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SF 장르 소설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내 기억 속에 있는 나의 첫 SF 소설책이 끝까지 다 읽지 못하고 내려놓게 만드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내가 이해하기엔 내용이 비관적이며 심오했고 또 너무 철학적이었다. 그 이후로 SF 장르 자체에 관심이 사라져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었는데 서점을 구경하다가 책 한 권이 눈에 띄었다. SF 장르인 것을 알면서도 집어 들었고 오늘 소개할 책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김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총 일곱 개의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다.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 선에서 각 단편들의 간략한 줄거리와 나의 감상을 몇 자 적어보려고 한다.
–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데이지라는 소녀가 사는 마을에서는 아이들이 성년이 되면 시초지로 순례를 떠나는 성인식이 있다. 데이지는 그 행사를 보며 매번 귀환하지 않는 순례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일기를 통해 깨닫는다. 그 이유를 마을 어른들에게 물어도 네가 성인이 되면 자연스레 알게 될 것이라며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다. 이에 의문을 가진 데이지는 마을의 비밀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p. 54 “우리는 그곳에서 괴로울 거야. 하지만 그보다 많이 행복할 거야.”
세상은 복합적인 감정들이 한데 섞여있다. 불평등으로 인한 분노, 슬픔. 사랑하는 사람과의 시간 속에서 나오는 행복, 기쁨 등 많은 것들이 우리 주변에 공기처럼 맞닿아있다. 과거의 나는 이 부정적인 요소들 때문에 많이 괴로웠다. 그리고 지금도 그 괴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고통을 받고 있음에도 나는 그 감정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부정적인 감정들이 존재하기에 우리가 좀 더 다채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 스펙트럼
우주탐사를 떠났다가 실종되어 40년 만에 극적으로 구조된 생물학자 희진은 자신이 실종된 시간 동안 외계 행성에서 외계 지성 생명체들과 함께 생활했으며 그들을 발견한 최초의 조우자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사람들을 희진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지 않았다. 희진에게는 명확한 증거가 없었으며 무엇보다도 행성의 위치에 대해 물어볼 때면 입을 다물어버렸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된 희진은 손녀에게 자신이 겪은 경험담을 이야기해주며 기억을 회상한다.
p. 96 그러나 그중 잊히지 않는 한 문장만큼은 지금도 떠오른다. “이렇게 쓰여있구나.” 할머니는 그 부분을 읽을 때면 늘 미소를 지었다. “그는 놀랍고 아름다운 생물이다.”
희진이 무리인의 협곡에서 멀어지기 위해 20년의 세월을 묵묵히 견디고 구조 후에도 미친 노인 취급을 받으면서도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던 우직함이 너무 멋있었다. 그리고 그 우직함이 무리인들을 지키기 위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유약한 이방인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지 않았을까? 서로를 아름답고 신비로운 존재로 인식하고 각자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서로를 위해주었던 루이와 희진의 관계성이 너무 좋았다.
p. 88 “그럼 루이, 네게는” 희진은 루이의 눈에 비친 노을의 붉은 빛을 보았다. “저 풍경이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보이겠네”
우리가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동안에도 지구는 열심히 자신의 언어로 말을 한다. 매일 뜨고 지는 해가 그렇고 언제나 푸르고 반짝이는 바다가 그렇듯이 말이다. 어쩌면 달콤하고 따뜻한 말을 속삭이고 있는 풍경들을 우리는 너무나 심드렁하게 지나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 공생 가설
서울 광진구의 뇌 해석 연구소에서는 피험자의 생각을 언어 표현으로 옮기거나 표현된 언어를 역추적하여 생각을 추측하는 생각-표현 전환 기술을 연구한다. 이 기술의 분석 대상을 동물에 이어서 인간에게로 넓혔고 이내 신생아의 울음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분석 결과는 기이할 정도로 이상했다. 일차원적인 욕구들일 것이라는 예상과 반대로 신생아들은 심오하고 복잡한 철학적인 대화를 하고 있었다. 연구원들은 이 말도 안 되는 결과를 이해하기 위해 여러가지 가설을 세우기 시작한다.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슬렌포니아 행성에 가기 위해 우주 정거장에서 우주선을 기다리는 할머니, 안나의 이야기이다. 자신을 파견직 직원이라고 소개하는 남자에게 안나는 자신의 사연을 서서히 말하기 시작한다.
p. 181 “예전에는 헤어진다는 것이 이런 의미가 아니었어. 적어도 그때는 같은 하늘 아래 있었지. 같은 행성 위에서, 같은 대기를 공유했단 말일세.”
난 이별에 있어서 슬픔이 없는 편이다. 친한 친구가 유학을 위해 다른 나라로 떠나게 되었는데 주변 친구들이 눈물을 흘릴 때 난 덤덤하게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건넸다. 어떻게 보면 정이 없어 보일지 모르겠지만 영영 못 보는 것도 아니고 잠시 떨어져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기에 더 그랬던 것 같다. 나에게 있어서 영원한 헤어짐은 죽음뿐이었는데 안나의 문장을 읽고 나서 아주 먼 훗날에는 죽음 말고도 또 다른 형태의 영원한 헤어짐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헤어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이유도 우리가 지구에 발이 묶여있다는 걸 무의식적으로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만약에 안나가 사는 시대였으면 난 이별을 퍽 아쉬워했을지도 모르겠다.
– 감정의 물성
어느 날 행복, 침착, 공포, 증오, 우울과 같은 감정을 조형화한 제품인 ‘감정의 물성’이 출시되고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된다. 잡지 기사인 정하는 감정의 물성이 유사과학 같은 상술쯤이라고 치부하며 구매자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증오와 우울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팔리는 것에 의문을 가지게 된다. 정하는 자신의 연인과 주변 인물들을 통해 점차 제품 사용자들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p. 206 “그냥 실재하는 물건 자체가 중요한 거죠. 시선을 돌려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있는 거잖아요. 물성을 감각할 수 있다는 게 의외로 매력적인 셀링 포인트거든요.”
나는 무언가를 기록해서 실물로 남기는 것들, 예를 들면 일기나 다이어리 같은 것들을 굉장히 좋아한다. 또한 쓰지도 않으면서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이러한 행동들이 개인적인 성향 탓이라고 여겼는데 이 챕터에서 나의 행동들의 이유를 객관적으로 명시해 둔 것 같아서 신기했다.
– 관내분실
사회가 발전하면서 종이책이 아닌 전자책으로 점차 대체면서 기존의 도서관은 죽은 사람들의 생애 정보를 데이터로 이식한 ‘마인드’를 모아놓는 마인드 도서관으로 바뀌게 된다. 마인드와 접속을 하면 망자의 영혼과 조우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을 망자를 추모하거나 만나기 위해 도서관을 찾는다. 지민은 3년 전에 엄마의 마인드 인덱스가 도서관 내에서 분실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엄마의 흔적을 찾아나서기 시작한다.
–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우주에 생긴 터널을 통해 우주 저 반대편으로 가기 위해 항공우주국은 터널 우주 비행사를 선발하게 된다. 선발된 비행사는 터널을 지나는 극한 상황을 견디기 위해 3년 동안 인간의 몸을 기계로 바꾸는 사이보그 그라인딩이라는 프로젝트를 거치게 된다. 그렇게 재경은 고통스러운 3년을 버텨 터널 비행사가 되었고 터널로 떠나기 하루 전, 바닷속으로 홀연히 자취를 감춰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