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한길그레이트북스 81)

이 책은 아돌프 아이히만을 중심으로 악의 평벙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들을 살펴보면 자신의
기계적으로 행하는 일을 비판적으로 사고하지 않는 것은 악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금 만든다. 그렇기에 우리
주변에 악은 언제나 생겨날 수 있음을 항상 인지해야 할 것을 깨달았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아이히만의 범죄, 유대인 학살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집중하기보다는 인간 심리에 대해 더 생각해본 것 같다. 지속적으로 인간의 본질에 대한 질문들을 던지게 되었다. 인간의 판단 기능의 본질에 대한 질문, 도덕성에
대한 기초적인 질문들을 생각해보면 혼란스러웠다. 사례를 들어 나를 대입해봤을 때 과연 나는? 과거의 나는? 이라는 질문을 되새김했던 것 같다. 

 책에서 언급된 이스라엘 법정이 내세운 논지 제48어떤 행위나 또는 행위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처벌 가능성은 그 사람이 자신의 양심이나 또는 자신의 종교의 명령에
따라 요구되는 행위를 고려했다는 근거에 면제되지 않는다.”
 본인의
행동에 따른 결과에 대한 사고를 하지 않은 죄악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논지라고 생각된다. 또한 아이히만은 상관의 명령으로 인해 악을 저질렀다라고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상관의
명령이라는 사실은 불법성이 명확하더라도인간의 ‘양심’의 정상적인 작용을 심각하게 혼란시킬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었지만, 정상적으로 작용하지 못한 양심에서 비롯한 행동도 주의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인간들은 자기를 이끌어 주어야만 하는 것이 그들 자신의 판단뿐이고,
게다가 그 판단이 자기들 주위에 모든 사람들의 만장일치의 의견으로 간주해야만 하는 것과 완전히 어긋나는 것일 때조차도, 사람들은 옮은 것과 그른 것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악의 평범성이란 말 그대로 누구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경각심을 갖고 제2의 아이히만이 되지 않도록 본인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해 항상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멋진 신세계

인간이 공장에서 제품처럼 생산되는 세계이 책의 뒤표지에 쓰여있는 문구다. 이 책에서 멋진 신세계라고 불리는 세상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는 달리 인간이 공장에서 제품처럼 생산된다. 남자와 여자가 관계를 맺고 아이를 잉태하는 행태가 아닌, 공장에서 똑같은 자동차를 몇백 대씩 찍어내듯이 인간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곳에서 인간이 만들어지는 방식은 실로 공장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수정되기 전부터 알파, 베타, 감마, 오메가, 엡실론의 5개의 계급으로 분류되고, 계급을 넘어서 인생까지 설계되어 생산된다. 이곳에서의 신은 포드이다. 자동차 회사 창립자 포드와 신세계의 신 포드. 이 둘의 이름이 같은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닌 것이다.

다른 등장인물의 이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버나드 마르크스의 경우, 버나드 쇼와 카를 마르크스를 합친 이름이다. 사실 이 책을 읽을 때 이름을 이렇게 지은 것을 의도한 걸까?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찾아보니 작중 이름이 있는 계급의 모든 인물은 역사적 인물의 이름들을 조합한 이름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다른 등장인물은 차치하고, 이 책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인물인 존의 이름이 나는 제일 궁금했다. 존은 신세계의 사람이 아니다. 야만인 보호구역에서 자라난 존은 어머니인 린다가 신세계의 사람이다. 모종의 이유로 신세계에서 퇴출당한 린다는 야만인 보호구역에서 존을 낳은 뒤 존에게 계속 신세계로 돌아가고 싶고, 신세계가 얼마나 멋진 곳인지 말한다. 존은 그러한 신세계에 환상을 갖게 되고, 어느 날 신세계로 갈 수 있게 되는 날이 오자 흔쾌히 그곳으로 향한다. 하지만 야만인 보호구역과 신세계는 완전히 대립하는 곳이었다. 냉전이라든가 그런 의미가 아니라, 사상적으로, 그리고 본능적으로 그 두 세계는 절대 공존이 불가능하다. 소설 속에서 존은 신세계에도, 야만인 세계에도,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한 존을 보면서 나는 문득 존의 이름의 유래가 무엇일지 생각해 보았다. John Doe. 영어권 국가에서 신원 미상의 남자 변사체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이 소설의 마지막에서 존이 결국 자살을 하는 것으로 짐작했을 때, 존의 이름은 여기서 따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공식적인 발언은 없었으니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소설을 다 읽고 난 뒤 만약 내가 이곳에 산다면 어떨지도 고민해 보았는데, 정작 나는 이 세계에 만족하고 살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지위와 세상에 만족하라고 설계되어 태어났다면, 지위가 낮은 오메가나 엡실론으로 태어났다고 한들 그 세상 속에선 행복하게 살지 않을까? 우리가 말하는 행복과는 거리가 멀지만, 신세계 속에서의 행복에 부합한, 그러한 행복한 삶을 살지 않을까? 높은 계급이든, 낮은 계급이든 모두가 만족하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유토피아가 아닐까? 물론 신세계를 바깥에서 보는, 읽는 입장에선 계급에 만족하도록 최면 유도 학습이 된 것을 차치하더라도 낮은 지위로 태어났는데 어떻게 만족할 수 있는지, 그리고 미래가 완벽히 설계되어 태어나는 것이 과연 만족스러운 삶이냐는 질문을 던질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 멋진 신세계라는 책이 유토피아의 이면을 잘 꼬집은, 아주 첨예하고 치밀하게 쓰인 작품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NFT 사용설명서

최근 NFT 서비스에 대한 관심이 많아진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들어본적이 없고 NFT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이번 동계 독서클럽을 기회로 공부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해당 도서를 선정해 읽게되었다.
NFT.. 사실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NFT를 통해 저작권 인식을 알리고 요즘 저작권 문제로 이슈되는 디지털 그림들의 소유권을 지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정이 있다면 발행 방법도 쉬워, 미리 알게되었으니 내 그림을 올려 소유권을 미리 주장하는 것도 재밌어보이는 일처럼 보인다.

멋진 신세계

  좋은 기회로 독서클럽에 참가하게 되었다. 독서 클럽에서 활용할 책은  「멋진 신세계」 였다. 처음 이 책을 사고 제목만 봤을 때는 굉장히 희망찬 결말로 끝날 것 같았다. 그러나 생각했던 결말과는 반대로 존의 자살 이라는 극단적인 결말로 끝났다. 이에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가 무엇인지 의문이 들었다.
  제일 인상깊었던 부분은 ‘공동체, 동일성, 안정성’ 이라는 표어를 앞세워 사람을 계급화하여 다룬다는 것이었다. 올더스 헉슬리가 그린 멋진 신세계에는 계급 있으며 각자의 위치에 만족해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과연 다들 진정으로 만족해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일까. 소마라는 일종의 마약을 통해 감정을 통제당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닐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세계를 지향해야 할까. 

허클베리 핀의 모험

허클베리 핀은 술주정뱅이 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적부터 학대를 받아온 아이입니다.
때문에 아버지를 원망하고 죽길 바라는 소년입니다.
그러다 더글러스 부인의 양자가 되어 그녀에게서 예절을 익히고 학교에 나가는 등 교양있는 생활을 차차 배워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허클베리의 아버지는 그가 떼돈을 벌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허클베리의 양육이 자신의 몫이라 주장한다.
그렇게 허클베리의 막대한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결국 그를 유괴하여 통나무집에 가두어 살게 한다. 
나름대로의 만족 생활을 하지만, 계속되는 아버지의 폭력에 위협을 느끼고 탈출을 결심한다.
벽에 구멍을 뚫어 탈출한 뒤, 근처 돼지를 죽여 집 안을 피바다로 난장판을 만든 뒤 누군가 
자신을 살해한 것처럼 꾸민 뒤, 강 가운데 있는 잭슨 섬에 숨어 살게 된다.
사람들로부터 도망을 치던 중 흑인 노예 짐도 만나 여러가지 상황을 맞닥뜨린다.
이 책은 허클베리핀, 흑인 노예 짐, 톰이 한 팀이 되어 짐의 자유를 위해 모험을 떠나는 내용입니다.
노예제도가 있을 당시의 미국 상황을 비판적으로 잘 드러낸다는 특징이 있어 인상깊었던 것 같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은, 우리나라에도 과거 신분제가 있었던 만큼 남의 나라 이야기라고 생각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짐이 노예에서 해방된 것을 축복받아야 할 일이지만, 아쉬웠던 점은 자신의 손으로
직접 이뤄낸 자유가 아닌 타인의 배려로 이뤄낸 해방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한 번쯤은 읽어볼만한 책이니 꼭 읽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메타버스 (디지털 지구, 뜨는 것들의 세상)

트렌드가 되어버린 메타버스에 대해 더 심도있게 알아보고자, 메타버스라는
책을 선택하여 독서클럽을 활용해 읽게 되었다. 이책에서는 메타버스의 4가지
세계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제페토와 같은 증강현실 세계, 인스타그램과
같은 라이프로깅 세계, 배달의민족과 같은 거울세계, 로블록스와
같은 가상세계로 구성된다. 각 세계에 해당하는 다양한 예시들을 제시하고 있으며, 책의 후반부에는 이러한 메타버스를 적용해 나타나는 여러 문제점들도 언급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문제에 우리가 어떠한 태도를 지녀야할지 고민해보게 하며, 메타버스를
올바르게 적용할 방향성도 언급하고 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메타버스가 이렇게 트렌드가 된 가장 큰 원인은 메타버스가 현실세계에서의 소통의 한계를 보완해주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면의 만남에 지치더라도 오히려 커뮤니티의 댓글을 통해 소통하듯 온라인상의
소통이 편한자들에게는 메타버스가 더 활발히 활용된다면, 현실세계의 만남을 대체하는 수단으로 활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도 서로 맞지 않는 이들과는 절교나 점점 멀어지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메타버스내 뒷삭이 문제일수는 있겠지만, 그것도 일종의 자기 방어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메타버스 공간내에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거나, sns에서 익명으로 대화를 하거나,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에서 뜻밖에 연락이 닿는 경우도 있다는 장점이 있다.

따라서 이러한 메타버스에 대해 오프라인 만남의 한계를 메타버스는 보완하고 무한한 확장이 가능하기에 메타버스를
거부하지 말고 수용하는 태도를 가지고 받아들이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면의 만남에 지치더라도
오히려 커뮤니티의 댓글을 통해 소통하듯 온라인상의 소통이 편한자들에게는 메타버스가 더 활발히 활용된다면, 현실세계의
만남을 대체하는 수단으로 활용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sns 공간상에서의
소외감도 느낄 수 있기에 메타버스에서 만나게된 사람들을 여행의 동반자처럼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책에 소개된 메타버스로 인한 문제들중 메타버스 내에서의 인공지능 오토에서 발생되는 문제가 가장 인상깊었다. 인공지능의 유저가 개입해서 원래 있던 (실제)사람 유저를 몰아내는 현상이 발생해 즐거움을 위해 게임을 하던 사람들은 결국 쫓겨나게 된다는 문제이다. 이를 통해 메타버스가 활발히 활동되는 현재, 인공지는 기술 오용에
대한 부작용에 대해 다같이 고민해봐야할 시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공지능의 발전은 어차피 막을 수
없고 인공지능은 미래 산업의 핵심 기술이 될 것이 확실하므로 무작정 인공지능에 대해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만
쓴다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해줄 것이 명백한 인공지능 기술을 앞으로 어떻게 활용하여 일자리를 창출하고, 보다
인간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라이프로깅, 거울세계 등의 다양한 메타버스 방식과 활용도는
더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업은 마케팅 시 적극적으로 메타버스를 활용해야할 것이며 우리의 소통방식또한
메타버스화 되어갈지도 모른다. 따라서 내가 희망하고 있는 직업인 마케터가 되기 위해서 메타버스 파악은
반드시 필요하며, 이를 활용한 다양한 마케팅 방안을 생각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의 증명 (은행나무 노벨라 07)

지난 날, 애인과 같이 있을 때면 그의 살을 손가락으로 뚝뚝 뜯어 오물오물 씹어먹는 상상을 하다 혼자 좋아 웃곤 했다. 상상 속 애인의 살은 찹쌀떡처럼 쫄깃하고 달았다. 그런 상상을 가능케 하는 사랑. 그런 사랑을 가능케 하는 상상. 글을 쓰면서 그 시절을 종종 돌아봤다.
 소설의 양도 양이지만 꿀떡꿀떡 넘어가는 문장들에 매혹되어 앉은 자리에서 마지막 장을 덮었다. 사채업자들의 구타에 ‘구’가 죽고 육신마저 ‘채무변제’란 명목으로 갈갈이 찢길 상황에서 ‘단’은 구를 먹기로 한다. 손톱 하나, 체모 한 올 남김없이 먹으며 울다 그리워하다 추억을 더듬는다. 그렇게 구를 다 먹고 단은 오래오래 살아남아 구를 누구보다 오래 기억 해 두려한다. 성인이 된 후 부모가 버리고 간 빚으로 제 존재를 지우기 위해 살아간 구를, 단은 글로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내고자 한다. 
 이 소설에서 ‘사람을 먹는’상상의 시작점은 달콤하고 평범하다. 애인과 살결을 맞대고 있으면 냄새맡고 깨물어보기도 한다. 그런 앙증맞은 경험은 소설 속 구와 단이 주변인들의,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목도해가는 과정에서 눈물겨운 최후의 수단이 된다. 단은 울며 자신이 드디어 미친건가 생각하고, 죽은 구는 애처롭게 자신의 몸을 뜯어먹는 단을 안쓰러워한다. 결국 사랑이야기이다.

사생활의 천재들

 난 고독한 두 사람이 만나 적응을 말하기보다 저항을 말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미래를 가져다주는 행동이라고 생각해. 이건 사랑과도 같지.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서로를 안전하게 지켜주겠다는 약속, 너를 위해 싸우겠다는 약속. 사랑 안에 이런 맘이 들어있지 않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겠지.
 우리가 뭔가를 간절히 기다리고 그리워하면 우리 자신이 바로 그 얼굴이 되어갈 수 있어. (…) 그래서 우리의 가장 아름다운 미래는 우리의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닮아가는 거야. 우리 자신이 보고 싶은 미래 자체가 되어가는 거지.
 “네가 나를 살려주었어. 인간은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자꾸 자기 안에 갇혀. 나는 요즘 내 안에 갇혀있어. 그런데 네가 해준 이야기는 나의 맘을 열게 했어. 이상하지? 살려고 마음을 닫았는데 마음이 닫히면 죽을것 같은 거야. 희망이 보이질 않으니까. 아무것도 보이질 않으니까.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열리면서 살 것 같아. 난 이제 도요새를 보러 가기 위해 살 수도 있을 것 같아. 우리 도요새를 보러 가자.”
 내게 축하한다는 말은 고맙다는 말이나 같아.
  저항군이 되는 것은 중요해. 저항군들의 구호는 하나야. ‘다시 시작해보자.’ 그 구호는 필사적이고 절실해야만 해. 그리고 그 구호 아래서 우린 각자에게 별로 존재하는 거야. 우리는 서로에게 미래가 되자. 미래가 되기 위해서 현재에 같이 있는 거야.
 미래의 어느 날 우리는 죽을 것이야. (…)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은 비밀뿐이지. 그런 우리에게도 신이 준 은총이 하나 있어. 우리가 무의미와 허무에 빠지지 말라고 준 은총이지. 자포자기하지 말라고 준 은총이지.
 그건 사랑을 알아보는 힘이야. 몇번이고 다시 만나도 만날 때마다 사랑에 빠지는 관계가 있어. 우리의 멋진 친구, 시인 심보선이라면 사랑을 ‘다시 알아봄’이라고 표현할 것 같아. 우리가 미래를 사랑하기 시작했단 것은 뭔가를, 특히 사랑할 만한 것을 다시 알아보기 시작했다는 말과도 같아. 물론 자기 자신도 다시 알아볼 수 있어야만 해. 
  내겐 꽃 이름을 아는 것보다 어디선가 꽃이 피고 있음을 잊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눈이 내리면 눈이 내리는 걸 느껴야 합니다. 낙엽 하나가 떨어져도 낙엽이 떨어지는 걸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릴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듣다 보니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싫어요.”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당신을 더 잘 알게 되나요?”란 질문이 가능함을. 그리고 그 질문의 힘을.
 우린 보통 확신이 있어야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움직임은 확신이 아니라 질문에서 나옵니다. 나는 왜 이런 삶을 살고 있지? 이 몸으로 이 세상에서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지? 이것이 자유의 질문입니다. 사람에게 자유를 주는 질문입니다.
 욕망은 (…) 내가 욕망하는 것이 내게로 다가오기를 원하게 된다, 이때 중력의 한 가운데에 서서 그 대상들이 내게로 빨려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반대로 사랑에 있어 모든 것은 움직임 자체다. 사랑을 하면 우리는 사랑의 대상이 내게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내가 그 대상에게 가서 그 안에 존재하려 한다. 사랑에 빠지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빠져나와 타인을 향한 여정을 떠나야 한다. 그 대상이 나를 중심으로 내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대상이 만든 궤도를 탄다.

너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어 (이슬아 서평집)

 언젠가 네가 그만 살고 싶은 듯한 얼굴로 나를 봤던 걸 기억해.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어. 네가 계속 살았으면 좋겠는데 고작 내 바람만으로 네가 살아서는 안 되잖아. 살아가려면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들이 있어야 하잖아. 울다가 잠든 네 모습을 한참 봤어. 아침이면 일어나고 싶은 생을 네가 살게 되기를 바랐어. 왜냐하면 나는 너 때문에 일찍 일어나고 싶어지거든. 일도 하고 너랑도 놀아야 해서 하루가 얼마나 짧은지 몰라.
 어쩌면 책 읽기는 나의 테두리를 극복해보려는 노력 같다. 내 신체와 역사와 기억과 쩨쩨한 자아로 세워진 그 테두리는 부단히 애써야 겨우 조금 넓어진다. (…) 나를 채우는 독서 말고 나를 비우는 독서도 있다. 어떤 책들은 과거의 나를 점점 줄여나가도록 돕는다. 새로운 나 혹은 새로운 존재가 되자고 등을 쓸어준다. 그래봐야 나는 영영 나고 겨우 나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나 이상의 무언가가 되고 싶어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는 것일지도 모른다.
 너에게 아침마다 물어보곤 해. 여전히 나를 좋아하냐고. 너는 그렇다고 대답하지. 나는 어째서 정기적으로 확인하려 드는걸까. 마음이 빈곤한 사람처럼 말이야. 그런 나에게 네가 이렇게 말했어. 
” 그럴 땐 좋은 방법이 있어.”
“뭔데?”
“그냥 먼저 사랑을 주는 거야. 주면서 알게 되거든.”
그래서 너는 아침마다 말없이 나를 꽉 껴안았던 것일까? 안아보기 전에는 모르는 사랑이 있지. 걸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체력과, 싸우기 전에는 낼 수 없는 힘도 있지. 써보기 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도 있고 말야.

12가지 인생의 법칙 (혼돈의 해독제)

도교는 안정과 변화의 경계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경계를 걷는다는 것은 삶의 길 위에 있다는 것이고, 신성한 중도를 유지한다는 뜻이다. 삶의 길을 걷는 것이 행복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이다.
나는 조심스럽고 특이한 성격이라 사람들이 내 말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면 오히려 주저하게 된다.
사람들은 신념을 지키려고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싸우는 진짜 이유는 믿음과 기대, 욕망 등이 서로 일치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 기대와 사람들 행동이 일치하는 체계를 지키기 위해 싸운다. 그런 것들이 서로 일치해야 모두 생산적이고, 예측 할 수 있으며 평화롭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불확실성이 줄어들고, 불확실성 때문에 생기는 고통스러운 감정의 혼돈도 줄어든다.
꿈은 이성이 접근한 적 없는 어둑한 곳에 빛을 비추는 역할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