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의 신, 혼마 (주식시장의 캔들차트와 사께다 전법의 창시자, 개정판)
한국 주식시장이 개방되기 전에 증권시장의 흐름과 기법을 배우려는 시도가 많았습니다. 시장개방 이후에는 투자자들의 투자 전략이 주가 되었습니다. 여전히 캔들차트가 가장 대중적입니다. 우리가 매일 보는 캔들차트의 창시자가 바로 혼마 무네히사입니다.
혼마는 거래의 신으로 불린 상인으로 당대 최고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 책은 그의 기술적 분석이 아니라 거래할 때 마음가짐과 전략에 대한 배움이 많은 책입니다. 혼마는 거래는 시작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서둘러 진행하지 말고 3일을 기다리리고 합니다. 그는 1년 내내 하지말고 휴식을 취하라고 합니다. 진정한 때가 아니면 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과 반대로 행동을 취하라고 하고 바닥에 사서 천정에 노리고 매매하고 바닥에 샀으면 시세가 꺾이기 전까지 팔지 말라고 합니다.
혼마가 계속 언급하는 말이 있습니다. 항상 때를 기다리고 나 자신을 알아야 하고 투자에 원칙을 정해야 하고 급하게 벌려고 하지 말아라 라고 합니다.
그가 깨달음을 얻고 마음가짐을 다르게 함으로서 당대 최고의 갑부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모든 일을 하는데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회사도 열심히 키워나가면 좋은 회사로 성공할 것이라는 기대감과 열정으로 키워나가겠습니다.
축적의 길 (Made in Korea의 새로운 도전 | 축적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이 책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무슨 내용인지 감도 안왔습니다. 보통 책을 처음 보면 무슨 내용인지 예상이 가지만 이번에는 아.. 좀 어려울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책은 한국 경제성장의 문제점을 끊임없이 언급합니다. 그만큼 요 몇십년동안 지속적으로 경제성장률이 하락하고 있고 이에 대한 해결책을 계속 얘기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알지만 실천하기에는 개개인이 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 모두 다같이 실천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일단 근본적인 문제점을 ‘개념설계 역량의 부족’이라고 합니다. 많은 기업들이 개념설계를 해서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도 글로벌 기업은 많지만 그 기업들이 몇 년동안 같습니다. 새로운 기업들이 탄생하지 않는데에서 경제성장률은 하락하고 있고 이러한 원인이 개념설계의 부족으로 얘기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발전하려면 실행을 해야합니다. 농업에서 제조업으로 넘어가고 제조업에서 대량으로 생산하고 수출해서 경제를 성장시킵니다. 우리나라도 여기서 1900년대 후반에 급속도로 경제가 성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대부분의 나라가 경제가 주춤합니다. 여기에서 선진국으로 넘어가려면 개념설계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개념설계는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합니다. 많은 시도가 있지 않으면 절대로 성공할 수 없습니다. 기존의 매뉴얼대로 하면은 실행능력은 잘할 수 있지만 개념설계의 역량은 늘릴 수 없습니다. 시간을 들여 차별화를 지속하고자 노력할 때야 비로소 개념설계는 완성될 수 있습니다.
현재 한국사회는 도전적 시도와 시행착오의 축적을 가로막고 있는 요소들이 많습니다. 충실한 실행으로 교육, 금융, 정책, 문화 등 어느 한곳만 변화를 하려면 안되고 모두가 변화를 만드려고 노력해야 한다.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
사람은 살아가면서 사람과의 교류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과의 접촉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미래에도 필요한 인간관계를 배우고자 이 책을 선택했습니다. 인간관계를 잘 확립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잘될 것 같았습니다.
이 책을 읽고 느낀 점은 항상 상대를 중점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하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대화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상대방이고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말고 비난하지 않다는 것이 중요 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는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상대방이 표현을 하면 저는 진심으로 경청하는 행위가 중요합니다.
이미 성공한 사람들은 상대방을 만나기 전에 그 사람의 관심사를 미리 공부합니다. 만난 이후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보입니다. 상대방에게 관심을 가지는데 많은 노력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주체가 내가 아니라 상대라는 것에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큰 놀라움을 느꼈습니다. 상대방을 설득하는데 나를 어떻게 할까도 중요하지만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비난하는 일은 잦아졌습니다. 과거보다 서로 헐뜯는 일이 잦아지면서 인간관계에 금이 가는 일이 자주 나타나고 있습니다. 서로의 자존심 때문에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남을 비난하는 일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을 낮추고 잘못을 인정하고 상대방이 실수해도 포용하고 오히려 격려하면 상대방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바른말, 고운 말, 칭찬하는 말, 힘들어도 웃는 일,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남을 우선시하는 일을 하는 습관을 우리 모두 다 같이 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동물농장
위저드 베이커리 (구병모 장편소설)
모순 (양귀자 장편소설)
고도를 기다리며 (1969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햄릿 이후 처음 읽는 희곡이라 두려움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으나 재밌게 읽었다. 그러나 희곡을 처음 읽는 사람이라면 그리 추천하고 싶지 않다. 당대에도 특이한 희곡이었기 때문에 지금 당장 연극이나 희곡을 접해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어려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시작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고도’라는 존재를 기다리는 것이다. 끝 또한 ‘고도’라는 존재를 기다리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고도’라는 부재(不在)의 현존(現存)이 무대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들의 이름이난 다른 등장인물의 이름은 잊더라도 고도는 잊을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그들이 기다리는 ‘고도’는 무엇일까. 모른다. 이 희곡의 연출자가 베케트에게 ‘고도’가 누구이며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자 베케트는 그걸 알았다면 작품 속에 썼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무라카미 류의 한 인터뷰가 생각났다.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무라카미 류는 그것에 답할 수 있다면 소설 따위는 쓰지 않았을 거라고 말했다.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걸 최선을 다해 전달했고 그를 해석하거나 의미를 찾는 것은 독자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독자 개개인에게 필요한 것은 형태도 의미도 전부 다를 것이고 각양각색일 것이다.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어떤 무언가를 스스로 찾는 행위 중 하나가 독서라고 생각한다. 고도는 내게 존재하지 않은 운명, 시간, 신… 따위로 느껴졌다. 존재의 여부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으나 있다고는 생각할 수 있는 그 경계 어딘가. 찾을 수 없지만 믿고 있으며 믿지 못 하는 어느 것.
인간 실격
독후감은 읽자마자 썼어야 했는데 항상 쓰는 게 귀찮다고 미루다 보니 읽었을 때 어떤 생각을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몇 자 적어 보려고 한다.
인간의 나약함을 잘 다루는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을 처음 읽어 봤다. 어렸을 때 인간 실격을 조금 읽어 봤는데 너무 재미 없어서 16페이지만 읽고 책을 덮었었다. 그때 읽고 꽂아뒀던 클립의 흔적이 16페이지에 여전히 남아 있다. 몇십 권의 책을 읽고 문해력이 올랐는지 마냥 재미가 없어서 책을 덮지는 않았다. 책은 읽을수록 더 많이 읽을 수 있다는 걸 이 책을 통해 느꼈다. 돌아가서 인간 실격은 주인공인 요조가 날 때부터 다른 인간들을 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 살아가는 어쩌면 죽어가는 이야기다. 익살꾼이 되기 위해 노력하지만 좌절하는 순간들이 많아지고, 계속 되는 자살 기도와 실패, 그리고 마약 중독까지 인간 실격자가 된다. 인간 사회의 위선과 잔혹성을 개인을 통해 드러냈다는 평이 많은 작품이다.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문구는 ‘신에게 묻겠습니다. 신뢰는 죄인가요?’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에 이어 신뢰는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들었다. 실은 이 문장 말고 모든 내용이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근래 읽은 책의 내용이 뒤죽박죽 섞여 어렸다. 신뢰는 무엇일까. 사회는 지금 서로를 신뢰할 수 없는 세상이 되어 갔다. 믿는 자는 사기를 당하고 사기를 당한 자의 잘못이 당연하다는 듯한 사회가 되었다. 호의를 베푼 자는 좋지 않은 사건에 휘말리고 뒤처리는 전부 본인이 책임져야 한다. 신뢰가 마치 죄의 시작이나 근본이 되어 버린 사회다. 믿으면 배신 당하는 건 일도 아니다. 배신한 자의 죗값은 사회에서 제대로 정당하게 치뤄지지 않으며 피해자들의 속앓이와 육체적 또는 금전적 피해만 존재할 뿐이다. 그렇다면 정말 신뢰는 죄일까. 믿는 자의 아픔은 믿었던 자의 온전한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