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은 여름 (김애란 소설)
여름의 마지막을 위해 아껴뒀던 책을 마침내 읽었다. 이 책을 고등학교 2학년 때 좋아하는 국어 선생님으로부터 추천받아서 읽은 이후로, 결말을 알면서도 여름철마다 괜히 꺼내 보게 되었다.
156p, <풍경의 쓸모>
“반면 차창 너머 여름은 느긋했다. 푸르고 풍요롭고 축축해 보였다. 그리고 그렇게 낯선 나라에서 모국어로 된 정보를 들여다 보고 있자니 손에 스마트폰이 아닌 스노볼을 쥔 기분이었다. 유리볼 안에선 하얀 눈보라가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인. 시끄럽고 왕성한 계절인, 그런.”
여기에 실린 모든 이야기의 배경이 여름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여름에만 느낄 수 있는 무언가가 느껴지는 것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여름보다는 가을에 가까운 지금 내가 책 속의 인물들을 바라보며 느끼는 감정도 마치 스노볼을 보는 감각과 닮아있다. 내가 있는 쪽이 안인지 밖인지는 확실히 할 수 없고, 또 중요하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이 주는 경험은 정확히 이런 부분에서 특별하다. 만나본 적도 없는 누군가의 솔직한 이야기를 아주 가까운 곳에서 관찰할 수 있다는 점. 내게는 특히 김애란 작가의 글이 그렇게 느껴진다.
266p,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어쩌면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선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이 ‘삶’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
죽을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한다는 건 자신의 삶을 걸고 죽음을 구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문장을 읽고선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존재를 곧 죽을 것으로 정의하는 것은 그 사람과 그 사람을 구하려는 사람까지 둘 모두를 모욕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깥은 여름>의 인물들처럼 때때로는 삶에서 미련하다고 느낄 정도로 선한 사람을 마주하곤 한다. 그런 사람들이 나 다음에는 어디로 향할지에 대해서 궁금해하기도 했다. 내게 있어서는 이런 이야기에 집중하게 되는 이유도 마찬가지인데 김애란 작가 또한 스스로가 이름 붙인 존재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바라보는 곳이 이따금 궁금하다고 말한다. 그 말 그대로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각자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고 또 다른 시간을 향해서 나아간다.
원하던 정답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더는 그들의 이후에 대해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희망찬 미래일지도, 상실의 늪일지라도 나아갈 사람들임에 분명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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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래시
21p
“본을 알던 우리는 모두 외과 수술로 몸을 절개하고 그 틈 사이로 보이는 장기를 끄집어내는 것만큼이나 고통스러운, 자동차 충돌 사고라는 도착된 에로티시즘을 인정한다.”
<크래시>라는 소설은 교통사고에 성적인 욕망을 느끼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이다. ‘교통사고’라는 메인 테마를 가진 것 치고 소설은 그닥 박진감있는 진행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느리고 선명한 말투로 모든 것을 묘사하는데 이 부분이 특히 읽기 괴롭게 느껴진다. 개그와 호러와 에로티시즘은 서로서로 가까이 맞닿아 있어서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섞이고 뒤바뀌기 마련이다. 이 경우도 마찬가지다. 너무 잔인해서 도발적이고 너무 적나라해서 오히려 우습다.
234p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은 점점 양식화되어서 우리가 유능한 외과 의사나 마술사, 아니면 코미디언 콤비가 된 것 같았다. 이제는 부상당한 희생자를 봐도 두렵거나 불쾌하지 않았다. 이른 오후까지 낀 안개로 사고를 당해 차 옆 풀밭에 앉아서 어이없어하거나 계기판에 찍힌 희생자를 봐도 본과 나는 직업적인 초연함을 느꼈다. 우리가 진정으로 이 일에 몰두하고 있다는 사실이 처음 드러났다.”
이 문장이 다가오기 전까지 나는 망할 책을 현대 사회의 삶에 대한 총체적인 은유라느니 하는 그럴듯한 문장으로 포장했다고 생각했다. 문명의 이기는 분명히 우리에게 상처를 남기고 있구나. 그리고 우리는 그런 상처를 알면서도 그 발전이 주는 쾌락에 당연하듯 몸을 맡기고 있구나… 억지스럽긴 했지만 이 책은 마침내 나를 이해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그의 성공적인 비유를 인정하는 것과 책 자체를 인정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일이다. 여전히 불쾌하고 어렵다는 기분을 떨쳐 낼 수가 없다. 우연히 내 눈 앞에 배고프다며 애처롭게 울고 있는 파쇄기가 나타난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가미 (구병모 장편소설)
아가미로 숨 쉬는 찰나를 담은 듯한 글자. 점을 찍기 전인 행간 사이로 들숨과 날숨을 끼워 넣은 신이 청련한 그 날의 곁을 거닐던 할아버지와 강하에게 곤과 강렬한 인사를 건네는 시간을 마련했다.
일시적인 인사치레였다면 몸을 구석구석 살피지도, 어디서 온 누구인지를 궁금해하지도 않았겠지만 가진거라곤 남들과 다른 특수한 몸집 하나를 지닌 곤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을 분요할 노릇이었다. 그럴 팔자였는지 모르겠으나 이내촌 사람들은 물론이고 존재의 노출을 기피하는 정체성이 곧 그의 세상이었다. 어쩌면 현실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미지의 아이들을 떠올리게끔 만든 페이지가 아니었을까 괜스레 짐작한다.
“싦음이 증오를 가르키지 않는다는 건 차라리 혼돈에 가까운 막연함이었어요.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은 매 순간 흔들리고 기울어지는 물 위의 뗏목 같아요. 그 불안정함과 막연함이야말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방법 아닐까요.”
곤은 그들의 세상을 아우르기 위해 여기에 남아있는 자세를 취했지만 흙으로 돌아간 먼지가 흩뿌려졌으리라 생각을 품었는지 눈물 닦을 필요 없는 물 속으로 그렇게 몸을 안긴다.
양심 고백
김동식 소설집은 읽는 시간보다 생각하는 시간이 더 길다. 두 번째로 집은 책 마저 윤리, 사회부조리, 성찰, 풍자를 오가는 자유로운 영혼의 느낌을 준다. 상황에 따라, 입장에 따라, 관점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되는 통찰이 경이로울 지경이다.
재능을 교환해주는 가게
10년간 연마하면 누구나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 김남우는 본인의 재능이 소설가였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가게 안을 들어선다. 뚱한 표정을 지닌 채 가장 낮은 5등급의 재능 – 바로 잠자는 재능이다. 새로운 환경, 침대가 없는 곳, 어디서든 개운하게 아침을 맞이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런 재능을 맡기곤 기다린다. 4등급의 다트 잘하는 재능이 마음에 안들었고, 3등급의 정원수 손질 재능을 지나, 2등급 시계 수선 재능을 뿌리쳤다. 욕심에 이끌려 1등급 가게의 관리직으로 교환 당했다.
일상이었고 익숙했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재능을 누구나 한 개씩 지녔을 거다. 허우적 대는 공중의 손을 바라보면서도 이미 김남우의 손을 감싸는 피부를, 그 감촉을 느끼지 못했다. 내기 지닌 거에 집중을 해보라는 의미를, 작은 거를 들여다보는 안구를 선사한다. 지금 나에겐 탐구하고 생각하는 습관과 어울리게 꾸밀 줄 아는 패션센스와 강인한 체력을 만든 운동루틴 이렇게 3가지의 재능을 꼽았다. 모든 것은 내 안의 내제된 것들로 피어난다. 그게 출발점이자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거라는 점. 무엇보다 타인의 것을 동경하고 아무런 기준점 없이 좇아갈 때, 그 끝을 마주할 때는 내가 아닌 내가 서 있을테고 길을 잃을 것이다. 그걸 알기에 나만의 내공을 쌓고 현재 지닌 것에 감사하며 내 손에 무얼 담았는지, 담을 수 있는지 탐색하는 이 시간이 참 귀중하다. 그렇게 또 한 번 나 자신을 지키는 힘을 기를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