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애는 내 딸이니까, 우리는 가족이니까. ”
# 1 『딸에 대하여』 줄거리
『딸에 대하여』 는 요양
보호사로 일하는 엄마와 그녀의 동성애자 딸의 이야기를 담고있다.
교수였던
엄마는 홀로 딸을 키우기 위해 온갖 궂은 일을 하다 끝내 요양원에서 일하게 되고 젠이라는 할머니의 보호사가 된다.
젠은 젊었을 때 전 세계를 찾아다니며 사회에 공헌 했던 여성이다. 그러나 그녀의 말로는
비참하다. 가족도, 찾아오는 이도 없이 치매에 걸린 체 요양원에
맡겨지고 그녀의 늙은 몸에는 욕창과 검버섯만이 찾아온다.
엄마는
이런 젠의 모습에서 딸을 본다. 딸애가 남을 위해 젊은 날의 귀한 힘과 정성, 마음과 시간을 낭비하는 것만 같아 걱정되고, 여자를 좋아하기 때문에
온전한 가정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또 무슨 후회할 일에 힘과 시간을 낭비하려는 것일까.”
그런
엄마의 집으로 넉 달치 월세와 생활비를 내겠다며 집을 나갔던 딸애와 딸의 연인인 ‘그 애’가 들어온다. 엄마는
딸의 동성 연인을 당장 내쫓고 싶지만 당장 넉 달치 돈을 지불했기 때문에 나가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그 애를 내보낼 수가 없다. 그로 인해 엄마와 딸, 그 애가 한 지붕아래 살게 되고 엄마의 근심은 늘어간다.
“지금의 나는 그럴 자격이 없다. 딸애를 세상에 데려왔다는
사실. 그것만으로 자격이 유지되던 시절은 끝났다. 이제 그것은
끊임없이 갱신되고 나는 이제 그럴 능력도 기운도 없다. 그건 그 애들도 마찬가지다. 입이 벌어질 만한 액수를 들이대며 그만 우리를 이해해 달라고 요구한다면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단순히 돈으로 셈할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돈에 대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
그러던 어느 날 엄마는 딸이 일했던 학교를 지나가게 되고 그 주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다. 무수히 많은 군중들이 분노에 찬 상태로 서로 뒤섞여 있다. 한
편에서는 신성한 대학에 동성애가 웬 말이냐며 외치고 있으며 압도적으로 수가 적은 다른 한편에서는 개인의 성적취향을 이유로 해고하는 것은 부당하다 외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를 경찰과 의경들이 가로 막고 있다. 엄마는
본능적으로 딸이 저 먼 연단 위에 있음을 직감하지만 늙은 몸으로는 분노한 젊은이들 사이를 뚫고 다가갈 수 없었다.
그 순간 사람들은 연단 위로 돌을 던지고 시위하던 사람들을 끌어내어 폭력을 행사한다. 엄마는
공황상태에 빠지고 만다. 그 어느 편에서도 설 수 없었던 엄마는 세상에게 비난 받고 매장당하는 딸의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됨으로써 동성애를 인정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와 상관없이 사람이 잘하는 것은 하게 두어야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엄마의 가치관에 따른 것이 아닌 오로지 딸을 지켜야 한다는 모성애로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그 이야기도 듣는다. 듣고, 또 듣고 계속 듣는다. 얼마나 들어야 나도 비로소 어떤 말인가를
시작할 수 있을까.
나는 내 딸이 이렇게 차별받는 게 속이 상해요. 공부도
많이 하고 아는 것도 많은 그 애가 일터에서 쫓겨나고 돈 앞에서 쩔쩔매다가 가난 속에 처박히고 늙어서까지 나처럼 이런 고된 육체노동 속에 내던져질까
봐 두려워요. 그건 내 딸이 여자를 좋아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잖아요. 난 이 애들을 이해해 달라고 사정하는 게 아니에요. 다만 이 애들이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두고 그만한 대우를 해 주는 것. 내가 바라는 건 그게 전부에요.
이를테면 그런 이야기를 나도 소리 내어 말할 수 있게 될까. 딸애에
대한 두려움과 서운함, 배신감과 노여움 같은, 어떤 감정이라
할 만한 것들이 다 빠져나가고, 그 애들이 서 있는 자리가 바로 가차 없는 세계의 한가운데라는 걸 말할
수 있게 될까. “
같은
시각 젠 역시 요양원의 외면을 받으며 점차 궁지로 내몰리는데 엄마는 그 전과는 달라진 생각으로 젠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더 이상 내 일과 남 일을 구별하며 외면하지 않고 엄마 또한 남 일을 곧 내 일같이, 가족이 아닌 사람도 가족처럼 챙기기 시작한다. 이는 엄마가 기존에
이해 못하던 딸의 행동을 하게 됨으로써 이해의 첫 단추가 끼워지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 말을 하는 동안 나는 젠이 아니라 나를 생각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내가 아니라 딸애를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건 세상의
일이 아니고 바로 내 일이다.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나의 일이다. 이런
말이 내 안의 어딘가에 있었다는 게 놀랍다. 그런 말이 깊은 곳에 가라앉아 죽을 때까지 드러나지 않는
게 아니라, 마침내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이렇게 말이 되어 나온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2 『딸에 대하여』 에 대한 나의 감상
평범하지
않은 그들의 이야기는 결코 우리와 먼 세상의 이야기가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여느 엄마와 딸이라면
모두 공감 가능한 갈등과 화해를 말하고 있다. 나 역시도 이러한 점 때문에 이 소설을 더 흥미롭게 생각하고
많은 부분에 공감하며 읽은 것 같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어른이 되어갈수록 나도 모르게
엄마와 사소한 것부터 부딫히는 일들이 늘어갔다. 책 속 엄마의 대사처럼 어렸을 때는 엄마의 말씀이, 그리고 엄마의 품 안이 내 세상의 전부였지만 어느새 커버린 나는 나만의 세상을 찾고 나만의 가치관을 갖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부모님은 예고도 없이 훌쩍 커버려 뜻대로 되지 않는 딸에게 서운할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아빠는 말을 아끼며 서운함을 속으로 삼켰고 엄마는 더욱 나무라며 서운함을 표현했다. 그래서 아빠보다 엄마랑 더 많이 부딫혔는지도 모르겠다.
남이라면 나와 다른 생각, 다른 생활 방식을 가진
사람과 부딫힐 필요가 없다. 그냥 거리를 두면 그만이다. 그러나
가족은 그렇지 않다. 아니, 자식은 그렇지 않다. 자식은 오히려 성인이 된 후 어느 시점부터는 부모의 품을 쉽게 떠날 수 있다.
하지만 부모는, 특히 엄마는 자식을 쉽게 떼어낼 수 없다.
그것이 바로 모성 아닐까? 아마도 “딸에 대하여” 속의 엄마도 나의 엄마도 자신과는 너무 다르게 커버린 딸애지만 차마 떼어낼 수 없고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이토록 모든 갈등을 힘들게 감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식은 모른다.
엄마가 엄마라서 얼마나 많은 것을 참고 견디는지 또 사랑하는 딸이라서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먼 훗날 엄마가 되어보기 전까진 알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모든 딸들에게 읽어 볼 것을 권한다. 이
책은 엄마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 는 없지만 그동안 잔소리로만 느껴졌던 엄마의 말들이 결국 사랑하기 때문에, 내 딸이 더
잘 살기를 바라기 때문임을 느끼게 해줄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