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기원 (인간의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생존과 번식 행복은 진화의 산물이다)

행복은 단지, 생존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정신적 도구일 뿐이다.

정서의 본질적 관심사는 행복이 아닌 ‘생존’이다.

 사람들은 보통 행복한 삶이 가장 좋은 삶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나 또한 행복이 최고의 선이라고, 추구해야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러나 왜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하고, 왜 행복을 추구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없었다. 그냥 좋으니까 행복은 좋은 거니까 라고 생각했다.

 

 이 책은 행복에 대해 WHY 라는 관점으로 접근한다. 인간은 왜 행복을 느끼고, 왜 행복하고 싶을까? 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인간에게 행복은 무엇이란 말인가?

 

 인간이 행복감을 느끼고 그토록 행복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또한 왜 행복한 감정은 오래가지 못할까? 행복감과 관련 있는 감정들을 떠올려 보자. 기분 좋음, 감동, 짜릿함, 통쾌함, 속이 뻥 뚫리는 것만 같은 성취감 등은 찰나의 순간에 우리 마음 속에 전율을 일으키고선 이내 모습을 감춘다. 새 노트북을 사도, 최신형 스마트폰을 갖고, 원하는 옷을 손에 넣어도 그 만족감은 길어봤자 3일도 못간다. 그리곤 다시 우리는 행복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

쾌락이 짧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적응과 관련이 깊다. 리셋(reset)과정이 없다면 우린 매일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장시간 마라톤을 하면서 목이 타고, 뜨거운 햇살에 살이 그을려진 온 몸이 물을 갈구할 때 누군가 옆에서 우연히 물을 내어준다면 어떨까? 행복은 괴로운 감정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행복의 달콤함을 간절히 원할 때 가끔씩 찾아오곤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과 최대한 가깝게, 그리고 자주 접촉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길 원한다.

 

 책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의 원인은 바로 ‘생존’이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행복감을 느끼며, 행복이 짧게 지속되는 것 또한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다. 행복감이 있으면 다음 날을 살아가는 데 커다란 동기부여가 되며, 행복은 빠르게 사라져야 또 일어나 행복을 향한 여정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또한 생존과 가장 밀접한, 죽을 것만 같을 때에 생존에 도움이 되는 일이 발생할 때 행복의 쾌락이 극대화 된다고 한다. 예를 들면, 피곤에 찌든 하루를 마치고 뜨뜬한 온도로 데워져 있는 욕실에 몸을 담글 때, 너무나도 배고팠는데 내가 좋아하는 맛집에 가서 상상하던 음식을 입안 가득 담았을 때 등의 순간이 쾌락이 제일 크다는 것이다. 

 

 진화인류학을 공부하는 저자는, 북한산에 관광을 가거나 문화생활을 하는 등의 활동 또한 그 근본이 ‘생존’이라고 한다. 또한 생존과 직결되는 ‘번식’에 대해서도 설명을 하는데, 그 중 피카소의 얘기가 나온다. 피카소의 예술 작품 중 가장 높은 평을 받는 작품들은 거의 피카소가 ‘아름다운 여인’을 만날 때 였다고 한다.

 

 세계적인 거장들의 뛰어난 예술적 감각, 유머감각이 뛰어난 사람의 재치 있는 조크(joke) 등의 모든 것들이 자신의 ‘번식’할 수 있는 확률을 높이기 위한 행위라는 것이다. 완전히 동의하기는 어렵겠지만, 이성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은 생각보다 엄청난 동기부여가 된다는 건 사실이다. 이러한 요인들이 그들의 예술적 혼에 열정의 불을 지폈을 수도 있을 수도 있으니.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 Happiness is the frequency, not the intensity, of positive affect.

 책의 후반부에 가면,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나름의 지침이 등장한다. 앞에서 행복의 원인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했다면, 이제는 적용할 차례인 것이다. 행복은 크든 작든 금방 사라지는 건 변함이 없다. 따라서 저자는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건(event)을 최대한 가까이 두고 자주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하라고 조언한다.

뇌의 원래 용도는 연애를 하고 친구를 사귀는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과 직결되는 ‘사람’이다. 뇌는 이것을 찾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렇다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건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좋아하는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시간을 보내는 것. 저자는 행복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강조한다. 인간의 뇌가 음식을 먹을 때, 사람들과 대화하고 이성과 손잡고 연애할 때 가장 큰 행복감을 느끼게끔 설계되어 있으니까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는 뜻이다.

 

 

 

읽고나서 끄적이는 몇 줄


가장 빈곤한 인생은 곁에 사람이 없는 인생이다. 사람이 없다면 천국조차 갈 곳이 못된다.

 위에 구절은 책의 막바지에 등장한다. 맞는 말이라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지만, ‘이러기가 어디 쉽나?’라는 생각도 든다. 나의 경우 일과가 끝나고 동네에 오면 5시고 친구를 만나기엔 몸과 정신이 피곤해서 요즘은 보통 혼자서 카페에 가곤 한다. 심지어 해야 할 공부마저 산더미다. 친구를 만나 맛있는 음식을 먹고 대화를 나누고 같이 피시방에 가서 게임도 하면 참 행복하겠지만 말이다. (가끔씩 그런다.)

 

 사람이 풍요로운 인생이 진정 행복으로 가는 인생이라지만, 나에겐 너무 어려운 말인 것 같다. 기브 앤 테이크라고, 누군가가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사랑을 주려면 나 또한 그들에게 사랑을 주고 소통해야 한다. 하지만 난 굉장히 속도 좁고 마음의 그릇도 작아서 내가 힘들거나 고민이 있으면 누군가를 챙겨주거나 먼저 연락하지 않는다. 

 

 요즘 내 카카오톡을 보면 어떤 상황인지 바로 알 수 있다. 대화가 오고가는 채팅방이 없다. 가족끼리 하는 가족 채팅방 빼곤 정말이지 메시지가 와 있다는 알림이나 그런 게 전혀 없다. 왜 그런지 알면서도 그저 귀찮고 힘들고 하는 마음에 손 놓고 방관하고 있다.

 

 내가 먼저 말을 건네기도 귀찮고, 그렇다고 누가 선뜻 만나자고 해도 꺼려지는 요즘이다. 스스로가 요즘 많이 다운되어 있다는 걸 알면서도 행복으로 가는 열쇠에 대한 좋은 책을 만나도 여전히 제자리 걸음인것만 같다. 

고백 (블랙 앤 화이트 18)

최근 인천 초등학생 살인사건과 더불어 중학생 폭력 사건 등 미성년자의 충격적인 범행에 대한 뉴스가 자주 들려오고 있다.
청소년들이 아직도 보호받아야 할 대상인가? 그들의 범죄는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으로 시작된 소년법의 개정, 폐지에 대한 청원이 참여인원 12만명을 돌파하고 있다.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인천 초등학생 살인사건은 몇년 전에 구입해서 단숨에 읽은 소설책을 떠오르게 한다.
중학생의 초등학생 살해, 반성을 모르는 가해자, 괴로워하는 피해자의 가족.
분명 소설에서나 읽을 법한 내용이었는데 현실에 그대로 실현되면서 섬뜩한 기분이 든다.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은 사회적 철학이나 교훈을 느끼도록 해주는 책이 아닌 흥미롭게 읽어갈 수 있는 단순한 추리 소설이다.
시작은 2명의 제자에 의해 딸을 살해당한 중학교 여교사의 담담한 고백으로 방학의 시작을 알리는 종업식 날, 평범한 교실에서 막이 열린다.
역시나 어려서 그렇다고 생각될 정도로 단순한 사고와 치졸한 이유로 살인을 저지른 제자들은 반성을 모르고, 
딸을 잃은 슬픔과 분노에 휩쌓인 여교사는 죄에 대해 용서한다는 도덕적인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고백’이 알리는 복수의 시작과 그 처참한 결말은 책을 덮은 후에도 진한 여운으로 남아 이제는 현실이 되어버린 미성년자의 잔혹범죄에 대해 생각해볼 계기가 될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 (까치글방 132)

최근 JTBC의 ​<비정상회담>에서 콜럼부스는 신대륙 발견의 위인이 아니라 사실 잔혹한 침략자라는 이야기가 나와 뉴스를 가득 채웠다. 이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위인’의 잣대가 한 분야의 정복에 맞춰져있기도 하고, 위인은 승자의 기준에 맞추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좋은 비유는 아니지만, 이를테면 히틀러를 실패한 위인이라고 하는 것으로 역설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라는 제목과 달리, 반 이상의 초점이 스페인에 맞춰져 있다. 라틴 아메리카의 ‘라틴’이 스페인을 기원으로 하기 때문인지, 본토에 대한 이야기보다 스페인, 유럽, 아프리카인 등의 유입과 융화의 역사를 더 상술한다. 모두는 어딘가에서 이리로 왔다.(p.424) 라는 말처럼, 아메리카라는 땅은 아메리고의 발견 이전에도 시베리아 쪽을 통한 유목인의 유입을 통해 정착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위에 언급한 유입과 융화는 그들의 배경이 아니라 역사 그 자체다.​ 표지로부터 300페이지가 지나고 나서 시몬 볼리바르와 호세 데 산 마르틴이 등장하며 근대와의 직접적인 끈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사실 푸엔테스의 이런 서술은 역사를 논하는데 당연한 수순이며, 라틴 아메리카 같은 경우는 그 과정이 침략과 식민으로 시작했기에 더욱 연원을 서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거장의 손길로 하나하나 수놓은 이 책에 첨언은 사족처럼 필요하지 않다. ** ​요약해서 말하면 스페인인의 전쟁은 지방주의, 게릴라 전쟁, 개인주의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플루타르코는 스페인의 전쟁지휘관은 ‘연대자(solidarios)’라고 불리는 충실한 심복부하들을 주위에 두고 있었으며, 그들은 자기들의 사령관이 죽으면 그들도 생명을 바쳐 싸운 후 뒤따라 죽었다고 썼다. 그러나 스페인인들이 상호간의 연합을 거부하고 오로지 그들의 토지와 지도자에게만 충성심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간파한 로마인들은 스페인인들이 훗날 아스테카나 잉카 제국을 괴멸시키기 위해서 썼던 것과 유사한 방법, 즉 우수한 무기를 동원하고 고도의 정보작전을 통해서 그들을 패배시킬 수 있었다. 멕시코인들이 자신들이 사는 촌이나 우두머리에 바치는 충성을 제외하고는, 그들끼리 광범위한 동맹 없이 그저 모자이크처럼 뿔뿔이 흩어진 지역중심주의에 입각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코르테스 역시 로마가 이베리아인들을 쳐부순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아스테카족을 정복할 수 있었다, (p.42) 세네카의 철학이 스페인에 끼친 영향은 강력하고 영속적이었다. 지금까지도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세네카”라는 말은 지혜를 의미하는데, 그 지혜는 바로 인생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행복한 세계에서는 철학자가 무슨 필요가 있다는 말인가? 죽음에 대해서 세네카 자신은 금욕적으로 대처했다. 즉, 네로의 총애로부터 멀어지자 그는 황제의 노여움을 예측하면서 자살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도 스페인 정신의 핵심을 이루는 영원한 철학을 남겼다. 무절제를 억제하고, 전쟁과 발견, 정복, 폭력, 죽음이라는 대모험 끝에는 언제나 자기 자신으로 다시 돌아가라는 것이 그의 가르침이었다. 성인과 화가, 시인과 전사의 나라 스페인은 스토아 철학이 말하는 이 진실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그 가운데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Don Quijote)」로서 이 작품의 주인공은 귀향해서 예전의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서 죽음을 맞는, 최후에 가서는 그의 광기 어린 모험을 진정시키는 한 인간으로 묘사되는 것이다. (p.46) 이렇게 해서 시간을 이해할 필요성은 인디오 세계에서 근본적인 것이 되었다. 왜냐하면 시간을 이해하는 것은 생존과 파멸 사이에 놓인 차이를 이해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즉, 시간을 지배하는 것은 삶의 지속성을 확인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닌 말이었다. “시간을 셀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는 신들과 소통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자”라고 마야의 시인은 말했다.(하략) (pp.119-120)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신부는 1511년 몬테시노스 신부가 크리스마스에 행한 설교와 인디오의 운명에 관해서 던졌던 질문, “이들은 인간이 아니란 말이요? 그들은 이성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란 말입니까?” 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이제 인디아스는 파괴되고 있다”라고 외쳤다. 몬테시노스가 한 그 설교는 “아메리카에서 정의를 향한 최초의 외침이었다”라고 현대 도미니카의 작가 페드로 엔리케스 우레냐는 썼다. (p.159)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농촌공동체는 순전히 인디오들로 이루어진 촌락과 새롭게 태어나기 시작했던 메스티소 공동체 사이의 경쟁으로 점점 분열되어 갔다. 그러나 노동관계의 중심은 곧 ‘엔코미안다(인디오를 보호하고 기독교화해주는 대신, 그들에게 사역을 시키는 것)’이나 ‘레파르티미엔토(임시적인 터전에 의거한 단순한 원주민 노동력의 분배)’를 계승해서 등장한 ‘아시엔다(hacienda)’라고 불리는 대농장제도에 의하여 공고해졌다. 이 제도는 오늘날까지도 존속하고 있다. 아시엔다 제도는 영속적인 노예노동의 형태, 즉 노동자들이 진 부채를 노동으로 갚는 것에 그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 빚은 노동자 자신의 살아 있는 동안 영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손들한테까지도 대대로 물려졌다. (p.165) 오늘날 토마토와 초콜릿은 누구나 알고 있는 흔한 것이지만, 당초 유럽인들은 토마토에 독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그것을 꺼렸다. 그러나 후에 그들은 이 토마토가 대단히 맛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토마토의 어원은 아스테카어의 히토마틀(xitomatl)에서 유래하는데, 이탈리아인들은 아마도 낙원의 일화로부터 쾌락과 죄를 상기시켜주기라도 하듯이(그러나 이들은 구별된다) 이것에 가장 아름다운 이름인 포모도로(pomodoro, 즉 황금의 사과)라는 이름을 붙였다. (p.251) 메스티소(mestizo)라고 불리는, 아마도 가장 독특하고 역동적이었던, 제4의 인종 그룹은 1810년쯤에는 그 수가 약 500만 명 정도였다. 메스티소는 세 개의 그룹 모두가 혼혈된 것을 지칭하는 말로 모멸적인 호칭으로 분류되었다. 메스티소는 백인과 인디오의 자식을, 물라토(mulato, 이 모멸적인 명칭은 물라[mila, 노새]에서 나왔다)는 흑인과 백인의 자식을, 삼보(zambo)는 인디오와 흑인의 자식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테르세론(Tercerón)은 물라토와 백인의 자식을, 쿠아르테론(cuarterón)은 테르세론과 백인의 자식을 지칭했다. 그리고 테르세론과 물라토는 텐테넬라이레(tentenelaire, 문자 그대로 공중에 붕 뜬 의미)의 범주에 들어갔고, 쿠아르테론과 흑인의 결합은 살타파트라스(saltqapatrás, 인정족 후퇴를 의미하는 “뒤로 튄다”는 뜻)라고 불렀다. (pp.286-287) 베네수엘라의 작가 아르투로 우슬라르 피에트리는 라틴 아메리카인은 흑인 유모나 인디오 유모로 인해서 세 문화의 혼합을 가지게 되었다고 썼다. 비록 순수한 백인일지라도 그들은 흑인이고 인디오이다. 또 순수한 흑인과 순수한 인디오로 남아 있어도, 그들은 유럽 세계를 동유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런 3차원의 문화주의는 인종상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문화는 인종주의를 초월한다. (p.303) 1829년부터 1852년까지 로사스는 23년간 최고권력자의 자리를 유지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여전히 아르헨티나 국민들 사이에서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국가의 통일, 무질서의 종식, 적극적인 국제무역의 확대, 애국주의, 외국 간섭의 배제, 거기에 더해서 국내 생산력의 육성을 달성했던 것은 그의 공일 수도 있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로사스를 변호하는 측의 주장이다. 그러나 질서를 가장한 무법, 잔혹, 공포가 과연 자유의 대가로서 지불할 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일까? (p.328) 멕시코 혁명이 라틴 아메리카인들을 위해서 20세기의 막을 열었을 때, 그들은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을 예상할 수 없었다. 라틴 아메리카인은 수많은 위기를 겪으며 살아왔다. 때때로 정치와 문화는 엄격히 분리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서로 가깝게 만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커다란 희망과 만연된 폭력의 세기를 맞는 이때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와 문화의 통합은 이제 미완의 작업으로 남게 되었다. (p.382) 이렇게 역사의 주기는 숙명적으로 우울하게 돌아가는 것이다. 허약한 문민정부는 새로운 군부 쿠데타에 의해서 전복되고, 혼란 뒤에 독재정권이 탄생하고, 또 독재에 의해서 또 다른 혼란이 뒤따른다. 레콜레타 묘지는, 작가인 토마스 엘로이 마르티네스가 지적한 것처럼, 시체애호증이 있는 한 나라의 상징이었다.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화려한 시체는 아마도 아르헨티나 자신일 것이다. (p.3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