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와 오리엔탈리즘

원래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개념은 서양의 예술가가 동양을 묘사하거나 모방하는 것이었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저서를 내놓고 그 개념이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이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고 억압하기 위한 방식이라고 한다. “서양은 우월하고 동양은 게으르고 열등하니 식민 지배를 해야 한다” 는 식의 사고를 정당화하는 것이 오리엔탈리즘인 것이다. 옥시덴탈리즘이란 것도 있다. 이는 동양을 고귀한 것으로, 서양을 잔인하고 비인간적으로 보는 것이다. 이 또한 편협한 사고 방식이다. 사실 동서양 모두 사람이 사는 곳이라, 사람이 살면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있기 마련이다. 불교의 국가라고 해서 전쟁을 안 하거나, 노예를 부리지 않는 경우가 드물듯이, 기독교 국가라고 해서 기독교 가치관대로 원수를 사랑하면서, 가난한 자를 도우면서 사는 나라가 드물듯이 말이다. 
  이 책은 학술심포지엄(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통문화연구소)에서 한 여러 학자들의 토론, 강의 모음이다.
동양에도 수많은 독자적 문화가 있는데, 오리엔탈리즘은 이를 동양이라고 하나로 묶어 말한다. 유교문화권, 불교문화권이라는 개념에 묶인 국가들이 있지만 모두 다 다르고 독자적이라는 것이다. 
한국문화라는 개념은 1930년대 일본인들에 의해 처음으로 제기되었다고 한다.(35쪽)일본인들도 일제 강점기에 전통문화가 사라지는 것을 슬퍼했지만, 그것을 사라지게 한 식민지 권력이나 정책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었다. 마을의 대동제나 봉산탈춤 같은 향토오락도 일본인들이 발견하여 부흥시켜 일제 지배전략에 이용되도록 했다. 이것은 1970-1980년대에 진보적 운동의 민중놀이로 탈바꿈했다,
문화란 순수하고 고정적이며 불변적인 것이 아니라 잡종적, 유동적이고 가변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라고 한다. 
아프리카 미술사를 이해하기 위해 서양 미술사 관점을 통해 보듯이, 우리는 한국의 정체성을 인식할때도 서양을 거쳐서 인식한다. 
우리나라 학문 세계에는 몇가지 구조적 문제점이 있다. 첫째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학문적인 입장의 계승, 연결 관계’가 아니라 특정 학교에서 한 때 가르치고 배운 관계에 머물고 있다. 또한 석사 이상은 대부분 유학을 가서(인문, 사회 분야), 우리나라에 ‘학파’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는 구조라는 점이다. 즉 각 대학에 퍼져 서로의 학문적 입장이나 관점을 공유하고 계승하는 학파보다는 같은 학교 출신인 ‘학연 집단’에만 머물고 있다. 서양에서도 이런 학파가 있고, 동양에서도 근대 이전에 이런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예로, 유가, 성리학은 스승과 그 제자들이 계승한 학파다. 노론, 소론 등의 ‘당파’도 학파, 혹은 학문적 공동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현대 한국에는 이런 학파가 없기 때문에 학자들의 학문적 성과가 자신의 당대에 끝난다. 이런 형태는 가우스 함수와 닮아있다. (y=x-[x])

침묵의 세계

저자인 막스 피카르트는 1888년 스위스 국경 지대에서 태어났다.대학병원 보조의사로 일하다가 스스로 기계화된 의학산업에 맞지 않는다고 여겨 의사를 그만두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책의 맨 앞머리에서 가브리엘 마르셀은 피카르트의 발언이 ‘종말론적 의식으로부터-최후의 그것, 즉 죽음, 심판, 지옥, 천국을 깨닫는 데에서-나온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자세에는 허무주의적 염세주의의 기미가 없고, 이 책의 분위기는 놀라울 정도로 평화롭다. 
  “침묵의 세계”에서 말하는 침묵은 “일체의 지성을 초월하는 평화”이다.
침묵이란 무엇일까? 저자는 32장 정도로 구성된 에세이로 침묵이 무엇인지 말하고자 한다. 그에 따르면, 침묵은 ‘단순히 말하지 않는 것 이상’이다. 즉 침묵은 하나의 독자적인 현상이다. 말의 중단으로부터 발생한 현상이 침묵이 아니라, 독립된 전체, 그 자체로 존립하는 것이다. 
  독자가 말을 경시하도록 하게는 않을 것이라고 한다. 인간을 진정한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침묵이 아니라 말이지만, 말은 침묵과의 관련을 잃으면 위축된다. 즉, 말을 위해서 “침묵의 세계”를 드러내야 한다. 사람들은 침묵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침묵은 존재하고, 하나의 실체이다.
  침묵은 존재하지만,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창조되지 않았지만 영속하는 존재다. 침묵은 존재할 뿐 다른 목적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효용성이 없다. 이는 오늘날 효용의 세계에는 맞지 않는다고 한다. 
  언어는 세계의 부속물이 아니라 또 하나의 세계이다. 즉 언어는 단순히 의사소통 이상의 것이 있다. 
  말은 침묵이라는 배경이 없다면, 말은 아무런 깊이도 가지지 못한다. 하지만 이것이 침묵이 말보다 우월하다는 것은 아니다. 고대 그리스 인이 인간의 본질을 ‘살아 있는 로고스’라고 한 것처럼 인간은 말을 통해 인간이 된다. 따라서 침묵은 말을 통해 비로소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말은 침묵에게서 활기를 얻고, 자신때문에 생긴 황폐를 침묵으로 정화한다. 
  하지만 오늘날 침묵은 더 이상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가 아니다. 침묵은 그저 소음의 중지이고, 말은 소음에서 생겨 소음 속에서 사라진다. 오늘날에는 진정한 죽음이 없는데, 오늘날의 죽음은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라기 보다는 수동적인 어떤 것(생명의 중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이 침묵과 결합하지 못하면 자신의 본질을 잃고, 공허해지고 종말로 치닫게 된다.
  막스 피카르트는 현대의 소음의 세계에서 본질을 잃은 언어를 탐구한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이 나오는데, 바로 ‘잡음어’라는 것이다. 오늘날 말은 침묵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말의 잡음으로 생기고, 다른 잡음어 속에서 끝난다. 즉, 오늘날 말은 정신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음향적 잡음으로 존재한다. 잡음은 소리 나는 공허(말의 물질화)인 반면, 참된 말은 소리 나는 충만함이다. 저자는 소음과 잡음어의 차이를 말한다. 소음은 침묵과 대치해 있는 적이다. 하지만 잡음어는 침묵과 대치해있지도 않고, 침묵이 존재했다는 사실도 잊게 만든다. 
  침묵은 수직이다. 문장의 수평적 흐름을 가로막는다. 잡음어는 가로막힘 없이 수평으로 나아간다. 마치 무엇을 의미한다기 보다 계속 증대시켜가는 것이 중요한 일인 것처럼 보인다. 잡음어는 사이비 말이며 사이비 침묵이다. 이 잡음어는 끊임없이 소멸에 대한 불안이 있다. 그래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이 잡음어의 부속물인 인간은 현재 자신이 존재함을 믿지 못하게 된다. 
  말은 많은 악마적인 것을 인간에게서 보호한다. 하지만 잡음어는 구멍이 뚫려서 악마적인 것이 드나든다.  “잡음어에 의해서 온갖 것들이 사방팔방으로 파급된다. 반유대주의, 계급투쟁, 국가사회주의, 볼셰비즘, 문학주의(문학이 유일한 가치라고 믿으면서 문학에 집착하는 주의) 등 온갖 것들이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간다. 인간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잡음어가 와서 인간을 기다린다. 잡음어는 무엇보다도 불확실함을 퍼뜨린다.”-p.207
  인간은 다만 잡음어가 펼쳐지는 장소, 잡음어를 위한 공간일 뿐이다. 독재자의 외침과 독재자의 슬로건이 잡음어가 기다리는 것이다. 이 독재자의 슬로건에서는 내용보다 소리 높음과 명확함이 중요할 뿐이다. 노동자는 말이 없고, 진공 상태에 있지만, 농부는 침묵한다. 
  라디오는 순전히 잡음어를 생산하는 기계장치이고, 침묵도 말도 없다. 만약 오늘날 매순간 전쟁에 대한 보고가 라디오(21세기로 보자면, TV, 스마트폰, 인터넷 등)에서 소란스럽게 나오지 않는다면, 침묵 속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절규가 들리고 그 전쟁의 소리가 너무 커 인간은 전쟁을 견딜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전쟁을 보고하는 잡음이 이 절규와 굉음을 보편적인 잡음으로 만든다. 따라서 인간은 라디오의 다른 잡음들처럼 전쟁 또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역자의 말에서 현대는 소음 대량생산의 시대라고 한다. 소음은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확인받으려 하며, 자유로운 사고를 억압하고 획일화된 사고를 강요한다. 즉, 저자가 하는 말은 ‘침묵이 말보다 위대하다’는 주장이 아니라, 도리어 침묵으로부터 진정한 말이 나온다는 것이다. 현대는 잡음어의 시대, 소음의 시대이고, 따라서 침묵도 없고 말도 없다.  
  전세계에 자신의 소리를 퍼뜨리려는 현대 미디어를 한번 생각해보자. 현재에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떠들썩하다. 하지만 그곳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절규는 막스 피카르트가 말한 대로 다른 잡음어처럼 평준화되지 않았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방인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다” 라는 말이 있다. 죽음은 과연 두렵기만 한 것인가?어쩌다 보니 최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수업에서 스티브 잡스가 이야기하는 죽음을 듣고,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라는 책을 접했고, <이방인>을 읽었다. 자연스럽게 죽음에 대해 끌렸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방인은 죽음이 중심을 이루는 소설이지만, 우울한 책일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이 죽음을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여기듯,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에게도 죽음은 초월의 도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선 책을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스토리가 간결하고 뻔하긴 하지만, 묘사가 정말 훌륭한 나머지 지루할 틈이 없었다. 그럼 이 책을 읽고 느낀 것들을 몇 가지 이야기하고, 내가 느낀 ‘죽음의 의미’에 대해 설명해보겠다.

구조의 미학
  사실 처음 읽는 것이다 보니, 카뮈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단번에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다. 아직도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해하려 하기 보다는 재미와 감상을 중시하며 책을 읽는 성향인 덕분에 술술 읽을 수 있었다. 아마 무언가를 얻고자 소설을 읽는 사람이라면 꽤 고생했을 수 있다. 책을 다 읽은 후에 숨겨진 의미들을 이해하기 위해 역자 해설을 읽었다. 해설을 읽으며 작품 안의 장치들을 하나하나 곱씹으니, 카뮈는 정말 천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이 부드럽게 읽히고, 안정감이 느껴졌던 이유가 다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들 중 하나가 바로 ‘구조’다. 이방인은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다. 작품에는 총 3개의 죽음이 있는데, 어머니의 죽음, 아랍인의 죽음, 뫼르소(주인공)의 죽음이다. 어머니의 죽음이 1부의 시작에, 아랍인의 죽음이 1부 마지막과 2부 시작에, 2부 마지막에는 뫼르소의 죽음이 배치되어 소설이 끝나게 된다. 나는 안정감이 느껴지기는 해도, 이러한 의도된 배치가 안정감을 준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숨은 형식, 작가의 의도가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준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인지하게 된 것이다. 앞으로도 이런 요소들을 인식하며 책을 읽으면 더 많이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훌륭한 묘사
  카뮈의 묘사는 정말 대단하다. 책을 펼치고 첫 문장을 읽자마자 빨려 들어갔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이방인의 첫 문장이다. <인간실격>의 첫 문장 만큼의 강렬한 인상을 준다. 스토리나 서스펜스보다는 묘사를 중시하는 나로서는 엄청난 설렘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심리, 배경, 인물들에 대한 풍부한 묘사를 이 책의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소름이 돋을 정도로 기억에 남았던 장면은, 태양을 느끼며 아랍인에게 총을 쏘는 장면, 사형을 앞둔 뫼르소가 신부에게 처음으로 화를 내는 장면이다. 총을 쏘는 장면에서는 뫼르소의 충동적인 감정들의 묘사가, 신부에게 화를 내는 장면에서는 죽음 앞에서의 분노와 성찰이 뇌리에 깊이 박혔다. 카뮈는 정말 천재라고 거듭 느꼈다.
죽음에 대하여
  그래서 카뮈가 <이방인>이라는 작품을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일까. 그것은 ‘죽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 삶이 의미가 있다.’라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사형수이다. 필연적으로 죽기 때문에, 여생이 의미를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1부에서 뫼르소는 삶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며, 현재에 충실한, 충동적인 삶을 살았다. 그러나 2부에서 결국 살인죄로(그의 태도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형을 선고 받게 되었다. 뫼르소는 사형을 기다리며 삶을 성찰하다가, 삶의 의미를 깨닫는다. 다시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감정을 느꼈다는 대목에서 알 수 있다. 죽음을 생각하며 성찰한 끝에 인생의 의미를 깨우치게 된 것이다.
  서론에서 언급한 ‘죽음은 최고의 발명품이다’ 라는 말과 카뮈의 <이방인>처럼, 죽음의 의미에 집중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죽음을 이용해 삶의 부조리를 극복하고 나아간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죽기 때문에, 하루하루의 남은 시간들이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죽음 앞에서는 사소하고 불필요한 문제들이 모습을 감춘다. 곧 죽는데 사소한 문제들이 신경 쓰이겠는가? 죽음을 직면한 사람이야말로 현실에 충실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에 대해 더욱 더 깊이 고찰해봐야겠다.

  사실 <이방인>에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나도 역자 해설을 읽고 이 작품을 나름대로 생각해 본 것이다. 그러니 당신이 읽은 <이방인>과 비슷할 수도, 완전 다를 수도 있다. 찾아 보니 주로 실존철학적 의미와 죽음의 의미, 이 두 가지를 중심으로 해석하는 것 같다. 그래서 해석들을 공부한 후에, 시간이 조금 지나서 다시 한 번 더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사실 죽음에 대해 여러 번 생각해보긴 했지만, 현실에 충실해질 만큼 직면하기는 쉽지 않았다. 마치 내가 영원히 존재할 것만 같고, 죽는다는 것이 잘 와닿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선학들이, 다른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탐구해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에 대한 탐구가 어쩌면, 삶의 문제들에 대해 답을 해줄지도 모른다.

작은 별이지만 빛나고 있어 (소윤 에세이)

 별, 별은 항상 시도때도없이 핵융합반응을 일으키며 빛을 뿜어낸다. 다만, 너무나도 멀리있어 한없이 작게만 보인다. 
 삶에는 특별한게 없어도 빛나는 법이다. 우리 모두 한 번쯤은 찬란한 순간을 보냈었다. 그것이 영원할 수는 없겠지만 다시 한 번 정도는 빛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아름답게 빛을 내지못하는 순간, 실패하고 좌절하고 부딪히는 그 순간, 이는 더 빛나기 위한 하나의 발악이다. 반짝거리는 그 사이들이 모여 우리를 이룬다. 어두운 순간이 있기 때문에 밝은 순간이 더 값진 것.
 
 하늘을 가득 메운 별들 중 유독 빛나는 별이 눈에 들어오는 까닭은 작은 별들이 있기 때문이다. 작은 별은 그렇다고 기죽지 않는다. 이들은 서로 다른 곳에서 각자의 위치에서 그저 해야할 일을 하고 있다. 
 실제로 작은 별은 소모에너지가 작아 거대한 별보다 오래 생존한다. 별들은 억겁의 시간을 살다가 결국엔 장대한 빛을 내뿜으며 장렬하게 소멸하고, 다른 존재가 되어버리거나 흩어져버린다. 소멸의 순간에 후회가 없도록 빛을 내는 것.

 밤하늘에 수놓인 작은 별조차도 빛나고 있다.
 

코스모스

<코스모스>는 모두가 꼭 읽어 봤으면 하는 책이다. 이 책은 일반적인 과학 교양서가 아니다. 양질의 지식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류의 미래를 위한 비전을 제시한다. 칼 세이건이 이러한 비전을 제시하는 이유는, 인간이 지식 문명을 자멸시킨 경험이 고대에도 있었기 때문이다. 지식 문명이 사라졌던 시기를 암흑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오늘날 한번 더 전쟁 등의 이유로 문명이 파괴된다면, 복구하지 못할 정도로 손상될 것이다. 우리는 인류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인류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에 살고 있는 것이다700페이지가 넘는 이 두꺼운 책은, 과학뿐만 아니라 풍부한 인문학 지식도 담고 있다.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이며, 교양서로서 매우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방대한 분량에도 구성이 잘 짜여 있어 부드럽게 읽을 수 있었다. 이제 이 책을 읽고 좋았던 점 몇 가지를 꼽아보겠다.

우선 , 책이 읽기 편하다는 점이다. 이 책은 다큐멘터리를 책으로 옮긴 것이다. 즉, 일반 대중을 독자로 설정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과학 지식이 없는 나도 충분히 저자의 논의를 따라갈 수 있었다. 또한 문체가 문학적이고 구어적이라는 점이 읽기 편하게 해준다. 글이 철학서 처럼 딱딱하지 않고 유려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앤 드루얀을 위하여, 공간의 광막함과 시간의 영겁에서 행성 하나와 찰나의 순간을 앤과 공유할 수 있었음은 나에게는 하나의 기쁨이었다.”가 있다. 내가 지금까지 읽어 본 학술 서적들은 대부분 불친절했는데, 이 책은 아니었다. 이러한 점 덕분에, 마치 소설을 읽는 것처럼 몰입하며 즐길 수 있었다. 나는 이 책을 읽은 후 “비문학도 이렇게 재미있게 쓸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훗날 나의 경험과 지식을 세이건 처럼 써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과학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도 충분히 읽을 수 있으니 꼭 도전해봤으면 좋겠다.
우주적 관점에서, 인간이 어떤 위치에 존재하며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인류는 오랜 시간 동안 지구를 중심으로 세계를 이해했다. 그 생각이 깨진 이후에도 사람은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현상은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지구를 지배하고 있고, 지구 밖의 세계에 대한 지식은 한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나도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인간 중심의 사고를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끝이 존재하지 않는 우주에서, 우리는 찰나에 머물다가 사라지는 존재일 뿐이다. 우주의 관점으로 보면 우리는 너무나도 작은 존재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과 지구’는 우주에서 유일무이한 존재다. 우주를 샅샅히 뒤져봐도 우리 인간과 같은 생명체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며, 지구와 유사하게 생긴 행성을 찾는 것도 힘들 것이다. 즉, 우주에서 인간은 작지만 소중한 존재라는 것이다.
서론에서, 우리는 문명을 보존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에 살고 있다고 언급했다. 어떻게 보존할 수 있을까? 칼 세이건은 우리가 지구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존의 국가 단위 공동체에서 벗어나, 행성 단위로 모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자멸(핵전쟁 등)의 위기에서 벗어나야만 다음 단계의 문명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이 말에 매우 동의한다. 핵전쟁이 일어난다면 인류의 역사, 지구의 역사는 전부 소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운 좋게 일부가 살아남았다고 해도, 지금까지의 지구와 인간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지구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은 끔찍하게 어려운 일이다. 현재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북한, 이외의 분쟁들을 생각하면 평화는 그저 막연한 꿈만 같다. 공동체를 이루는 과정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희생될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이루어내야할 과제이기도 하다. 나는 이것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난다면, 평화도 점차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인류의 운명에 대해 인식하고 책임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이 책은 몇 번이고 다시 읽을 것 같다. 마음 같아서는 5번 넘게 반복해서 읽어보고 싶지만, 분량이 묵직한 나머지 용기가 나지 않는다. 이 책이 양서를 넘어서 고전인 것은 확실하다고 느꼈다. 나의 생각이 크게 바뀌는 데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생명의 공허함과 불확실성에서 갈피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와준 책이다. 나는 과학을 몰라서 연구를 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여, 어떤 방식으로든 문명의 발전과 보존에 힘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편한 편의점

베스트셀러라고 되어있어서 이 책을 집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서울역의 볼품없던 노숙자가 한 여사의 도움을 받아 편의점에 야간 알바로 취업하게 되고 난 후, 각자의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있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그 상처를 치유해주는 힐러 역할을 하는 노숙자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저는 평소에 마음이 따듯해지는 말을 들으면 속이 울렁거리고 손이 오그라들어서 주위 사람들에게 감동적인 말을 잘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난 후 이 책의 주인공인 “독고” 처럼 다른 사람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주는 힐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독고”씨는 항상 손님들에게 친절하고 손님들의 마음의 상처를 빠르게 캐치하여 따뜻한 위로의 말을 전하면서 처음에는 그의 덩치와 더듬거리는 말투를 보고 손님들이 “독고”씨를 보고 불편하다며 불편한 편의점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진심어린 마음을 알고난 후부터는 이 편의점의 단골이 되는 그런 따뜻한 소설입니다.
이 책의 특징으로는 실제 지명과 현재의 코로나 상황 등을 다루고 있어서 몰입감이 엄청납니다. 지하철에서 등하교를 하며 이 책을 읽었는데 이 책을 읽는 동안은 마치 제가 지하철을 타고 있는 것이 아닌 이 책 속의 장소인 용산구 청파동에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이 책을 보다가 한성대입구역을 종종 놓친 적 도 있습니다.
이 책에서 주인공인 “독고”씨가 만나는 가상의 인물들은 영화 속에 나오는 주인공이나 소년 만화 주인공처럼 특이한 상처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 가장의 무게, 가족 사이의 갈등, 불효자로 인해 스트레스 받는 어머니 등과 같이 현실적인 갈등 요소를 가지고 있어서 공감하며 읽을 수 있어서 좀 더 재밌었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평소에 책을 매우 싫어하거나, 소설책에 대한 편견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합니다. 저도 원래 소설책을 안 좋아했는데 이 책을 읽고 난 후 다양한 소설책들을 읽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보건교사 안은영 (정세랑 장편소설,특별판)

 신선한 감각과 톡톡튀는 상상력, 여러가지 메타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런 것을 모른 채 감상해도 정말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었다. 언제부터인지 나는 소설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야기를 감상하는 본질은, 그저 그것을 보는 것이 즐거워서가 아니었나?
 이 소설이 그 본질에 가장 적합한 소설같다. 이 소설은 말 그대로 정말 재미있다. 

카스테라

 처음보는 글이었다.  황당하게 느껴지는 이야기를 읽다가 어느새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흥미롭게 시작한 이야기의 끝에서 삶의 처연함과 쓸쓸함을 느끼며 눈물을 훔치게 되었다. 지금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과, 더 이상 볼수 없는 소중했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미안함과 감사함, 그리고 슬픔이 느껴졌다. 이상하다. 정말 이상한 소설이다. 그래서 좋다. 
 나는 이런 글을 난생 처음 읽어 보았다. 

쓸 만한 인간 (박정민 산문집)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듯이 술술 읽게 되었다. 사람 자체가 매력적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글도 참 매력적이었다. 다 읽고 난 후 왠지 모르게 박정민이라는 사람과 친해진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누군가에 대해서 알려면 그 사람 읽고 쓰는 글을 보아라’ 라는 말이 있다. 배우 박정민을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읽는 것도 좋을 듯 싶다.

저주토끼 (정보라 소설집)

 이 책은 현실과 동떨어진 설정을 가져와서,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더 현실적으로 다가 왔다. 아마도 리얼리티라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창조한 현실을 믿게끔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여러가지 단편집으로 구성된 이야기를 통해서, 어쩌면 내가 될지도 모르는 추악한 인간의 얼굴들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