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바나나가 아니다

  “이것은 바나나가 아니다.” 도무지 예상할 수 없는 말들로 이어지는 시들을 모은 이 시집은 한 번에 읽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모래 알갱이가 끝없이 벼랑 끝으로 몰리는 이미지의 첫 시를 보고 이 시집은 해체주의처럼 보이는 작가의 상상력과 만물에 대한 관심과 존중으로 읽혔다.
  두 사람이 서로 트랙을 반대 방향으로 달리거나 정신에서 끊임없이 질문하는 이미지를 펼치는 작가는 죽음을 기다리는 무의미한 삶을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간단히 말하면 인간은 늙고, 늙으면 죽는다. 하지만 작가는 시로써 생을 바라보며 그 삶을 가볍게 보지 않는 것 같다. 시가 무의미하지는 않다. 작가는 시로써 아픔과 독백을 표현한다. 대답하는 사람보다 질문하는 화자가 더 많은 이 시집에서는 끊임없이 고민할 수 밖에 없는 이 세상에 애정을 붙이고 살아가는 일을 생각한다. 국어사전의 가나다순과 사람 기호성이라는 이상한 개념을 가져와 단어장을 만드는 작가의 집착은 꽤 신나는 일이라고 생각됐다.
  서점에서 팔리는 시집 중에서 최승자 시인이나 기형도 시인의 시집을 읽어 본 적이 있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허무주의적이거나 고통을 음미하는 감상적인 시를 읽어왔지만 이 시집을 통해 지루하고 답답한 인생에서 어떻게 하면 더 뜯어보고 만져봐서 의미를 만들어갈까 하는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의미가 과장되지 않고 열심히 일구어 낸 시어들이 보석처럼 느껴진다.

외사랑

  히가시노의 게이고의 ‘외사랑’은 ‘아내를 사랑한 여자’로 우리나라에서 2006년에 발표된 책을 소미미디어에서 제목을 바꾸고 간단한 수정을 거쳐 다시 출간한 책이다. 나는 전의 제목보다 이번에 개편된 ‘외사랑’이라는 제목이 책과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이 ‘외사랑’이라는 제목이 마음에 드는 가장 큰 이유는 책이 가진 방향성이 미쓰키가 데쓰로의 아내인 리사코를 오랜 시간 짝사랑했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 넓은 세계관을 가졌으며, 복잡한 심리상태가 얽혀 있다. 또한 당시에는 덜 했을 지 모르지만 요즘은 젠더의 경계와 갈등에 대한 고찰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퀴어 축제가 전세계에서 열리고, 페미니즘 사상이 퍼지는 지금을 살아가는 데에 이 책은 근본을 찌르는 질문을 던진다. 무엇이 옳은 지 그른 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남성이 되고 싶은 여성, 여성으로 태어났지만 남성의 특성을 지닌 여성, 그리고 그 들을 바라보는 주변의 평범한 인물들.. 이 들은 저마다의 사랑을 한다. 하지만 그 사랑은 상호작용이 일어나지 못한 채 서로를 짝사랑한다.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를 위한다. 그 결말이 어떻게 될 지라고 그들은 상대를 위해, 자신을 위해, 또 어떤 이는 냉철하게 자신의 업을 관철한다. 누구도 비난할 수 없으며 누구도 행복하지 못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려고 참고 노력하기만 하는 것은 과연 옳은 것인가? 참지 않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세상에 맞서는 일은 두렵다. 때론 위험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할 수 밖에 없는 일들이 있다. 우리는 그 때에 모든 것이 무너질 수도 있음을 알면서도 그 일을 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 하찮은 외사랑, 짝사랑일 뿐일지라도
  

비밀

  히가시노 게이고는 대표적인 다작작가이다. 굉장히 많은 수의 작품을 집필했으며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 작가로 손꼽히는 일본의 추리소설 작가이다. 하지만 이런 그도 처음부터 모든 작품이 성공적이진 않았으며, 지금에 비하면 초반의 소설들은 다듬어지지 않은 느낌도 있었다. 그의 초반 14년 간의 작가 시절엔 책도 안팔리고, 문학상도 후보에는 올랐으나 떨어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그는 작가 생활 중 유일하게 단 한 권의 소설도 출간하지 않은 1997년이 지나 1998년이 되어 ‘비밀’을 출간시킨다. 그동안의 작품들과 달리 인간의 마음을 쓰기 위해 노력했고, 오랜 준비 끝에 나온 장편소설 ‘비밀’은 성공적이었고, 그의 작가인생에 있어 터닝포인트가 되어 주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을 많이 읽어본 입장에서 확실한 차이가 느껴지는 섬세함이 있다. 이전 작품에 비해서 이후 작품들은 인물과 사건 속의 감정들이 섬세하게 묘사되었고, 독자의 몰입을 이끌어냈다. 이 책의 절정을 향한 전개와 위기에서 보여지는 헤이스케의 고민과 점점 심연으로 빨려들어가며 집착하는 모습들과 반대로 나오코는 모나미의 삶에 녹아들어 새로운 인생을 활기차게 살아가면서도 헤이스케와 자신의 사소한 변화를 아는 듯 모르는 듯한 그녀를 바라보는 헤이스케의 시선. 그 긴장감이 주는 몰입이 엄청났다. 그리고 그 아슬아슬한 줄타기 속에서 서로의 감정이 폭발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강하게 구속된 채 상대의 정신을 갉아 먹고 있음을 보여주고, 모나미의 영혼이 점차 돌아오기 시작한다. 이 장면 이후 나오코와 모나미의 소통과 헤이스케와의 교류 속에서 점차 모나미가 새로운 인생을 적응해 나가고, 반대로 나오코는 점차 사라져 간다. 그리고 결국 헤이스케는 모나미의 몸을 한 나오코를 처음 데이트를 한 공원에서 마지막으로 보내준다. 이후 나오코는 모나미의 몸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모나미의 결혼식이 진행되기 직전, 나오코와 결혼할 때에 반지를 맞춰준 고죠에게 시계 수리를 맡기러 간 헤이스케는 모나미의 결혼반지가 나오코의 결혼반지를 새롭게 디자인만 바꿨음을 알게된다. 그 반지의 위치는 둘 만의 비밀이었다. 모나미가 알 리가 없었다. 즉 나오코는 사라지지 않았고, 크게 싸운 그 날 밤 그녀는 서서히 자신을 지워나가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앞으로는 모나미로서만 살아가기로 결심했고, 그 긴 시간을 연기해온 것이다. 이를 알게 된 헤이스케는 빠르게 식장으로 향했고, 신부대기실에서 마주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녀의 눈물섞인 인사만 받아준 채 신랑인 후미야 앞에서 소리내어 우는 것. 그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렇게 책은 끝이 나는데도 도저히 책을 놓을 수 없었다. 처음엔 뒤통수가 얼얼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다음엔 두 사람이 크게 싸웠던 장면으로 돌아가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게 더 이해가 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 싸움이 트리거가 되어 모나미의 영혼이 돌아오고 나오코의 영혼이 천천히 사라지는 것 보다는 나오코가 두 사람 모두의 앞날을 위해 스스로를 지우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이후 한동안 이 책의 여파에서 못 헤어나왔다.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나라면 그 사람을, 그 역할을 잘 연기할 수 있었을까? 도저히 이런 질문들을 떨치기 힘들었고, 답을 내리기는 더욱 어려웠다. 과연 다른 이들은 어떤 결정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이미 베스트셀러이지만 더 많은 사람이 읽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