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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이상의 날개
이하늘
고등학교 1학년 당시 나는 진로를 미술 쪽으로 갈지, 교육 쪽으로 갈지 고민이 많았다. 미술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좋아한 것이었으나 장래 직업의 안정성을 고려했을 때 썩 좋은 분야가 아니었다. 그러나 교육은 내가 관심이 덜한 쪽이긴 했으나, 공무원이란 직업과 안정적인 일자리라는 점이 끌렸다. 그렇게 고민에 빠져있던 중, 우연히 이상의 <날개>를 읽었다.
나는 이 글을 읽고 화자가 처음엔 죽어있다 느꼈다. 박제가 된 천재,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본질은 죽은 것이다. 자신의 글을 쓰지도 지식인으로서 활동하지도 않는 화자는 날개가 꺾여 죽은 지 오래라 생각됐다. 화자는 소설 내내 강한 의지도 목표도 없는 권태롭고 나태한 모습을 보여준다. 심지어, 아달린을 먹여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도, 아내의 매춘행위를 목격했음에도 아내를 탓하지 않는 답답한 태도까지 보인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에 “날자”고 말하며 인공의 날개를 펼친다.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고, 오히려 상황이 더 악화되었음에도 화자는 재부상을 꿈꾼다. 괴로움에도 굴하지 않고 권태에 갇혀 있음을 거부하는 의지가 그에게 인공의 날개가 돋게 한 것이다. 다시 한 번 날개를 얻은 화자는 이제 전 같은 무력함을 벗어나 날게 될 것이다, 라고 나는 느꼈다.
이를 보고 생각했다. 만일 내가 미술 쪽으로 진로를 정하지 않는다면, 간간이 그림을 그릴 수는 있으나 그림으로 인정받지도 이름을 떨칠 수도 없다. 평생을 ‘미술이 취미인 사람’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런 삶 속의 나는 언제나 후회와 일에 대한 권태로 차있을 것이다. 그런 나는 날개가 꺾인 차가운 박제와 다름이 없다. 그러나 미술 쪽으로 방향을 정한다면, 매일 내가 좋아하는 그림에 대해 연구하고, 이를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런 나날들 중 비록 좌절과 시련이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으나, 사랑하는 그림과 함께라면 언제나 날고자 하는 의지를 잃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그 후 나의 장래 희망란은 언제나 미술 분야 직업으로 가득 차 있게 되었다. 이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언제나 가방에 세월과 손 때로 인해 꼬질꼬질해진 노트를 넣고, 책상 앞에서 몽땅 연필의 뭉뚝한 심을 억지로 깎아가며 계속 그림을 그려간다. 지우개가 재처럼 거뭇해지고, 내 손에서 고무와 흑연 냄새가 진동하게 되더라도 나는 멈추지도 후회하지도 않는다. 나도 화자와 함께 박제가 아닌, 살아서 날아가는 천재가 되기 위해
폭풍의 언덕
폭풍의 언덕을 보며
이하늘
<폭풍의 언덕> 은 1847년, 에밀리 브론테가 쓴 영국 장편 소설이다. <폭풍의 언덕>의 중심 내용은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사랑과 복수이다. 어릴 적 언쇼 가에서 길 잃은 집시인 히스클리프를 입양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히스클리프는 캐서린과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작은 오해로 인해 둘의 사이는 어긋나고, 히스클리프는 복수를 꿈꾼다. 그 후 히스클리프는 복수에 성공하지만, 모든 게 끝난 후 허망함과 캐서린의 죽음으로 인해 광증이 생겨 추운 날 홀로 사망한다.
<폭풍의 언덕> 약 60년의 시간을 차례대로 보여주는데, 나이대가 달라질 때마다 소설 속 묘사도 점점 성숙해지고, 변해 책 속의 인물들이 실시간으로 나이를 먹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어릴 적 캐서린의 거칠고 천진난만한 부분부터, 나이가 들고 에드거와 결혼해 부인이 된 성숙한 부분, 히스클리프와 재회한 후 지병으로 인해 점점 정신마저 병들어 가는 광적인 부분까지.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
연
노인과 바다
심판
한 인간은 광활한 우주 속에서 먼지 만큼 작게 태어나 찰나의 순간을 살다가 다시 무(無)로 돌아간다. 이 사실에 대해 알게 된 후 일상을 보내면서 종종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이 들곤 한다. 내가 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찌하여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살아야 하나?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들 때면 이런 생각의 빈도가 잦아지곤 한다.
이 책 <심판>은 이런 내 물음에 대답을 해주는 듯한 책이었다. 비록 희곡으로 써진 가상의 이야기였지만 작가가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있다. 주인공인 ‘아나톨’은 현실 세계의 재판장으로 살다가 의사의 부주의로 인해 죽어 저승에서 심판을 당한다. 저승의 심판은 이승의 재판과 비슷한 형식으로 진행된다. 재판장, 변호인, 검사, 방청객으로 이뤄진 모습이다. 여기서 흥미로웠던 점은 이승에선 큰 벌을 지면 저승으로 사람을 보내기 위해 사형을 시킨다. 하지만 반대로 저승에서는 착실하게 살지 않았다면 이승으로 보내는 ‘삶의 형’을 구형한다. 만약 착실하게 살았다면 천사가 되어 저승에 남아 있는다. 즉, 저자는 삶이란 고통이라는 불교의 윤회사상을 많이 착안한 것 같다. 그렇다면 ‘착실하게 살았는가?’는 어떤 기준으로 판명될까?
작품 내에서는 이승에서 있던 거의 모든 일들을 하나씩 확인한다. 사소하게는 무단횡단, 불장난, 욕설 등이 있고 크게는 재판장으로써의 의무를 다 했는가에 대해서도 기준이 됐다. 심지어 자식들을 잘 키웠는가에 대해서도 형을 내린다. 그 중 가장 큰 기준이었던 것은 ‘인에게 주어진 운명을 잘 따랐는가?’이다. 이 작품에선 생을 시작하기 전에 심판을 받고 카르마라고 하는 의 생의 갈피를 정한다. 예를 들어 직업, 핸디캡, 장점, 부모 등을 말이다. 하지만 주인공은 배우가 될 운명과 재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재판장이라는 직업을 가졌기에 카르마가 잘 이뤄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결국 삶의 형을 받게 된다.
그러나 작가인 베르나르는 운명에 국한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이 책을 지은 것 같다. 주인공은 재판장이 되어야 할 천사들이 몰랐던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본인 인생에 정해지지 않았지만 천사들도 모두 인정할만한 이유였다. 또한 주인공이 다시 태어나기 직전 자신이 저승의 재판장을 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저승의 재판장이었던 가브리엘은 이승의 세계를 궁금해하며 결국 둘의 운명이 바뀌어 작품은 끝난다. 이런 일들도 그 전생에 정해진 운명이었을까? 아니다. 그 누가 저승의 재판장이 이승의 생을 다시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이는 모두 아나톨이 주어진 삶이 아닌 자신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 삶이야 말로 즐겁고 주체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정해진 일, 정해진 공부, 수동적인 삶이 안정적이고 편안하겠지만 알 수 없는 미래를 처음으로 가본다는 설레임이 얼마나 인간을 흥분되게 하는가? 내가 모르는 처음 가보는 여행지가, 처음 해보는 일들이 얼마나 흥미로운가? 우리는 삶에서 주어진 일, 같은 일만 해서는 안된다. 삶을 주체적으로 개척해 나갈 때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고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는다.
인간의 삶은 두 숫자로 요약이 된다. 그 숫자 사이를 채우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야에 따라서 달려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