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모르던 나의 어린 시절, 이 책의 ‘동물농장’이라는 제목은 우연히 나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 당시에 즐겨보던 프로그램이 모 방송국에서 여전히 방영하고 있는 ‘TV 동물농장’이였던 것이 기막힌 우연이였을까? 당시 동물을 사랑하던 꼬마 아이는 그저 동물 백과사전쯤으로 알고 처음 이 책을 집어들었던 것이였다. 웃기게도 첫 번째 책장을 넘기고 그다지 많은 시간이 흐르기도 전에 나는 금방 이 책에 시들해져서는 그저 쓱쓱 의미 없이 책장을 넘기다 당시 감성에 더 없이 잔인한 묘사들이 드러나면 눈을 질끈 감고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는 했다. 그러다 드디어 마지막 한 페이지만을 남겨놓았을 때 마지막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누가 돼지이고 누가 인간인지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이미 분간할 수 없었다.’ 그 어렸던 시절 스치듯이 읽었던 그 마지막 문장이 성인이 된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있었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였을까? 그로부터 시간이 흐르고 흘러 어느새 나는 20대 초반의 대학생이 되어 다시 이 책을 집어들게 되었을 때 모든 기억이 흐릿했지만 나에게는 처음부터 심중에 작은 목표가 하나 있었다. ‘그 마지막 문장을 제대로 읽어내보고 싶다.’ 정확히는 그 마지막 문장이 뜻하는 바를 내 나름대로의 의미로 해석해내고 싶었다.
이 책이 소련의 스탈린 체제를 희화화한 작품이라는 것은 인터넷에 몇 번만 검색해보면 누구나 알게 되는 사실이다. 따라서 나는 이 책이 어떤 사회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기보다는 그냥 책 안의 내용 자체에 집중하며 생각해보고 싶다. 이 소설을 관통하고 있는 주제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한다면 단연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나쁘다.’ 라는 문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문장 하나가 동물들이 인간에게 맞서게 만들었고 그들이 ‘자유’로울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문장을 핵심으로 이 소설 속 등장인물들을 오직 선과 악으로만 나눈다면 이 말에 따라 두발로 걷는 메너농장의 주인, ‘존스’(를 비롯한 인간)는 악하고 네 발로 걷는 모든 동물(두 발로 걷는 조류의 날개는 나쁘게 쓰이지 않기에 조류도 포함이란다)는 선하다고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진행되는 이야기 속에 우리는 계속해서 의문을 가지게 된다. ‘과연 네 발로 걷는 모든 동물은 선한가?’ 책에서는 동물들의 생활이 존스가 주인으로 있던 그 시절보다 훨씬 나아졌음을 강조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책을 읽으며 자꾸 찝찝한 기분이 드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생각을 거듭한 결과 나는 그 것이 책에서도 강조하고 있는 ‘자유’와 ‘평등’의 개념으로 인해 생기는 이물감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책 속에서 동물들은 메너 농장에서 벗어난 후 그 누구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 아닌 자신들을 위하여 노동을 한다고 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들이 기본적으로 삶을 영위하기 위한 노동을 했고, 그 누구도 다른 이를 ‘주인님’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표면적으로 그들은 자유롭고 평등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군가는 우유를 마셨다. 누군가는 침대에서 잠을 잤으며 누군가는 술을 마셨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다른 누군가를 죽였다. 우리는 이 지점들에서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돼지들이 다른 이들은 쉽게 마실 수 없는 우유와 술을 마시고 잠자리를 달리하며 ‘평등’을 깨버리는 것, 다른 누군가를 동물들의 눈 앞에서 죽이며 그들이 자신의 의견을 표출할 수조차 없게 그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우리가 잠재적으로 내면에서부터 알고 있는 ‘선’에서 벗어나는 지점들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처음부터 이 부분을 교묘히 이용한다. 그는 직접적으로 ‘다른 동물들의 자유와 평등을 억압하는 돼지들은 나쁘다.’ 라고 쓰는 것이 아니라 돼지들이 어떤 불평등하고 껄끄러운 일을 행할 때마다 양들로 하여금 외치게 하는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나쁘다.’라는 표어로 의도적으로 우리가 묘한 기분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에 뜻 밖의 반전이 일어난다. 돼지들이 두 발로 일어서 사람처럼 걷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그들이 간직해오던 일곱 가지 계명은 자연스레 모두 없어지고 마지막 한 가지 계명만이 남는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 ‘평등’이라는 단어의 뜻이 ‘권리, 의무, 자격 등이 모두 고르고 한결같음’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 문장은 상당한 비문이다. 모두 고르고 한결같은 것 위에 또 다른 고르고 한결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비문으로 조지 오웰은 이 책에서 가지고 있는 ‘평등’이라는 말의 의미를 한 번에 정리해버리는 듯하다. 동물농장에서의 ‘평등’은 사실은 ‘차별’과 ‘계급’을 의미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소설 내내 동물들은 평등을 외친 모든 순간에 결코 평등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주목해야 할 점은 돼지들이 일어나서 두 발로 걷기 시작한 순간부터 양들이 외치는 표어가 달라졌다는 점이다.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더 좋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직접적인 표현보다는 간접적으로 우리가 불편한 구조를 은밀히 느끼게 하던 작가는 끝이 되어서야 직접적으로 ‘네 발’ 위에 ‘두 발’이 있음을 드러내며 보이지 않는 듯 존재하던 계급의 존재를 확고히 드러낸다. 결국 지금껏 주장했던 인간은 나쁘고 동물은 좋다라는 개념이 두발로 걷는 인간과 돼지는 더 뛰어나고 다른 동물들은 그저 순진하다라는 뜻으로 바뀌는 순간이 되는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생각해본다. ‘누가 돼지이고 누가 인간인지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이미 분간할 수 없었다.’ 라는 마지막 문장의 의미는 대체 무엇인가? 나는 이번에야말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네 발 동물로 시작한 돼지는 처음에는 다른 동물들과 어떠한 차별점도 존재하지 않았으나 그들은 은밀히 조금씩 다른 동물들의 평등과 자유를 억압하는 인간과 같은 존재가 된다.(이는 소설 전반적으로 돼지들이 인간과 같은 특성을 띄게 되는 것을 통해 간접적으로 표현된다.)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나쁘다.’라는 말에서 선으로 보였던 돼지가 명백히 인간과 같은 성격의 악으로 분류되는 순간이였던 것이다. 또한 ‘누가 누구인지’라는 인간을 지칭하는 표현이 아니라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라는 물건을 지칭하는 듯한 표현에서 작가가 느끼는 혐오감이 드러나는 듯 해서 다시 읽을 때는 묘한 희열감이 느껴지기도 하는 문장이였다.
마치면서, 우리나라 헌법 제 11조는 이러하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생각해본다. 나는 의도치 않게 누군가에게 ‘두 발’이 된 적은 없는가? 나는 평등 위의 평등을 추구한 적이 없는가?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나는 ‘두 발’도 ‘네 발’도 되어서는 안 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