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타적 믿음
최정현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완전히 사랑할 수는 있다.” 현대에는 이런 말들이 영화에 쓰이고 수필집이 유행을 탄다. 과연 100년전 시대는 누군가의 마음과 감정이 중요했을까? 이 책은 당시 봉건적 질서, 관습이 당연했던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무언가를 믿는다면, 나라를 믿고, 종교를 믿고, 국왕을 믿고, 선배(선생님)를 믿고, 의타성에 갇힌 시대정신이 난무했다. 나 자신만을 믿으며 누군가에게 배반당하지 않으려 애썼던 선생님은 고결한 엘리트로 묘사된다. 하지만 나 자신을 믿던 선생님은 결국 죄의식에 갇히고 만다. 즉, 선생님의 배신 당한 마음이 아닌 배신한 마음에 더 큰 초점을 두는 장면을 통해 ‘죄의식’에 방점이 찍힌 점을 알 수 있다. 당시 일본의 급변하는 세계관 속에서 무기력했던 엘리트의식과 죄의식이 혼재된 채로 살아가는 지식인의 일상세계를 나타냈다고 본다. 엄격한 윤리의식, 에고이즘만을 이야기해야 했다면 마음이라는 책에서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등장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나’를 통해 선생님은 다음 세대가 살아가야할 방법을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나 자신 조차도 완전히 믿어서는 안되며, 우리 인간은 의타적인 존재라는 점을 인지하고 참회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선생님은 누구를 믿었던 걸까?
K를 믿었다고 본다. K라는 인물은 결코 자신의 암울한 현실에 비관하여 죽는 인물이 아니라고 말이다. 그리고 선생님은 존귀한 인물로 K를 대한다. K 역시 선생님을 존귀하게 대했다. 어쩌면 K에 대한 믿음이 크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서로 의지할 사람은 몇 없었고 선생님과 K는 부모와 나라로부터 신경 쇠약만을 얻을 뿐이었다. 그들의 유대감은 점차 쌓여 서로 없으면 안되는 사이로까지 발전한다. ‘나’에게 동성에 대한 호기심과 마음이 후에는 이성에 대한 마음이 될 것이라는 요상한 선생님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다. 우리의 마음은 누구에게 의존하는가에 따라 삶의 방향이 정해지고 그것이 이성인지, 동성인지, 국가인지, 종교인지는 각기 다르다. 이 점에서 선생님의 마음이 온전히 K에게 어느새 의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죄의식 역시 마찬가지이다. 만일 죄의식이 없었다면 선생님에게 자신이 그토록 의지했던 K를 그릴 방도가 없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타성이라는 본성이 죄의식이란 감정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를 믿으며 살아야 할까?
노기대장, 천황의 죽음으로 메이지 시대가 끝났듯이, 선생님의 죽음으로 아내를 향한 고결한 사랑이 유지되고 친구를 향한 고결한 우정이 유지된 채 선생님의 믿음이 아름답게 마무리 된다. 만일 죽음, 희생 따위가 없었다면, 믿음의 의타성이란 마음, 즉 본성이 인간의 배반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으로만 서술되기 때문이다. 이는 작가가 예수의 죽음을 굉장히 모티브로 삼지 않았을까 싶다. 성경에서 예수가 죽지 않았다면? 말이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싶은 마음, 배반하고 싶지도, 배반 당하고 싶지도 않은 마음으로 살아간다. 선생님 역시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던 마음을 더이상 비관하기보다는 죽음을 통해 끝냈다. 작가는 오랫동안 온갖 잔병과 신경 쇠약, 일본문화에 의해 자살이란 것이 하나의 자연스러운 죽음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저 죽을 때가 된 것처럼 말이다. 35년을 참은 노기대장의 죽음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 역시 죽음이란 것을 언젠가는 맞이해야 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에게 믿음을 가지고 의타적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나쓰메 소세키는 이 책을 마음을 다스리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권한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