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 홀릭 (되새길수록 좋은 서울의 한옥마을 이야기)
무엇보다 저자가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은 ‘보존은 선善 이고 개발은 악惡일까?’이다. 북촌의 관광 상업화 문제에 대해서 몇몇의 상인들은 관광객들을 유치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선택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역사를 활용하고 새로운 콘텐츠를 만드는 것보다 ‘있는 그대로’가 가장 좋은 콘텐츠라고 주장하는 동네의 젊은 층들이 있었다.
서촌은 ‘세종 마을’이라는 새로운 지역명칭으로 바뀔 뻔했다. 하지만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 되었다. 새로 만들어진 말보다 이곳에서 먹고사는 주민이 편하게 사용하는 지역명을 지키고 싶어하는 경향을 엿볼 수 있다. 이런 차이는 개발중심인 모더니즘과 무질서하면서도 유기적으로 변화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차이와도 비슷하다. 역사보존은 단순한 미적 낭만주의가 아닌 고정관념이라는 무게감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아나가는 해방적 행위이다. 중요한 것은 선악이 아니라 ‘소통의 방법’, 소통하는 과정에 ‘보존 선’에 대한 희망을 주며 공감대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태평천하 (베스트셀러한국문학선 11)
도쿄 미술관 예술산책 (크리에이티브 여행가를 위한)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애거서 크리스티 에디터스 초이스, 애거서 크리스티 장편 소설)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는 처음에 인물 관계만 잘 파악하면, 이후에는 술술 읽히는데, 그 이유가 뚜렷한 인물의 개성과 성격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1939년에 출간되었음에도 최근 인물 이론에 넣어도 전혀 무리가 없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이들에게 살해될 수 있다는 생존이라는 공통된 압력을 가하면서, 다양한 반응을 제시한다. 이 압력에 대한 그들의 다양한 반응은 그들이 죽는 순간, 심지어 범인의 동기까지도 일관되어, 독자가 캐릭터에 몰입하거나 캐릭터를 이해하는데 무리가 없도록 한다. 한 세기 가까이 이 작품에 대한 찬사가 끊이지 않는 이유는 뚜렷한 개성을 지닌 주인공과, 이러한 개성을 성급하게 풀지 않고, 서서히 드러내는 작가의 철저한 설계라고 생각된다.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1 (빛이 있는 동안,유작 소설집,완전판,애거서 크리스티 단편집)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단 한 번도 페미니즘 운동이 여성들만의 것이라도, 그래야만 한다고도 생각해본 적 없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소녀든 소년이든 모두가 페미니즘에 한 발 더 다가오게 설득하지 못하면 페미니즘 운동이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확신했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몸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주어 여성들도 나이듦을 좀더 긍정적인 경험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지만 가부장제 사회에서 나이든 여성으로서의 현실, 특히 생물학적으로 더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는 현실과 직면하자, 수많은 여성들이 여성미를 정의하는 고루한 성차별주의적인 기준을 다시 받아들였다.
…(중략)…
페미니즘 운동으로 수많은 유형의 여성 친화적인 잡지가 속속 발간되었지만 페미니즘을 지향하는 어떤 패션잡지에서도 미의 기준을 대체할 만한 이상형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대안도 없이 성차별주의적인 이미지만 비난한다면 그것은 실패한 개입이다. 비판만으로는 달라지지 않는다. 사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아름다움의 기준을 비판해왔지만, 여성들은 뭐가 건강한 선택인지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을 뿐이다. 나는 중년에 접어들면서 그 어느 때보다 체중이 늘었으나 자기혐오에 찌든 성차별주의적 몸매를 목표로 삼지 않고 체중을 줄이기로 했다.
비행운 (김애란 소설집)
어린 왕자 (Le Petit Prince)
너도 어른처럼 말하는구나
여섯 번째 별에는 커다란 책을 쓰고 있는 노신사가 하나 있다. 그는 별을 찾아온 어린 왕자에게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지리학자는 너무 중요한 사람이어서 나돌아 다닐 수가 없어. 지리학자는 자기 서재를 떠나지 않는단다. 그러나 서재에서 탐험가를 맞이하지. 그들에게 질문을 하고 그들의 기억을 기록하는 거야. 그러다가 그들 가운데 한 탐험가가 흥미로운 기억을 얘기하면 그 탐험가의 품행을 조사하게 되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황현산 옮김,『어린왕자』, 열린책들, 2015 (전자책)
어린 나에게 『어린왕자』는 이상한 그림을 그려놓고 보아뱀이 들었다고 억지를 부리는 이야기에 불과했다. 오랜만에 어린왕자를 다시 찾아갈 기회가 생겼고, 어린왕자는 아직 그곳에 있었다. 그리곤 나에게 실천 없는 공부가 무슨 쓸모냐고 물었다. 어른이 되어버려서일까. 대답할 수 없었다. 서재를 떠나지 않은 채 방 안에서 조사만 하고 있는 ‘지리학자’를 타자화 하기에 나는 그와 너무나 닮아 있었다. 책 속으로, 이론 속으로 파고들었던 것은 해결을 위해서가 아니라 맞서기 두려워 회피한 것일지도 몰랐다.
되묻자면 문제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막연한 불안이 싫어 더 막연한 문학을 붙잡았을 뿐이다. 너는 무엇을 할 거니?라는 질문에 서로가 적당히 만족해 뒤로 물러날 수 있는 답을 줄 수 있도록 말이다. 내게 문학이란 너무 막연하지도 않으면서도 이 세상을 위해 너무 열심히 살지 않을 거라는 다짐 같은 것. 그런 거였다. 문학을 하고 싶다는 말은 너의 쓸모가 무엇이냐는 말에 대답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고, 나의 쓸모를 너에게 증명하고 싶지도 않다는 말이기도 했다.
되돌아가기에도 어색해질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대부분의 시간을 그냥 그렇게 보냈고 달라진 게 무엇이 있냐고 물으면 어른이 되었다. 라고 밖에는 대답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너와 나의 관계, 소중함 그런 것들을 잊어(혹은 잃어)버릴 정도로 충분히 급급한 삶에 놓여 버렸다. 여우 한 마리를 길들이는 데에도 내가 가진 시간과 여유를 계산하고 있었다. 너와 나의 관계가 가져올 특별함보단 내가 가진 것들 중 포기해야 할 것을 계산하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열심히는 살았다. 그런데 어린왕자의 눈을 다시 보자니 한없이 부끄럽다. 어린왕자의 억지가 이제는 억지스럽지가 않다. 그래서 어른을 위한 동화라고 했던 걸까. 문학은 오늘도 나에게 정답을 주지 않는다. 방황하다 답을 찾기 위해 들어간 곳에는 또 다른 방황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문학에서 쓸모를 찾는 내 모습을 어린왕자가 봤다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 거다.
<너도 어른처럼 말하는구나>
자존감 수업 (하루에 하나, 나를 사랑하게 되는 자존감 회복 훈련)
제목: 나에게 집중하기
자존감이라는 키워드로 이 책을 읽으려고 한 것이었는데 프롤로그를 보면서 공감되는 부분도 많았고 빨리 책을 읽고 싶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자존감과 행복은 아예 연관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행복은 다른 사람의 사랑으로 생겨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 스스로를 다져 나아가야 하는 자존감과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사랑은 감정이며 관심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나는 호불호가 분명한 편이라고 생각해서 나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필자가 구체적으로 [장점과 단점, 잘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 타인이 말하는 내가 잘하는 것]을 써보는 자존감 향상을 위해 오늘 할 일로 제시 한 것을 보고 정작 나는 나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것들에 대한 답을 바로바로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책에서는 ‘자존감 향상을 위해 오늘 할 일‘이라는 주제로 좋은 것들을 많이 제시하고 있다. 그 중 ‘자기 자신에게 사과하기’를 직접 할 때는 뭔가 울컥하는 느낌이 든다. 왜 필자가 변명이나 구실을 덧붙이지 말자고 했는지 알 것 같다. “내가 ~해서 널 미워한거야.”라고 덧붙이게 되면 과거의 자존감 낮은 상태에서 변화하지 못하고 그 상태에 머무를 뿐이기 때문이다. 그냥 “널 미워해서 미안해.”라고 말하면 내면 깊은 곳에 있는 나에게까지 마음이 전해진듯한, 울림을 주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가치 및 과정과 평가에 대한 관점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자신을 존중해야 하는 것을 알지만 다른 사람에게 쓸모 있는 존재로 인정받고 사랑받아야만 가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가치는 반드시 누구에게 인정받아야만 찾을 수 있는게 아니라고 한다. 필자는 이를 위한 방안을 제시해준다. “과정에 몰입하기”이다. 평가는 나중의 일이고 과정은 현재의 일이어서 과정에 집중한다는 것은 오늘 할 일에만 집중한다는 것이라고 제시해준다. 즉, 과정에 집중하는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의 나에게 집중할 수 있고, 자존감은 내가 내 마음에 얼마나 마음에 드느냐 이기 때문에 타인의 평가가 아닌 자신의 평가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나는 결과보다 과정이 더 가치 있는 것이라고 여겨왔다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며 과정보다 평가에 집중한 모순적인 모습으로 지내온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내 정체성은 하나가 아니다’라는 부분을 읽으면서 꽉 막혀있던 관점이 어느 정도 풀리게 되었다. 나는 사람의 정체성은 하나지만 어떤 사람이 상대방이냐에 따라 내 모습, 성격이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런 관점과 함께 들었던 역설적인 생각이 있었다. 나는 가족들에게는 너무 무뚝뚝한 편이다. 친한 친구들 앞에서는 어색하지 않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전하는 편이고 메시지를 주고받을 때도 이모티콘도 엄청 많이 쓰고 받침 있는 말투를 종종 쓰는데 가족들에게는 친구들에 비해 그렇게 많이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진짜 못되고 다중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을 항상 지녀서 힘들었다. 물론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표현을 못하는 것은 좋지 못한 모습이지만 그래도 이 글을 보면서 ‘가족에 대한 정체성은 떨어지구나..’라고 생각하며 나의 전체(정체성)를 일반화하여 미워하지 말기로 노력하자고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