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 내내 든 생각이 있다. 이 책은 소설이라기보단 에세이지 않나? ······.
이런 생각이 들 만큼 작가의 얼굴이 가깝게 느껴졌다. 데미안과 싯다르타에서 느꼈던 헤르만 헤세 특유의 플롯, 내지는 취향이 부분마다 만져지는 기분이다. 주인공 한스와 헤르만 헤세는 거의 동일한 삶을 살았다.
한스는 조용한 시골 마을의 영재로 아버지의 기대에 따라 신학교에 2등으로 입학한다. 신학교의 엄격한 규율 속에서 방황하던 한스는 시인이자 반항아인 헤르만 하일너를 만나며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다. 하일너와 사랑과 우정 사이의 관계를 보내는 사이. 우등생이던 한스의 성적은 떨어지고, 교육체계에 반항하던 하일너는 퇴학까지 당한다. 한스는 결국 무기력증과 우울증으로 공부를 놓게 된다. 치료를 위해 한스는 집으로 돌아오지만, 마을 사람들은 실패자인 한스를 반기지 않는다. 매일 자살을 꿈꾸며 살아가던 한스에게 첫사랑인 엠마가 등장하나, 엠마 역시 한스를 떠나자 더욱 괴로워한다. 이후 한스는 견습공으로 들어가나 ‘신학생 대장장이’라는 놀림을 당하고, 스스로도 회의감에 빠져 산다. 결국 한스는 견습공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돌아가던 도중 강에 빠져 죽는다. 실수였는지 고의였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헤르만 헤세도 그렇다. 슈바르츠발트 산맥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14살 신학교에 진학하고 입학한 지 7개월 만에 학교를 그만둔다. 이후 우울증에 빠진 헤세는 자살을 시도하나 미수로 끝난다. 이후 다른 학교에도 들어가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이후 시계공장의 견습공으로 들어가 일하다 관두고 서점 직원으로 취직해 작가로서 활동하기 시작한다.
시골 마을-신학교 입학-부적응-시계공장의 견습공까지. 너무나도 비슷하다. 주인공의 친구이자 존경의 대상인 하일너도 ‘헤르만’ 하일너이다. 마을에 나오는 목사와 몇몇 인물들의 이름은 실제 마을 사람들의 이름을 변형해 사용했으며 비슷한 지명도 몇몇 보인다. 이렇게까지 닮으면 과연 자전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 원래 자전소설이란 이렇게나 밀접하게 닮아있는 건가? 그렇다면 작가 자기 생각과 경험한 일을 토대로 자유롭게 써 나가는 글 – 에세이와 무엇이 다른 건지 궁금해졌다.
찾아보니 둘의 차이는 사실과 허구의 차이라 나와 있었다. 간단명료한 답이나 그래도 여전히 납득이 가질 않았다. 에세이는 사실이라 볼 수 있는가.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100% 사실들로만 구성되어 있는가? 사건과 진실이 다른 것처럼, 자신의 경험을 재해석해 배치하는 것 또한 허구가 아닌가? 실제로 에세이에 등장하는 작가인 ‘나’는 원래의 나와는 조금 다르지 않나. 이렇듯 사실을 바탕으로 하더라도 묘사하는 사람에 따라 다른 뉘앙스를 가질 수밖에 없고, 때로는 전혀 다른 것이 되기도 한다면, 원래 있던 사건들을 발단-전개-결말의 형식으로 구성하는 것도 에세이라고 볼 수 있지 않나? 특히 수레바퀴 아래서와 같이 주인공의 삶의 행적이 작가와 거의 동일하다면?
그만큼이나 이 책은 작가와 밀접하게 맞닿아있다. 주인공 한스의 생각도, 행동과 보는 시각도 닮아있어서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엿보는 기분이 들었다. 특히 자연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두드러진다. “인간만이 자연의 순환에서 벗어난 듯 착각을 한다”라고 말했듯. 자연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걸 시각적으로도, 감성적으로도 알 수 있었다. 한스가 신학교의 정원을 둘러보는 묘사는 기껏해야 4~5줄인데, 시골의 자연을 묘사하는 대목은 거의 2페이지, 3페이지가량을 사용해 묘사한다.
작가와 매우 가까운 소설인 만큼, 작가에 대한 배경지식이 많을수록 더욱 즐겁게 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레바퀴 아래에서는 훌륭한 비판 소설이지만 나에게는 비판 소설보다도 자전적인 의미가 더 크게 다가왔던 책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