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3.0 (이시카와 토모타케 장편소설)

 좀비 3.0이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은 지금은 흔히 볼 수 있는 좀비 콘텐츠와는 다소 다른 결을 보이고 있다. 우리가 보고, 재미를 느끼는 여러 좀비 콘텐츠는 주로 ‘생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좀비 3.0은 생존도 중요하지만 좀비 바이러스가 왜 발생했는지, 어떠한 증상이 있는지 등에 초점을 맞추어 독자들에게 색다른 읽을 거리를 준다.
 이 책은 왜 좀비 바이러스의 발현에 초점을 맞추게 된 것일까? 이 책의 배경은 예방감염증연구소이다. 이 연구소의 직원이자 주인공인 ‘카츠키’가 휴일에 출근을 하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 연구소는 업무 특성상 최고 방어 레벨을 갖추고 있는 안전지대이다. 이 공간에서 카츠키는 좀비 바이러스의 원인을 규명하고자 노력한다.
 연구소가 배경인 탓인지 전공자가 아니라면 다소 어렵게 느껴지는 과학 용어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용어가 전혀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의 높은 몰입감으로 책을 매우 재밌게 읽었다. 좀비 콘텐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높은 흥미를 가지고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사실은 괜찮지 않았어

이 책은 저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책이며, 자신의 감정을 참고, 숨기면서 ‘자신은 행복하다’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마음속 응어리로 인해 공황발작까지 와서 심리상담을 통해 진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괜찮지 않으면 괜찮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게 하는 법을 알려주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지금의 나는 책에 쓰여진 저자의 모습과 굉장히 닮았다는 걸 알았다.
난 이제 막 20살이 되었고, 이제 막 사회에 들어온 것이기에 모르는 것도 많고, 실수하는 부분도 많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마찰과, 부정적인 감정들을 난 책의 저자처럼 참고, 밝은 모습만 보여주려 노력한다.
‘내가 참으면 될거야.’, ‘이 감정만 참으면 행복할거야.’ 라는 식으로 그저 마음 깁숙히 박아두기만 했다.
아직 저자처럼 이 박아둔 감정들로 인해 고통을 받는 단계는 아니지만, 만약 이 책을 보지 못하고 계속 감정들을 박아두기만 했다면
저자와 비슷하게 힘들어 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주인공의 두번째 심리상담 때 상담선생님은 이런 말을 한다.
“참 안됐다, 저자는 대단한 사람이에요. 앞으로도 지금처럼 잘 살거에요. 그런데 이대로라면 힘들게 잘 살것 같아요. 그래서 안됐어요.
지금 오뚝이 안에 쌓인 이야기가 많아서 오뚝이가 너무 무거워져 있어요.”
이 말이 너무나도 나에게 와닿았다.
누구에게나 자신만 알고있는,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이야기들이 있을것이다.
이 이야기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부정적인 감정은 안 생길수가 없다.
물론 매번 부정적인 감정을 생길때마다 표현하면, 사람 자체가 부정적이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부정적인 감정을 아에 박아두는 것 또한 사람을 힘들게 하고, 우울증이나 공황증세가 나타날 수도 있다.
많이 표현하지 않아도 되니까, 꼭 누구에게 풀지 않아도 되니까,
오늘 하루만큼은 부정적인 감정을 털어놓아도 되지 않을까?

혹시 MBTI가 어떻게 되세요?

나는 mbti에 크게 관심이 없던 부류의 사람 중 한 명 이였다.
하지만 요즘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 주로 묻는 질문 중 하나가 mbti가 어떻게 되냐고 묻는 것인 만큼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이나마 관심도를 높일 수 있었고, 나랑 mbti가 같은 주인공한테 벌어지는 사건을 보면 
나였어도 저렇게 행동했을 것 같다 하면서 공감을 할 수 있었고, mbti가 장점만 말해주는 성격유형검사 라고 알고있었는데
여기서는 주인공 성격의 단점까지 묘사되는 부분까지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안나 카레니나 3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사랑과 배신, 사회적 규범 속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복잡한 감정을 탐구한 작품이다. 안나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는 개인의 욕망과 사회적 제약 사이의 갈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톨스토이는 등장인물들의 내면을 섬세하게 묘사하며, 사랑과 결혼, 행복의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을 이끌어낸다. “안나 카레니나”는 인간 관계의 복잡성과 도덕적 딜레마를 탁월하게 그려낸 고전 문학의 정수이다.

변신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은 인간 존재의 불안과 소외를 강렬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벌레로 변신하면서 겪는 고립과 가족의 냉대는 현대 사회의 비인간화와 소외감을 상징한다. 카프카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물며, 인간의 불안정한 존재와 정체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변신”은 인간의 내면 깊숙한 두려움과 소외감을 탐구하며,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와 관계를 성찰하게 만드는 강력한 우화이다.

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는 인간의 불굴의 의지와 고독을 그린 강렬한 작품이다. 노인 산티아고의 고기잡이 여정은 인간의 끊임없는 도전과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상징한다. 헤밍웨이는 간결한 문체로 인간의 내적 투쟁과 생명력, 그리고 실패 속에서도 존엄을 잃지 않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며, 독자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노인과 바다”는 삶의 의미와 인간의 존엄성을 깊이 있게 탐구한 현대 문학의 걸작이다.

위대한 개츠비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는 1920년대 미국의 황금기를 배경으로, 사랑과 야망, 그리고 사회적 계층의 한계를 그려낸 작품이다. 주인공 개츠비의 이루지 못한 사랑과 그로 인한 비극은 미국 꿈의 허망함을 상징한다. 피츠제럴드는 화려한 배경 속에서 인간의 내면적 빈곤과 부의 덧없음을 생생하게 묘사하며, 현대 사회의 물질주의와 도덕적 붕괴를 비판한다. “위대한 개츠비”는 시대를 초월한 인간의 욕망과 꿈을 심도 있게 탐구한 명작이다.

죄와 벌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은 인간의 심리와 도덕적 갈등을 심도 있게 탐구한 작품이다.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자신의 이념을 시험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지만, 그로 인한 죄책감과 고뇌는 그의 삶을 무너뜨린다. 도스토옙스키는 인간의 내면 갈등과 구원의 가능성을 강렬하게 그려내며, 독자에게 윤리적 선택의 복잡성을 고민하게 한다. 인간 본성과 죄책감, 그리고 속죄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며, 인간 존재의 심오함을 탐구하는 걸작이다.

제5도살장

  역사에 무지했기 때문에 드레스덴 폭격을 ‘제5도살장’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 때 많은 폭격이 있었겠지만, 대한민국의 광복이나 일본의 히로시마 폭격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다. 수많은 폭격 중 하나가 드레스덴 폭격이고, 제5도살장은 드레스덴 폭격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드레스덴 폭격은 ‘엘베 강의 피렌체’라고 불리운다. 커트 보니것은 이 폭격을 목격했고, 살아남은 이야기를 하게 된다. 책 맨 앞에 적힌 문구가 커트 보니것이 적은 것인지 역자가 적은 건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비행접시를 보낸 트랄파마도어 행성의 이야기들을 약간 전신문체적이고 정신분열증적인 방식으로 다룬 소설이다. 평화를.’라고 적혀있다. 이 설명이 이 책을 꿰뚫는 설명이다.

  줄거리는 서점이나 오픈백과를 통해 검색해서 알 수 있으니까 줄거리는 따로 적지 않겠다. 내가 인상깊었던 장면들을 위주로 남겨보고자 한다.


– “··· 이렇게 하죠. 거기에 ‘소년 십자군’이라는 제목을 붙이겠습니다.”/그녀는 그후로 친구가 되었다.

  처음에 말했듯이 난 역사에 무지하다… 배워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배우지 않는 자세를 가진 한심한 사람이다. 그래서 십자군 전쟁을 이름만 알지 얼마나 심각한 전쟁인지 모른다. 어린 청년들이 군인이나 전쟁에 대한 존경이나 동경 그런 감정을 가지게 되는데 한 몫하는 책이 될까 작가를 싫어하던 지인의 마음을 돌린 장면이다. 지금 청년들은 군인이나 전쟁은 끔찍하게 여기는 게 대다수라고 생각했는데, 과거에는 다른 행태였다는 걸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 지금 시기만 해도 군인이 고문으로 죽어가는데… 물론 대한민국의 이야기지만.


– 그런데 새는 뭐라고 할까요? 대학살에 관해서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지지배배뱃?”같은 것뿐입니다.

  새는 무엇을 물어도 자신의 언어로만 대답할 뿐이다. 우리가 못 알아들었을 뿐일까.


– 빌리 필그림은 즐거운 환각에 빠져 있었다. 따뜻하고 하얗고 두툼하고 바싹 마른 양말을 신고 무도회장 바닥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있었다. 수천 명이 환호했다. 이건 시간 여행이 아니었다. 그렇게 스케이트를 탄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터였다. 이것은 구두에 눈이 가득찬 채 죽어가는 젊은 남자의 광기였다.

  빌리 필그림은 작중 시간 여행을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저 고통은 시간 여행따위가 아니다. 눈밭을 헤치고 다니지만 제대로 된 군화 한 없어 발이 얼어버린 자의 즐거운 환각.


– 하느님, 저에게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차분한 마음과 제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와 언제나 그 차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이 책의 아마 가장 유명한 문구가 아닐까 싶다. 원래 있는 기도문인지 아니면 제5도살장에서 나온 것인지 궁금해서 여러 번 검색해봤는데 평온의 기도인가 그거라고 한다. 내가 바꿀 수 없는 것과 바꿀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걸 신에게 맡겨야 찾을 수 있는 건가? 신은 존재하는가? 글쎄, 나는 이 질문에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


– “트랄파마도어에는 전문이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 말이 맞습니다. 각 기호들의 덩어리는 짧고 급한 메시지입니다-하나의 상황, 하나의 장면을 묘사하지요. 우리 트랄파마도어인은 그것을 하나씩 차례로 읽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한꺼번에 읽습니다. 그 모든 메시지들 사이에 특별한 관계는 없습니다. 다만 저자는 모두 신중하게 골랐지요. 그래서 모두 한꺼번에 보면 아름답고 놀랍고 깊은 삶의 이미지가 나타납니다. 시작도 없고, 중간도 없고, 끝도 없고, 서스펜스도 없고, 교훈도 없고,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책에서 사랑하는 것은 모두가 한눈에 들어오는 수많은 경이로운 순간들의 바다입니다.”

  내게 가장 난해했던 트랄파마도어인의 이야기다. 깔끔한 스토리 전개라기보단 정말 빌리 필그림의 한 인생의 시간을 이야기로 담은 느낌이라 이곳저곳 시공간을 넘나들며 진행되기 때문에 읽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그중 트랄파마도어인은 외계인인데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트랄파마도어인의 전달법이 마음에 들었다. 수려한 문장들로 이야기를 화려하게 이어가는 게 아니라 짧고 급한 덩어리지만 신중하게 고른 메시지… 나는 언젠가부터 유려한 문장들을 좋아하기도 했다. 과거에는 더 심했고, 지금은 과거의 쓴 글은 가독성이 떨어져 읽지도 못한다. 그때 열심히 사전과 시집을 찾아가며 썼던 단어들의 뜻도 기억이 나지 않아 글을 이해하지조차 못하는 것도 있다. 내 메시지는 짧고 급하지만 신중하게 담아내는 형태를 갖추길 바란다.


– 오, 이런-이 사람들은 린치할 사람을 잘못 고른 게 틀림없어!/ 이 생각에는 형제가 있었다. “린치하기에 적당한 사람들이 있다.” 누굴까? 좋은 연줄이 없는 사람들이지. 뭐 그런 거지.

  이 책에서 ‘뭐 그런 거지.’라는 문장이 나오면 참담한 현상이 계속 이어지기 때문에 이해하고 납득하지 못하는 주인공, 빌리 필그림이 최대한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쓰는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사람이 죽을 때마다 튀어나오는 문장이다. 린치 장면도 같다.


– ···아주 재미있는 일이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의 존엄을 빼앗아버리는 것이.

  사랑이라는 이름은 정당화될 수 없다. 쉽게 말하자면 범죄인 스토킹이 사랑한다는 이름으로 범죄가 아니될 수 없고, 아동학대가 사랑의 매라는 이름으로 아이를 괴롭게 하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의 형태로 드러날 때가 있다. 이 장면에서는 딸이 아버지의 존엄을 무너뜨린다.


– 어린 경비병 베르너 글룩은 드레스덴 소년이었다.···그는 빌리처럼 키가 크고 몸이 약해, 빌리의 동생이라 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들은 사실 먼 친척이었는데, 둘 다 끝까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소년 십자군인 이유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장면이다. 빌리의 동생처럼 보이는, 실제로 친척지간이었지만 그들은 몰랐던 어린 아이가 빌리와 포로들을 감시하는 경비병이다. 어린 아이들과 청년들이 전쟁에서 죽어나가고 트라우마를 가진 채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 채로 살아갈 수는 없다.


– “나도 늙는 게 나쁠 줄은 알았지.”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지만 이렇게 나쁠 줄은 몰랐어.”

  젊음이 좋은 건 알겠다. 하지만 늙음이 나쁜 건 모르겠다. 주변 사람들을 보면 늙음이 나쁜 게 느껴지지만, 좋은 늙음도 존재하지 않는가. 나는 나쁘게 늙어갈 것만 같아 늙고 싶지 않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늙는다면 젊음을 가진 청년이 늙은 나를 보고 늙음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겠지.


-(해설) 이 책에서 누군가가 죽을 때마다 등장하는 “뭐 그런 거지”라는 표현-총 106번 나온다고 한다-도 체념적 수동성을 드러내는 말로 들리기도 하여, 과연 이 책이 반전의 메시지를 던지기는 하는 것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책 맨 뒤에 짧은 해설이 있다. 죽음이나 고통을 이해하고 납득할 수 없지만 현실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야만 했던 ‘뭐 그런 거지.’라는 문장이 106번 등장했다고 한다. 많이 등장했다는 건 알고 있다.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을 고르라고 하면 첫 번째로 ‘뭐 그런 거지.’를 고를 것이고, 두 번째도 기도문을 고를 것이다. 후반부에 기도문은 그림과 함께 등장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물론 그림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지만, 한 번 더 나에게 기도문을 새겨주었다고나 할까. 그냥 그런 거지, 뭐 그런 거지, 세상이 이런 거지 등 이런 생각으로 순간을 지나치려면 그전에 분명하게 그에 대한 고통이나 괴로움을 겪었어야만 했다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는 시험 성적이 그랬다. 반토막난 점수를 보면서 왜 이런지 따지고 들며 힘들어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낮은 점수는 무감각해졌다. 그런 거지. 지금은 다양한 것들이 그렇다. 어제 있었을 동성애 폐해 예방의 날과 같은 것들. 사랑을 폐해라고 말하는 것들이 아직도 조금은 이해가 되지 않고 그런 생각을 가진 자들의 이름도 얼굴도 모르지만 그들을 증오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있지만, 나는 그들에게 돌도 달걀도 던지지 못하고 내 의견도 소신껏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이런 나를 그냥 그런 거지, 그런 사람도 있는 거지라고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 이런 현상이 좋은 건 아니다. 이 책도 잠깐 청소년유해소설로 들어갔을 만큼 반문화적, 반전 소설이다. 하지만 글은 말보다 내게 강력한 무게로 다가와서 내게 유해되는 문장들도 쉽게 받아들여진다. 내 의견을 소신껏 말할 수 있어야 하는 단단한 사람이고 싶음에도 내 멋대로 잘 되지 않는다. ‘뭐 그런 거지’라고 받아들이지 말길 바란다.

페인트 (이희영 장편소설)

이 책을 읽고 느낀 점은 가족의 의미와 아이들의 권리에 대한 깊은 성찰이었다. 주인공들이 각자 자신에게 맞는 부모를 찾는 과정이 감동적이었다. 특히 인물들이 겪는 감정과 고민을 통해 진정한 가족의 의미와 조건 없는 사랑의 중요성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