다. 저렴한 가격으로 재밌는 책을 빌려주어 소설에 대한 사람들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세책점은 이 과정에서 독서의 대중화를 이끌었고 산업이 성장할 수 있었다. 이후 세책문화는 남성과 지식인들로 확대 되었고 학문적이고 전문적인 서적도 취급하게 되었다.


 세책점의 이러한 역할은 독서문화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18세기 이전의 문학은 시와 민요를 뜻했다. 그러나 소설이 대중화 되며 문학 갈래의 한 축을 차지하게 되었고 오늘날에는 가장 대중적인 갈래가 되었다. 

 또한 낭독 중심의 모여 읽기 문화에서 묵독 중심의 혼자 읽기로 전환되었다. 18세기 이전에는 책을 가진 누군가가 읽어주어야만 했지만 세책점에서는 개인적으로 빌려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독서가 개인적인 취미가 되었으며 독서 문화에 있어서는 개인주의라는 개념이 등장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한 권을 깊게 읽던 전과 달리 여러 권을 넓게 읽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 또한 한 사람이 접할 수 있는 책의 양이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다시 기존의 깊게 읽기에서 넓게 읽기로의 전환을 일으켜는데, 학문 성취와 정신 수양을 위해 한 권을 공부하던 과거와 달리 정보와 통속을 위해 다양한 책을 흝어보는 문화를 만들었다. 오늘날에도 취미로 책을 읽는 사람들 중에는 통속과 표면적인 정보를 목적으로 독서하는 경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세책업의 사회적 역할은 축소되고 이전되어 쇠퇴하게 되었다. 세책점의 요금은 구매보다는 저렴했지만 여전히 중산층 아래로는 부담스러운 수준이었다. 그리고 신문이 이 간격을 매우는 대체제로 등장하였다. 신문은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흥미로운 가십거리들을 담고 있었다. 독자들은 신문을 통해 이야기에 대한 욕구를 채울 수 있었다. 또한 영화, 텔레비전의 등장은 서사의 시각적인 체험을 가능하게 했다. 이러한 영상매체는 한 차원 높은 서사 체험을 제공하였기 떄문에 소설을 뛰어넘는 수요를 창출하였다. 

 세책업의 내부적인 문제점도 있었다. 세책점은 이익을 늘리기 위해 자체적으로 책을 복사해 대여해주곤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원본과 달라지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여러 권을 빌려보도록 한 권의 소설을 여러 권으로 분권하는 과정에서 문학적 가치가 훼손되기도 하였다.  

 이에 더하여 미국에서는 계몽주의 정신에 힘입어 국가차원에서 공공 도서관을 보급하기 시작하였다. 더 저렴한 가격으로 서사를 즐길 수 있게 되고 국가 차원에서 양질의 서적들을 제공함으로 세책업의 유용성은 감소하며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세책업의 역할이 축소되는 과정 속에서도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려한 세책점들이 이 있었다. 그들의 경영전략이 오늘날에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점이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세책업의 역할 변화를 인식한 세책업자들은 영업 전략을 변경하였다.  부유한 이들은 자신의 교양을 과시하기 위해 세책점에 후원을 하기도 했다. 또한 세책점은 교양 있는 사람들의 사교 클럽이 되기도 하였다. 이를 간파한 세책업자들은 인테리어를 고급스러운 살롱으로 꾸미는 등 사교 문화 공간으로 사용하였다.

 오늘날에는 온라인 서점의 등장으로 동네 서점들이 역할을 잃고 쇠퇴하고 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서점 고객들을 대상으로 백일장을 개최하고, 함께 낭독극의 시간을 갖거나 독서 모임을 개최는 등의 활동을 한다. 이는 책에 관심 있는 이들을 대상으로 로컬 커뮤니티의 역할을 수행하려는 것으로 바라볼 수 있다. 특히 사회의 신뢰가 약해져 낯선 이에 대한 경계가 커진 요즘, 비슷한 관심사로 낯선 이에 대한 경계심을 덜 수 있다는 것은 큰 매력으로 다가올 수 있다.

스피노자의 뇌 (기쁨, 슬픔, 느낌의 뇌과학)

안토니오 다마지오의 스피노자의 뇌는 느낌과 정서라는 인간 경험의 근본적인 측면을 탐구하며, 과학적 통찰과 철학적 성찰을 조화롭게 엮어낸 작품이다. 이 책은 단순히 신경과학이나 심리학적 관점에서 인간의 감정 체계를 설명하는 것을 넘어, 인간 존재를 보다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특히, ‘느낌이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추며 그것이 우리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탁월하게 풀어낸다.

 

책의 도입부에서 다마지오는 느낌과 정서를 쌍둥이에 비유하며, 정서가 먼저 태어나고 느낌이 뒤따라온다고 설명한다. 그는 느낌을 정서의 그림자로 묘사하며, 느낌이란 정서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것을 의식으로 드러내는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그동안 느낌의 출처에 대해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를 통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으면서 깊이 고찰하게 되었다.

 

다마지오는 단순히 느낌과 정서의 작동 원리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스피노자의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인간의 신체와 정신, 그리고 감정의 상호작용을 논의하며, 인간 존재의 복잡성을 심도 있게 탐구한다. 그는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영감을 받아, 우리의 느낌과 정서가 단순히 뇌의 반응이나 신체적 작용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 삶과 의식의 핵심적인 부분임을 강조한다. 이 과정에서 다마지오는 과학과 철학의 경계를 허물며, 독자들에게 인간의 감정 경험을 이해하는 새로운 통합적 관점을 제시한다.

 

책을 읽으며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점은 다마지오의 통찰이 단순히 학문적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의 일상과 삶 전반을 관통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느낌이 단순한 신경 반응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고 주장하며,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과 삶의 질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논의는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감정과 느낌을 단순한 생리적 현상이 아니라, 자신을 이해하고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사피엔스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사피엔스 책이 유명한 책이기에 한 번쯤은 읽어보고 싶었는데 이번 독서클럽 프로그램을 통해서 읽을 기회가 되었다. 책 제목만 보았을 때는 인간의 진화와 관련된 내용으로 가득 있을 줄 알았다. 책을 읽어보니 각 챕터마다 주 내용이 있지만 책을 읽어보니 내용이 계속해서 이어갔다. 책을 읽으면서 작가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지 솔직히 이해가 되진 않았다. 되게 철학적이고 심오한 내용으로 책이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고 완전한 이해를 하지 않은 채 은 이해를 하면서 일단 책을 완독하는 걸 목표로 하였다. 여러 번 이 책을 읽게 된다면 충분히 작가의 의도를 완전히 이해하고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모순 (양귀자 장편소설)

삶의 본질을 받아들이다 : 양귀자의 『모순』을 읽고
모순으로 가득한 삶을 우리는 살아간다. 인생을 탐구하겠노라 마음을 먹으면서도 결국에는 인생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던지는 고난에 굴복해버리고,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에게서 스스로 멀어지며, 우리를 괴롭게 하는 존재를 우리가 직접 거두어들인다. 삶은 결코 단어 하나, 문장 하나로 정의될 수 없는 복잡다단한 존재다. 어쩌면 인생은 정의하려 해서는 안 되는, 정의되어서도 안 되는 것일지 모른다. 
현대 사회를 돌아보면, 우리는 모순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실감한다. 성공을 추구하면서도 행복을 잃어가는 삶, 더 많은 연결을 원하면서도 진정한 소통을 놓치는 아이러니. 양귀자의 작품은 이러한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자,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모순을 관조하고 수용하도록 이끈다. 작품 속 인물들은 인생의 복잡함 속에서 답을 찾으려 애쓰지만, 결국 답은 없다. 이는 곧 삶의 진리로 다가온다. 삶은 단순히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겪고,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할 여정이다.

삶의 모순을 해결하려 하지 마라. 그 모순은 우리의 인생을 우리의 인생으로 만들어주는 것이기에. 양귀자는 이를 통해 말하고 있다. “삶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그 모순이 바로 삶의 진정한 미학이다.” 우리는 모순 속에서 살아가며, 그 모순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간다.

결국, 삶의 모순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삶의 본질을 묻는 행위와 같다. 그것은 정의를 넘어선 존재의 형태이며, 이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삶의 진정한 깊이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모순』은 그런 깨달음을 주는 작품이다.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

평소 읽던 소설이 아닌 시집을 고른 것은 우연에 가까웠다. 시를 읽는 것을 좋아하긴 하나 시집을 특별히 찾아보진 않고 인터넷을 돌아다니거나 지하철 스크린 도어에 붙어있는 짧은 구절을 읽고 지나가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이시영 시인의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는 현대까지 이어져 온 ‘막지 못하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전쟁과 폭력, 넓게 나아가보면 인간의 발전으로 일어난 자연의 파괴까지.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 앞에서 너무나도 쉽게 나타났다 흐려지고만 소실들에게 저마다의 이름을 붙여 거시적 시선에선 지워져 버린 죽음을 세밀한 시선에서 바라보았다.

시는 다른 어떤 형식보다도 사람에게 여운을 깊게 남긴다. 나는 그 이유가 짧은 문구로 이루어진 시가 페이지에 남기는 여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이나 에세이같이 길게 이어지는 글은 마지막 페이지가 아니라면 문장을 넘어가고, 페이지를 넘기면 다음 이야기가 있음을 직감할 수 있다. 하지만 보통의 시는 한 페이지에서 온점을 찍고 여백을 만나 버리면 끝이 나기에, 독자는 여백을 지나가며 자신의 감정을 생각해 보게 된다. 그 과정에서 시의 단어, 문장이 주려 했던 의미나 시인이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의 속뜻을 짐작해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시영 시인이 ‘막지 못하는 죽음’들을 시로 써야 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시의 여운으로 죽음들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해준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만약 바쁜 일상에서 무심코 지나쳐버렸던 긴 시간 중 잃어버리거나 뒤돌아보지 않아 놓쳐버린 것들이 있던 사람들이 있다면 이 시에 실린 시 한 편을 읽어보길 추천하고 싶다. 그리고 문장이 끝났을 때, 여백의 여운을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란다.


이광웅 형을 군산 가까운 서해 낮은 산자락에 묻어주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바다 갈매기들이 바다로 가지 않고 끼룩거리며 우리 뒤를 조용히 따르고 있었다.
– 「 모년 모월 모일 」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