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의 사회는 기본적으로 인간을 위협하는 거의 대부분의 요소가 제거되어 있다.
질병? 작중 언급으로는 몇 개빼면 없다.
우울증 같은 심적 고통? 그런 일이 일어날 환경이 거의 없을 뿐더러,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났다할지언정 소마가 해결해준다.
게다가 멋진 신세계 속 문명인들의 사회는 작품 밖을 살아가는, 우리가 느끼는 가장 가장 원초적인 공포인 ‘죽음에 대한 공포’ 또한 없다.
그런 외부적, 내부적인 고통 요소로부터 해방된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아감. 스스로가 행복하다고 느끼고, 그렇게 느끼도록 지속적인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전쟁도 없고, 내부적인 쿠데타도 없고, 사회는 안정적으로 작동하며 사회 구성원들은 행복을 느낀다. 멋진 신세계 속 사회는 아무런 문제 없이 행복하다라고 볼 수 있다.
패니 크라운 같이 멋진 신세계 속 ‘문명사회를 살아가는 문명인’의 입장에서는.
내가 생각하기에, 작가는 독자로 하여금 이 ‘멋진 신세계’가 멋지다고 받아들일 수 없도록 두 가지 장치를 설정해놓았는데
첫번째는 버나드 마르크스와 헬름홀츠이고, 두번째는 야만인 존이다.
버나드 마르크스와 헬름홀츠. 혹자는 의문을 품을 수 도 있을 것이다. 두 가지 장치라면서 첫 번째로 소개되는 인물은 왜 두 명이냐는 의문을.
이는 각 인물로서 버나드와 헬름홀츠는 두 명이지만, 둘은 같은 속성을 공유한다. 바로 ‘문명 사회에서 소외된 인물’이라는 점이다.
물론 둘이 사회로부터 소외된 이유는 다르다. 버나드는 알파임에도 열등한 체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고, 헬름홀츠는 모든 부분에서 완벽하였기에 많은 시기를 받았고, 이에 기인한 소외감이다.
버나드와 헬름홀츠가 이 작품에서 의미하는 바는, 진리를 버리고 행복을 주는 사회에서도 행복 대신 진리를 찾으려고 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 즉 행복만이 모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나 헬름홀츠는 마지막에 섬으로 전출가는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데, 이것은 바로 윗 문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한계가 있는데, 기본적으로 문명 사회에서 자라왔기에 완벽하게 문명 사회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다.
존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었을때 웃는점을 보면, 아무리 그들이 소외감을 느끼고 이단적인 생각을 한다한들, 그들은 결국 문명사회가 가진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가령 문명사회가 하나의 유리병이고, 버나드와 헬름홀츠가 유리병 속에든 생쥐라면
둘은 유리병 바깥으로 손을 뻗을 수 있을지언정, 유리병 바깥으로 나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즉, 문명 사회 전체를 관통해서 바라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두 번째 장치인 ‘존’이 이 한계를 뛰어넘는다.
존은 위의 둘과 다르게 문명사회 바깥의 존재다. 그렇기에 문명사회의 인물들과 다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고, 지배자인 무스타파 몬드와 만났을때도 문명사회의 여러 것들을 관통하는 질문을 한다.
작가는 무스타파 몬드와 존의 대화에서 자신이 말하고자하는 바를 전달하는데, 바로 행복을 이유로 진리를 비롯한 인간의 여러 권리를 제한할 수 없으며, 그것이 설령 ‘고통 받을’ 권리 일지라도 각 개인의 선택에 맞겨야한다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을 얻기 위해 쟁취한다. 그리고 멋진 신세계의 사회는 ‘고통을 제거하고’ 행복을 던져준다. 하지만 단지 행복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상태가 되기 위해 고통 속에서 투쟁하고 스스로 행복한 상태에 도달했을때 비로소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부차적인 생각인데, 존이 원한 여러 고통받을 권리들도 받아들이겠다는 것은, 인간이라면 어떤 상태에 놓이더라도 그 상태에서 정신적으로 성숙해지고 성장하여 나아갈 수 있다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