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단어 (인생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인생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라는 수식어가 나의 시선을 멈추게 했다.

처음 알게 된 박웅현님은 30년 간 광고 일을 하는 분이다. 또한 일과 동떨어져 가장 좋아하는 취미인 책 읽기를 통해 인문학적 소양을 나누는 작가의 삶을 살기도 한다.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 책은 도끼다’ ‘다시, 책은 도끼다등 그의 책을 천천히 읽어 볼 생각이다.

여덟단어를 읽는 틈틈이 내가 겪은 시간에 대해 생각을 해보게 됐다.

10대까지는 오로지 가족 그리고 친구였고 본격적으로 성인이라고 간주 되었던 20, 방황은 아니었지만 뭔가 목표는 있어야 할 텐데 목표가 무엇인지 잘은 모르겠고 타인을 꽤 의식하면서 살았다. 그러다 30대가 다가올 때 큰일이 나는 줄 알았다. 막상 30세에 딱 들어서니 심리적인 것 말고 딱히 별다른 큰일이 생기진 않았다.

인생의 가장 큰 변화를 겪기 시작한 30, 막연히 결혼은 서른에 해야지 했는데 정말 서른에 결혼을 하고 3235세에 아이들을 출산했다. 시댁의 육아 지원으로 맞벌이를 할 수 있었고 하루하루 울고 짜고 한편으로는 파이팅 하며 정신없이 지내왔다.

앞으로 만들어 갈 나의 40대는, 밤새 함박눈이 소복하게 내려앉아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차분한 느낌, 그런 느낌으로 나의 40대를 만들어 가고 싶단 생각을 한다. 어쩌면 현실적으로는 30대 때보다 더 고군분투이어야 할 일상들이 기다릴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를 한 번 돌아보고 앞으로의 나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갈지는 나 스스로 주도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타이밍에 인생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라는 수식의 여덟단어가 눈에 띈 것이다. 남편에게 물었다. “이 책 어땠어?남편이 말하길 뭐 열심히 살라는 거 아닌가? 책 많이 읽고? 잘 모르겠네.” 김이 훅 센 느낌이었다.

책이나 영화 같은 어떤 작품을 통해 서로 공감하고 소통하는 것이 쉬운 건 아니구나 라는 생각과 그것이 통했을 때 그 대화가 얼마나 재미있고 깊이가 생길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드니 책을 앞으로 꾸준히 읽어야겠다.

남편과 달리 난 이 책을 내가 20대에 읽었었다면 이렇게 인상적이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 이 책을 읽은 것이 행운이라는 감상을 하게 됐다.

박웅현 작가는 책 속에서 삶의 태도에 대한 여덟가지 화두를 제시한다.

자존, 본질, 고전, , 현재, 권위, 소통, 인생

단어들만 보면 좋은 책에서 늘 보던 단어들이지만 각자의 해석 혹은 입증할 만한 경험들에 따라 공감을 얻는 정도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나에게 충분한 공감을 얻었고 앞으로의 다짐도 이끌었다.

30대가 너무 쏜살같이 지나갔음에 놀라는 요즘, 그럼 50대를 준비해야겠어! 라는 생각에 마음이 분주했다. 계획을 세우고 이를 문서화해둘까? 연도별로 가족의 각자 대소사를 한눈에 볼 수 있게 표를 만들어 두고 미리 준비할까? 이런 업무식 사고투성 이었다. 물론 모르기보다는 알고 있음이 나쁠 건 없다. 다만, ‘현재를 놓치고 있음을 간과했다. 여덟단어 중 무엇보다 현재를 살아감이 얼마나 중요한 순간인지 눈으로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내 주변의 지금 모든 것들이 그냥 현재인 것이다. 글을 쓰는 지금도 나의 현재, 더 성장한 내 삶의 합 중에 아주 영향력 있는 순간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현재를 개처럼 살기로 했다. 개는 밥을 먹으면서 어제의 공놀이를 후회하지 않고 잠을 자면서 내일의 꼬리치기를 미리 걱정하지 않는다.” 지금 하는 일에 성의를 다한다면 그 즐거움이 더없이 클 것이다. 삶은 경주가 아니라 순간의 합이다.”

여덟단어 중 현재의 가치를 나에게 아주 깊게 이해시킨 박웅현님의 말이다.

다른 답은 나의 답이 될 수 없음을 알고 내 답이 옳다라는 나의 자존을 바탕으로 마음을 다해 현재를 살아간다면 시간이 꽤 흐른 시점에는 목표하지 않았어도 내가 원하는 방향에 도달해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얻었다.

삶은 순간의 합이다순간이 행복하지 않다면 삶의 끝에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 정말 동의하는 글귀다. 인생에 정답은 없으나 다만 정답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 바로 현재인 것. ‘Be myself’ 내 안에 그럴만한 실력이 있다는 자존을 장착하고 일희일비 흔들리지 말고 묵묵히 내가 생각하는 본질을 꽉 붙들어 현재를 나답게 살아가고 싶다. 나의 기준점은 바깥 어딘가가 아닌 내 안에 두고 말이다.

인생은 묵묵히 자기를 존중하면서, 클래식을 궁금해하면서, 본질을 추구하고 권위에 도전하고, 현재를 가치 있게 여기고, 깊이 봐가면서, 지혜롭게 소통하면서 전인미답의 길을 가자.” 행운을 위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 그 자리를 행운의 공간으로 전환 시키는 것. 여덟단어를 응축시킨 이 한 줄을 매일 아침 명상 한 줄로 삼아 나의 것으로 만들어 볼 생각이다

밝은 밤 (최은영 첫 장편소설)

밝은 밤은 멀면서도 가까운 이야기다단순 시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내가 겪었던어쩌면  가족들이 겪었던 이야기다

밝은 밤은 전쟁 때부터 현재까지의 여성들(증조모할머니엄마), 그리고 가족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로 나는 크게 공감할  있었다작품의 등장인물들은 가족에게 상처를 받으면서  다른 가족에게 위로를 받는다나에게 상처를 주는것도 가족이며 동시에 나를 살아갈  있게 하는 것이 가족이라는 점에서 독자인 나와 비슷했고한국의 모녀 관계와비슷했다 많은 여자들이 동감하는 ‘애증의 모녀 관계 시대의 특징을 반영해 여러 형태로 보여준 점이 흥미로웠고  번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세대를 뛰어넘고 만나는  관계는(할머니  없이 배려가 가득한 사이가   있는데  1차적인 관계는 그렇게도 복잡하고 어려운지책에서도 동감한다는 듯이  법칙을 세밀하게 풀어냈다

작품은 여성들이 구조적으로 비슷한 위기를 겪게 만들며 비슷한 상황에서  시대상을 반영해 어떻게 이겨내고 감내하는그리고 그의 결과가 어떠한지 나타낸다그래서 나도 이런 생각을 한다엄마와 할머니의 젊은 날이어린 날이 궁금했는데 그들도 이러했을까 사람들처럼 이런 상처와 기억이 있으려나이렇게 힘들었을까하는 마음이 든다

방구석 미술관 2 (가볍게 시작해 볼수록 빠져드는 한국 현대미술,한국)

비록 내가 이번 저자와의 만남이라는 행사에 참여한 가장 큰 이유는 한성대 비교과포인트를 수령하기 위해서지만, 미술 작품을 어떻게 감상해야 올바른지 궁금했다는 이유도 조금 포함하고 있었다. 
그렇게 약간의 기대를 품고 배운 내용은 미술에 대한 나의 인식에 확실한 변화를 주는 계기가 되었다. 즉,내 본래의 예상보다 더욱 가치있는 시간이었다는 말이다.
원래 난 현대의 미술이 난해하고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별로 특별해 보이지도 않은 잡다한 것들을 어째서 예술이란 말로 포장하는지 이해가 안됬었다. 
그러나, 어쩌면 그동안 내가 닫힌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가치가 없다고 함부로 단정지었던 게 아닐까? 이번에 참여한 행사를 통해 나는 그런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고, 편협했던 과거의 자신의 관점에 대해 깊이 반성하게 되었다.
또한, 그동안 나는 예술을 감상하는 행위는 전문적인 지식과 까다로운 판단 기준이 수반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미술 작품 감상을 어려운 행위라고 간주해왔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번 행사를 통해 꼭 그런 전문적인 지식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작품 감상은 막연하게 어려운 행위가 아닌 즐겁게 노는 시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이는 그동안 미술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던 내게 신선한 충격으로 작용했고, 결과적으로는 나의 예술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이번 강연에서 배운 내용을 토대로 앞으로는 미술작품을 감상할 때 작품을 열린 마음으로 음미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방구석 미술관 2 (가볍게 시작해 볼수록 빠져드는 한국 현대미술,한국)

비록 내가 이번 저자와의 만남이라는 행사에 참여한 가장 큰 이유는 한성대 비교과포인트를 수령하기 위해서지만, 미술 작품을 어떻게 감상해야 올바른지 궁금했다는 이유도 조금 포함하고 있었다. 
그렇게 약간의 기대를 품고 배운 내용은 미술에 대한 나의 인식에 확실한 변화를 주는 계기가 되었다. 즉,내 본래의 예상보다 더욱 가치있는 시간이었다는 말이다.
원래 난 현대의 미술이 난해하고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별로 특별해 보이지도 않은 잡다한 것들을 어째서 예술이란 말로 포장하는지 이해가 안됬었다. 
그러나, 어쩌면 그동안 내가 닫힌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가치가 없다고 함부로 단정지었던 게 아닐까? 이번에 참여한 행사를 통해 나는 그런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고, 편협했던 과거의 자신의 관점에 대해 깊이 반성하게 되었다.
또한, 그동안 나는 예술을 감상하는 행위는 전문적인 지식과 까다로운 판단 기준이 수반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미술 작품 감상을 어려운 행위라고 간주해왔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번 행사를 통해 꼭 그런 전문적인 지식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작품 감상은 막연하게 어려운 행위가 아닌 즐겁게 노는 시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이는 그동안 미술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던 내게 신선한 충격으로 작용했고, 결과적으로는 나의 예술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이번 강연에서 배운 내용을 토대로 앞으로는 미술작품을 감상할 때 작품을 열린 마음으로 음미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괜찮지 않은데 괜찮은 척했다

 사람들은 모두 노력하고 있다.  힘들어도 힘들지 않은 척, 슬퍼도 슬프지 않은 척. 괜찮지 않은데 괜찮은 척 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더 괜찮아지지 않기 때문에, 하기 싫어도 해야 되는 것은 아닐까 싶다.
사람들은 모두 사랑을 받고 싶어 한다. 사랑을 받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사랑을 갈구한다. 그러나 한 번쯤은 내가 사랑 받을 행동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마음가짐을 가지기 위해서는 굳이 잘나고, 잘살 필요는 없다. 나이가 들어갈 수록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은 힘들어진다. 단순히 ‘해야 하는 일’ 을 반복해야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을 찾는데 시간과 돈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설령 시간과 돈이 소비되더라도 그것은 낭비와 실패가 아닌 경험이다. 낭비와 실패가 경험이 되어주는 때는 오직 시간이 허락하는, 우리가 젊을 때 뿐이 아닐까.
 

밝은 밤 (최은영 첫 장편소설)

이 책을 읽기로  독서클럽에서 선정하기 전에 ‘쇼코의 미소’라는 책으로 유명한 최은영 작가의 신작이 나왔다는 말을 듣고 예쁜 표지에 반해 사두었던 책이다. 최근 젠더 문제가 심각해서 과연 독서클럽 때 읽을 책으로 선정해도 괜찮을지 걱정이 되었지만 모든 활동이 끝난 지금 돌이켜보면 절대 후회없는 책이다. 일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증조할머니의 이야기부터 서술이 되는데 그 당시에 여성이라는 이유로 당했던 참혹한 일들부터 시작해 현재까지 이어지는 여성들의 아픔을 굉장히 공감하며 몰입하여 보았다. 증조할머니가 살았던 시대, 일제 시대라고 하면 지금으로부터 굉장히 먼 것 처럼 느껴지는데 증조할머니, 할머니, 엄마, 주인공 이렇게 내려오면서 먼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때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다. 또한 마냥 어른인 것만 같은 그들에게도 어리고 젊은 시절이 있었다는 것도 실감하고, 그들의 어린시절은 전쟁과 차별로 인해 고생으로 가득찬 삶이었다는 것이 너무나도 슬펐다. 작가가 만들어낸 이야기지만 시대를 조금만 타고 올라가면 내 가족, 우리 조상님들이 실제로 겪었을 이야기임에 틀림없었기에 더욱 마음이 아팠다. 이 책을 통해 내가 가지고 있던 가족에 대한 태도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 책을 읽고 토론을 하는 동안 수많은 생각들에 잠겼으며 많은 것을 깨닫고 배웠다. 

한국문화와 오리엔탈리즘

원래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개념은 서양의 예술가가 동양을 묘사하거나 모방하는 것이었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저서를 내놓고 그 개념이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이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고 억압하기 위한 방식이라고 한다. “서양은 우월하고 동양은 게으르고 열등하니 식민 지배를 해야 한다” 는 식의 사고를 정당화하는 것이 오리엔탈리즘인 것이다. 옥시덴탈리즘이란 것도 있다. 이는 동양을 고귀한 것으로, 서양을 잔인하고 비인간적으로 보는 것이다. 이 또한 편협한 사고 방식이다. 사실 동서양 모두 사람이 사는 곳이라, 사람이 살면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있기 마련이다. 불교의 국가라고 해서 전쟁을 안 하거나, 노예를 부리지 않는 경우가 드물듯이, 기독교 국가라고 해서 기독교 가치관대로 원수를 사랑하면서, 가난한 자를 도우면서 사는 나라가 드물듯이 말이다. 
  이 책은 학술심포지엄(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통문화연구소)에서 한 여러 학자들의 토론, 강의 모음이다.
동양에도 수많은 독자적 문화가 있는데, 오리엔탈리즘은 이를 동양이라고 하나로 묶어 말한다. 유교문화권, 불교문화권이라는 개념에 묶인 국가들이 있지만 모두 다 다르고 독자적이라는 것이다. 
한국문화라는 개념은 1930년대 일본인들에 의해 처음으로 제기되었다고 한다.(35쪽)일본인들도 일제 강점기에 전통문화가 사라지는 것을 슬퍼했지만, 그것을 사라지게 한 식민지 권력이나 정책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었다. 마을의 대동제나 봉산탈춤 같은 향토오락도 일본인들이 발견하여 부흥시켜 일제 지배전략에 이용되도록 했다. 이것은 1970-1980년대에 진보적 운동의 민중놀이로 탈바꿈했다,
문화란 순수하고 고정적이며 불변적인 것이 아니라 잡종적, 유동적이고 가변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라고 한다. 
아프리카 미술사를 이해하기 위해 서양 미술사 관점을 통해 보듯이, 우리는 한국의 정체성을 인식할때도 서양을 거쳐서 인식한다. 
우리나라 학문 세계에는 몇가지 구조적 문제점이 있다. 첫째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학문적인 입장의 계승, 연결 관계’가 아니라 특정 학교에서 한 때 가르치고 배운 관계에 머물고 있다. 또한 석사 이상은 대부분 유학을 가서(인문, 사회 분야), 우리나라에 ‘학파’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는 구조라는 점이다. 즉 각 대학에 퍼져 서로의 학문적 입장이나 관점을 공유하고 계승하는 학파보다는 같은 학교 출신인 ‘학연 집단’에만 머물고 있다. 서양에서도 이런 학파가 있고, 동양에서도 근대 이전에 이런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예로, 유가, 성리학은 스승과 그 제자들이 계승한 학파다. 노론, 소론 등의 ‘당파’도 학파, 혹은 학문적 공동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현대 한국에는 이런 학파가 없기 때문에 학자들의 학문적 성과가 자신의 당대에 끝난다. 이런 형태는 가우스 함수와 닮아있다. (y=x-[x])

침묵의 세계

저자인 막스 피카르트는 1888년 스위스 국경 지대에서 태어났다.대학병원 보조의사로 일하다가 스스로 기계화된 의학산업에 맞지 않는다고 여겨 의사를 그만두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책의 맨 앞머리에서 가브리엘 마르셀은 피카르트의 발언이 ‘종말론적 의식으로부터-최후의 그것, 즉 죽음, 심판, 지옥, 천국을 깨닫는 데에서-나온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자세에는 허무주의적 염세주의의 기미가 없고, 이 책의 분위기는 놀라울 정도로 평화롭다. 
  “침묵의 세계”에서 말하는 침묵은 “일체의 지성을 초월하는 평화”이다.
침묵이란 무엇일까? 저자는 32장 정도로 구성된 에세이로 침묵이 무엇인지 말하고자 한다. 그에 따르면, 침묵은 ‘단순히 말하지 않는 것 이상’이다. 즉 침묵은 하나의 독자적인 현상이다. 말의 중단으로부터 발생한 현상이 침묵이 아니라, 독립된 전체, 그 자체로 존립하는 것이다. 
  독자가 말을 경시하도록 하게는 않을 것이라고 한다. 인간을 진정한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침묵이 아니라 말이지만, 말은 침묵과의 관련을 잃으면 위축된다. 즉, 말을 위해서 “침묵의 세계”를 드러내야 한다. 사람들은 침묵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침묵은 존재하고, 하나의 실체이다.
  침묵은 존재하지만,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창조되지 않았지만 영속하는 존재다. 침묵은 존재할 뿐 다른 목적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효용성이 없다. 이는 오늘날 효용의 세계에는 맞지 않는다고 한다. 
  언어는 세계의 부속물이 아니라 또 하나의 세계이다. 즉 언어는 단순히 의사소통 이상의 것이 있다. 
  말은 침묵이라는 배경이 없다면, 말은 아무런 깊이도 가지지 못한다. 하지만 이것이 침묵이 말보다 우월하다는 것은 아니다. 고대 그리스 인이 인간의 본질을 ‘살아 있는 로고스’라고 한 것처럼 인간은 말을 통해 인간이 된다. 따라서 침묵은 말을 통해 비로소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말은 침묵에게서 활기를 얻고, 자신때문에 생긴 황폐를 침묵으로 정화한다. 
  하지만 오늘날 침묵은 더 이상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가 아니다. 침묵은 그저 소음의 중지이고, 말은 소음에서 생겨 소음 속에서 사라진다. 오늘날에는 진정한 죽음이 없는데, 오늘날의 죽음은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라기 보다는 수동적인 어떤 것(생명의 중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이 침묵과 결합하지 못하면 자신의 본질을 잃고, 공허해지고 종말로 치닫게 된다.
  막스 피카르트는 현대의 소음의 세계에서 본질을 잃은 언어를 탐구한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이 나오는데, 바로 ‘잡음어’라는 것이다. 오늘날 말은 침묵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말의 잡음으로 생기고, 다른 잡음어 속에서 끝난다. 즉, 오늘날 말은 정신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음향적 잡음으로 존재한다. 잡음은 소리 나는 공허(말의 물질화)인 반면, 참된 말은 소리 나는 충만함이다. 저자는 소음과 잡음어의 차이를 말한다. 소음은 침묵과 대치해 있는 적이다. 하지만 잡음어는 침묵과 대치해있지도 않고, 침묵이 존재했다는 사실도 잊게 만든다. 
  침묵은 수직이다. 문장의 수평적 흐름을 가로막는다. 잡음어는 가로막힘 없이 수평으로 나아간다. 마치 무엇을 의미한다기 보다 계속 증대시켜가는 것이 중요한 일인 것처럼 보인다. 잡음어는 사이비 말이며 사이비 침묵이다. 이 잡음어는 끊임없이 소멸에 대한 불안이 있다. 그래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이 잡음어의 부속물인 인간은 현재 자신이 존재함을 믿지 못하게 된다. 
  말은 많은 악마적인 것을 인간에게서 보호한다. 하지만 잡음어는 구멍이 뚫려서 악마적인 것이 드나든다.  “잡음어에 의해서 온갖 것들이 사방팔방으로 파급된다. 반유대주의, 계급투쟁, 국가사회주의, 볼셰비즘, 문학주의(문학이 유일한 가치라고 믿으면서 문학에 집착하는 주의) 등 온갖 것들이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간다. 인간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잡음어가 와서 인간을 기다린다. 잡음어는 무엇보다도 불확실함을 퍼뜨린다.”-p.207
  인간은 다만 잡음어가 펼쳐지는 장소, 잡음어를 위한 공간일 뿐이다. 독재자의 외침과 독재자의 슬로건이 잡음어가 기다리는 것이다. 이 독재자의 슬로건에서는 내용보다 소리 높음과 명확함이 중요할 뿐이다. 노동자는 말이 없고, 진공 상태에 있지만, 농부는 침묵한다. 
  라디오는 순전히 잡음어를 생산하는 기계장치이고, 침묵도 말도 없다. 만약 오늘날 매순간 전쟁에 대한 보고가 라디오(21세기로 보자면, TV, 스마트폰, 인터넷 등)에서 소란스럽게 나오지 않는다면, 침묵 속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절규가 들리고 그 전쟁의 소리가 너무 커 인간은 전쟁을 견딜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전쟁을 보고하는 잡음이 이 절규와 굉음을 보편적인 잡음으로 만든다. 따라서 인간은 라디오의 다른 잡음들처럼 전쟁 또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역자의 말에서 현대는 소음 대량생산의 시대라고 한다. 소음은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확인받으려 하며, 자유로운 사고를 억압하고 획일화된 사고를 강요한다. 즉, 저자가 하는 말은 ‘침묵이 말보다 위대하다’는 주장이 아니라, 도리어 침묵으로부터 진정한 말이 나온다는 것이다. 현대는 잡음어의 시대, 소음의 시대이고, 따라서 침묵도 없고 말도 없다.  
  전세계에 자신의 소리를 퍼뜨리려는 현대 미디어를 한번 생각해보자. 현재에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떠들썩하다. 하지만 그곳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절규는 막스 피카르트가 말한 대로 다른 잡음어처럼 평준화되지 않았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방인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다” 라는 말이 있다. 죽음은 과연 두렵기만 한 것인가?어쩌다 보니 최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수업에서 스티브 잡스가 이야기하는 죽음을 듣고,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라는 책을 접했고, <이방인>을 읽었다. 자연스럽게 죽음에 대해 끌렸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방인은 죽음이 중심을 이루는 소설이지만, 우울한 책일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이 죽음을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여기듯,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에게도 죽음은 초월의 도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선 책을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스토리가 간결하고 뻔하긴 하지만, 묘사가 정말 훌륭한 나머지 지루할 틈이 없었다. 그럼 이 책을 읽고 느낀 것들을 몇 가지 이야기하고, 내가 느낀 ‘죽음의 의미’에 대해 설명해보겠다.

구조의 미학
  사실 처음 읽는 것이다 보니, 카뮈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단번에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다. 아직도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해하려 하기 보다는 재미와 감상을 중시하며 책을 읽는 성향인 덕분에 술술 읽을 수 있었다. 아마 무언가를 얻고자 소설을 읽는 사람이라면 꽤 고생했을 수 있다. 책을 다 읽은 후에 숨겨진 의미들을 이해하기 위해 역자 해설을 읽었다. 해설을 읽으며 작품 안의 장치들을 하나하나 곱씹으니, 카뮈는 정말 천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이 부드럽게 읽히고, 안정감이 느껴졌던 이유가 다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들 중 하나가 바로 ‘구조’다. 이방인은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다. 작품에는 총 3개의 죽음이 있는데, 어머니의 죽음, 아랍인의 죽음, 뫼르소(주인공)의 죽음이다. 어머니의 죽음이 1부의 시작에, 아랍인의 죽음이 1부 마지막과 2부 시작에, 2부 마지막에는 뫼르소의 죽음이 배치되어 소설이 끝나게 된다. 나는 안정감이 느껴지기는 해도, 이러한 의도된 배치가 안정감을 준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숨은 형식, 작가의 의도가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준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인지하게 된 것이다. 앞으로도 이런 요소들을 인식하며 책을 읽으면 더 많이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훌륭한 묘사
  카뮈의 묘사는 정말 대단하다. 책을 펼치고 첫 문장을 읽자마자 빨려 들어갔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이방인의 첫 문장이다. <인간실격>의 첫 문장 만큼의 강렬한 인상을 준다. 스토리나 서스펜스보다는 묘사를 중시하는 나로서는 엄청난 설렘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심리, 배경, 인물들에 대한 풍부한 묘사를 이 책의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소름이 돋을 정도로 기억에 남았던 장면은, 태양을 느끼며 아랍인에게 총을 쏘는 장면, 사형을 앞둔 뫼르소가 신부에게 처음으로 화를 내는 장면이다. 총을 쏘는 장면에서는 뫼르소의 충동적인 감정들의 묘사가, 신부에게 화를 내는 장면에서는 죽음 앞에서의 분노와 성찰이 뇌리에 깊이 박혔다. 카뮈는 정말 천재라고 거듭 느꼈다.
죽음에 대하여
  그래서 카뮈가 <이방인>이라는 작품을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일까. 그것은 ‘죽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 삶이 의미가 있다.’라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사형수이다. 필연적으로 죽기 때문에, 여생이 의미를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1부에서 뫼르소는 삶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며, 현재에 충실한, 충동적인 삶을 살았다. 그러나 2부에서 결국 살인죄로(그의 태도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형을 선고 받게 되었다. 뫼르소는 사형을 기다리며 삶을 성찰하다가, 삶의 의미를 깨닫는다. 다시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감정을 느꼈다는 대목에서 알 수 있다. 죽음을 생각하며 성찰한 끝에 인생의 의미를 깨우치게 된 것이다.
  서론에서 언급한 ‘죽음은 최고의 발명품이다’ 라는 말과 카뮈의 <이방인>처럼, 죽음의 의미에 집중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죽음을 이용해 삶의 부조리를 극복하고 나아간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죽기 때문에, 하루하루의 남은 시간들이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죽음 앞에서는 사소하고 불필요한 문제들이 모습을 감춘다. 곧 죽는데 사소한 문제들이 신경 쓰이겠는가? 죽음을 직면한 사람이야말로 현실에 충실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에 대해 더욱 더 깊이 고찰해봐야겠다.

  사실 <이방인>에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나도 역자 해설을 읽고 이 작품을 나름대로 생각해 본 것이다. 그러니 당신이 읽은 <이방인>과 비슷할 수도, 완전 다를 수도 있다. 찾아 보니 주로 실존철학적 의미와 죽음의 의미, 이 두 가지를 중심으로 해석하는 것 같다. 그래서 해석들을 공부한 후에, 시간이 조금 지나서 다시 한 번 더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사실 죽음에 대해 여러 번 생각해보긴 했지만, 현실에 충실해질 만큼 직면하기는 쉽지 않았다. 마치 내가 영원히 존재할 것만 같고, 죽는다는 것이 잘 와닿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선학들이, 다른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탐구해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에 대한 탐구가 어쩌면, 삶의 문제들에 대해 답을 해줄지도 모른다.

작은 별이지만 빛나고 있어 (소윤 에세이)

 별, 별은 항상 시도때도없이 핵융합반응을 일으키며 빛을 뿜어낸다. 다만, 너무나도 멀리있어 한없이 작게만 보인다. 
 삶에는 특별한게 없어도 빛나는 법이다. 우리 모두 한 번쯤은 찬란한 순간을 보냈었다. 그것이 영원할 수는 없겠지만 다시 한 번 정도는 빛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아름답게 빛을 내지못하는 순간, 실패하고 좌절하고 부딪히는 그 순간, 이는 더 빛나기 위한 하나의 발악이다. 반짝거리는 그 사이들이 모여 우리를 이룬다. 어두운 순간이 있기 때문에 밝은 순간이 더 값진 것.
 
 하늘을 가득 메운 별들 중 유독 빛나는 별이 눈에 들어오는 까닭은 작은 별들이 있기 때문이다. 작은 별은 그렇다고 기죽지 않는다. 이들은 서로 다른 곳에서 각자의 위치에서 그저 해야할 일을 하고 있다. 
 실제로 작은 별은 소모에너지가 작아 거대한 별보다 오래 생존한다. 별들은 억겁의 시간을 살다가 결국엔 장대한 빛을 내뿜으며 장렬하게 소멸하고, 다른 존재가 되어버리거나 흩어져버린다. 소멸의 순간에 후회가 없도록 빛을 내는 것.

 밤하늘에 수놓인 작은 별조차도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