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1. 사피엔스에게 상상하는 능력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사피엔스에게 생각하는 능력이 없었다면 현존하는 인류는 당연히 사피엔스가 아니였을 것이며 인류의 발전 또한 더 진보하지 못했을 것이다생각하는 능력으로 다른 종들과 차별화를 가졌던 사피엔스가 생각하는 능력을 갖지 못하였다면 어쩌면 다른 뛰어난 개체에 의해 인류가 사라져 버렸을 수 도 있을 것 같다만약에 인류가 계속 유지 되었어도 지금의 우리와의 생활 방식은 물론 인체 구조 또한 큰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2. 농업이 사피엔스의 삶을 더 낫게 만들기 위한 개선이라고 저자는 주장했다. 이에 대해 공감하는가?

농업이 사피엔스의 삶을 더 힘들게 만들었다는 것은 논리에 어긋나는 주장이다물론 이전에 하지 않았던 농업에 대한 노동으로 인해 사피엔스가 더 힘들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 문제를 주장하기 전에 농업 발달에 본질을 생각해보자농업을 발달시킨 이유는 사피엔스의 생존과 직결된다사피엔스는 식재료를 구하는 것이 쉬운 문제가 아니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농업을 발달시켜왔다농업 발달이 없었다면 아마 사피엔스의 생존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며 이는 농업으로 인한 삶의 힘들어짐 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한다먹고 사는 것에 대한 안정이 확보되지 않은 삶에서 사피엔스들은 그들의 즉 인류의 유지 및 발전에 힘쓸 수 있었을지는 매우 불투명하다.

3. 인류의 역사에 방향성은 있을까?

역사에 방향성은 없다고 주장한다수천 수만년에 걸쳐여러문화들이 모여 복합적인 문화가 생겨났다이렇게 생긴 복합적인 문화에 방향성이 있다고 볼 수 있을까이전에 존재했던 작고 단순한 문화들에 대해 연관성 및 방향성이 일치하지는 않을 것이다이러한 주장과 반대되는 의견에는 인류가 거의 동일한 경제지정학과학체제를 이루고 있다는 의견이있다하지만 이러한 규제의 모임들이 방향성을 설명할 수 있을까새로운 규제가 갑작스럽고 빠르게 등장해 인류에 스며든다면 어떨까이것이 기존에 존재하던 것과 완전히 다른 것이라면 우리는 이에 대한 방향성을 예측 및 해석하지 못할 것이다역사가 어떻게 새로 쓰여질지는 현재 체제로 해석을 하면 어느정도 예측이 가능 하겠지만 체제라는 것이 언제 변화할지 모르고 언제까지 유지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에 대한 방향성은 없다고 생각한다.

4. 인간은 과학기술 혁명의 주체인가, 노예인가?

인간은 과학기술 혁명의 주체이다애초에 인간이 더 잘 살려고 개발한 과학기술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 노예라고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다더욱 풍요롭고 나은 삶을 위해 개발한 과학기술에 대해 인간이 그것에 휘둘리는 것에 대해 노예라는 표현은 맞지 않다이렇게 인간은 과학기술 혁명의 노예다 라는 주장 또한 더 낫고 진보된 과학기술의 등장으로 충분히 무마될 수 있을 것이다왜냐하면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과학기술보다 훨씬 발전된 과학기술이 등장한다면 우리가 지금 느끼고 생각하는 이 문제점들은 하나 둘 없어져 나갈 것이며 결국엔 인간이 과학기술 혁명의 노예다 라는 생각 또한 자연스레 사라질 것이다과학기술의 혁명은 인간에 있어 이전보다 훨씬 낫고 발전된 문화를 이끌었을 뿐 그것의 노예는 아닐 것이다.

사피엔스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를 통해 인류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역사의 기록은 객관적이지만 저자의 주관적 생각이 들어가니 흥미로운 부분이 많았다. 저자는 인류의 역사를 크게 네가지로 분류해 놓았다. 인지혁명, 농업혁명, 돈과 종교,제국에 의한 혁명, 그리고 과학혁명이다. 내가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농업혁명 파트이다.
 
본래 우리는 학교에서 농업을 통해 인류가 발전했다고 배웠다. 하지만 저자는 농업혁명을 인류 최대의 사기라고 묘사하고 있다.
농업이 시작되기 전에 인류는 유목민이었다. 먹을 것을 찾아 이동하였고, 소진되면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생활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농업이 시작되고서부터는 농작물을 기르기 위해 밭을 갈아야했고, 매일 노동을 해야했다. 또한 열매를 채집하고 사냥을 해서 서식지로 돌아왔어야했다. 유목민 생활에 비하면 체력 소모가 엄청나게 증가한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도 체력이 다 소진된 상태였기 때문에 음식물을 제대로 섭취하지도 못했다. 이로 인하여 기아의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전염병도 확산하게 되었다.
 
이러한 부분에서는 농업혁명이 ‘인류 최대의 사기’라는 것에 어느정도 동의한다. 하지만 나는 ‘최대의 사기’ 까지라고 보긴 힘든 것 같다. 인류는 어떻게 해서든지 정착생활을 하게 됐을 것이고, 정착생활로 인해 발생한 문제 덕분에 현재의 호모 사피엔스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당연한 소리라고 들릴 수 있다.
여러가지를 예로 들 수 있겠다. 첫번째는 채집과 사냥에 대한 것이다. 열매를 따먹기 위해서는 열매가 익어야하고, 인류는 열매가 익기까지 기다려야한다. 그러면서 인류는 열매가 열리고 익는 주기를 알게될 것이고, 그 시기에 맞춰서 열매를 채집할 것이다. 사냥 또한 마찬가지다. 사냥을 하면서 특정 지역에 특정한 동물이 출현하고, 동물의 특성을 파악하여 사냥하는데 점차 요령이 생기게 될 것이다. 두번째는 전염병에 대한 것이다. 병으로 인해 신체가 쇠하고 죽어가는 것은 이때의 인류도 싫어했을 것이다. 병에 걸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 서로 격리 시킨다거나, 어느 식물을 섭취하면 통증이 완화된다는 것 등의 사실들을 알게될 수도 있다. 이것이 약과 치료에 대한 발전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큰 일이 작은 실수 하나 없이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지만, 나는 어떻게 해서든 그 작은 시행착오라도 겪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인류의 발전 또한 그렇다. 물론 그렇다고 농업혁명이 ‘사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는건 아니다. 농업혁명은 발전도 맞지만, 저자의 말대로 사기같고 모순적인 면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인류가 밀과 감자를 길들인게 아니라, 밀과 감자가 인류를 길들인 것이라는 유쾌하고 흥미로운 평가를 하기도 하였다.
 
농업혁명 외에 다른 파트도 재밌고 흥미로웠다. 솔직히 두꺼워서 읽을 엄두가 안났는데 역사라서 그런지 생각보다 술술 읽히는 편이었다. 우리는 역사를 배울 때 그저 구석기 시대에는 뗸석기를 썼고, 청동기 시대에는 어땠고… 등으로 간단하게 배우고 넘어갔지만 이 <사피엔스> 만큼이나 자세하게 인류의 역사를 배우진 않았다. 그 길다는 이집트의 역사보다 훨씬 더 오래된 인류의 역사를 한번 배워보는 것도 즐거운 일인 것 같다.

사피엔스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사피엔스]는 약 135억 년 빅뱅으로 물리학과 화학이 생겨나고 약 38억 년 전 자연선택의 지배 아래 생명체가 생겨나 생물학이 생기고, 약 7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 종이 발전하여 문화를 만들고 역사를 개척하는 지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저자는 과거에서 오늘날까지 이 거대한 수만 년의 역사를 관통하여 인간의 진로를 형성한 것으로 세 가지 대혁명을 제시한다. 바로 약 7만 년 전의 인지혁명, 약 12,000년 전의 농업혁명, 약 500년 전의 과학혁명이다. 과학혁명은 여전히 발전하고 있는 역사의 한 부분이고, 농업혁명은 새로운 사실들이 계속 밝혀지고 있지만, 인지혁명은 여전히 많은 부분 신비에 싸여 있다. 끝나지 않은 발견과 빈약한 사료들을 근거로 펼쳐내는 상상의 언어들은 놀랍도록 이성적이며 빈틈이 없어 독자들을 몰입하게 한다. 저자는 역사 발전 과정의 결정적인 일곱 가지 촉매제로 불, 뒷담화, 농업, 신화, 돈, 모순, 과학을 지목했다. 인지혁명의 시작으로 불을 지배함으로써 먹이사슬의 최정점에 올라선 인간은 언어(뒷담화)를 통해 사회적인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고, 수렵채집인에 머물던 인간은 농업혁명을 통해 기하급수적인 인구증가를 경험한다. 늘어난 인구를 통제하는 강력한 무기는 종교, 계급, 권력 등 허구의 신화들이다(물론 수렵채집인 사회를 지배한 것도 역시 허구의 신화들이었다). 농업의 발달은 부의 증가와 정착생활로 이어졌고, 사람들은 돈을 맹신하게 되었으며, 돈의 맹신은 사회적 모순을 야기한다. 500년 전 과학혁명은 우리에게 이전 시기와 완전히 다른 세상을 열어보였다. “이 혁명은 역사의 종말을 불러올지도 모르고 뭔가 완전히 다른 것을 새로이 시작하게 할지도 모른다.”(19쪽) 40억 년간 자연선택의 지배를 받아온 인류가 이제 신의 영역까지 넘보고 있다. 인간의 지적설계로 만들어갈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사피엔스]는 이런 중요한 순간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다가올 미래에 대해 어떤 전망이 있는지, 지금이 전망을 가져야 할 때라고 말한다.
저자는 사피엔스에게 상상하는 능력이 여타 다른 짐승들과 다르게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커다란 힘이라고 하였다. 나또한 이에 크게 동의하였다. 많은 지식들이 그저 글로된 정보일 뿐이라면 이는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않는다. 정보란 우리가 응용하고 적용시켰을때야 비로소 빛을 발하는 것들 이다. 우리는 사피엔스가 처음 나타난 시절부터 상상하는 능력을 사용하여 정보를 응용시키고 기술로서 발전해 나갔다. 그것이 현대에 이르러서는 4차 산업혁명까지 이끌어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사피엔스에게 상상하는 능력이 없었다면 우리는 자연과 날씨처럼 주어진 상황에 그저 따라 사는 삶을 살고있으며, 우리가 항상 같이 사는 IT기술을 비롯한 생활속 많은 기술들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로 그렇게 수동적으로 삶을 영이하게 되었을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저자의 말에 항상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농업이 사피엔스의 삶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들기 위한 개선이었지만결과적으로 삶은 더 힘들어졌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나는 공감하지 않는다. 인간과 여타 다른 짐승과의 차이는 바로 상상과 생각을 하고 이를 발전으로 만들어내서 진보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진보의 첫 걸음인 농업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인간은 그저 다른 짐승들과 마찬가지로 수렵채집활동을 하며 그저 생을 잇기위한 활동만을 하였을 것이다. 농업혁명으로 밀과 쌀에 얶매이게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주식이라는 개념이 생기고 대규모 농업을하여 식량을 저장하고 삶을 영이해 나가는 방법 또한 만들었다. 이는 농업혁명이 가져온 아주 큰 변화이자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장을 통해서 여유가 생겼으니 인간의 사고는 그저 삶을 영이해 나가는 것 뿐만아니라 아주 다양하게 그리고 깊게 발전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농업혁명은 우리의 삶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들어 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만약 이러한 발전된 삶이아닌 그저 수렵채집활동을 하며 구석기 시대적인 삶을 사는 것이 더 나은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농업혁명이 불행한 것 일수도 있지만 말이다.
또한 저자와 달리 역사에 방향성은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 현재 우리가 누리는 문화와 과학 기술들 그 많은 것들은 분명 과거부터 순차적으로 발전되어 온 것이 맞다. 그저 시간적 관점에서 단편적으로 본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그러한 것들은 그저 순탄하게 놓여져있는 길을 따라오듯이 발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때로는 넘어지기도하고 돌아가기도하고 다른길로가서 더 좋은 방향을 찾아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역사에 정해진 방향성은 없으며 우리 인류는 우리의 상상과 생각에 따라 우리가 맞다고 생각하는 길을 방향으로 정하고 각자의 역사를 이끌어 갔다고 생각한다. 이 길은 모두가 같지는 않다. 그저 각자의 입맛에 맞는 길을 찾아 걸어갔을 뿐이다. 물론 이러한 많은 길들을 멀리서 보면 하나의 줄기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줄기는 서로 다른 많은 가지들로 이루어져있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된다.

또한 나는 인간이 과학기술의 노예가 아닌, 인간은 과학기술 혁명의 주체라고 생각한다. 과학기술이 어디에 주로 사용되었는지 생각해보자. 우리와 항상 함께 생활하는 세탁기, 청소기, 자동차 등과 같이 우리가 숨쉬듯이 생각하는 그 모든 것들이 다 과학기술의 산물이다. 그렇다면 근본적으로 인간은 이것들을 왜 만들었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세탁과 청소, 이동등과 같은 행동들은 인간이 삶을 살아가기 위해 어쩌면 당연시하게 해야하는 것들이다. 과거에 우리 인간들은 이러한 행동들을 힘들게 도구없이 해왔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너무 힘들다. 그래서 인간은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더 편하게 그리고 효율적으로 당연한것들을 해결할 수 있을지, 그것에 대한 결론이 바로 저러한 과학적 산물들이다. 그러므로 나는 과학기술은 인간들이 자신들의 편의성을 위해서 주체적으로 이뤄낸 성과 라고 생각한다.

사피엔스라는 책은 작년 필수 교양시간에 처음 접한 책이다. 그때는 시험을 위한 수업의 교재로 사용되었기에 정독을 할 수 없었고 우리는 이번 상상독서 프로그램을 통해서 작년의 아쉬움을 덜어보고자 이 책을 선정하게 되었다. 사피엔스에서 저자인 유발하라리는 끊임없이 질문한다. 인간은 과연 인간의 생각대로 주체적으로 살아가는가, 모든건 계락에 의한 조종은 아닌가 등의 많은 질문을 던진다. 물론 저자의 말에 공감하기도하고 많은 깨달음을 얻기도 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가 누군가의 의한 삶을 살고 밀에게 조종당하고 과학기술의 노예로 살아가고 그렇게 수동적인삶을 주체적인 삶이라 착각하고 사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생긴다. 그래서인지 토론에서도 저자의 생각에 반대되는 의견을 많이 피력하게 된것 같다. 이렇게 친한 사람들과 의미있는 책을 읽으며 토론을 진행하니, 이 책에 대해 더욱 잘 알게 된듯하다. 매우 좋은 기회였고 다음에도 꼭 다시 참여하고 싶다.

오만과 편견

보통 오만과 편견을 영화로 먼저 접하기 때문에 대중들은 오만과 편견을 로맨스라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책을 통해서 이야기를 접하니 로맨스는 제인 오스틴이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을 알았다. 제인 오스틴은 당시의 여성 재산권을 인정하지 않는 에 대한 비판 그리고 본인이 지향하는 여성상, 당시의 결혼관 등을 소설로 표현을 했다.
 
오만과 편견에서 처녀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제인(첫째), 엘리자베스(둘째), 리디아(셋째), 샬롯이다.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자신이 지향하고자 하는 결혼과 현실을 생각하며 결혼하는 엘리자베스에 주목을 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와 지금의 결혼관이 큰 틀에서는 차이가 없기 때문이었다. 지금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은 이상과 현실에서 고민하며 갈팡질팡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한다.
 
이 당시 영국은 여성의 재산권을 인정하지 않던 시대였다. 즉 남편을 제외하고 집안 내에 유산을 물려줄 남자가 없다면 유산은 가장 가까운 남자 친척에게 상속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 내에서 콜린스라는 인물이 베넷가의 모든 유산을 상속받게 된다. 상속을 받게 된 콜린즈는 베넷가의 처녀와 결혼하기 위해 방문을 하고 엘리자베스에게 청혼을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거절을 한다. 오만과 편견에서 엘리자베스는 그 당시의 여성상인 순종적인 여성이 아닌, 자신의 하고자 하는 것을 하는 진취적인 여성으로 표현되므로써 제인 오스틴의 가치관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영화로만 봤던 오만과 편견을 글로 읽으니 새로웠다. 로맨스인 줄 알았던 소설이 작가의 성향, 당시의 시대 배경을 알고 보니 책의 내용을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각각 상징하는 바를 잘 알 수 있게 된 거 같다.

오만과 편견 (세계문학전집 88)

도서명 : 오만과 편견 
팀 명 : 김교수님과 다섯 제자 
이름/학번: 신재호 1612022 
일 시 : 2019.10.01. ~ 2019.11.05.  
주차별 활동 
1주차  : 콜린스의 결혼이 제일 인상깊다. 엘리자베스 집안에 상속받을 아들이 없었기에 당시 한정상속에 의해 사촌인 콜린스가 모든 유산을 상속받게 되었다. 콜린스가 엘리자베스에게 청혼 후 거절당하자 엘리자베스 친구인 샬롯과 결혼하게된다. 이를 보면 진실된 사랑이라기보다는 속물적인 성격을 띤 결혼이라고 볼 수 있었다. 
2주차 : 오스틴은 작품 속에서 여러 결혼관을 보여준다. 그중 샬롯과 콜린스의 결혼이 그 시대의 가장 현실적인 결합이었던 것 같다. 작가는 샬롯이 콜린스와 결혼하는 과정에서 ‘교양은 있지만 이렇다 할 상속 재산이 없는 아가씨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노후 대책으로 결혼만 한 것은 없다’고 이야기 한다. 샬롯의 결혼 이야기는 18~19세기를 살아간 여성들의 남성에 의해 운명이 정해지는 냉혹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여러 여성 인물의 결혼관과 그들의 선택을 통해 19세기 초 유럽의 격동기를 살았던 제인 오스틴이 현대 여성 주체의 탄생을 보여 주었다고 생각한다. 
3주차 : 엘리자베스는 영리하고 자유분방하고 자신의 욕망에 당당한 여성이다. 엘리자베스의 욕망은 당대 중간 계층 미혼 여성의 욕망을 대변한다. 또한 엘리자베스를 통해 여성이 지배되어지며 운명이 남에 위해 결정되어지는 당시의 현실에 어떤 방식으로 저항하고 대응하는가를 볼 수 있다. 어떻게든 딸들을 시집보내려는 베넷가의 베넷부인, 자신의 경제적인 면, 권력과 지위를 믿고 무례하게 행동하는 다아시 등을 통해 제인 오스틴이 보여주려 한 사회인식을 알 수 있었다.
4주차 : 소설을 기반으로 각색된 영화가 그 원작을 더 명확하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더 친숙하게 함으로써 원작에 더 기여 할 수 있다 생각한다. 이와 같이 오만과 편견을 영화로 각색함으로써 등장인물별 성격과 특징도 더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원작소설는 소설대로 영화는 영화대로 나름의 장점이 존재하는 것 같다.

위대한 개츠비

위대한 개츠비, 그는 과연 정말 위대한가? 
 순수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 시대에서 그는 자신의 마음을 지키고자 하였다. 
처음 영화를 봤을 때는 개츠비가 이상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굉장히 궁금했다 그는 왜 매일 파티를 하고 모습을 보이지 않을까, 그리고 영화를 보면서 점점 의문들이 사라졌다. 개츠비는 지고지순하게 자신의 사랑을 지켜왔던 것이다. 사실 나의 가치관의 관점에서 보아도 개츠비의 행동들이 아주 정당하고 옳은 것 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아주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개치비는 자신의 순수한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부정한 방법을 통해서도 상관없다는 식의 태도를 보이면서까지 데이지에게 다가갔다. 데이지도 처음에는 다가오는 개츠비를 보면서 이전에 자신이 갖고있던 환성을 투영하여 개츠비를 바라보았고 그들은 둘이 있는 그 시간만큼은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추억속에서 지낼 수 있었다. 개츠비는 계속해서 그러길 바랬고, 데이지에게 톰과 헤어지고 자신에게 왔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데이지를 다그쳤다. 물론 데이지도 싫은것은 아니었지만 온실속의 화초처럼 지낸 데이지가 톰 뷰캐넌에게 개츠비를 선택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주저하자 개츠비는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고야 말았다. 
그 모습을 본 데이지는 환상속의 개츠비의 모습이 아닌 자신이 생각치도 못했던 개츠비의 모습을 보고말았고 그 과정에서 개츠비에게 정이 떨어지고 만다. 집으로 가던중 데이지는 사고를 냈고 그 사고를 개츠비는 덮어쓰고 그로인한 원한 때문에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내가 예상했던 위대한 개츠비의 내용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흔히 티비에서 위대한 개츠비에 대해서 언급할 때는 그의 화려함과 파티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는데 분명 작가가 사람들이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개츠비의 모습은 그런모습이 아닐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렇다면 작가가 위대한 개츠비의 제목을 굳이 ‘위대한’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그의 순수한 사랑을 높이 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개츠비의 사랑이 환상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사랑이 자신의 감정을 앞세워서 상대의 처지를 곤란하게 만드는 이기적인 감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개츠비가 데이지를 사랑해서 그 자리 까지 가서 저택을 구매하고 그 속을 모두 다 데이지가 좋아하는 것으로 채워놨다는 점 그리고 그 것을 이루기 위해서 부정한 방법을 쓰면서 처절하게 살아왔다는 점은 얼마나 그녀를 사랑했으면 그렇게까지 했을까 생각이 들면서 그녀에 대한 마음이 크다는 사실에 대해서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이 꿈꿔왔던 상대방의 상황이 그렇게 추억이나 곱씹으면서 감정을 즐길 수 있는 처지도 아니고 이미 현실은 데이지가 톰과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있는 상황이었다. 그 상황을 다 알고도 개츠비는 데이지도 같은 마음일거라는 확신 아래 그녀에게 함께하자고 했고 그것을 톰에게 통보하라는 부탁을 하였다. 이게 얼마나 이기적이고 자신의 감정에 눈이 멀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의 상황을 힘들게 만드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너무나도 들었다. 
물론 원작으로 이 소설을 본다면 내가 생각하는 방향이 달라질 수는 있을것같다. 이 영화의 평을 찾아보니까 원작의 의도와 감정을 전혀 살리지 못한 영화라고 하던데 시간적 여유가 될 때 이 소설을 다시한번 곰씹어 보아 이 작품의 가치를 느끼고 싶다. 

쇼코의 미소 (최은영 소설)

쇼코의 미소는 여러 개의 단편 소설을 엮어 만든 하나의 책이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제목과 같은 작품인 쇼코의 미소와 미카엘라라는 작품이었다.
쇼코의 미소에서 쇼코는 일본으로 돌아가고 나서도 주인공과 주인공의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쓴다. 주인공에게는 자신의 할아버지를 나쁜 소식들을 주인공의 할아버지에게는 좋은 소식들만을  적어서 보냈다. 주인공은 그것을 보고는 두 가지 모두 쇼코의 진심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시간이 흐르고 쇼코를 만나러 일본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만난 쇼코는 자신이 증오하던 할아버지를 모시면서 살고 있었다. 쇼코는 할아버지를 증오하면서도 할아버지를 버리지 못해 자신의 꿈을 버리고 할아버지를 모시는 삶을 살고 있는 모습을 본 주인공은 적잖아 충격을 받는다.
반대로 주인공은 자신의 꿈인 영화감독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하지만 노력에 맞는 결과는 나오지 않고 있어서 고민이었다. 누군가는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현실을 살고, 누군가는 꿈을 위해 힘든 현실을 살고 있다.
두 모습은 극과 극의 모습이지만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모습이었다. 그런 쇼코와 주인공을 보며 나는 자연스럽게 나의 삶을 되돌아 봤다.
미카엘라에서는 세월호 사건을 다루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세월호 사건을 과거로만 보고 세월호 사건으로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을 비판하기 시작하는 사회를 직,간접적으로 보여주면서 대중들을 비판했다. 특히 매인 인물인 딸의 이름을 미카엘라라는 흔하디 흔한 이름으로 설정해 세월호 같은 사건의 피해자는 누구나 될 수 있다. 라는 것을 글을 이용해 말해주는 방식이 특이하게 느껴졌다.
쇼코의 미소는 전체적으로 사회를 비판하고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되돌아보도록 하는 책인 것 같았다.

오만과 편견 (세계문학전집 88)

도서명 : 오만과 편견 

  : 김교수님과 다섯 제자 

한지민 1512090

  : 2019.10.01. ~ 2019.11.05. 

나의 주차별 활동

1주차

오만과 편견을 중심으로줄거리와 등장인물의 담화 분석

크게 제인과 빙리엘리자베스와 다아시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 하였다제인은 수동적이고 순응적인 인물로 그려지며 그에 상대적으로 보았을  엘리자베스는 진취적이며 능동적이고 저항하는 인물로 그려진다제인은 착한 성품을 가진 인물이지만 빙리와의 관계에서 주도적인 역할이 아닌 주변 상황과 인물에 수동적인 모습을 보여준다제인을 통해 작가는 당시 18세기의 전형적인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고생각한다엘리자베스와 다아시의 관계를 본다면 다아시는 오만의 캐릭터이며 엘리자베스는 편견의 캐릭터이다하지만 다아시가 베넷가를 폄하하는 부분은 다아시가 오만과 편견을   가지고 있다고   있다이처럼 둘의 관계를 통해 우리도 인간 관계에서 충분히 의도하지않아도 오만과 편견을 낳을  있다는 것을 느꼈다.  

2주차

오만과 편견에 등장하는 여성인물의 결혼관가족결혼부와 권력여성성에 대해

여러 여성 인물들의 다양한 결혼관  엘리자베스의 친구 샬롯 캐릭터가 가장 눈에 들어왔다샬롯은 훌륭한 성품과 지성을 소유한 여성상으로 그려지지만 외모와 재력 등에서는 내세울 것도 없기에 엘리자베스에게 고백하고 거절당한 콜린스 목사와 결혼한다엘리자베스에게는 콜린스와의 결혼이 경제적으로 보장되어있음에도 물질에 얽매이지 않고 본인만의 주관으로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쉽지않았을 것이다또한 샬롯의 선택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자신의 행복이 보장되어있지 않음에도 물질적인 여유와 부유한 생활의 보장으로 내린 선택면으로 말이다하지만  속에선 행복과 미래는 불투명하더라도 당시 권력과 지위는 재력으로 이어지던 18세기 시기에선 샬롯이  선택이 최적이었음을 보여준다.

3주차

오만과 편견에 반영된 사회상 비교작가 제인 오스틴의 사회인식  여성주의를 중심으로

제인 오스틴의 작품들은 대부분 결혼 또는 결혼의 조건이라는 것이 중요한 요소들로 등장한다당시 결혼은 현대와 같이 평등한 관계에서이루어지는 사랑의 결실이 아니며 여성들이 본인의 직업을 가지고 경제적으로 능력이 있는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시대상이기에조건에 의한 불평등한 계약과도 같았다그렇기에 제인 오스틴은 이를 주제로하여 작품을 그려냈고 당시 여성들의 결혼에 이르는 현실적인 선택과 과정을  그려냈다엘리자베스제인샬롯  그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선택여성성 그리고 스스로 인식하고 극복해 가는 모습을 통해 작가 제인 오스틴의 여성주의에 대한 의견을 작품과 등장인물을 통해 보여주었다.

4주차

소설과 영화의 비교 고찰함께 영화 관람  비교 고찰

확실히 책에서 보여주는 스토리를 영화에  담아낼  없다등장인물 구성 또한 차이가 있었며 스토리또한 영화에 맞추어  흥미롭게각색된 부분이 많았다소설은 독자의 상상력을 요구하여 오로지 장면은 우리의 상상력으로만 채워지지만 영화는 영상  실제 인물에 시대적 배경 또한 우리 눈으로 입체감과 명도를 확인   있어 둘의 다른 매력이 존재한다또한 원작 소설에선 다양한 복선과 세세한 전개사항을 모두 열거 하지만 영화의 오만과 편견에선 관람객의 긴장과 시선을 사로잡아야하기에   불필요한 전개사항이 추가되지않았나느꼈다.  

 

쇼코의 미소 (최은영 소설)

최은영 작가의 단편소설집 쇼코의 미소를 읽었다. 우리 팀은 모든 소설들을 토론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거라고 판단했고 단편소설들 중 쇼코의 미소와 미카엘라를 선정해 토론을 진행하였다. 쇼코의 미소의 경우 주인공과 쇼코의 미묘한 관계를 굉장히 잘 나타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생 때 학교 프로그램으로 만나 인연이 시작 된 둘, 주인공은 처음에 쇼코를 굉장히 어른스러운 아이라고 인식했지만 자라면서 쇼코의 미소를 비롯한 어른스럽다고 생각한 행동들이 사실은 서툴고 상처 많은 아이의 방어적 행동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야기가 진행될 수록 쇼코와 주인공이 점점 동일화 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 섬세한 표현들이 책을 읽으며 가장 좋았다. 또한 결론까지 읽으며 나의 삶도 돌아보게 됐다. 상처와 고민많던 20대의 청년층들의 삶을 보게 해주게 만들기 때문이다. 집안 사정 때문에 꿈과 대학을 포기한 쇼코,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지만 점점 길을 잃고 피폐해져가는 주인공은 20대들의 현실적인 삶을 과감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를 읽으며 나의 삶과 인물들의 삶의 공통적인 부분을 발견하며 그 공통적인 부분으로도 위로를 받게됐다.
반면에 미카엘라는 과거 ‘세월호 사건’을 담은 이야기이다. 개인적으로 엄마와 딸의 관계보다는 세월호에 대한 대중들의 변해버린 차가운 반응들, 또한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보였다. 그들의 힘들고 고통스러운 감정들은 여전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들은 이제 지겹다는 반응이다. 이에 대해 나의 태도들도 돌아보게 됐다. 또한 엄마와 딸의 관계로 나와 엄마의 관계도 생각하게 됐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에게 더 솔직히기 힘들어하며 상처주는 말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상대가 떠나간 뒤 많은 후회를 한다. 이 미카엘라를 읽으며 가까운 사람에게 애정을 품고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쇼코의 미소 (최은영 소설)

 “불에 타다 만 발바닥 / 등이 꺼져버린 하이웨이 위의 가로등 / 썩었으되, 그것뿐인 씨앗 / 발을 맞춰 걷지 못하는 군인 / 의욕없는 독자재 / 전형의 반대말 그러나 … 전형 / 이럴 줄 알았다는 말의 이상한 말의 메아리 / 얼어죽기 직전까지 바닥을 찍는 비둘기 / 나. 쇼코
 쇼코의 미소는 최은영 소설가의 단편을 묶은 소설집이다. 그 중 <쇼코의 미소>는 2013년 작가세계에서 신인상을 받은 작품이다. 작품은 주인공인 ‘소유’는 할아버지와 엄마와 같이 살고 있다. 그러다 고등학생 때 일본에서 교환학생 신분으로 한국을 찾은 ‘쇼코’와 한 집에서 살게 된다. 쇼코는 할아버지와 돈독한 관계를 맺으며 편지를 주고 받는 정도로 가까워졌다. 그렇게 여운을 남기고 쇼코는 떠난다. 그 후 주인공인 소유는 작가라는 꿈을 향해 정진하지만 좀처럼 일이 풀리지 않는다. 끝없는 도전과 실패 속에서 지쳐가던 소유는 우연히 쇼코의 소식을 접한다. 그러나 쇼코는 고등학생 때보다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었다. 편찮으신 할아버지를 돌보며 자신의 환경을 개선하려는 의지가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그런 쇼코는 자신을 불에 타다 만 발바닥, 썩었으되 그것뿐인 씨앗 등으로 묘사했다. 그러던 중 소유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는데 이후 할아버지와 편지를 주고 받았던 쇼코를 통해 할아버지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당장 쇼코를 잃어버린다고 해도 내 일상이 달라질 수는 없었다. 쇼코는 내 고용인도 아니었고, 나와 일상을 공유하는 대학 동기도 아니었고, 가까운 동네 친구도 아니었다. 일상이라는 기계를 돌리는 단순한 톱니바퀴들 속에 쇼코는 끼지 못했다. 진심으로, 쇼코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종종 낯선 사람에게서 편안함을 느끼는 경험을 한다. 나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사람, 나의 일상에 영향력을 끼칠 수 없는 존재. 그런 곳에 털어놓음으로서 후련함을 느낄 수는 있지만 그 뿐이다. 쇼코와 소유의 관계처럼 서로의 일상은 각자가 굴려야 하는 것이고 둘은 맞물려 돌아가지 않는다. 작은 위기에도 깨질 수 있는 관계인 줄 알았으나 의외로 그런 관계에서 서로에 대해 잘 아는 경우도 있다. 일상에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사람이니까 할 말 못 할 말을 다 털어놓으니 의아하게도 다른 사람보다 서로를 더 잘 아는 것이다.
 이 작품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 싶은 작품의 주제는 완벽한 타인은 없다는 것이다. 완벽한 타인, 서로에게 관여할 수 없다고 생각된 쇼코와 소유의 관계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 영향력을 끼친다. 소유가 할아버지의 죽음 후에 그에 대한 부정적 생각으로 덮여 있을 때 쇼코가 할아버지가 그녀에게 보여줬던 모습을 소유와 공유한다. 그런 행위를 통해 소유 속 할아버지의 인식이 긍정적으로 변화한다. 완벽한 타인만이 알고 있는 익숙한 사람의 속내란 아주 이상하게 들린다. 하지만 작가는 그에 맞는 인물을 배치함으로서 주제를 구체화 하였다. 결국 서사의 마지막에서는 그런 것이 구체적으로 드러났으므로 본 작품의 주제는 “완벽한 타인은 없다.”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