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세계문학전집 44)

데미안은 상징이 많이 나온다. 꿈이 중요한 것들을 암시하며 신비주의적인 색채도 짙다. 주인공인 싱클레어는 의식적으로 금기시되는 것들에 다가가고자 하고 무의식적으로는 그것들을 통합시키고자 소망한다.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싱클레어는 소설의 개막부터 부모로부터 심적인 독립을 하고 시작한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간파하지 못하는 아버지는 더 이상 의지할 수 있는 보호자가 될 수 없고 자신을 완전히 포용해줄 수 없다고 생각되는 어머니 또한 믿을 수 없다. 이렇게 보금자리를 잃은 싱클레어는 방황해야만 한다… 그러던 와중에 데미안이 나타남으로써 부모를 향했던 싱클레어의 의존이 데미안으로 옮겨진다.
신비롭고 이교도적인 데미안은 싱클레어의 무의식적 소망과 결을 같이한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의 정신적 인도자로 자리잡게 된다. 방황하는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은 여러가지 자극을 줌으로써 이정표를 제공해준다. 그러나 데미안이 사라진 뒤 싱클레어는 또 다시 길을 잃는다.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보다 편한 것을 향해 도피한다. 후에 거리를 거닐며 이러한 자신의 과거 허물에 대한 혐오감 때문인지 무리지어 놀러다니는 학생들을 향해 마음 속으로 야유하기도 한다.
도피하던 와중 또 다른 길잡이인 피스토리우스를 만나게 된다. 이 사람 역시 신비주의적인 언행을 보이는데 소설에서 말하고 있는 바에 의하면 이것은 싱클레어가 원했기 때문인 것 같다. 싱클레어는 요령좋고 편안한 삶을 사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으니 힘겨운 통합의 과정으로 나아가야만한다. (싱클레어의 성장 이야기니까 그 부분이 부각되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겠지만) 어쩐지 그 과정에서 주변인들이 싱클레어의 성장을 위한 자양분으로 소모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싱클레어가 더 이상 피스토리우스 곁에 있어봤자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피스토리우스와의 관계를 끊는다. 그 후 데미안과 재회하고 징병된 후 탄알에 맞고 쓰러진다. 싱클레어는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상황에서 데미안을 통해 성장한다. 내면의 고뇌는 수없이 한 것에 비해 싱클레어의 삶 자체는 꽤 안락한 편이었으니 그 부분을 탄알이 채워주었던 것 같다. 말하는 것을 보면 그 때 처음으로 생사의 위기를 겪은 것 같으니까…
인물들이 전체적으로 연극적인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데미안 자체가 현실적이기보다는 내면, 상징 이런 것들을 더 중요하게 다뤄서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같이 읽은 친구들의 후기를 들어보면 이런 상징적인 특징 때문에 호불호 많이 갈리는 것 같았다.

이방인

주인공인 뫼르소는 기계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과묵하고 감정표현이 적으며 욕구가 거의 없어 보인다는 점에서 그렇다. 뫼르소는 결정할 때도 단순하다. 재미있을 것 같으니까…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으니까… 이런 이유들로 선택한다. 그의 결정은 무언가를 원해서라기 보다는 부정성이 존재하지 않음에서 기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웬만한 것들은 흔쾌히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것이 남들에게 잘보이기 위해 꾸며낸 것이 아니라는 점이 좋았다. 진심이 아니라면 상투적인 인삿말도 하지 않는 이런 솔직함은 어떻게 보면 통달한 도승처럼 보이지만 뒤집어서 보면 또 정반대로 보이기도 한다.
뫼르소가 살인에 대해 ‘ 햇빛이 너무 눈부셔서’ 라고 변명한 것 또한 솔직한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본인도 모르는 어떤 복잡한 내면의 의지가 섞였다 한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정직함을 보인 것이다. 검사는 뫼르소가 첫 발을 쏜 후 뜸을 들이고 네 발을 더 쏜 것이 확인사살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건 당사자가 아니고서야 알 수 없는 일이다. 끼워맞추고자 한다면 어디에든 욱여넣을 수 있다.
검사는 뫼르소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건에서부터 역행하고 있다. 과거가 먼저이고 현재가 나중인데도 검사는 이를 거꾸로 현재를 먼저, 과거가 나중이 되게 만든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든 간에, 부모님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았든 질나쁜 친구와 사귀었든 그런 것들은 뫼르소의 살인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당시에는 현재였을 순간들에 충실했을 뿐인데 살인을 저지른 순간부터 뫼르소의 모든 삶이 살인의 복선이 되어버리고, 과거가 현재의 주석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검사나 재판장처럼 뫼르소의 심리를 알기 쉽도록 규명하고자 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만 마냥 나쁘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아무 의미 없던 것들을 엮어서 스토리텔링 해내는 것이 책 밖에서 보면 터무니 없긴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무서우니까 나름 납득이 가도록 정리해보려는 시도일 것이다.
뫼르소의 솔직함이 작품 초반에서는 별로 의식하지 않는 솔직함이었다면 후반으로 갈수록 의식하는 솔직함을 보여준다고 느꼈다. 자신의 솔직함을 관철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소신이 생겨난다고 생각한다. 뫼르소는 여전히 사회와 유리되어 있을지언정 자기자신에 대해서는 멀리 있지 않다. 어찌 되었든 삶에서 도망치지 않고 충실히 살아간다… 
마지막 문장이 정말 좋았다.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써 나를 맞아주었으면 하는 것뿐이다.”
이 부분인데, 종교로 도망치지도, 좌절해서 삶을 포기하지도 않고 오히려 죽기 직전까지 삶에 대한 열망을 불태우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 같았다.

변신 (아로파 세계문학09)

변신은 유명하기도 하고 언제나 초등학교 권장도서 목록에 실려있었으니 많은 사람들이 한번쯤은 읽어봤으리라 생각한다. 나도 초등학생 때 교내 도서관 추천 코너에 꽂혀있던 것을 읽어봤었다. 그 땐 벌레가 되어버린 그레고르에 마냥 충격을 받았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다시 읽어보니 예전에 읽은 책과는 다른 책이라고 느낄 정도로 새로운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이래서 같은 책도 여러 번 읽어보라고 하는 거구나 싶었다.
그레고르의 가족 모두가 가장이었던 그레고르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레고르가 벌레가 되어 더 이상 가장의 역할을 하지 못 하게 되더라도 그레고르의 가족은 무너지는 일 없이 상황에 적응해나간다. 봉급을 받아오는 가장이 필요한 건 맞지만 중요한 것은 가장의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봉급 그 자체다. 그레고르는 돈을 벌어오는 것 이외엔 가장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돈은 다른 사람도 벌어올 수 있고 그레고르는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는 존재다.
가장 좋았던 장면은 그레고르가 벌레로서 더 편하게 기어다닐 수 있도록 그레고르의 방의 가구들을 모조리 빼버리는 부분이었다. 그레고르의 외관이 벌레로 바뀌어버렸다 해도 그것은 단순한 벌레가 아니라 그레고르라는 사람이다. 점점 그레고르의 벌레 모습에 익숙해져 갈텐데 그레고르의 이전에 사람이었던 흔적들을 지워버리면 그레고르는 정말 큰 벌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어버린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니까 그레고르를 대하는 태도도 점점 차가워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눈 앞에 있는 게 커다랗고 말도 못 하는 벌레니까 서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망도 사라져버린다..
그레고르에 대한 가족의 이해는 차단된 상황에서 가족에 대한 그레고르의 이해의 여지는 남아있다는 점이 잔인했다. 차라리 그레고르도 사람들의 말을 이해할 수 없도록 완전히 벌레로 변할 수 있었다면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하지만 이런 고민은 부질없을 것이다. 이랬으면 어땠을까, 저랬으면 어땠을까 같은 고민이나 왜 벌레가 되어버린 걸까, 이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느껴진다. 사람이 태어날 때 목적을 갖고 태어나지 않듯이 벌레로 변해버린 것도 이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벌레로 변해버려 부딪혀야만 했던 매순간에 대한 그레고르의 고군분투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
단절된다는 것에 대한 공포가 컸다. 그레고르는 장애물로 치부되고, 그레고르가 죽어도 아무도 그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레고르의 죽음을 새 출발 삼아 이제는 외동딸이 되어버린 그레고르의 여동생을 통해 미래를 꿈꾸며 끝나는 결말이 찝찝했다. 찝찝한 만큼 몰입이 굉장히 잘 되어서 읽고 난 후 정말 좋았던 책이었다. 또 시간이 지난 뒤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그동안 나는 너무 많이 참아왔다 (쓸데없이 폭발하지 않고 내 마음부터 이해하는 심리 기술)

‘그동안 나는 너무 많이 참아왔다’는 ‘분노’라는 감정으로 인해 인간관계에서 여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심리상담사(저자)를 찾아가며 점차 변화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책이다.
사회적으로 ‘화’라는 감정은 부정적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화를 참고 숨기려다가 그것이 쌓이고 결국엔 터져버려 난처한 상황을 마주하기도한다. 
이 책에서는 ‘화’라는 감정을 ‘적절히’ 표현해야한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다양한 사연을 가진 내담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먼저 ‘자신의 감정에 대한 이해와 인정’이 이루어지도록 돕고, 내담자들이 느낀 분노를 적절히 표현하며 타인과 대화하는 연습을 통해 분노표현이 오히려 인간관계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내가 느끼는 ‘분노’라는 감정 또한 나의 일부임을 받아들일 때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해준 책이다.

빈센트 나의 빈센트 (정여울의 반 고흐 에세이)

 우리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들어봤을 법한 이름, 빈센트 반 고흐.
 그는 일생동안 살아가며 모욕당하고, 무시당해왔다. 그는 자신 주변의 화가뿐만 아니라 부모님에게도 천대받는 삶을 살아왔다. 끝끝내 그들의 사랑을 쟁취해내지 못했다. 
 그런 기억을 가진채, 슬픔을 머금고 그림을 그려냈다. 우울과 애로를 베이스로 화폭을 채워나갔을까?
 사실 아무도 모른다. 그가 그런 서글픈 고통으로 그림을 그려냈을지. 혹은,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사랑을 그림에 담았을지 말이다. 이러한 방법이 그릇된 열정이든, 극적인 열정이든 그 자신 나름대로의 발버둥이었을 것이다.
 어째서 반 고흐의 작품은 명작이 되었을까. 그것또한 모른다. 어느 누군가는 “이 정도 그림은 나도 그려.” 할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게 모작은 그리 어렵지 않다. 모작은.
 그림은 단순히 눈으로 각인된다. 하지만, 그림을 그린 이의 사념은 눈에 각인되지 않는다. 기쁜마음으로 그린 아름다운 그림, 애통한 마음으로 그린 아름다운 그림. 둘은 아름다우면서도 아름답지 않다. 
 화폭에는 그런 매력이 있다. 그리는 이의 생명력이 담겨있다. 단순히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로, 우리가 갈 수 없었던, 갈 수 없는 공간으로 감히 잠시나마 발을 들일 수 있게해주는 매개의 힘이 있다. 아지랑이 처럼 녹아내린 화가의 편린을, 당신이 투쟁한 그곳에 닿는.

쿠키 한 입의 사랑 수업

어린이들이 읽는 동화책으로 독후감을 쓰기가 좀 그렇지만 참 좋은 책이다.
내가 막연하게 알고 있는 것들을 실재로 알려주는 책이다. 쑥스러워서, 혹은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는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하는지 알려준다. 점점 이기적이 되어가는 이 세상에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며 살아야하는지를 알게하는 책이다. “아 그렇구나. 이렇게 말하면 되겠구나.” ” 이렇게 하면 상대방이 내 마음을 전달받겠구나”라고 생각하며 계속 책을 읽게된다.
 친구에게 좋은 일이 있을 때 다른 누구보다 기뻐해 주며 응원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군가 쿠키를 엉망으로 만들어도 그 사람을  아끼는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 조건 없는 사랑을 하고 싶다. “난 괜찮아”라고 말하는 너그러운 사람이 되고 싶다.  달콤한 쿠키 냄새만으로 행복을 느끼는 그런 삶을 살고싶다.

험한 시절을 살아보니 모든 순간이 은혜였다 (93세철학교수할아버지가 손주들에게들려주는삶의교훈이되는 자전적편지모음)

선물 받은 책이다.
93년을 살아 온 할아버지가 삶의 교훈을 들려주기 위해 손주들에게 쓴 편지이다. 이 편지의 수신자 중 한 명이 나와 아는 분이여서 이 책을 선물받게 되었다. “할아버지”가 주는 친근함이 편안하게 책을 읽을 수 있게 하였다.
저자인 할아버지는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내셨다. 일제시대에 태어나셨고, 한국전쟁도 겪으셨으며, 전쟁 때 참전하여 총상도 당하셨다. 가난한 집안이여서 선교사님들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업을 마쳤고,  여러 선교사님들과의 인연과 도움으로 신학 공부를 하고 교수가 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늘 끼니 걱정하며 지내야 했던 어린시절이였지만 그때마다 선교사님들의 도움이 있어서 정말 감사한 삶이였다고 하시며 손주들에게 “감사하자”고 하셨다.
할아버지는 큰 병으로 입원하고 치료 받은 일이 있었는데, 무사히 병이 나은 후에는  할아버지 스스로, 먼저, 변화하는 삶을 사셔야겠다고 결심하셨다. 세상을 변화시기고, 남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먼저 변화시켜야한다고 순주들에게 교훈을 주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손자 손녀들을 축복하시며 이 책을 마무리하신다.
나의 할아버지는 내게 어떤 말씀을 해주실까? 할아버지와  가끔 전화할 때면  날 걱정해주시는 마음이 느껴진다. 밥 잘 챙겨 먹으라고도 하시고, 든든한 할아버지가 있으니 걱정 없이 열심히 하라고도 말씀해주신다.이 책의 저자처럼 손자에게 무한 사랑을 주시는 할아버지가 계셔서 좋다.

유혹하는 글쓰기 (스티븐 킹의 창작론)

몇 주 전, 알라딘을 구경하다가 우연히 <유혹하는 글쓰기>라는 책을 발견했다. 요즘 글쓰기에 관심을 두고 있었던 터라, 이 책의 이름이 꽤나 익숙했다. 저자인 스티븐 킹도 낯설지 않은 이름이었다. 그래서 몇 페이지 읽어 본 후 고민 없이 구매할 수 있었다.
짧은 감상

우선 책에 대한 감상을 간단히 소개해보겠다. 이 책은 일반적인 작법서와는 사뭇 다르다. ‘글쓰기 책이라고 하면, 실용적이지만 재미없을 것 같은 느낌이 많이 든다. 하지만 저자인 스티븐 킹이 문학 작가이다 보니, 이 책도 마치 산문을 읽는 듯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가령, 자신의 생애, 작문 방법 등을 수필 형식으로 풀어낸다. 다른 작법서들보다 훨씬 재미있었고, 몰입하며 읽을 수 있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소설 창작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글쓰기에 적용할만한 것도 꽤 있긴 했지만, 소설에 아주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추천하지 않는다. 그러나 소설을 직접 창작하고 싶은 것이 아니더라도, 소설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다면 읽어 볼 만 하다. 한 소설가의 창작 과정을 엿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책의 내용

책의 구성을 한번 살펴보자. ‘이력서-연장통-창작론-인생론’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이력서와 인생론 부분은 저자의 자서전이라고 보면 된다. 한 유명 작가의 생애, 그리고 그의 인생은 어떤 것이었는 지를 알 수 있다. 나는 그의 인생이 참 부러웠다. 왜냐하면 저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글쓰기, 즉 ‘예술’을 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삶의 위기 상황에서,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못할 수 있는 상황에서 ‘예술을 하기 위한 의지’ 덕분에 살 수 있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원하는 삶 아닐까? 나는 그의 삶이 너무도 부럽다. 나도 저자처럼 나의 인생을 지탱해 줄 어떤 것을 찾고 싶다.

연장통과 창작론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글을 쓰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연장통에는 글쓰기 기술들이, 창작론에는 소설을 창작하는 과정이 담겨있다. 이 파트도 정말 마음에 들었다. 글쓰기 방법을 설명하는데도 소설을 읽는 듯 재미있어서 몰입하며 읽었고, 예시문이 풍부하고 훌륭했기 때문이다. 특히 작가의 창작 방법을 처음 알게 된 것이라서, 소설의 탄생 과정을 흥미롭게 탐색할 수 있었다. 작가가 알려준 글쓰기와 창작 방법들은 대부분 소설에 관한 것이긴 하다. 하지만 일반적 글쓰기와 더불어 전혀 다른 분야의 일에도 녹여낼 수 있는 방법들이다. 다른 분야와 엮어가며 읽다 보니 순조롭게 완독할 수 있었다.

후기의 인생론을 보면, 저자는 이 책을 집필하는 도중에 심각한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주 운 좋게, 죽지 않을 정도로만 다친 것이다. 남은 인생을 누워서 보내야 할 수 있는 상황에서, 과연 누가 긍정적으로 인생을 바라볼 수 있을까? 저자는 이 고난을 예술(창작)으로 회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창작에 대한 의지로 미래를 이어나갔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예술은 수많은 이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사람을 풍요롭게 해주고, 현실을 초월하게 해준다. 나도 좋아하는 예술을 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된다면 좋겠지만, 아직 삶을 바칠 만큼 좋아하는 것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이 책을 읽고 문학에 관심이 깊어졌다. 그래서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아무 생각 없이 대출해서 읽는 중이다. 하지만 아직 내 수준으로 읽을만한 책은 아닌 것 같다. 사르트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과 내가 이해하는 것이 일치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열심히 읽어서 이 책의 독후감도 쓸 수 있게 되면 좋겠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당신은 의미 있는 삶이란 어떤 삶이라고 생각하는가? 그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

3분 정도라도 좋으니 잘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 짧은 줄거리

주인공 이반 일리치는 19세기 러시아의 유능한 판사이다. 그는 허영심에 가득 찬, 행동에는 위선이 배어있는 인물이다. 겉으로는 선한척하고 고귀함을 떨면서, 속으로는 타인에게 고상한 인물이라고 비춰지는 자신의 모습을 즐긴다. 흔한 사교계 인물의 전형이다. 이러한 그가 불치병에 걸리게 되고, 죽음에 이르며 삶을 회고하는 과정을 깊이 있게 묘사해낸 책이다.

 

앞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서,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의미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계속 떠올랐다. 인생은 매우 짧다. 인간은 오래 살아봐야 100년 정도 산다. 하지만 인간 문명이 이어져 온지는 약 6천년 되었다. 또한 지구가 탄생한지 약 46억년이 지났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는 긴 시간의 찰나에 머물다가 소멸하는데, 대체 의미 있는 삶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작고 미미한 인간의 삶을, 대체 어떻게 살아야 의미가 있을 지 궁금했다.

이 책의 주인공 이반 일리치는 죽음의 곁에서 삶을 회고한다. 그는 젊은 시절 판사가 되었고,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사교계에서 활동하며 행복한 삶을 살았다. 이런 삶을 일반적으로 보면 의미 있고, 멋진 삶이다. 심지어 이반은 해야만 하는 것을 잘 해낸 삶이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그는 하등 의미 없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깨닫고, 정신적 고통과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나의 의미 있는 삶에 대한 질문은 바로 이 장면에서 명확한 실체를 드러냈다. 대체 의미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 죽기 전 삶을 회고할 때, “의미 있는 삶을 살았다.”라고 말하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사랑을 한 삶, 헌신한 삶, 쾌락을 추구한 삶많이 생각해 보았지만,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내가 얻은 교훈: 솔직한 삶

주인공은 허영심에 가득 찬, 위선에 가득 찬 삶을 살았다. 그러다보니 그의 아내도, 친구도, 지인도 전부 똑같은, 위선적인 인간들이었다. 죽음의 공포에 빠져있는 주인공에게, 위선적인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이 더 큰 고통을 가져다주었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가는 주인공의 피해의식도 이해가 간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얻은 교훈 한 가지가 있다. 물론 의미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완벽한 답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삶을 사는 데 분명히 도움 될 교훈이라고 확신한다. 나는 이 책이 솔직한 삶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주인공이 겪는 정신적 고통의 원인은 거짓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거짓된 삶, 그렇게 살아옴으로써 형성된 주변의 위선적인 환경들, 지인들의 가벼운 태도 등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물론 인생을 살아가는 데 솔직한 것은 독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소중한 누군가와 솔직한 대화를 나누는 것, 허영심을 버리고 진짜 를 마주하는 것, 불안정한 세계를 있는 그대로 직면하는 것, 그러한 것들이 우리의 삶에 고통을 덜어주는 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나를 다스리는 묵직한 침묵 (헨리 데이빗 소로우 명상일기)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1817년 7월 12일 메사추세츠 콩코드에서 태어났다. 그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초월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월든>으로 유명한 듯 하다. 어쨋든 왜 그의 책을 읽어야 할까. 그는 주객전도의 문명을 비판했기 때문이다. 19세기 미국이나 21세기 한국 모두, 인간이 물건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물건이 인간을 소유한다. 인간이 돈을 쓰는 것이 아니라 돈이 인간을 쓴다. 즉 인간은 소외되었다. 
  그는 책과 학교에서만 얻어지는 지식보다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지혜를 말한다. 그는 개성을 중시했다. 즉 학교나 인간이 만든 제도는 인간을 억압하고, 정형화시킨다. 모두가 똑같아지는 것이다. 하지만 소로우는 ‘각자의 북소리에 맞춰 살라’고 했을 만큼 개개인의 개성을 중시했다. <나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라는 소로의 평전을 보면, 소로는 멋대로 자유롭게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소로는 그런 삶을 강연과 저술을 통해 알리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그가 알려지게 된 것은 러시아의 대문호라 불리는 톨스토이 때문이라 한다.
  하지만 제도나 관습을 탈피한 삶이 원칙 없이 사는 삶이 아니라, 정신주의의 원칙에 충실한 삶, 철저한 정신적 탐구를 하는 삶이라고 한다. 그는 당시 19세기의 배금주의, 물질주의를 특히 경계했다. 오히려 인디언의 삶에서 영감을 받은 글이 많다. 그는 특히 물질이 인간을 소유하게 되는 것을 철저히 경계해 소박한 삶을 중시했다.
  그는 평생 최소한의 노동(일주일에 하루 정도)으로 돈을 벌고, 나머지 6일은 산책, 자연관찰, 독서, 집필을 했다고 한다. 소로가 추구한 삶은 “나는 강제되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 숨을 쉰다.”이다. 
  소로는 44년간 살았지만, 매우 방대한 저작을 남겼다. 그 중 대부분이 일기이다. AMS출판사의 총 20권으로 된 소로 전집에서 7권부터 20권까지가 <일기 The Journal of Henry David Thoreau>이다. 하지만 이 책의 경우 총 237페이지로 상당부분은 인용하고 짜집기를 통해 만들어 진 것 같다. 하지만 소로의 <일기 The Journal of Henry David Thoreau> 전집이 한국어로 번역된 것 같지는 않다. 적어도 학술정보관에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의 한국과 세계에는 문제가 많다고 한다. 문제 원인에 대해서는 사람들마다 의견이 다르지만 소외, 억압, 강제 등이 문제의 원인 중 하나라는 것에는 대부분 동의 할 것이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어떤 삶이 이상적인가? 하는 물음을 묻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소로의 삶과 생각을 통해 단순하게, 소박하게, 고독한 삶이 무엇이고 지금 현실에서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해 생각해볼 만하다. 
  다음은 이 책에서 인상깊었던 문장들이다.
“어떤 사람에게 무엇을 가르친다는 것은, 아니 진리를 가르친다는 것이 얼마나 무익한 일인가! 사람들은 자기 방식대로 진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필요하다. 사람은 두뇌로만 생각하지 말고 팔과 다리로도 생각해야 한다.”-p.14
“부유함으로 인해 더 좋은 옷을 입고 더 좋은 집에서 살면서 부유함을 가졌을지 몰라도 인생의 진지함을 얼마쯤 잃은 것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자기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남을 고통스럽게 했을 것이다.”-p.19
“인디언들은 침묵의 힘을 믿으며, 그것을 완전한 평정의 상징으로 여긴다. 침묵은 육체와 정신과 영혼의 절대적 평정이자 조화라는 것이다. 자아를 한 치의 흔들림 없이 평온하게 유지하는 것, 즉 나뭇가지에 떨림도 없이 매달려 있는 나뭇잎, 물웅덩이 위에 반짝임조차 그쳐버린 잔물결, 이런 것들이 바로 지식에 물들지 않고 자연에서 배울 수 있는 가장 큰 지혜이며, 힘이다.”-p.54
“인생의 해변가에서 우리와 바다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 이웃들은 순례의 길을 가는 동안 나에게 위안이 되어줄 동료들이다. 그러다 길이 갈리는 곳에서 또다시 홀로 길 위에 서 있어야 한다. 인생의 먼 여정을 끝까지 함께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p.94
“왜 고되지만 단호한 삶을 살지 않는가. 모험과 일로 가득하고 배울 것이 많은 삶을 왜 피하는지? 때때로 나는 들을 가로질러 오랫동안 가보지 않은 색다른 곳으로 달려간다. 그래 멀리 방랑을 하고, 삶을 껴안고 삶을 송두리째 알아 내 많이 배우고 살아가고 싶다.”-p.170
“아, 이 조용하고 어둡고, 이슬비 내리는 오후의 외출이 생각보다 좋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나의 산책은 쾌청한 날보다는 이런 날이 더 암시적이고 유익하다. 경치는 안개비로 축축하고 고요함이 성찰을 불러일으킨다. 모든 것들이 나를 안정시킨다. 구름과 안개, 나는 지금 이것들에 쌓여 산책을 하고 있다.”-p.195
“야생은 어떤 사람도 결코 지배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진짜 독립적인 인간들이란 결코 길들여지지 않으며, 사회에 의해서 결코 파괴되지도 않는 야생의 인간들이다. 모든 아름다운 것은 야성적이고 자유롭다.”-p.198
“인디언이 생각하는 용기란 절대에 가까운 자기 절제이다. 참으로 용기 있는 사람은 공포나 분노, 욕망이나 고뇌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자기 자신의 주인이다.”-p.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