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균, 쇠 (무기 병균 금속은 인류의 운명을 어떻게 바꿨는가,퓰리처상 수상작)

이 책은 제목과 연관을 지어 인류의 역사를 가장 크게 받은 혹은 받게 된 총, 균, 쇠에 대해 말하고 있다. 상업이 발달하고 무역이 활발해지며 이전까지 많은 역사가 존재 했고 그 안에 수많은 전쟁들이 존재하였다. 유럽이 큰 전성기를 맞이하여 아프리카 대륙을 차지하고 이후에 쇠퇴기가 찾아왔고. 그 이후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일본의 을사조약 체결을 맺어 일본의 식민지 아래에 힘겹게 살아왔는지, 2차 세계 대전 때 독일과 일본이 지게 되었는지 이유를 이 책에서 찾을 수 있었다.

앞으로 3차 세계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겠지만 총,균,쇠를 떼지 못하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 이 말 뜻은 전쟁으로 인해 총과 연관을 짓는 것이 아닌 평화를 위해서 총으로 그들을 협박하기도 하고 지금과 같이 코로나 19시대에 균으로 인해 백신과 치료제를 끊임없이 만들며 세계 안정과 평화를 누리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나는 쇠가 가장 무슨 의미인지 몰랐는데 여기서 말하는 쇠는 서로 각기 다른 나라에 빈부격차를 유발하기도 하지만 개발도상국의 개발을 위해서도 아마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4차 산업 시대에 AI가 모든 것을 다 대체하고 연관성이 깊다고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우리는 여전히 총, 균, 쇠와 연관되어 가며 살아갈 것이고 AI가 등장을 한다 해도 같이 공존하며 살아갈 것이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세계적으로 볼 때 UN의 많은 기부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난이 생기고 기아가 발생하는 이유는 선진국의 이기심으로 발생했다고 본다. 남는 곡식을 폐기해버리거나 아프리카 땅을 매입하여 유럽인들에게 값비싸게 채소나 각종 과일을 파는데 이런 자잘한 행동들이 가난을 낳고 있는 주요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조금 더 성숙하게 그들을 배려하고 자신이 이기심을 가져가지만 않는다면 세계의 절반, 그 몇 분의 1이라도 줄일 수 있다고 본다. 어쩌면 대부분의 숙제로 남겨져 있는 기아 문제, 식량 부족 문제, 가난 문제에 대해 이미 선진국들은 해결책을 알고 있을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북한에서도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다. 북한은 자신들의 자금들을 식량 해결로 쓰기보단 군사력 증권과 핵 개발에 힘을 쓰고 있고 식량 문제 발생 시 남한과 중국 다른 나라에게 원조를 바라는 무책임한 상태에 글렀다. 또한 아프리카도 쿠데타가 잦아들어 자신들의 권력을 앞세우기 위해 막대한 자금들을 식량 원조에 힘쓰는 것이 아닌 군사력 증권을 높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선진국의 무책임한 자잘한 낭비 행동도 문제지만 가난한 나라를 지도하는 지도자들의 행동도 우리가 앞으로 주의 깊게 볼 커다란 숙제라고 생각한다. 그저 우리가 먹는 음식과 낭비하는 행동들을 생각하는 것을 앞세워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온 자금들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알아야 할 것이다. 

단단한 공부 (내 삶의 기초를 다지는 인문학 공부법)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어떻게 공부해야 효율적일까?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한번쯤은 해 보았을 것이다. 내가 특히 궁금했던 부분은, 속독이 좋은 건지, 얼마나 빠르게 읽어야 하는지, 하나하나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은지 같은 세부적인 내용들이었다.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내기 위해 독서법 영상도 여럿 보았지만, 명쾌하게 해결되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가벼운 마음으로 중고서점을 둘러보다가 우연히 이 책을 보게 되었다. 나는 한순간의 고민도 없이 책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서점 구석 벽에 기대서 훑어보기 시작했다. 책을 읽는 법, 책 읽는데 좋지 않은 습관, 예습하는 방법 등등감탄스러울 정도로 상세하게, 내가 궁금했던 내용들이 제시되어 있었다. 책의 뒷면에는 영미권에서 60년간 읽힌 공부법의 고전이라고 설명되어 있었는데, 그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바로 구매한 후, 집에 와서 꾸준히 읽기 시작했다.

 

책의 장점

책의 내용은 대만족이었다. 이 책은 효율적인 공부법에 대한 나의 갈증을 해소시켜주었다. 또한 상황에 맞추어 적합한 방법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나를 이끌어 주었다. 목차만 보더라도 공부에 대해 다방면으로 다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4장인 읽는 것에서 더 얻는 법에서 독서법에 대한 궁금증을 말끔히 해결했다. 나머지 장들에서는 어휘, 외국어, 역사 공부법 등 다양한 것들을 배웠다. 물론 배운 것을 직접 실천해본 후 나에게 맞게 수정해야 하겠지만, 이 지식들을 처음 접한 것만으로도 공부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게 되었다.

내가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들었던 점은, 매 장의 도입에서 잠언을 제시해 동기를 자극해 준다는 점, 부드럽게 쓰여 있어 읽기 편하다는 점, 공부법을 자세하게 알려준다는 점이 있다. 잠언의 예시로, 7장의 도입에서는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침략자가 가장 먼저 불태우는 것은 도서관이다.”라는 토마스 모어의 말이 적혀있다. 이런 짧은 문장만 보더라도,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축복처럼 느껴지게 된다. 이렇게 독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공부하는 데 흥미가 생기도록 글을 쓴 부분에서, 독자의 학습을 돕고자 하는 저자의 마음이 절실히 느껴졌다.

 

책의 단점

물론 단점도 있다. 10~14장은 특정 학문에 관한 공부법이라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 공부법을 무작정 받아들이고 따라 하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10장에서 14장은 외국어, 수학, 과학, 시험 등 특정한 영역에서 공부하는 방법을 다룬다. 이 부분은 학생이라면 큰 도움이 되겠지만, 일반인들에게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나도 후반 부분은 빠르게 훑어보기만 했다. 그리고 아무리 공부법의 고전이라고 해도 사람마다 잘 맞는 방식이 있고 안 맞는 방식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무작정 좋다고 생각하며 따르기보다는, 하나씩 시도해 보고, 효과가 느껴지면 습관화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마치며

이 책을 읽고 독서를 하며 얻는 이점이 확실히 늘어났다. 생각 정리도 잘 되고, 시간당 읽는 페이지 수도 늘었다. 역시 모든 일에는 항상 더 효율적인 방법들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학습법에 대한 연구도 끊임없이 해나가야겠다고 느꼈다.

노인과 바다 (1952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초판본)

 책을 모르더라도 작품의 제목쯤은 다들 알 법한 책이다.
 
 인간은 모두 늙는다. 모두 늙고 결국엔 죽음으로 돌아간다. 이 책에는 노인이 나온다. 이름은 산티아고. 산티아고는 물고기를 잡기위해 바다로 나섰다. 정확히 84일째 물고기를 잡지 못하다 85일이 되는 날 커다란 청새치를 마주한다.
 청새치는 결코 잡히려고 하지 않는다. 있는 힘껏 발버둥치고 또 발버둥친다. 노인이 타고있는 배도 들썩거릴만큼 힘이 좋은 물고기였다. 이 때문에 노인도 넘어져 꽤 고생하고 말았다. 며칠에 걸쳐 결국 노인의 작살이 청새치의 심장을 관통하여 싸움의 끝이 난다. 노인이 항구로 돌아가려던 찰나 상어무리가 나타난다. 상어무리가 청새치를 뼈만 남기고 모조리 먹어치우는 와중에도 노인은 물러서지 않고 수면 위 배에서 자신과의 싸움을 계속해 나간다.
 결국, 노인은 다 헤져버린 청새치를 이끌고 돌아온다.
 노인은 실패했다. 청새치를 지켜내는 것에 대해서. 그러나, 좌절하지 않는다. 노인은 패배하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실패를 안고 살아간다. 모두의 실패는 한 때,  강렬한 노력으로 불타버린 숯덩어리일지도 모르겠다. 실패에 굴복하기싫어 강렬하게 버티지 않더라도 괜찮다. 단지 우리의 실수를 포용하고 머금어야한다. 때로는 보다듬어 주어야한다.
 그런 열정과 노력을 안고 살아간다. 그것을 내려놓으면, 청새치를 내려놓는다는 건 곧 스스로에게 패배를 안겨주는 셈이니까 말이다. 아무리 누가 물어뜯고, 뜯겨나가도 굳건하게 살아가야한다. 우리는 이미 좋든싫든 다들 바다에 오른 노인과 다름없다.

앵무새 죽이기

 미국인들이 사랑하는 소설이라고 불릴 정도로 굉장히 이름있는 책이다. 이 책 또한 한창 ‘~죽이기’ 시리즈에 빠져있을 때 펼쳐보게 된 것들 중 하나다. 이 책은 1930년대 미국에서 계층(신분)의 대립, 젠더 등 여러 사회적 문제들을 다룬 책이다. 시점은 좀 의외라고 생각되는 ‘어린아이’ 시점이다. 하지만,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결점없이 순수하게 악을 뽑아내는 느낌을 받을 수 있지 않았나 싶었다.

 책에서는 법적으로 심판하는 자리인 법원에서, 재판 과정의 내용이 나온다. 변호사와 검사. 신성한 자리인 만큼 최대한 논리적이고 신사적인 태도로 진행하는 변호사와 달리, 검사는 비논리적, 무례한 태도로 일관한다. 그런 두 사람 사이에서 오가는 남자와 여자 사이 갈등, 인종(피부색)의 갈등. 그것은 얼만큼의 시간이 지나더라도 고쳐지지 않는다는, 변하지 않는 검사의 태도로 묘사되어 있다. 
 재판은 끝이났다. 아이들은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런 죄도 없는 인간을 단지 ‘과정’을 통해서 죄인으로 만들었다. 인간에게 죄를 부여하고, 심판하고, 벌하는 건 더이상 신따위가 아닌 셈이다. 우리는 서로를 물어뜯는다. 마치 짐승처럼.

 신이 있다면 어째서 인간에게 차별과 불평등을 부여했는가.

아이들의 눈물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독자들로 하여금 되새김하게 만드는 요소일지도 모르겠다. 말로는 정의를 추구하지만 결국은 자신들의 입맛대로 주물러대기 위한 일종의 도구, 가진 자들에게 있어서는 한없이 물렁한 도구.

 우리는 현재 계급과, 신분, 성별, 외모에 대한 차별과 불평등이 없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물론, 예전처럼 노예가 있고 귀족이 있는 시대는 우리나라에서 지워졌다. 현재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라는 법의 문구아래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문구는 문구이고, 문구는 말일 뿐,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인간은 돈, ‘부’의 소유정도에 따라 암묵적으로 계층이 있다. 그리고 ‘부’를 취하기 위해서는 태어난 환경, 성별, 심지어는 얼굴가죽의 색과 배열, 체형, 체구조차 천차만별적으로 관여한다. 차별을 단 1번도 받지않은 사람이 있을까 싶다. 아닌 사람이 있다면 심심한 축하의 말을 건넨다.

 여러모로 뜻깊은 책, 작품이었다. 법이라는 말을 이겨내지는 못할지언정, 꿈틀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제법 자극하는 작품. 우리가 생각하는 법은 진정으로 우리를 지키기 위한 목적으로 존재하는 것인지, 우리가 앵무새를 죽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고도를 기다리며

이 책에는 고도라는 인물이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블라디미르와 스트라공은 최소 50년 이상을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리고 있다.
 이들은 오랜 기간 동안 고도를 기다려왔기에 대화할 주제도 서로 없어졌다. 
이 둘은 고도를 기다리며 지난 날 동안 똑같은 생활을 하였기에 그들은 정상적인 대화를 할 수 없었다.
이 둘의 기다림속에서 한 소년이 “고도 씨가 오늘 밤에 못 오고 내일은 꼭 오겠다고 전하랬어요” 라는 말을 해준다. 이 말은 사실 수십 년 간 고도를 기다려온 
블라디미르와 스트라공에게 희망을 품게 해주는 멘트이다. 
이 스토리를 보며 나는 현대사회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요새 현대인들은 어떤 자기의 목표나 목적을 위해 어떤 것을 기다리기보다는 소년의 말처럼 확실하지않은 불확실한
것을 위해 계속 기다리는(쫒는) 사회 인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며 자신도 잘 모르겠는 불확실한 것을  쫒는거 보다 불확실한 길을 자신의 노력으로 확실하게 변화시키며 살고싶다.

THE GIVER (기억전달자)

현재 우리는 앞날을 예상할 수 없는 불안정한 삶을 살고 있다. 만약 개인의 가족, 직업, 그리고 감정상태까지 모두 규칙적으로 통제된 삶을 살게 된다면 어떨까? 이 주제는 아마 우리 모두가 살면서 한번쯤은 떠올려 본 이야기일 것이다. 필자가 읽은 도서 <기억 전달자> 에서는 조너스라는 주인공이 모든 것이 통제된 마을안에서 살아간다. 시민들의 안전, 평등, 효율적인 분배를 목적으로 마을의 원로 위원회가 모든 것을 체계적으로 감시하고 결정한다. 이렇게 감정없이 오로지 누군가에 의해 정해진 삶을 살아가게 된다면 과연 지금보다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을까?

조너스가 사는 마을은 공통적으로 색, 감정, 감촉, 개인의 선택권이 없다. 개개인이 태어나서 죽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원로 위원회에서 체계적으로 관찰하고 관리한다. 심지어 가족구성원도 산모에게서 태어난 아이와 가장 적합다고 생각되는 엄마, 아빠와 배치하여 구성한다. 또한 장애인, 쌍둥이, 노인들과 같이 더이상 사회에서 쓸모없다고 판단되거나 부적합한 인원은 가차없이 임무해제된다. 여기서 뜻하는 임무해제는 약물을 투여하여 인위적으로 죽이는 행위이다. 조너스는 12살 기념식에서 보육사, 오락지도자, 산모, 교사 등의 다양한 직위를 받은 친구들과 달리 기억 보유자의 역할을 맡게 된다. 기억 보유자는 마을내에서 유일하게 기억을 가지고 있는 기억전달자에게 과거로부터의 기억을 전달받는다. 조너스는 기억 전달자로부터 부드러운 깃털같은 감촉이 있는 눈, 따뜻한 햇볕, 가족들간의 사랑, 전쟁당시의 상처의 기억등을 전달받는다. “늘 같은 상태에서만 지내왔던 조너스는 새로운 기억들을 전달받고 감정을 느낄때마다 놀라움에 젖어든다. 하지만 임무해제의 비참한 현실을 알고 난 후에는 통제된 마을을 원래의 마을로 변화시키기 위해 마을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한다.

조너스가 사는 마을은 효율적이고 안전한 사회를 명목으로 한치의 오류와 차이도 인정하지 않는다. 원로 위원회는 마을의 효과적인 생산성을 위해 쌍둥이, 노인, 장애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주기율표의 18족 원소처럼 항상 안정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다. 늘 같은 상태가 아닌, 반전과 또다른 새로움이 있을 때 잠재되어 있던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샘솟고 수많은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다. 개인의 자질에 맞게 정해진 삶을 편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선택으로 경험해보아야 비로소 나 자신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꾸준한 도전을 통한 경험은 우리에게 가치있는 지혜를 선사한다. 인생에 정해진 길은 없다. 주인공 조너스처럼 주어진 틀을 깨고 도전을 시도할 때 우리의 삶은 더욱 다채로워질 것이다.

언어의 온도 (170만부 기념 에디션, 말과 글에는 그리고 삶에는 나름의 따뜻함과 차가움이 있다)

 새학년 새학기가 밝았다. 새학년의 첫 글인 만큼 이제까지 리뷰해왔던 책들과는 다른 느낌의 책을 리뷰해볼까 한다. 지금은 잘 모르겠으나 한 때는 상당히 유명한 베스트 셀러였다.
 책은  단순히 전개가 있는 이야기만이 담기지 않는다. 이번 글은 단순히 내가 느끼고 생각한 것만 적을 생각이다.
 지금 필자가 쓰고 있는 ‘글’은 글씨이고 언어이다. 언어는 무언가를 전달할 때 쓰인다. 단순히 정보뿐만 아니라 감정을 전하기도 한다. 우리가 구두로 전할 때, 글씨를 적어서 전할 때는 같은 내용의 글이어도 억양이 있고 말투가 있다. 그리고, 말에는 앞뒤가 있다.
 예를 들어, ‘그냥’이란 말은 얕게보면 별거 아니다, 그런거다. 등의 뜻을 품는다. 책의 내용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다.’ 라고 나온다. 그리곤 ‘굳이 이유를 대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하다.’ 라는 뜻도 담고있다.
 ‘힘내.’, ‘기운내.’라는 말은 힘든 거사를 치른 뒤에 듣는다고해서 정말 힘이 나지 않는다. 정말 기운 나지 않는다. 정말로 메마른 말이기 짝이 없고 무미건조하다. 행동으로 표현하거나 진정 깊이 있고 길이가 긴 표현이 더 위로가 된다.
 이처럼 말은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 약이 되어줄 수도 있다. 냉혹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온화하게 들릴 수도 있다. 같은 말이어도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 우리는 모두 같은 사람이지만 각자가 다른 삶을 살아가듯이 그 온도가 다른 것이고 무게가 다른 것이다.

인간 실격 (세계문학전집 103)

[상상독서 베스트리뷰 선정 도서 | 대출하러가기]

서론

몇 달 전,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읽었다. 책을 구매하기 전에 서평을 먼저 읽어봤는데, <인간실격>의 퇴폐적인 감성과 우울감 때문에 읽기 거북했다는 평가들이 많았다. 그래서 읽을까 말까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인간실격이라는 책의 제목이 너무나도 강렬한 나머지, 바로 주문해버렸다. 지금 다시 생각해 봤는데, 책 제목을 정말 잘 지은 것 같다. 어떻게 고독, 우울, 배신, 인간, 죄라는 핵심 단어들에서 인간실격이라는 제목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본론: 책이 재미있었다고 느낀 이유

책을 읽기 전에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지루할 틈 없이 후루룩 읽어버렸다. 여러 독후감을 읽어 보니, 주인공의 성격과 비슷하거나, 공감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재미있게 읽은 것 같았다. 물론 지루했다고 하더라도 공감이 부족하다거나 그런 말이 아니다. 지금부터는 내가 이 책을 재밌게 읽은 이유를 적어보겠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나의 어린 시절, 소심하고 예민한 성격이 주인공과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릴 때 예민한데다가 청력이 조금 좋아서 듣고 싶지 않은 것까지 들어버릴 때가 많았다. 물론 지금은 타인의 시선을 거의 신경 쓰지 않는 편이다. 아무튼 이 책의 주인공 요조는 예민한 사람들 중에서도 특히 예민한 사람이었다. 그러한 주인공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성적인 성격에 공감하고, 그가 겪었던 일들을 마치 내가 겪었던 것처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었다.

두 번째로 재밌었던 이유는 문체이다. 나는 사실 경어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경어체를 사용하면 자신도 모르게 독자를 신경 쓰게 된다. 그렇게 되면 등장인물의 내면, 행동, 사건의 묘사가 부자연스러워지기 때문이다. 소설뿐만 아니라 모든 글에 해당된다. 경어체를 사용하면 솔직함이 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은 달랐다. 경어체를 사용하면서도 주인공의 불행, 깊은 내면 안에 쌓여 있던 불만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경어체를 사용하면서도 너무나 솔직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니 글을 읽는 내내 새로운 느낌이었다. “아무리 책이어도 사람들은 작가와 작품을 연결시켜 이해하기 마련인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서술할 수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 번째로 재미있었던 이유는 죄의식’(자아성찰)이다. 이 책에는 큰 배경이 두 개 있다. 그것은 공산주의패전 이후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주인공 요조는 하인들을 두고 있는 부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일반적으로, 자신이 부자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그것을 선택받은 것으로 여기고 만족해할 것이다. 하지만 요조는 부자인 것, 남들과 다른 특별한 삶을 사는 것에 대해 죄의식을 느꼈다. 특히 패전 이후 내려앉고 있는 나라에서, 비참한 삶을 사는 주변 사람과는 다른 자신의 특권에 죄책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공산주의 운동가들을 지원했던 것이기도 하다.

이 작품이 당시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지금까지도 사랑받고 있는 이유 말이다. 현대에 들어서고, 시간이 지날수록 개인주의가 심화되어 가고 있다. 그렇게 사람들은 멀어지고, 각자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는 사회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면, 불공정과 차별에 대해 죄책감을 덜 느끼게 되었다. 어쩌면 이 책은 나만 좋으면 된다라고 생각하며 뻔뻔하게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고발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론: 책의 교훈

나는 이 책의 핵심이 자아성찰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책 맨 뒤의 역자 해설을 보고 동의한 것이긴 하다. 주인공 요조의 내면을 보면, 해결 방법이 부정적이긴 하지만 자신의 문제를 잘 파악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요조는 자살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현실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아마 다자이 자신도 같은 방식으로 살았던 것 같다. 여기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만약 요조가 문제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이었다면?” 물론 이 질문이 성립했다면, <인간실격>같은 작품이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요조가 파악한 문제들에 대해 직면하고, 해결하기 위해 긍정적인 노력을 기울였다면 그는 누구보다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결국 이 책은, “섬세한 감각으로 자신을 이해하고,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해나가는 삶을 살라.”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한다면, 우리는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최승자 산문집)

 나 자신이 놀랄 정도의 엄청난 끈질김으로, 정말 거의 하루도 뺴놓지 않고 달려온 세월이었어. 그리고 이제 비로소 후유, 한숨 돌리고 좀 느긋한 속도로 나아가도 될 듯싶은 상태에 이른 거야. 그건 한마디로, 공포로부터 생겨난 죽음이라는 관념을 극복하는 여행이었어. 신화 상징적으로 말하자면 그건 자기 내부의 용과 싸우는 것인데, 내가 체험한 바로는 그 용을 만든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 그러므로 그 용은 환영이며, 따라서 그 용과는 싸울 필요가 없다는 것. 우리가 생각으로 키워낸 것이므로 생각으로 없앨 수 있다는 것이지. 돈키호테가 자기 적으로 알고 싸워 무찌르려 했던 풍차는 실제로 적이 아니었지. 적이라고 잘못 생각했던 것뿐이야. 그 용과 싸울 필요가 없다고 해서 대면할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니야. 똑바로 대면하고서, 그리고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 만들어놓은 환영이라는 것을 확인한 후, 그것을 지워버리는 거지. 대면하지 않는 이상은 그것이 내가 만든 환영임을 알 수 없고, 그런 가운데 그 용의 환상은 점점 더 커지면서 실제적인 힘을 행사하게 되니까.
 이전에 <어떤 나무들은>을 먼저 읽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아이오와 이후의 글, 개정된 후의 4부 글들이 유난히 마음이 끌렸다.
그는 아이오와에 다녀온 후 서양 점섬학에 빠져 들었고 공부하는 5년 간 정신분열증으로 치료받는다. 
죽음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을 본 후 점성학에 빠져드는 것은 모순되면서도 자연스러운 순서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치료 후 자신과의 공포에서 벗어난 후 그가 이야기하는 바이다. 내가 만들어낸 용과 대면하자. 
그리고 그것이 허상임을, 내가 만든 환영임을 깨달아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