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나의 빈센트 (정여울의 반 고흐 에세이)

 우리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들어봤을 법한 이름, 빈센트 반 고흐.
 그는 일생동안 살아가며 모욕당하고, 무시당해왔다. 그는 자신 주변의 화가뿐만 아니라 부모님에게도 천대받는 삶을 살아왔다. 끝끝내 그들의 사랑을 쟁취해내지 못했다. 
 그런 기억을 가진채, 슬픔을 머금고 그림을 그려냈다. 우울과 애로를 베이스로 화폭을 채워나갔을까?
 사실 아무도 모른다. 그가 그런 서글픈 고통으로 그림을 그려냈을지. 혹은,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사랑을 그림에 담았을지 말이다. 이러한 방법이 그릇된 열정이든, 극적인 열정이든 그 자신 나름대로의 발버둥이었을 것이다.
 어째서 반 고흐의 작품은 명작이 되었을까. 그것또한 모른다. 어느 누군가는 “이 정도 그림은 나도 그려.” 할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게 모작은 그리 어렵지 않다. 모작은.
 그림은 단순히 눈으로 각인된다. 하지만, 그림을 그린 이의 사념은 눈에 각인되지 않는다. 기쁜마음으로 그린 아름다운 그림, 애통한 마음으로 그린 아름다운 그림. 둘은 아름다우면서도 아름답지 않다. 
 화폭에는 그런 매력이 있다. 그리는 이의 생명력이 담겨있다. 단순히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로, 우리가 갈 수 없었던, 갈 수 없는 공간으로 감히 잠시나마 발을 들일 수 있게해주는 매개의 힘이 있다. 아지랑이 처럼 녹아내린 화가의 편린을, 당신이 투쟁한 그곳에 닿는.

쿠키 한 입의 사랑 수업

어린이들이 읽는 동화책으로 독후감을 쓰기가 좀 그렇지만 참 좋은 책이다.
내가 막연하게 알고 있는 것들을 실재로 알려주는 책이다. 쑥스러워서, 혹은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는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하는지 알려준다. 점점 이기적이 되어가는 이 세상에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며 살아야하는지를 알게하는 책이다. “아 그렇구나. 이렇게 말하면 되겠구나.” ” 이렇게 하면 상대방이 내 마음을 전달받겠구나”라고 생각하며 계속 책을 읽게된다.
 친구에게 좋은 일이 있을 때 다른 누구보다 기뻐해 주며 응원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군가 쿠키를 엉망으로 만들어도 그 사람을  아끼는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 조건 없는 사랑을 하고 싶다. “난 괜찮아”라고 말하는 너그러운 사람이 되고 싶다.  달콤한 쿠키 냄새만으로 행복을 느끼는 그런 삶을 살고싶다.

험한 시절을 살아보니 모든 순간이 은혜였다 (93세철학교수할아버지가 손주들에게들려주는삶의교훈이되는 자전적편지모음)

선물 받은 책이다.
93년을 살아 온 할아버지가 삶의 교훈을 들려주기 위해 손주들에게 쓴 편지이다. 이 편지의 수신자 중 한 명이 나와 아는 분이여서 이 책을 선물받게 되었다. “할아버지”가 주는 친근함이 편안하게 책을 읽을 수 있게 하였다.
저자인 할아버지는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내셨다. 일제시대에 태어나셨고, 한국전쟁도 겪으셨으며, 전쟁 때 참전하여 총상도 당하셨다. 가난한 집안이여서 선교사님들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업을 마쳤고,  여러 선교사님들과의 인연과 도움으로 신학 공부를 하고 교수가 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늘 끼니 걱정하며 지내야 했던 어린시절이였지만 그때마다 선교사님들의 도움이 있어서 정말 감사한 삶이였다고 하시며 손주들에게 “감사하자”고 하셨다.
할아버지는 큰 병으로 입원하고 치료 받은 일이 있었는데, 무사히 병이 나은 후에는  할아버지 스스로, 먼저, 변화하는 삶을 사셔야겠다고 결심하셨다. 세상을 변화시기고, 남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먼저 변화시켜야한다고 순주들에게 교훈을 주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손자 손녀들을 축복하시며 이 책을 마무리하신다.
나의 할아버지는 내게 어떤 말씀을 해주실까? 할아버지와  가끔 전화할 때면  날 걱정해주시는 마음이 느껴진다. 밥 잘 챙겨 먹으라고도 하시고, 든든한 할아버지가 있으니 걱정 없이 열심히 하라고도 말씀해주신다.이 책의 저자처럼 손자에게 무한 사랑을 주시는 할아버지가 계셔서 좋다.

유혹하는 글쓰기 (스티븐 킹의 창작론)

몇 주 전, 알라딘을 구경하다가 우연히 <유혹하는 글쓰기>라는 책을 발견했다. 요즘 글쓰기에 관심을 두고 있었던 터라, 이 책의 이름이 꽤나 익숙했다. 저자인 스티븐 킹도 낯설지 않은 이름이었다. 그래서 몇 페이지 읽어 본 후 고민 없이 구매할 수 있었다.
짧은 감상

우선 책에 대한 감상을 간단히 소개해보겠다. 이 책은 일반적인 작법서와는 사뭇 다르다. ‘글쓰기 책이라고 하면, 실용적이지만 재미없을 것 같은 느낌이 많이 든다. 하지만 저자인 스티븐 킹이 문학 작가이다 보니, 이 책도 마치 산문을 읽는 듯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가령, 자신의 생애, 작문 방법 등을 수필 형식으로 풀어낸다. 다른 작법서들보다 훨씬 재미있었고, 몰입하며 읽을 수 있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소설 창작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글쓰기에 적용할만한 것도 꽤 있긴 했지만, 소설에 아주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추천하지 않는다. 그러나 소설을 직접 창작하고 싶은 것이 아니더라도, 소설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다면 읽어 볼 만 하다. 한 소설가의 창작 과정을 엿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책의 내용

책의 구성을 한번 살펴보자. ‘이력서-연장통-창작론-인생론’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이력서와 인생론 부분은 저자의 자서전이라고 보면 된다. 한 유명 작가의 생애, 그리고 그의 인생은 어떤 것이었는 지를 알 수 있다. 나는 그의 인생이 참 부러웠다. 왜냐하면 저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글쓰기, 즉 ‘예술’을 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삶의 위기 상황에서,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못할 수 있는 상황에서 ‘예술을 하기 위한 의지’ 덕분에 살 수 있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원하는 삶 아닐까? 나는 그의 삶이 너무도 부럽다. 나도 저자처럼 나의 인생을 지탱해 줄 어떤 것을 찾고 싶다.

연장통과 창작론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글을 쓰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연장통에는 글쓰기 기술들이, 창작론에는 소설을 창작하는 과정이 담겨있다. 이 파트도 정말 마음에 들었다. 글쓰기 방법을 설명하는데도 소설을 읽는 듯 재미있어서 몰입하며 읽었고, 예시문이 풍부하고 훌륭했기 때문이다. 특히 작가의 창작 방법을 처음 알게 된 것이라서, 소설의 탄생 과정을 흥미롭게 탐색할 수 있었다. 작가가 알려준 글쓰기와 창작 방법들은 대부분 소설에 관한 것이긴 하다. 하지만 일반적 글쓰기와 더불어 전혀 다른 분야의 일에도 녹여낼 수 있는 방법들이다. 다른 분야와 엮어가며 읽다 보니 순조롭게 완독할 수 있었다.

후기의 인생론을 보면, 저자는 이 책을 집필하는 도중에 심각한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주 운 좋게, 죽지 않을 정도로만 다친 것이다. 남은 인생을 누워서 보내야 할 수 있는 상황에서, 과연 누가 긍정적으로 인생을 바라볼 수 있을까? 저자는 이 고난을 예술(창작)으로 회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창작에 대한 의지로 미래를 이어나갔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예술은 수많은 이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사람을 풍요롭게 해주고, 현실을 초월하게 해준다. 나도 좋아하는 예술을 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된다면 좋겠지만, 아직 삶을 바칠 만큼 좋아하는 것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이 책을 읽고 문학에 관심이 깊어졌다. 그래서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아무 생각 없이 대출해서 읽는 중이다. 하지만 아직 내 수준으로 읽을만한 책은 아닌 것 같다. 사르트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과 내가 이해하는 것이 일치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열심히 읽어서 이 책의 독후감도 쓸 수 있게 되면 좋겠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당신은 의미 있는 삶이란 어떤 삶이라고 생각하는가? 그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

3분 정도라도 좋으니 잘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 짧은 줄거리

주인공 이반 일리치는 19세기 러시아의 유능한 판사이다. 그는 허영심에 가득 찬, 행동에는 위선이 배어있는 인물이다. 겉으로는 선한척하고 고귀함을 떨면서, 속으로는 타인에게 고상한 인물이라고 비춰지는 자신의 모습을 즐긴다. 흔한 사교계 인물의 전형이다. 이러한 그가 불치병에 걸리게 되고, 죽음에 이르며 삶을 회고하는 과정을 깊이 있게 묘사해낸 책이다.

 

앞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서,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의미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계속 떠올랐다. 인생은 매우 짧다. 인간은 오래 살아봐야 100년 정도 산다. 하지만 인간 문명이 이어져 온지는 약 6천년 되었다. 또한 지구가 탄생한지 약 46억년이 지났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는 긴 시간의 찰나에 머물다가 소멸하는데, 대체 의미 있는 삶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작고 미미한 인간의 삶을, 대체 어떻게 살아야 의미가 있을 지 궁금했다.

이 책의 주인공 이반 일리치는 죽음의 곁에서 삶을 회고한다. 그는 젊은 시절 판사가 되었고,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사교계에서 활동하며 행복한 삶을 살았다. 이런 삶을 일반적으로 보면 의미 있고, 멋진 삶이다. 심지어 이반은 해야만 하는 것을 잘 해낸 삶이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그는 하등 의미 없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깨닫고, 정신적 고통과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나의 의미 있는 삶에 대한 질문은 바로 이 장면에서 명확한 실체를 드러냈다. 대체 의미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 죽기 전 삶을 회고할 때, “의미 있는 삶을 살았다.”라고 말하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사랑을 한 삶, 헌신한 삶, 쾌락을 추구한 삶많이 생각해 보았지만,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내가 얻은 교훈: 솔직한 삶

주인공은 허영심에 가득 찬, 위선에 가득 찬 삶을 살았다. 그러다보니 그의 아내도, 친구도, 지인도 전부 똑같은, 위선적인 인간들이었다. 죽음의 공포에 빠져있는 주인공에게, 위선적인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이 더 큰 고통을 가져다주었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가는 주인공의 피해의식도 이해가 간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얻은 교훈 한 가지가 있다. 물론 의미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완벽한 답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삶을 사는 데 분명히 도움 될 교훈이라고 확신한다. 나는 이 책이 솔직한 삶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주인공이 겪는 정신적 고통의 원인은 거짓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거짓된 삶, 그렇게 살아옴으로써 형성된 주변의 위선적인 환경들, 지인들의 가벼운 태도 등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물론 인생을 살아가는 데 솔직한 것은 독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소중한 누군가와 솔직한 대화를 나누는 것, 허영심을 버리고 진짜 를 마주하는 것, 불안정한 세계를 있는 그대로 직면하는 것, 그러한 것들이 우리의 삶에 고통을 덜어주는 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나를 다스리는 묵직한 침묵 (헨리 데이빗 소로우 명상일기)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1817년 7월 12일 메사추세츠 콩코드에서 태어났다. 그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초월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월든>으로 유명한 듯 하다. 어쨋든 왜 그의 책을 읽어야 할까. 그는 주객전도의 문명을 비판했기 때문이다. 19세기 미국이나 21세기 한국 모두, 인간이 물건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물건이 인간을 소유한다. 인간이 돈을 쓰는 것이 아니라 돈이 인간을 쓴다. 즉 인간은 소외되었다. 
  그는 책과 학교에서만 얻어지는 지식보다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지혜를 말한다. 그는 개성을 중시했다. 즉 학교나 인간이 만든 제도는 인간을 억압하고, 정형화시킨다. 모두가 똑같아지는 것이다. 하지만 소로우는 ‘각자의 북소리에 맞춰 살라’고 했을 만큼 개개인의 개성을 중시했다. <나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라는 소로의 평전을 보면, 소로는 멋대로 자유롭게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소로는 그런 삶을 강연과 저술을 통해 알리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그가 알려지게 된 것은 러시아의 대문호라 불리는 톨스토이 때문이라 한다.
  하지만 제도나 관습을 탈피한 삶이 원칙 없이 사는 삶이 아니라, 정신주의의 원칙에 충실한 삶, 철저한 정신적 탐구를 하는 삶이라고 한다. 그는 당시 19세기의 배금주의, 물질주의를 특히 경계했다. 오히려 인디언의 삶에서 영감을 받은 글이 많다. 그는 특히 물질이 인간을 소유하게 되는 것을 철저히 경계해 소박한 삶을 중시했다.
  그는 평생 최소한의 노동(일주일에 하루 정도)으로 돈을 벌고, 나머지 6일은 산책, 자연관찰, 독서, 집필을 했다고 한다. 소로가 추구한 삶은 “나는 강제되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 숨을 쉰다.”이다. 
  소로는 44년간 살았지만, 매우 방대한 저작을 남겼다. 그 중 대부분이 일기이다. AMS출판사의 총 20권으로 된 소로 전집에서 7권부터 20권까지가 <일기 The Journal of Henry David Thoreau>이다. 하지만 이 책의 경우 총 237페이지로 상당부분은 인용하고 짜집기를 통해 만들어 진 것 같다. 하지만 소로의 <일기 The Journal of Henry David Thoreau> 전집이 한국어로 번역된 것 같지는 않다. 적어도 학술정보관에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의 한국과 세계에는 문제가 많다고 한다. 문제 원인에 대해서는 사람들마다 의견이 다르지만 소외, 억압, 강제 등이 문제의 원인 중 하나라는 것에는 대부분 동의 할 것이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어떤 삶이 이상적인가? 하는 물음을 묻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소로의 삶과 생각을 통해 단순하게, 소박하게, 고독한 삶이 무엇이고 지금 현실에서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해 생각해볼 만하다. 
  다음은 이 책에서 인상깊었던 문장들이다.
“어떤 사람에게 무엇을 가르친다는 것은, 아니 진리를 가르친다는 것이 얼마나 무익한 일인가! 사람들은 자기 방식대로 진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필요하다. 사람은 두뇌로만 생각하지 말고 팔과 다리로도 생각해야 한다.”-p.14
“부유함으로 인해 더 좋은 옷을 입고 더 좋은 집에서 살면서 부유함을 가졌을지 몰라도 인생의 진지함을 얼마쯤 잃은 것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자기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남을 고통스럽게 했을 것이다.”-p.19
“인디언들은 침묵의 힘을 믿으며, 그것을 완전한 평정의 상징으로 여긴다. 침묵은 육체와 정신과 영혼의 절대적 평정이자 조화라는 것이다. 자아를 한 치의 흔들림 없이 평온하게 유지하는 것, 즉 나뭇가지에 떨림도 없이 매달려 있는 나뭇잎, 물웅덩이 위에 반짝임조차 그쳐버린 잔물결, 이런 것들이 바로 지식에 물들지 않고 자연에서 배울 수 있는 가장 큰 지혜이며, 힘이다.”-p.54
“인생의 해변가에서 우리와 바다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 이웃들은 순례의 길을 가는 동안 나에게 위안이 되어줄 동료들이다. 그러다 길이 갈리는 곳에서 또다시 홀로 길 위에 서 있어야 한다. 인생의 먼 여정을 끝까지 함께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p.94
“왜 고되지만 단호한 삶을 살지 않는가. 모험과 일로 가득하고 배울 것이 많은 삶을 왜 피하는지? 때때로 나는 들을 가로질러 오랫동안 가보지 않은 색다른 곳으로 달려간다. 그래 멀리 방랑을 하고, 삶을 껴안고 삶을 송두리째 알아 내 많이 배우고 살아가고 싶다.”-p.170
“아, 이 조용하고 어둡고, 이슬비 내리는 오후의 외출이 생각보다 좋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나의 산책은 쾌청한 날보다는 이런 날이 더 암시적이고 유익하다. 경치는 안개비로 축축하고 고요함이 성찰을 불러일으킨다. 모든 것들이 나를 안정시킨다. 구름과 안개, 나는 지금 이것들에 쌓여 산책을 하고 있다.”-p.195
“야생은 어떤 사람도 결코 지배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진짜 독립적인 인간들이란 결코 길들여지지 않으며, 사회에 의해서 결코 파괴되지도 않는 야생의 인간들이다. 모든 아름다운 것은 야성적이고 자유롭다.”-p.198
“인디언이 생각하는 용기란 절대에 가까운 자기 절제이다. 참으로 용기 있는 사람은 공포나 분노, 욕망이나 고뇌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자기 자신의 주인이다.”-p.207

지식의 역습 (오만한 지식 사용이 초래하는 재앙에 대한 경고)

이 책의 저자는 웬델 베리(Wendell Berry)이다. 미국의 시골 중의 시골이라 하는 켄터키에서 농사를 지으면서(자급자족한다고 한다) 글을 쓴다. 지금으로부터 몇 십년 전에 쓴 것으로 보이는 전기산업비판, 컴퓨터로 대표되는 3차 산업혁명에 대한 비판 글을 접하면서 웬델 베리를 처음 알게 되었다. 웬델 베리는 컴퓨터로 글을 쓰지 않고, 1956년산 타자기와 연필로 글을 쓴다고 한다. 컴퓨터로 글을 쓰지 않고, 타자기와 연필로 글을 쓰는 것은 단순히 취향문제가 아니라 대규모 전력 산업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즉 그는 조금의 편리함을 위해 자연을 착취하거나, 에너지 문제에 있어 대형 기업이나 산업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지금 인구 1000만이라는 서울(지금은 950만 9,458명)에 살고, 삼성 노트북으로 이 책에 대한 리뷰를 하는 나로서는 좀 거리가 먼 이야기인 것 같다. 특히 온라인 수업덕분에 인터넷이 필수가 되어버렸다.
  웬델 베리는 이런 산업체제에 의존하는 것에 문제가 있지는 않은가? 특히나 환경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지는데 도시중심적인, 전력과 석유에 의존하는 사회가 지속가능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들을 다룬다. 그래서 웬델 베리에 대해 알아보고 읽어보는 것은 나름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 <지식의 역습 The Way of Ignorance>은 총 4부(1부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하여, 2부 더 나은 경제가 필요하다, 3부 생태적이면서도 경제적인, 4부 희망을 주는 정치)로 구성된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인간의 무지를 궁극적으로 치유할 수는 없다.’,’어떤 문제들은 영영 해결되지 않으며 어떤 질문들은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인간은 아무리 애써도 죽음을 피할 수 없고 편견과 결함과 실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인간이 습득한 지식의 양은 언제나 무지의 양과 똑같을 것이다.’라는 내용이 이 책의 글들에 대한 전제가 될 것이라 한다. 기술적 특이점, 인공지능, 사이보그화 등등 기술혁신으로 인간이 무지에서 완전히 벗어나 신의 위치에 이를 수 있다는 일반적인 견해와 달리, 웬델 베리는 무지는 인간 존재의 본질적 속성이라 한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무지의 길은 “이웃 사이의 사랑과 친절, 염려와 관심, 적당한 규모, 검약, 올바른 노동과 생활”이라 한다. 즉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요컨대 무지의 길이란 우리가 가진 지식의 한계와 효능을 제대로 알고 신중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며, 겸허한 마음을 가지고 적절한 규모로 일하는 것이다.”
  1부 1장에서는 괜찮은 개인주의와 위험한 개인주의를 나눈다. 시민 불복종 운동의 선조라 불리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의 개인주의는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공공의 이익과 일치함으로 꽤 괜찮다고 한다. 위험한 개인주의란 신, 정부, 공동체, 이웃, 후손도 아랑곳않고 하고싶은데로 하는, 대표적으로 자신의 재산은 마음대로 써도 된다는 발상이 위험하다고 한다. 재산권을 절대적 권리로 인정하면, 소유주가 일시적 이익을 위해 영구적인 가치가 있는 것들을 남용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개인주의는 위험하다고 한다. 특히 대기업이 ‘법인’이라는 것으로 인간의 지위를 획득할 경우, 대기업은 이런 과격한 개인주의자가 되어 자기 자산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사람들의 권리는 이런 극소수 법인들의 손에 넘어가고 있다.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해 행동하라”라는 교리를 따르기보다는 돌봄, 믿음, 친절, 평화의 언어로 대화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다음 2장의 <무지의 길을 가라>에서는 인류가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나쁜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는 등의 생각은 오만한 무지라고 한다. 최근까지도 벌어지고 있는 코로나19와 우크라이나 전쟁의 상황을 말하는 듯 이런 문구가 있다.”오만한 무지에 의해 응용된 현대 과학(화학, 핵물리학, 분자생물학 등)은 여섯 살짜리 아이가 모는 자동차, 또는 원숭이의 손에 쥐어진 장착된 권총과 닮은꼴이다. 오만한 무지는 세계화 경제를 장려하면서도 그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세균과 질병의 국제적 확산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오만한 무지는 평화에 대해서는 고려하지도 않고 무조건 전쟁을 일으킨다.-p.20″ 이 책이 2007년에 나온 것을 생각해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게 없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 후 2장의 마지막에서 저자는 엘리엇이 말한 ‘무지의 길’을 따라간다고 한다. 엘리엇의 <이스트 코커> 중 일부를 인용한다. “지식은 형식을 만들고 왜곡한다./형식은 매 순간 새롭기 때문이다./그리고 매 순간은 우리의 존재 전체에 대한/새롭고 충격적인 평가이기 때문이다.” 모든 순간, 모든 창조물은 새롭고 독자적이다. 하지만 우리의 지식때문에 새로움이 왜곡된다고 말한다. 
  1부 3장과 4장에서는 삶과 노동의 목표, 풍성한 삶의 의미는 무엇인지 알아본다. 오래 사는 것만이 무조건 좋은 것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저자는 오래사는 것보다 ‘완전한 삶’을 이상으로 보는 듯하다. 삶과 노동의 목표는 무엇이고, 무엇이 되어야 할까? 이것은 아주 조심스럽게 대답해야 하고, 개개인이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저자는 “옛날부터 인류는 자기 소명을 인식하고 그것을 성실하게 따르며 행복한 마음으로 일하는 삶을 모범이나 이상으로 여겼던 것 같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결혼가고 가정을 이루며 가족을 부양하는 삶, 이웃과 넉넉하게 어우러지는 삶, 자기 지역의 자연에서 얻은 것들을 먹고 마시며 즐기는 삶, 자기 아이들과 이웃의 아이들이 자신의 역할을 대신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늙어가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쓸모 있는 존재로 남는 삶, 그리고 마침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좋은, 또는 신성한 죽음을 맞이하는 삶”이라고 한다. 
  2부 ‘더 나은 경제가 필요하다’에서는 오랜 역사를 가진 자급자족 경제가 산업화때문에 사라졌다고 한다. 또한 작은 하천과 장소를 무시하면서 대륙과 해양을 깨끗이 유지할 수는 없고, 이런 작은 파괴가 쌓이면 심각한 파괴 양상이 드러난다고 한다. 또한 더 나은 경제, 즉 지역사회를 살리는 경제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한다. 말을 이용한 삼림업 등, 지역사회에서 벌고 쓰면 더 좋은 경제 효과가 난다. 
  3부 ‘생태적이면서도 경제적인’에서는 트랙터가 몰아낸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시작한다. 우리는 자연을 이길 수 없고, 이렇게 자연을 파괴하는 방식으로는 건강, 경제를 파괴함으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협력하며 살아야 한다고 한다. 그러러면 도시 주변부, 농촌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가진 지식과 경험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로 지금의 정보화 사회에 관해 이야기를 한다. 중심에서 주변으로 흐르는 정보는 추상적이거나 보편적인 방향으로 기울어진다. 중심에서 개발한 것들이 지역에서는 그 지역의 특수성과 관련 없이 획일적으로 쓰인다. 지역 문제에 대해서 최적의 조치를 취하기 위해서는 지역 주민이 가진 지역 지식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런 지식은 특정한 장소에서만 얻을 수 있으며, 그 장소를 벗어나면 무지와 별반 다르지 않기’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저자는 인간의 소통 수단에 한계가 있음을 잊지 말자고 한다. 가령 농사일같은 경우는 언어, 정보는 적절한 수단이 되지 못한다. 즉 정보가 아닌 오직 경험과 협력을 통해서만 습득 가능한 지식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환경 보호에 있어서, 특히 토양 문제에 있어서 윤리보다 지식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왜냐하면 그가 느끼기에 대부분의 목장 주인들은 윤리 관념은 그대로이지만, 목초지가 훼손되지 않게 가축을 제대로 통제하자 풀이 다시 자랄 시간이 충분히 보장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4부의 제목은 ‘희망을 주는 정치’이다. 지금까지 보면 알듯이, 사회, 삶, 경제, 생태, 정치 이런식으로 구성이 된다. 그는 책 곳곳에서 자연이 주는 즐거움, 모든 존재는 얽혀 있고, 그런 것들이 소중하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마지막 장에서는 무슨 내용을 말할지 알아보자. 첫 장에서는 인권과 정부의 기밀 유지에 대한 ‘업무상 필요’와 대조로 시작한다. 인권을 ‘자연법과 신법’에서 비롯된 권리라고 명시한 데는 정부 권력보다 높은 곳, 정부 권력이 미치지 않는 곳에 인권을 두기 위해서이다. 국가의 목적은 애초부터 시민 개개인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 다음 장에서는 2차 세계대전 전에는 미국이 다수가 소유한 나라였지만, 소수가 소유한 나라, 몇몇 대기업이 소유하고 경영하는 나라가 되어가는데, 역대 모든 정부가 공공연히 이런 길을 걸어왔고 이런 변화에 반대하는 정부가 필요하다고 한다. 
  우리(미국인)는 미국을 파괴했다. 스스로 파괴했다고 말한다. “우리 경제는 발전이나 보존이 아니라 착취를 목표로 한다.” 즉 대기업은 지역 주민을 다른 곳보다 싼값에 착취할 수 있을 때까지만 머물고 그들이 떠나간 곳은 모두 텅 비었고, 죽음만이 있다. 이런 파괴가 자행되는 이유는 우리가 경제학의 두 가지 거짓말을 믿고 살아가기 때문이라 한다. (“1. 시장에서 가격이 매겨지지 않은 것은 가치가 없다. 2. 우리 지역의 경제를 대기업에 넘겨주어도 괜찮다.”) 이런 경제적 폭력, 파괴에 대한 책임은 미국 국민에게 있지만, 정부 또한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개인이나 공동체는 이런 경제적 침략에서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기 때문에 주 정부와 연방 정부가 보호해야 한다. 
이런 파괴는 문제가 있고 더 나은 방안을 제시한다. “첫째,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사는 장소를 존중하자. 둘째, ‘산업을 유치해서’ 경제문제를 해결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자. 셋째, 규모의 경제에 정직하게 대처하자. 마지막으로 우리의 토지를 구석구석 돌보는 일에 절대적인 우선순위를 부여하자.”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실제 경험에 기초한 글쓰기를 위해 언제나 ‘경험을 상상하려는 노력’을 했다고 한다. 기억이나 사실의 기록도 한계가 있지만, 상상력은 사실을 넘어 그림을 완성한다고 한다. 수많은 작가들과 책들에게 영향을 받았지만, 오랜 세월 웬델 베리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책과 작가는 성서, 호메로스, 단테 ,셰익스피어, 밀턴, 블레이크가 있다고 한다. 
  
이 책을 읽고난 뒤 느낀점: 한국어 제목은 지식의 역습, The Way of Ignorance를 직역하면 무지의 길이다. 제목만 보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잘 짐작이 안 갈 수 있다. 지식의 역습이라니? 무지의 길? 우리는 ‘아는 것이 힘’, 지식은 좋은 것, 무지는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인간이 살아감에 있어 지식, 지혜는 생존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필요하다. 하지만 저자는 인간의 한계, 자연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지식추구를 비판한다. 즉, 그런 지식추구는 불가능하고 오히려 해만 입힌다는 것이다. 지식을 통해 인간의 모든 고통을 없애고, 수명을 무한정 연장시키는 일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유해하다고 한다. 무지의 길을 가자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살자는 것이다. 
  유발 하라리의 유명한 책 <호모 데우스>에서는 인류의 다음 목표가 불멸, 행복, 신성이 될 것이라 한다. 즉 노화와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인공지능에 대항하기 위해 인간의 뇌에 컴퓨터를 심는다고까지 한다. 기술적 특이점이 오면, 모두가 행복해질 것이다. 아니면 정치, 경제적인 문제때문에 소수만 그 혜택을 누릴지라도 어쨌든 인류는 신이 되었기 때문에 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한다. 웬델 베리는 우리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은 존재하고, 한계는 없앨 수가 없다고 한다. 이런 기술의 무한 발전이 오히려 실패로 끝나고 파멸로 끝난다고 한다. 중심이 주변을 착취하는 관계가 아니라 주변이 자치하고 자족할 수 있게 되어야 인간다운 삶이 가능해진다. 
  무엇이 인간다운 삶인지는 독자 개개인이 판단해야 할 것이다. ‘자급자족하고, 지역에서 먹고 살기. 중심은 지역을 지키기 위해서 존재해야 하지 착취해서는 안된다 ‘등이 인간다운 삶에 도움이 되는가. 아니면 ‘해외에 생필품을 의존하면서, 세계화라는 명목으로 모든 경제가 얽혀, 도시에서 살면서 스스로 먹고 살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 인간다운 삶인가. 자본주의의 엄청난 생산력은 물질의 풍족함을 가져다 주었지만, 풍족함의 대가로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같다.

유원 (창비청소년문학 96)

 가장 멋진 여자에게 추천받은 책이어서 읽기 전부터 기대가 됐다. ‘유원’이라는 제목답게 주인공의 이름이 ‘유원’이다. 유원이 아기였을때, 집에 불이 나게 된다. 윗집에 사는 아저씨가 담뱃불을 떨어뜨렸고, 그것이 불씨가 되어 집이 활활 타게된다. 그 시간에 집에 있었던 건 유원과 유원의 언니 유예원. 그 당시 유원의 언니인 유예원은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유예원은 동생을 이불포대기로 감싸고 베란다 밑으로 던진다. 밑에 있던 아저씨가 유원을 받으면서 아저씨는 다리를 다치게 되고 한쪽 발을 절게 된다. 유원은 그 뒤로 언니의 목숨을 대신 살아야한다는 압박감과 아저씨의 무례한 돈요구에도 아무 말 할 수 없는 가족들을 봐야했다. 그런 유원의 삶에 나타난 친구 수현. 수현은 사실 아저씨의 딸이었다. 그런 수현을 모르고 절친한 친구가 되고, 그 사실을 알고난 후로도 둘은 절친하다. 유원이 수현을 통해 얻는 위로와 수현이 유원을 통해 얻는 위안. 이 책을 읽으면서 중간중간 멈칫하고, 분노하고, 마음이 아팠다.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은 아니지만, 어딘가에 있을 유원의 행복을 바란다. 세상 모든 유원의 행복을 바란다.

더블린 사람들 (세계문학전집 307)

제임스 조이스. 어렵기로 유명한 <피네간의 경야><율리시스>를 쓴 아일랜드의 대문호이다. 원래는 그의 이름만 알고 있었지만, 도서관을 둘러보다 우연히 <더블린 사람들>을 읽게 되었다. 조이스가 쓴 책들 중 그나마 대중들이 쉽게 즐길 수 있다는 책이다. 그가 쓴 책들 중 가장 대중친화적인 책임에도 불구하고, 완독하고 작품 해설을 볼 땐 정말 놀라웠다.

 

감상

우선 책의 구성이 흥미로웠다. 이 책은 15개의 단편 작품을 유년기청년기성년기공동생활이라는 큰 구조로 구성하고 있다. 유년기에서 성년기까지의 작품은 주인공 중심의 일화를 다룬다. 공동생활로 넘어가면서는 여러 등장인물들이 나오고, 다양한 인간들의 상호작용을 보여준다. 읽으면서, 점점 나이가 많은 주인공으로 바뀐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지만, 개인에서 집단으로의 변화는 확실하게 인지하지 못했다. 이러한 구성 덕분에, 책이 굉장히 체계적으로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통 단편집을 보면, 서로 다른 이야기지만 주제의식이 비슷한 작품을 묶어둔 경우를 많이 봤다. 작품들이 별로 연관되어 있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더블린 사람들>은 단편집이지만 마치 하나의 장편처럼 느껴진다. 이런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엄청난 공을 들여야 할 텐데, 조이스가 대문호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음에 든 것은 조이스의 솔직함이다. 그는 타락한 아일랜드의 모습을 현실 그대로 묘사하려고 했다.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나라의 문제점을 진지하게 지적함으로써 정신적 해방을 도모했던 것이다. 사람 또한 자신의 과거를 직면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과거에서 해방되고, 미래를 도모할 수 있게 된다. 그런 것처럼 아일랜드 사람들이 타락과 혼란에서 해방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것은 현재 우리나라의 문제점이기도 하다. 국뽕도 애국심에 도움 되기는 할 테지만, 문제점을 온전히 직면하는 것이 우리의 미래에 좋은 도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좋았던 것은 묘사이다. 사실 이 책의 묘사는 호불호가 갈릴 것 같다. 배경 묘사가 매우 자세해서 책 속의 세계에 한 번 빠져들면 마치 상황을 직관하는 느낌이 든다. 여러 인물이 나오는 부분은 배경을 파악하는 데 힘을 좀 써야 한다. 따라서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한순간에 흐름을 놓쳐버리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독자가 지루함을 느끼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을 것 같다.

묘사에 더 얹자면, 이 책의 묘미는 에피파니(epiphany)”이다. 에피파니란 행동이나 마음 자체에서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정신적 현현을 말한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인물이 특정 사건이나 자신의 본질 등을 깨닫는 현상이다. 책에 나오는 내용으로 예를 들자면, <애러비>의 마지막 부분에서 소년이 거의 문 닫은 바자에서 어둠이 깔린 곳을 허무하게 응시하는 장면이 있다. 또한 <작은 구름>의 챈들러가 현실을 직면하는 부분, <가슴 아픈 사건>의 더피가 뒤늦게 외로움에 빠진 것 등이 있다. 아마 수록된 단편 대부분에 어느 정도의 에피파니가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마치며

고전답게, 작품 해설을 읽는데도 정말 재밌었다. 책에 숨겨진 내용, 이해를 더 깊게 해주는 내용이 정말 많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왜 조이스가 20세기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대문호이고, 그의 작품이 고전으로 평가받는지 알 수 있었다. 물론 <율리시스>를 읽어봐야 그의 진가를 알 수 있겠지만.. 아무튼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매번 다른 인물들과 다른 배경들을 파악하느라 조금 힘들기도 했지만, 모든 작품이 연결되어 하나의 구성을 이루니 정말 새로웠다. 킬링타임 위주의 소설보다 문학적으로 의미 있는 작품을 읽고 싶은 사람이라면 꼭 <더블린 사람들>을 읽어보길 바란다!

정의란 무엇인가 (한국 200만 부 돌파, 37개국에서 출간된 세계적 베스트셀러,새로운 시대, 새로운 정의)

이 책에서 보여주는 정의라고 하는 것은 미덕, 자유, 이성, 관점 등 주로 4가지를 효율적으로 쓰는 것을 정의라고 할 수 있다. 법학과를 희망한다면 이 책을 한 번씩 읽어봤을 것이다. 정의를 접근하는 첫 번째 방식은 정의란 공리나 복지의 극대화, 즉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두 번째 방식은 정의란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세 번째 방식은 정의란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책 문구는 페이지 379쪽에서 나오는데 우리가 생활과 윤리, 도덕적인 관념에서 배우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한다고 주로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올바른 행동 실천도 중요하겠지만 정의는 올바른 가치 측정의 문제이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가치를 측정하였을 때 사람마다 측정하는 기준이 다르고 공정하게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려는 사회 구성원들의 많은 무수한 고민이 전반적인 사회 가치를 상승 시킬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우리가 쉽게 일상생활에서 지나칠 수 있는 일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고 즉 성찰 할 수 있는 시간을 지니게 해준다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사람마다 추구하는 가치는 다 다르고 그걸 측정하는 가치도 다르지만 어떻게 정의를 해석하고 흡수하냐에 따라 사회가 달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