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소설ㅣ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l 2023년 메디치 외국문학상 수상)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 사건을 배경으로 삶과 죽음, 기억과 망각을 정교하게 직조한 작품이다. 작가는 역사적 비극 속에서 소외되고 잊혀진 목소리를 끌어내며, 고통스러운 진실을 마주하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해당 소설은 희생자와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다양한 시점에서 풀어내며, 그들이 겪은 고통과 상실을 생생히 전달한다. 주인공들은 사랑과 죽음이 교차하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끝까지 붙잡는다. 특히, 작품에 흐르는 죽은 자와 산 자의 대화는 단순한 추모를 넘어,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연대를 모색하려는 강렬한 시도로 읽혀진다. 또한 사건의 잔혹함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은유와 함축을 통해 독자에게 더 깊은 울림을 전하고 있다. 독자는 작품을 읽으며 잔혹한 역사적 현실을 마주하는 동시에, 망각의 위험에 대해 경고받게 된다고 느껴진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단순히 과거를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기억의 책임과 화해의 가능성을 묻고 있다. 

한강은 이 작품을 통해 고통 속에서도 인간다움과 사랑을 잃지 않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긴 여운과 깊은 사유를 남긴다.

사라진 것들 (앤드루 포터 소설)

여러가지의 챕터로 구성된 이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챕터는 <넝쿨식물>이다.
“나는 서른한 살이었고, 내 일을 좋아했다. 내 삶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고, 마야와 함께 있는 한 그저 그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나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에, 다른 사람의 예술에 소소한 방식으로 기여하고 있다고 느꼈다.”
이 구절이 가장 인상깊은 이유는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내가 누군가에게 예술적 영감이 될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그대의 차가운 손 (한강 소설ㅣ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의 그대의 차가운 손은 삶과 죽음, 예술과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깊이 있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인물들의 복잡한 내면을 통해 인간의 본질적 고독과 상처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주인공은 죽음에 대한 강렬한 집착과 생에 대한 회의 속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해석하고자 한다. 특히, 주인공이 예술적 창작을 통해 고통과 대면하는 과정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한강은 독특한 서사 구조와 서정적 문체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모습을 묘사한다. 주인공의 심리적 방황과 감정의 결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는 그가 느끼는 고통과 허무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히 어두운 면만을 조명하지 않는다. 상실과 고통 속에서도 삶을 지속하게 하는 작은 가능성과 연대의 순간들을 포착하며, 그 안에서 희망의 조각을 발견한다.

그대의 차가운 손은 죽음과 예술을 통해 인간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며, 우리에게 삶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던진다.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감각과 이를 표현하는 한강의 문장은 독자에게 강렬한 여운과 깊은 사유를 남긴다.

채식주의자 (한강 소설ㅣ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인간의 본성과 억압, 그리고 내면의 욕망을 탐구한 강렬한 작품이다. 주인공 영혜는 어느 날 갑자기 채식을 선언하며, 사회적 규범과 가족의 기대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녀의 결정은 단순한 식습관의 변화가 아니라, 폭력적인 세계와 자기 몸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하려는 몸부림이다. 영혜를 둘러싼 가족들은 그녀의 변화에 충격과 분노로 반응하며, 사회가 개인에게 강요하는 폭력적 굴레를 드러낸다.

작품은 영혜의 시선뿐 아니라 그녀를 바라보는 주변 인물들의 내면을 통해 다층적으로 전개된다. 특히 남편, 형부, 언니의 시선을 통해 드러나는 영혜의 모습은 욕망과 억압, 자유와 소외가 뒤얽힌 인간의 복잡한 본성을 보여준다. 한강의 문체는 서늘하면서도 강렬한 이미지로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며, 인간의 본능적 욕망과 문명적 규율 간의 갈등을 강하게 환기한다.

채식주의자는 단지 채식의 문제가 아닌,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규범에 저항하고 자신의 본질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파괴와 자유는 독자로 하여금 삶과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사유를 불러일으킨다.

소년이 온다 (한강 소설 l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을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역사의 비극 속에서 개인이 겪는 고통과 상처를 섬세하고도 강렬하게 그려낸다. 작품은 주인공 동호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의 시선으로 서술되며, 사건의 잔혹성과 이를 겪는 인간의 내면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특히 동호의 죽음을 비롯한 비극적인 사건들은 독자에게 광주의 아픔을 강하게 각인시키며, 당시의 잔혹한 현실을 외면하지 못하게 만든다. 한강은 단순히 고발적 시선을 넘어, 비극 속에서 인간이 보여주는 연대와 희망의 가능성을 탐구했다. 그녀의 문체는 서정적이면서도 날카로워, 독자로 하여금 역사적 사건과 그 여파를 더욱 깊이 체감하게 한다. ‘소년이 온다’는 단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에도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폭력과 억압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행동해야 할까?  이 작품은 잊지 말아야 할 역사와 인간 존엄성의 가치를 일깨우며 깊은 울림을 준다.

각각의 계절 (권여선 소설)

<사슴벌레식 문답> 챕터가 가장 인상깊었다.
그 중에서 가장 깊은 구절은 다음과 같다.
“나는 주문을 외우듯 다시 사슴벌레식 문답으로 돌아간다. 어디로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대답하는 사슴벌레의 말은 의젓한 방어의 멘트도 아니고, 어디로든 들어왔다 어쩔래 하고 윽박지르는 강요도 아닐 수 있다.”
이 구절이 바로 사슴벌레식 문답 그 자체를 표현하는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기 전에는 사슴벌레식 문답이 무엇인지 궁금했는데, 읽고보니 너무 심오하고 어려우면서도 공감이 가는 것이었다.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한강 시집ㅣ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는 고독과 일상의 공허함을 서랍이라는 상징적 공간을 통해 풀어낸 작품이다. 주인공은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낡은 서랍을 열며 잊고 지냈던 과거의 기억과 마주한다. 서랍 속 물건들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시간과 감정이 응축된 매개체로 작용한다. 이를 통해 주인공은 억눌린 감정과 대면하며, 잊고 지냈던 삶의 온기를 되찾는다. 작가는 서랍이라는 공간을 통해 현대인이 잃어버린 소통과 관계, 그리고 자아 성찰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특히, 서랍 속 물건이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며 주인공에게 깨달음을 주는 과정은 삶의 본질적인 의미를 탐구하게 만든다. 이 작품은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며, 우리가 잊고 살았던 소중한 기억과 감정의 가치를 일깨워 준다. 읽는 내내 따스하면서도 묵직한 여운을 남기는 소설이다.

이제야 언니에게 (최진영 소설)

실제로 생길 수도 있는 사건이지만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 주인공인 제야는 소설이니까 책이니까 반드시 일어날 수 있을 거라는 믿음 없이는 읽기 힘들었다. 굉장히 강한 역겨움과 동정, 위로를 느꼈다.

학교 폭력을 다룬 드라마인 ‘더 글로리’였던가 아니면 어디서 주워 들은 건지 모르겠다. 폭력을 당하지 않은 사람들은 0에서 시작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폭력을 당한 사람들을 0이라는 제자리에 돌아오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구렁텅이에 빠지기 쉽다. 스스로 빠지고 싶은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밀어넣는 자들이 있다. 도대체 밀어넣는 자들은 자(者)라고 부를 수 있을까? 들짐승이나 날짐승보다 나은 게 뭐가 있다고 그들을 사람으로 취급할 수 있을까. 또, 0보다 한참 전에 있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경멸하고 잊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역겹고 끔찍한 사람들이 너무 많이 등장한다. 소설이 역겹고 끔찍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미 이 사회에, 세상에 이런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제야의 노력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지구 끝의 온실 (여름 에디션,김초엽 장편소설)

프림 빌리지는 ‘애정의 결집체’라고 생각한다. 프림 빌리지에 모인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버려져 착취당하고 내팽겨진 사람들이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세계”(출처: 지구 끝의 온실, 2024).를 마주하면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은 유일한 도피처였던 프림 빌리지에서 잠깐이나마 평화와 안정을 느꼈다. 그리고 프림 빌리지에서 세계의 재건을 꿈꾸고 프림 빌리지 바깥의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안에서 삶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 사랑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행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따라서 프림 빌리지는 애정을 상징하는 공간인 것 같다. 이렇게 <지구 끝의 온실>은 공동체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떠올렸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애정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서는 개인의 희생이 필수적인가? 오늘날의 사회에서 ‘프림 빌리지’의 기능을 하는 공간은 어디일까?

일주일 (최진영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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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생각없이 읽었다가 많은 생각을 하게 된 <일주일>이다. 우리 사회가 숨기거나, 숨겼지만 결국 드러나는 이야기에 주목하고 있다. 청소년의 불행, 과연 이것은 누가 만들어낸 것일까? 불행은 누구에게나 오지만 자의보다는 타의적이다. 나를 둘러싼 모든 상황이 나에게 공격적인 것만 같고, 나를 향해 비난하는 것 같고, 나를 억압하는 것 같은 때. 그러한 때를 우리는 불행하다고 한다. 어쩌면 나의 탓은 하나도 없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불행을 감내하는 것은 오직 나의 몫이 된다. <일주일>에서는 불행의 책임을 스스로 져야만 하는 청소년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울고 있는 어린이를 바라보면 어린이는 점점 ‘소’라는 글자에 겹쳐졌다. ‘소’를 닮은 어린이는 자라서 열아홉 살이 되었고 혼자 울 때 이제 나는 ‘서’라는 글자와 비슷한 것 같다.’ (14쪽)

<일주일>에서 다루는 특성화고의 실습은 마치 선심 쓰듯 부당함을 강요하는 어른들의 무대이다. 청소년이라 아무것도 모른다는 둥, 원래 이런 것이라는 둥, 감사함을 모르는 애들이 많아졌다는 둥 사실과는 별개로 제멋대로 판단하는 어른이 판을 친다. 어른이니까 믿었고 어른이라서 따랐지만 그에 대한 책임은 아이러니하게도 청소년이 지게 된다. 홀로 서야한다는 의무감으로 자라나는 청소년들은 ‘어른’의 무게를 지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지만 정작 어른들은 책임을 미루기만 하는 웃긴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다. 혼자 울면서도 체념하고 홀로 서야하는 어른의 탈을 쓴 청소년이 될 것인지, 부당함에 맞서고 사회에서 차츰 소외되는 청소년이 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누구에게든 너무 가혹한 현실이다. 

죽음과 상처가 분명하지만 누구도 이에 주목하거나 책임을 지지 않는 사회에 대해 가시지 않는 의문을 넣어두고 애매한 웃음(37쪽)으로 청소년의 짧은 끈기와 이기심과 불성실함에 동의해야 하는 현실. 어른들의 어리석고 이기적인, 오직 ’내가 맞다‘고 주장하는 질문이 던지는 동아줄을 잡을 수 밖에 없는 현실. 

이러한 현실이 현 사회의 현 주소라는 것이 씁쓸하다. 

‘나는 아니겠지’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도 똑같은 사람인 때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고충을 토로하는 이들에게 함부로 ‘버티라’고 말하던 어느 날의 내가 있었음을 잊고 있었다. 버티고 버텨서 이겨내라, 돌아오는 것은 지는 것과 다름없다는 말이 ‘돌아와달라’는 애원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사회를 살아가야할 창창한 청소년들에게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응원해야 할 것이다. 그들을 잃고 후회하지 않도록, 미뤘던 책임이 배로 돌아오지 않도록 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