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질문 (기술 선진국의 조건)
Chat gpt가 등장했다. 사람들이 걱정하던 인공지능의 시대의 도래가
바로 눈 앞으로 다가왔다. 우린 걱정한다. 대부분의 일을
Chat gpt와 같은 인공지능이 대체하게 될 것이라고.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우리 인간은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하는가? 어떤 고민을 해야하는가? 그 답에 조금이나마 해답을 줄 수 있는 책, [최초의 질문]은 완전히 새로운 세대에 마주하고, 이전에 없었을 직업을 갖게 될
우리 세대에게 나침반 역할을 해준다.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고, 더
나아가 미래를 예측하여 적절한 질문을, 도전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경영학도로 성장하기 위해 이 책을
읽게 되었다.
화자는 책에서
최초의 질문을 강조한다. 최초의 질문이란 기존 분야에서 정석으로 받아들여지는 답변과 다른 규범을 제시하려는 질문이다. 이러한
질문은
“정답”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반복적인
최초의
질문을
통하여
기술적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책을
읽으며
저자의
생각에
공감이
갔다.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정답을
찾아가는
사회이다. 산업화가
한창이었던
1960년대부터 우리는 다른 국가들의 기술을 따라가야 했었다. 빠르게 모방하는 것이 곧 생존은 길이므로 많은 지식을 빠르게 흡수하는 능력이 중요했다. 빠르게
흡수한
방대한
지식을
통해
타국가를
모방한
전략을
사용하여
값싼
제품을
만드는
것이
과거
우리나라의
경쟁력이었다.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시대가
바뀌었다. 우리나라는
예전의
가난하고
기술력
없는
나라가
아니다. 선도하고
있는
산업분야도
있고
나름의
기술력도
탄탄히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까지
정답을
찾으려고
애를
쓴다. 여전히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12년동안 암기 위주의 정답을 쓰는 교육을 받는 상황을 보면 씁쓸해진다..
우리나라도
기술적
선진국이
될
수
있는
밑바탕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앞서
언급했던
과거의
전략으로
인한
관습에
여전히
지배받고
있는
현실이
기술적
선진국으로
가는
길의
발목을
잡는다. 최초의
질문을
할
사회적
여건이
부족하다는
것이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현실적으로
최초의
질문을
하려면
비용과
시간이
충분히
투자되어야
한다. 이러한
‘투자’를 우리나라는 ‘낭비’로 보는
경향이
짙다. 단시간에
성과가
나지
않으면
금방
포기하고
지원을
끊는다. 최초의
질문을
통해
축적된
실패와
자잘한
성공은
헛된
낭비로
치부될
수
없다. 그러한
시행착오들이
모여
혁신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Chat gpt로 도입의 포문을 열었다. 지금의 가장 블루 오션은 인공지능 분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앞다퉈
인공지능에
관련한
영상을
게시하고
관련
책을
출판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앞으로도
성장하기
위해서는
인공지능의
이해가
필수적이다. 이해를
넘어선
깊이
있는
연구와
도전적인
질문이
필요하다. 사회적으로
최초의
질문을
받아들일
수
있는
분위기와
시간이
수반된다면, 우리나라의
혁신도
멀지
않았다고
전망한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바꾸는
것이
나의
몫이다. 미래의
직원으로서
CEO로서, 오늘은 열망있는 경영학도로 이 책의 메시지를 접한 것을 잊지 않고 행동하고 고민하면서 치열하게 살아가길 다짐한다.
마음 (에디터스 컬렉션 9)
<나츠메 소세키, ‘마음’ 감상평>
시대를 초월한 인간 본성 해부
김민상
‘마음’은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읽어본 국민 소설이며, ‘도련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와 함께 한국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소세키의 대표작이다. 세상에 나온 지 100년이 넘은 소설이 시대와 국경을 넘어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는 ‘마음’이 다루는 소재가 여전히 생명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은 인간의 본성을 세밀하게 포착하는 데 성공했고 이제는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소세키의 ‘마음’에서 선생님은 ‘나’에게 말한다. “사람은 막상 어떤 일이 닥치면 갑자기 악인으로 변하니까 무서운 거네.” 이 대사를 통해 인간 본성에 대한 선생님의 관점과 소세키의 통찰을 잘 알 수 있다. 부모님의 유산 문제를 다루던 중, 언급된 내용으로 어떤 일이란 일반적으로 독자에게 금전적 문제, 즉 ‘돈’에 대한 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 대사는 이익 앞에서 나약한 인간의 마음으로 해석되기 쉽다. 그러나 이 대사에서 중요한 부분은 ‘어떤 일’이 아니라 ‘갑자기’이다. 사람은 갑자기 변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자기 자신도 놀라울 만큼 빠르게 변하는 사람의 마음을 소세키는 지적하고 있다. 작중 선생님은 k가 하숙집 아가씨에 대한 마음을 고백하자 갑자기 돌변한다. 가장 확실히 선생님의 돌변을 알 수 있는 장면은 선생님이 밤중 자살한 k를 처음 발견한 장면이다. 자살한 친구를 보고 선생님이 가장 먼저 한 행동은 k의 유서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친구의 유서에 자신의 배신에 대한 언급이 담겼을지 두려워하고 하숙집 가족들에게 폭로될까 두려워한다. 동맥이 끊어져 길게 튄 핏자국은 유서를 확인한 다음에야 눈에 들어온다. ‘마음’을 끝까지 읽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명백히도 선생님은 인간성을 상실한 인물이 아니다. 선생님은 근원적으로 친구의 죽음에 대한 가책으로 죽음까지 이르게 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생님은 갑자기 인간성을 상실하고 악인으로 돌변했다. 소세키가 ‘마음’을 통해 지적하고 싶던 인간 본성이란 이러한 것이다.
‘마음’에는 선생님의 입을 통해 인간 본성에 대한 여러 통찰을 그대로 전하고 있지만, 그중 가장 유명하고 중요한 문장이 하나 있다. “예전에 그 사람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기억이 이번에는 그 사람 머리 위에 발을 올리게 하는 것이네.” 표면적으로 생각해보면, 이 문장은 자신의 죄(k를 기만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죄)에 대한 죄의식과 죄를 숨기고 있는 사람의 경계심, 그리고 언젠가 죄가 폭로되었을 때 받을 경멸에 대한 경계로 읽힌다. 그러나 인간 불신 혹은 인간 혐오(자기혐오를 포함한다.)에 가까운 선생님의 사상이 과거의 두 인물, 작은아버지와 k에 의해 형성되었음을 생각할 때, 이 문장을 k와 선생님의 관계에 대입해서 읽으면 흥미롭다. 과거 k에 대한 선생님의 감정은 미묘하게 묘사된다. 경외심과 동정심을 동시에 갖고 하숙집에 들어가서는 열등감으로 해석될만한 장면도 여러 나온다. k와 선생님의 관계에서 무릎을 꿇은 기억이란 k에게 경외심을 품었던 마음이고 머리 위에 발을 올리는 것이란 열등감으로 충동질해 k를 죽음으로 이어지게 한 행동을 의미하지 않을까 생각해봤다.
종장에 이르러 결과적으로 선생님과 k, 그리고 ‘나’는 공통된 속성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고향의 상실이다. 작은아버지와의 불화로 죽을 때까지 고향에 돌아가지 않은 선생님과 거짓말로 인해 두 가족에게 절연을 당한 k의 자리를 아버지의 임종을 내팽개치고 상경한 ‘나’가 계승하는 것이다. 이것은 작품의 시작부터 이어진 사제 관계의 완성이 아닐까 생각해봤다. ‘나’에 대한 부분으로 작품이 완결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한 가지 아쉬웠던 부분은 ‘마음’이 선생님의 편지에서 끝나버린 것이다. 이 작품은 명백히 1, 2장에서 흥미로운 인물인 선생님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키고 3장에서 모든 복선을 회수하는 구조이다. 그러나 1, 2장에서 ‘나’와 ‘나의 가족’에 대한 서사는 단지 선생님 서사에 대한 부속적 부분으로 취급하기에는 아쉬울 정도로 잘 만들어졌기에, 선생님의 유서를 읽은 후 ‘나’에 대한 언급 없이 작품이 끝난 점에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세이노의 가르침 (피보다 진하게 살아라)
타인에 대한 연민 (혐오의 시대를 우아하게 건너는 방법)
오직 인간만이 오랫동안 무력하고, 무력하기 때문에 타인에게 의지하며 살아간다. 무력감이 오래가는 순간 두려움을 만나게 된다. 만약 주위에 빛과 행복이 넘쳐나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 삶에 암흑처럼 번져 있다며 작가는 두려움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처럼 무력한 인간은 타인에게 자신이 필요한 것을 제공받지 못하면 분노하게 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제공받고자 하는 관점의 표현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책에서 분노를 부정적 관점으로만 언급하지 않고, 부당한 사건 자체에 부정을 느끼고 항의하며 잘못된 행동을 인식하는 데 필요하다고 말해주는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분노라는 감정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희망, 사랑, 연구에 집중한다고 1장에서 말한다.
“우리는 분명하지 않은 사실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를 필요가 있다. 보복에 대한 소망은 미묘할 수 있다.“라는 문장을 읽으며 과연 인간이 두려움 앞에서 차분하게 감정을 제어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또한 ”하지만 나는 민주사회에서 우리가 늘 동료 시민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는데서 두려움을 느낀다.“라는 문장을 통해 저자의 간절함과 절박함이 전해졌다.
모든 사회에서 혐오와 배제는 진행되었으며, 현대사회에서도 진행되고 있다. 혐오는 문화적 영향을 받아 특정 집단에 대해 일어나며, 성 소수자처럼 도덕적 논쟁과 상관없이 관념적 이미지 때문에 혐오로 나타나기도 했다. 인간의 의식이 자신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혐오를 조작하고 타 집단을 배제하는 사례들을 읽으며 답답함을 느꼈다. 결국 우리는 혼자 살 수 없지만, 자신을 지키기 위해 혐오하고 배제하는 잘못된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 두려움이 낳은 감정 중 하나인 시기심은 불확실성에서 태어나 사회에 만연하게 있으며, 민주주의를 늘 위협해 왔다고 말한다. 시기심 또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타인을 불행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악의를 보였으며, 근본적으로 무력감에서 발생하고 역시 원초적 두려움과 관련이 있었다. 저자는 오늘날 시기심이 만연한 이유는 경제적 안정이 보장되지 않아 발생하며, 시기심이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자라지 않는 조건, 사랑과 창조적인 업적을 국가의 길을 밝히는 조건으로 만들어가야만 시기심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인간이라는 불완전한 존재 속에 자라나는 불안한 감정들을 통제할 수 있는 날이 올까. 불가능하겠지만 시기심을 비롯한 불안한 감정들을 극복하는 힘을 길러 건강한 마음가짐, 건강한 관점으로 살아갈 수 있길 바란다.
모든 생명체는 본래 약자와 강자가 나누어지져 생존해왔다. 성차별주의도 남성과 비교하면 신체적으로 약한 여성을 비하하고 무시하는 것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틀린게 아니라 다름을 받아들이고 서로 공존하는 방법은 충분하지만, 아직도 사회 곳곳에 성차별주의와 여성혐오는 존재한다. 이 부분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유독한 감정들의 조합이 아니라 두려움으로 인한 모든 감정을 뛰어넘어 모두를 위해 함께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나갈 전략이다.”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이 모든 문제를 관통하는, 저자의 간절함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혐오의 시대에서 작가는 그럼에도 희망을 보기 위해 노력한다. 생각을 멈추지 않고 실제로 행동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게 희망을 생각한다. 세상은 희망적인 태도를 보여야 할 이유를 제공하지 않는다. 이 책에서 언급된 것들뿐만 아니라 우리는 수많은 사건 사고, 위험들에 노출되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말처럼 희망은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라 늘 선택의 문제다. 하지만 그럼에도 희망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바로 희망이 가치 있는 사랑과 신뢰를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책을 통해 기억해야 될 것은 두려움과 혐오를 직시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사회에선 개인의 행복을 중요시하는 개인주의 성향을 많이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선 개인의 행복이 아닌 전체적인 사회의 행복을 추구하며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준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어디로 이끄려 하는지 깊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느꼈으며, 그럼에도 희망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저자의 말처럼 희망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이 책을 통해 모두가 차분하게 불안정한 감정을 받아들이고 대응하며, 희망적인 연대 의식을 가질 수 있기를 소망한다.
타인에 대한 연민 (혐오의 시대를 우아하게 건너는 방법)
타인에 대한 연민 (혐오의 시대를 우아하게 건너는 방법)
타인에 대한 연민 (혐오의 시대를 우아하게 건너는 방법)
“인간은 세상에 맞설 준비가 되지 않은 채로 태어난다. 중요한 사실은 영영 준비가 되지 않는다”
소년이 온다 (한강 장편소설)
이방인
세번째 독서토론 활동이다. 이방인의 소설 부분은 끝이 났고 논문과 해설 부분이 이어진다. 일단 논문이니만큼 어렵고 읽는데속도가 나지 않아 조금 힘들었다. 과학 논문이 아닌 책 해석을 바탕으로 한 논문이기에 간결하고 확실한 내용이 아닌 조금 추상적이고 모호한 표현이 많아 두번 세번 다시 읽어야 했다.
해석을 읽은 후 이방인이라는 이 책의 제목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주인공인 뫼르소는 사회에 속할 수 없는 주변 인물이며사회를 낯설어하고 그 세계에 끼려는 노력 조차 하지않는 인물이다. 즉 뫼르소는 사회의 이방인인 것이다. 뫼르소는 사회에 맞춰지기 위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자신이 피고인인 재판장에서조차 말이다. 그가 조금의 거짓말을 한다면 사형을 받지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하지 않았다. 거짓말을 거부하고 진실만을 추구했다. 내가 그와 같은 상황에서도 뫼르소처럼 행동할 수 있었을까? 아마 아니었을 것 같다. 애초 나는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내가 아는 것보다 내가 느낀 것보다 더말하는 것이 나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거짓말의 거부의 결과가 사회에 부적응, 동떨어짐 심지어 죽음으로까지 이어진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나의 진실함을 추구하는 그런 신념보다는 거짓말을 택할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그런 굽힘과 유연함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물론 다른 사람에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내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뫼르소가 더 대단하게느껴지기도 한다. 어느정도 이해할 수 없긴 하지만 말이다. 뫼르소가 진실함울 추구하는 모습. 진실함에 대한 정열의 그 뜨거움은 책을 너머 나에게까지 다가온다. 진실함에서 벗어날 수 없는 뫼르소의 열정이 그가 그렇게 온전히 경험하고 격한 감정을 느끼게 하던 태양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