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의 열쇠는 홀로코스트 소설이다. 제2차 세계대전 나찌 정부가 들어선 프랑스는 자국 내의 모든 유태인을 색출해 낸다. 경륜경기장에 갇힌 그들은 물도 화장실도 없는 극한의 상황에서 죽어간다. 사라는 금방 올 거라고 동생을 안심시키고 다락방에 가둔다. 그리고 탈출, 친절한 노부부의 도움으로 파리로 가서 동생의 죽음을 목도한다. 이 끔직한 학살행위는 독일에서가 아닌 프랑스 정부하에서 이루어졌음을 우리는 간과 하고 있었다. 대개의 경우 유태인 대학살은 독일의 게슈타포의 만행만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프랑스는 아프지만 기억해야할 역사의 현장인 벨로드롬을 철거하고 건물을 지어버렸다. 한 권의 소설책을 통해서 진실된 역사 앞에서 성찰 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쥐 (합본)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살아갈 이유를 찾아야 해.’
내가 홀로코스트를 다룬 책들을 찾아보기 시작한 것은 ‘더 라스트 오브 어스’라는 게임에서 나온 위 대사를 듣고 난 후부터였다. 게임 속 좀비 바이러스로 황폐해진 사회에서 사람과 좀비를 끊임없이 죽이며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생존자들의 마지막 대화인데, 나는 게임을 하는 내내 살기 위해 죽이는 삶을 살면서까지 살아가야 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었다. 왜 그렇게까지 살아야 할까? 그 이유가 무엇인가? 만약 살아갈 이유가 없다면 죽어도 좋지 않은가? 삶의 이유를 왜 찾아야 하지? 나는 그 이유를 찾거나, 찾지 않을 이유를 찾기 위해 아무 이유 없이 죽어가야 했던 유대인들의 삶을 살펴보기로 했다. ‘쥐’는 이러한 목적을 가진 이들에게 훌륭한 지침서가 되어 줄 것이 분명하다.
조금은 섬뜩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 그림체로 그려진 이 책은, 유대인을 쥐로 그려내고 있다. 물론 나치는 쥐를 잡는 고양이로 나온다. 쥐. 먹이사슬 하위 층에 있는 동물, 보기만 해도 혐오스럽고 죽이는 것이 급한 동물. 유대인들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쥐만도 못한 삶을 살았음이 분명하다. 홀로코스트를 조금만 살펴보아도 그에 대한 반증은 수두룩하다. 그 당시 수용소로 잡혀갔던 유대인들은 어떤 삶을 살던 사람들이었을까? 화목한 가정을 꾸려 행복하게 살기도, 우울증에 빠져 삶의 고비를 넘나들기도, 아무런 생각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기도 하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삶의 목표나 이유를 찾기도 전에 나치에 의해서 무차별적으로 죽어나간다. 왜 톱밥 섞인 빵을 먹으며 하루 종일 일을 해야 하는지도, 더 이상 일을 하지 못하면 죽임 당하는지도, 명령에 불복종하면 공개처형 당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이대로 살 바에는 죽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힌 유대인들의 유일한 삶의 목표는 살아 돌아가는 것이 되었다.
죽느니만 못한 삶. 유대인들은 수용소에서 딱 그런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하루라도 더 살기 위해서 아직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하고, 티푸스에 걸려도 일어나 일을 한다. 힘들게 하루 더 살 바에야 편하게 하루 일찍 죽는 게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살려고 발버둥 친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 돌아가겠다는 신념 하나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버틴다. 누군가가 죽음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상황에 처한다면, 앞뒤 불문하고 그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은 살기 위해 하는 행동이 된다. 본능적으로 사람을 살기를 원한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왜 살고 싶을까? 혹시 아무도 알 수 없는 죽은 그다음이 두렵기 때문은 아닐까. 아니면 나에게 소중한 존재를 계속 보고 싶기 때문에? 책의 주인공은 또 다른 수용소에 갇힌 부인을 만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생존한다. 이 책은 수용소의 유대인들이 살아가는 끔찍한 광경을 덤덤하게 풀어내며 그들이 살아야 하는 저마다의 이유, 홀로코스트의 참혹한 진상, 살아남은 후의 삶의 태도를 보여주고 나아가 읽는 이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난 혼자서 빈 집에 들어갔어. 우린 둘 다 우유를 정말 실컷 마시고는 밖을 둘러봤지. 쉬베크는 농촌 출신이었거든. 그는 날마다 닭 한 마리씩을 잡고 젖소에게서 우유도 짜냈지. “자! 이제 다시 사람 같아 보이는구나!” “나도 그래. 단지 끅!- 구역질이 나는 것만 빼놓고 말이야.” 우리 위가 우유와 닭을 먹고 충격을 받은 거였어. 우린 심한 설사를 했지.’ -p.111
늘 빵 한 조각과 수프로 끼니를 해결해야 했던 유대인의 위는 우유와 닭을 버티지 못할 만큼 상해 있었다. 나는 아플 때 쉴 수 있음에 감사하고, 배고플 때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하고, 아직 살아있음에 다행임을 느꼈다. 저 사람들은 나보다 더 불행하니 내 불행은 아무것도 아니야, 이런 것이 아니다. 불행한 와중이라도 그저 의지가 닿는 한, 억압받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에 안도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삶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삶의 이유를 찾을 수도, 더욱 절망감에 빠질 수도 있지만 어찌 되었든 삶이라는 것을 주체적으로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지고도 자유롭게 살지 못했던 유대인들. 그들의 역사를 누군가는 기억해야 할 것이고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그 행보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살아가는 모습, 그 모습이 지닌 주체성, 그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와 삶의 목적이 사는 것이 된 경위를 생각해 보라. 삶의 모든 것에 있어 방황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번 읽어보기를 추천하면서 글을 마친다.
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세계 역사 1001 DAYS
고분벽화로 본 고구려 이야기
도쿄 룸 셰어라이프 (세 여자의 코믹 동거 에세이)
서울 1964년 겨울 (한국남북문학100선 35)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은 1960년대 당시,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의 진행으로 인해 발생한 인간소외를 표현한 작품이다. 1964년의 겨울, 서울의 선술집에서 극중 화자인 김형은 나이 말고는 모든 것이 상반되는 안형과 술을 마시게 된다. 이들 일행에 합류한 36세의 가난뱅이.
갑작스러운 병을 얻어 죽은 아내의 시체를 병원에 팔아 갑작스럽게 큰 돈을 가지게 된 사내는, 죄책감과 우울감에 괴로워했고, 돈을 다써버리기로 결심한다.
막상 돈을 쓰려고 해도 못쓰고 방황하던 그들은, 우연히 지나가는 소방차를 보고, 택시를 타고 불구경을 하러가기로 결정한다. 불구경을 하던 중 사내는 남은 돈을 불속으로 던져버렸다.
사내의 부탁대로 돈을 다 쓰자, 김형과 안형은 돌아가려 했지만, 사내는 혼자 있기 무섭다며 같이 있어 달라 애원을 하고, 결국 그들은 같이 여관에 들어갔다. 하지만 사내의 바램과 다르게 안형의 단호함으로 그들은 각자 다른 방에 투숙한다.
다음날 아침에 안형은 김형을 깨워 사내의 자살소식을 알리고, 그들은 황급히 자리를 뜨며 소설은 마무리가 된다.
그들에게 사실이란 무엇일까?
선술집에서 시작한 김형과 안형의 문답은 되게 독특하면서도 일반적으로 생각하지 않는것들이다. 그들은 남들이 보기에 되게 필요없는 내용들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그들의 현실에 대한 이야기는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을수 없다.
p.10
“안 형, 파리를 사랑하십니까?”
이들이 말하는 파리는, 우리의 이상속에 있는 ‘프랑스, 파리‘가 아닌, 그냥 우리의 현실속의 곤충, 파리다. 김형에게 파리는, 날 수 있음에도 동시에 내손에 붙잡힐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김형과 안형은 이렇게 그들만의 색다르고 독특한 관점으로 사과 거짓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들은 사실을 열거하는 문답식으로 대화를 이끌어 간다. 그러면서 그들은 서로를 존중하기 시작한다. 이 대화들은 개인주의와 그로인한 소외감이라는 주제와 더욱 대비된다. 이렇게 사실들을 이야기하며, 현실에 대한 대화를 이어가던 그들도, 소설의 마지막 부분인 여관에 들어가는 장면에서, 단호한 개인주의, 이기주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p.45
“모두 같은 방에 들기로 하는것이 어떻겠어요?”
(중략…)
“난 아주 피곤합니다. 하시고 싶으면 두 분이나 하세요.” 하고 안은 말하고나서 자기의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중략…)
숙박계에는 거짓 이름, 거짓 주소, 거짓 나이, 거짓 직업을 쓰고나서 사환이 가져다 놓은 자리끼를 마시고 나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지독한 고독감과 소외감에 찌든 사내의 부탁을 칼같이 거절하며, 그들은 숙박계에 거짓된 정보를 작성한다. 그렇게 끊임없이 사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사물을 보는 관점을 다르게 생각하던 그들도, 현대 이기주의, 개인주의 사회에 완벽하게 적응했다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안형과 김형은 현대 개인주의 사회의 일원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사내가 돈은 얼마든지 있다며, 같이 시간을 보내달라 할때는 아무런 손해도 없고, 같이 돈을 쓸수 있다는 이익만 있으니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지만, 사내가 돈을 다쓰고, 36세의 거렁뱅이로 돌아왔을때는, 사내와의 관계에서 철저한 거리를 두며 그를 자신의 틀에서 완벽하게 제외시킨다. 이상적으로는 진실에 대해 탐구하던 그들도, 정작 현실에서는 거짓 정보를 작성하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서 1960년대의 개인주의 사회를 잘 표현한 작품인것 같다.
혈의 누 (이인직 소설선)
한국 계몽의 영웅, 옥련
혈의누, 보통 개화기 때의 과도적 성격을 지닌 신소설이자, 친일파인 이인직이 쓴 이 소설을 읽고 나는 이 소설을 조금 다르게 봤다. 청일전쟁이라는 비운의 전시상황에서 가족을 잃고 시련을 받는 옥련이가 시련을 견뎌내고 성장하는 영웅소설로 해석 해보았다.
옥련이는 다른 영웅들과는 다르게 비범한 출생을 하지는 않았지만, 청일전쟁 때문에 가족과 생이별을 하고 가족들의 생사도 모르는 시련을 겪는다. 게다가 다리에 일본군의 총까지 맞는 불상사 까지 겪지만, 일본군의 호의로 치료를 받는다. 야전병원에서 군의 이노우에 소좌가 옥련을 불쌍히 여겨 옥련을 양녀로 삼고, 편지 한통을 써 일곱 살의 옥련을 일본 오사카의 자신의 집으로 보내 자식이 없는 부인에게 보낸다. 이렇게 하나의 전시상황이라는 시련을 조력자의 도움으로 극복하며, 옥련은 일본 오사카에서 학교를 다니게 된다. 옥련은 일본에 온지 반년만에 일본어를 능통하게 하고, 학교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는 등, 총명함이 두드러지며, 이노우에 부인의 자랑거리가 된다. 옥련의 총명함은 일반 영웅소설에 비해서는 그리 비범한 능력은 아니지만, 혈의 누라는 계몽적인 성격을 가진 이러한 소설에서는 근대화에 필요한 지식을 배워가는 총명함은 그 어떤 능력보다 비범하다고 생각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던 중 이노우에 군의가 죽게 되고, 옥련과 이노우에 부인과의 관계는 틀어지게 된다. 이노우에 부인은 옥련을 위해 시집도 아니 가고 옥련의 학교를 졸업시키지만, 날이 갈수록 옥련에 대한 원망과 미움은 커져만 간다. 이렇게 다시 시련이 생긴 옥련은 오사카를 도망쳐 나오던중 우연히 구완서를 만나게 되고, 여기서 또 다른 조력자인 구완서를 통해서 미국으로 유학을 가 학문적인 소양을 더욱 키우게 된다. 그러던 중 옥련은 뛰어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 하게되 신문에 실리게 되고, 그 신문을 통해 우연하게 아버지 김관일과 다시 만날 수 있게 된다. 김관일에게 어머니 춘애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안도한다.
김관일은 구완서에게 감사하며, 옥련이와의 혼인을 부탁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옥련이의 목표가 나온다.
p.74
옥련이는 아무리 조선 계집아이이나 학문도 있고 개명한 생각도 있고, 동서양으로 다니면서 문견이 높은지라. 서슴지 아니하고 혼인 언론을 대답을 하는데, (중략…) 옥련이는 공부를 힘써 하여 귀국한 뒤에 우리 나라 부인의 지식을 넓혀서 남자에게 압제받지 말고 남자와 동등한 권리를 찾게 하며, 또 부인도 나라에 유익한 백성이 되고 사회상에 명예 있는 사람이 되도록 교육할 마음이라.
이처럼 옥련이는 계몽사상의 선두두자로서 우리나라 조선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은, 아니 조선을 바꿔야 하는 개혁적, 계몽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우리는 「혈의 누」 의 옥련이를 이처럼 계몽영웅으로 평가 할 수 있지 않을까?
모두의 아두이노 (누구나 쉽게 배우는 전자 회로 공작과 프로그래밍)
빌러비드 (토니 모리슨 장편소설,Beloved)
토니 모리슨은 소설 내내 담담한 어조로 참혹한 사건을 늘어놓는다. 3대에 걸친 소설 속 여성들에게는 일상 속으로 녹아 삶 전체에 찐득하게 들러붙은 사건들이다.
‘글로 쓰기엔 분노는 너무 시시하고 연민은 너무 질척거리는 감정’이라던 토니 모리슨의 글쓰기 철학이 전반에 묻어나는 작품이었다.
흑인 여성이 쓴, 흑인 여성의 삶이 담긴 책은 처음 읽어보았는데 그 처음이 토니 모리슨이라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작 소설 한 권으로는 그들이 살아낸 시간들에 서려있는 감정을 모두 느끼기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토니 모리슨은 잠시 동안 세서의 등에 자라난 벚나무의 거친 줄기들을 상상하거나 덴버의 옆에 앉아 빌러비드의 기묘한 춤을 감상하기에 충분하게 만들었다.
1856년 켄터키 주의 도망 노예였던 마거릿 가너의 극단적인 실화를 바탕으로 태어난 책의 주인공들은 각자의 이야기를 페이지마다 토해낸다.
작가는 그녀들이 뱉어내는 독백을 이리저리 배치하여 초면인 그들의 불 꺼진 마음속을 해매이게 만든다.
지금 누구의 심장 위에서 어떤 부위를 밟고 서있는지를 끊임없이 생각해야한다. 아직 어린 세서의 심장인가? 별 하나 조차 사랑할 자유를 잃고 굳어가는 폴디의 녹슨 심장인가? 작가의 이러한 배치는 그들의 삶에 더욱 바짝 다가가게 만든다.
세서의 곁을 떠나지 않고 맴도는 과거는 육신을 입고 124번지 집 앞에 비현실적인 등장을 한다. 빌러비드의 검은 드레스 안에 용서는 없었다.
대신 그녀는 원망과 추궁을 매일 세서 앞에 꺼내 놓았다. 세서의 절박한 설명은 빌러비드에게 통하지 않는다.
그동안 흘려온 세서의 눈물을 잉크 삼아 당시의 심정을 길게 써내려간다 해도 빌러비드는 단 한 줄도 읽으려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읽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과거니까.
이미 일어나버린 과거는 아무리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이해를 간청해도 고개를 내저으며 소용없다 말한다. 단편적인 과거만 가지고서는 아무데도 갈 수 없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 폴디는 침대 속으로 가라앉아버린 세서에게 일어나서 내일을 살아내라고 애원한다.
과거의 무거움에 짓눌려 형체를 잃어버린 채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무리 힘겨워도 갈 곳은 내일 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어제의 고통을 잊으려면 우리에겐 내일의 시간이 필요하다. 지울 수 없는 실수로 잔뜩 얼룩진 과거의 시간이 아니라 아직 텅 빈 채로 신선하기만 한, 내일이 가져올 시간말이다.
세서의 짙은 사랑과 덴버의 오롯한 외로움, 빌러비드가 결국 남기지 않고 떠난 용서를 연료 삼아 경적을 울리고 살아남은 이들을 실은 채 출발해야한다.
내일을 향해서. 세서는 침대에서 일어났을까? 내일에 무사히 도착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