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받을 용기 1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아들러의 가르침)

이 책을 읽기전에는 프로이트 심리학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다. 1장을 읽으면서 목적론과 원인론에 대한 구분과 각각의 주장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새로운 주장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좋았으나, 목적론이 너무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과거가 현재의 나를 만든 것이 아니라 과거의 경혐으로 가지게 된 의미들이 현재의 나를 구성하고 있다는 주장이 어떤 일이 일어나도 계속 될지 모르겠다. 또한 트라우마에 대한 부정에 이해하지 못했다. 트라우마는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내가 변화해야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다시 깨닫게 되었다.

2장에서는 총 두가지의 관점에서 목적론에 대한 반감을 느끼게 되었다. 하나는, 서로간의 주장에 대해 토의하거나 싸우게 될 때 저는 서로 주장에 대해 이야기하고 사실을 실제로 확인한 뒤 결론을 내거나, 확실하게 사실로 증명할 수 없는 바는 토론 자체를 회피하는 방법으로 아들러 심리학과 관련없이 타인과의 큰 다툼없이 살고 있었다. 이가 회피하여 성장하는 방향인가에 대한 의문이 있다. 두번째로는 인간관계에서 서로 멀어질 때 단점이 보이기 시작해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멀어지고 싶어서 단점이 보인다는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싫은 점이 보이고 추가적으로 계속해서 보이기 시작할 때 그제서야 커질대로 커진 부정적인 감정이 엉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라 생각이 든다. 하지만 각각의 해석과 설명에서 나와는 다른 관점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다음 주차에는 어떤 설명으로 다시 이 이론에 대한 주장을 펼칠지 기대하며 읽게 되었다.

상벌교육의 영향으로 인정욕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곧 돌이 되는 조카를 자주 바라보면서 조카의 교육에 대한 생각을 하곤 했다. 조기 교육이나 공부를 떠나서, 아기 때 어떠한 행동이나 버릇으로 인해 삐딱한 가치관이 생길지 혹은 그릇된 행동을 했을 때 그 행동을 하는 아가에 대한 우리의 행동이 어떤 영향을 미칠 지에 대하여 등을 말이다. 이러한 경우에서 보통은 3세가 되기전까지 아기는 엄격한 가르침과 반대 되어야만 하며. 꼭 칭찬과 벌이 있어야만 그 행동을 하고 하지 않고가 아닌 단순히 하면 안된다 된다만 인지시켜주는 인지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의식의 시초인 아기와 이 책의 내용을 비교해보았고, 또한 타인에게 미움을 받는 것이 자유라는 말에 대한 고심을 하게 되었다.

세상을 자유롭게 보고싶다. 매우 어려운 행위임을 최근 인간관계에서 느끼며 살고 있어 공감가는 한주 이야기였다.

책의 결론부에 다다르다보니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강조하는 느낌이 든다. 자신을 이해하고 내 스스로 하는 바를 꾸준히 하면 된다가 결론이다. 흔들릴 때는 길을 찾기 위해 길잡이 별인 타자공헌을 계속 보라. 라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플라톤은 용기가 무엇인가에 대해 탐구하는 대화에서 결론을 내지 않고 끝내는데, 저도 이제 이 책을 읽어보며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만 하지않고 남들의 의견도 받아들여야한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게 만들었다.

여행의 이유 (김영하 산문)

<그럼에도 여행>
 sns의 3대 요소가 여행, 연애, 맛집이라는데 나는 이 시대의 젊은이 치고 참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누가 가자고 하면 따라가긴 했지만 내 손으로 여행 계획을 세워본 기억은 손에 꼽는다. 시간과 돈이 주어진다면 아마 여행이 아닌 다른 곳에 쓸 것이다. 이 책을 읽기 전이라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모든 게 간편화된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여행은 품이 많이 드는 일이고, 여행의 즐거움을 비슷하게 충족시켜줄 수 있는 컨텐츠들도 많이 개발됐다. 이 책은 그럼에도 대체될 수 없는 여행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여행의 이유는 공항에서 산 책이다. 작년에 가족여행을 가는데 책을 한권도 챙기지 못한걸 깨닫고 급하게 샀다가 늘 그렇듯 한 페이지도 안 펼쳐보고 고대로 가지고 돌아와서 한국에서 읽었다. 여행 전에 혹은 여행지에서 읽었다면 더 좋았을 책이란 생각이 들어서 아쉬웠다. 왜냐면 이 책을 읽기 전의 여행과 후의 여행은 분명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책을 다 읽고 나니 드물게 여행을 가고 싶은 기분도 들었다. 그런데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코로나 때문에 당분간 여행은 어려운 상황이 돼버렸다. 그래도 이 정도는 인생이 파놓은 함정 치고는 얕은 축에 든다. 김영하는 중국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비자가 없어 추방당하고,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허리케인을 만나 숙소에 틀어박혔다가 게임중독에 빠진다. 하지만 좌절하는 법 없이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로 부터 여행에 전제되어야 하는 유연한 사고를 배운다. 이런 깨달음은 본래의 계획에서 완전히 벗어난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왔다. 예상하지 못했기에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고정관념은 사람을 묶어둔다. 그렇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각도에서 체감한 깨달음만이 사람을 변화시킨다. 여행에 실패와 성공을 나누긴 어렵겠지만, 일반적으로는 목적달성에 실패한다면 그것을 실패한 여행이라 부를 것이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실패는 예상치 못한 경험으로 이어지고 경험은 새로운 장을 열어준다. 그런 의미에서 실패한 여행이야말로 성공한 여행이다. 달리 말하면 계획한대로 평탄하게 이뤄진 여행은 새로운 것을 찾지 못했다는 말과 일맥상통이니 여행으로써 실패한 것일 수도 있다. 여행은 이토록 모순투성이다. 꼭 우리의 인생처럼 말이다.
  프로그램은 인물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일종의 신념이며, 김영하는 본인이 여행을 좋아하는 것은 낯선 호텔에서 환대 받을 때 안정감을 느끼는 프로그램이 작동하기 때문이라 했다. 그렇다면 나의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성향은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어린 시절을 반추하면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고명딸로, 체구가 작은 여자애로 과보호 받으며 자랐다. 길물어보는 할머니조차 흑심을 품고 있을지도 모르니 상대해주지 말라는 교육을 받고 자란 결과 내 프로그램은 외부를 불신하고 오로지 내부에서 안정감을 찾도록 작동한다. 환대는 여행에 있어 중요한 개념일 뿐만 아니라 확장해서 우리 삶에 적용 가능한 개념이다. 인생이 여행이고 인류가 한 배에 탄 승객이라면, 낯선 사람에게 베푸는 환대는 순환되고 대물림 되는 선이다. 환대를 믿지 않고 그 순환의 고리를 끊는 태도는 단순히 여행에 한정해서가 아니라 삶의 전반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건 자명하다. 문고리가 세균 투성이라 문고리를 잡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결벽증 환자는 어디로도 나아가기는 커녕 문을 열 수 조차 없을 것이다. 고여서 썩은 물이 되지 않으려면 안락함에 갇혀 있어선 안된다는걸 명심하게 됐다.
  김영하는 소설과 여행을 비교했는데, 시작과 끝이 분명하게 통제돼있어 현재에만 몰입할 수 있다는 점이 소설과 여행은 공통점이다. 여행은 산발적이고 무질서한 삶에서 벗어난 휴식이며, 새로운 경험의 원천이다. 내가 이렇게 재밌는 여행을 여태 썩 반기지 않았던 건 외부세계에 대한 불신 때문만은 아니다. 나에게 여행의 이점을 비슷하게 충족시켜주는 다른 취미가 있기 때문이다. 흔히들 ‘연뮤덕’이라고 부르는 연극과 뮤지컬의 팬이다. 김영하는 삶이 부과하는 무게가 까다로울수록 여행을 갈망한다는데 나는 그럴 때일수록 관극을 갈망한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관극은 여행을 대체할 수 없다. 관극은 내가 극장까지 가서 배우가 연기하는 극을 직접 관람한다는 점에서 소설보다는 경험적이다. 하지만 설령 내가 극의 내용을 모르고 있다고 해도 극은 정해진대로 진행된다. 극의 주체도 내가 아니라 배우다. 여행은 낯선 환경에서 오감으로 체득한 경험을 통해 새로운 ‘나’를 알아가는 경험이다. 말하자면 주인공이 나인 극이 펼쳐지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앞으로의 여행이 훨씬 기대가 됐다.
  김영하의 소설은 몇 권 읽었는데 그 중에서 “살인자의 기억법”이 인상적이었다. 범죄자에 대한 나의 평소 인식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어서이다. 그 책에서 연쇄살인범은 남들 다 사는 평범한 삶조차 살아내지 못하는 무능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미디어에서 중범죄자를 거창하게 괴물이나 악마 따위로 지칭하는게 늘 못마땅했다. 사실 그들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는 살아가지 못할 정도로 무능할 뿐이다. 현대사회에서 일어나는 심각한 범죄들도 비대한 자의식에서 발생한다. 타인의 고통에는 둔감한 반면 본인이 조금이라도 무시당한다고 느끼면 견디지 못힌다. 극단적으로 사회성이 낮은 것이다. 어쩌면 요즘 들어 더 두드러지는 이런 경향들은 사회적 단절 때문에 생긴 것이고 이는 여행을 통해 고쳐질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여행자가 반드시 지녀야할 태도는 스스로의 허영과 자만에 대한 경계, 그리고 타자에 대한 존중심이다. 그렇지 못한다면 외부세계의 타인과 접촉해야하는 여행은 습격으로 변해서 삶을 송두리째 잡아먹어 버릴수도 있기 때문이다. 원주민들은 본인들의 안위를 위해서 신원불명의 낯선 사람인 여행자를 경계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타지를 방문한 여행자는 개인의 개성과 전혀 상관없이 기호화되어 분류된 자신을 받아들여야 한다. 가족과 친구 그리고 쌓아온 모든 것이 있는 본국에서의 정체성과 여행지에서의 정체성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오디세우스는 이를 오랜 방랑을 통해 체득했다. 여행지에서 나는 포근한 환대를 받을 수도 있지만 대개는 아무 의미 없는 뒷배경같은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그건 좀 자존감에 상처를 남기는 깨달음일지도 모른다. 물론 세계는 나의 좌절과는 상관없이 흘러간다. 하지만 내가 없으면 세계도 없기에, 세계는 나의 인식에 따라 달라지고 존재한다. 이를 정확히 알고 긍정적인 시각을 견지한다면 굳이 자신을 외부에서 인정받으려 들지 않고도 동등한 주체로써 외부와 소통하고 상생할 수 있다.
  여행은 인생의 축소판이다. 그래서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는 단순히 여행담이 아니라 삶과 성장 그리고 외부세계에 대한 이야기다. 김영하의 여행론은 일상에서의 해방과 새로운 시점의 구축 그리고 생에 대한 거시적 관점을 제시한다. 고유한 개인이 아닌 표준화된 노동력으로 인간이 다뤄지는 요즘, 여행은 몇 개 안남은 인간성의 발로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생존과는 전혀 무관하고, 수고롭고 가성비 낮은 여행이 그럼에도 오래도록 바래지 않는 가치를 가져온 이유는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아가씨와 밤 (La Jeune Fille et la Nuit,기욤 뮈소 장편소설)

[상상독서 베스트리뷰 선정 도서 | 대출하러가기]

기욤 뮈소 작가를 좋아해서 많이 읽었엇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내용 전개가 너무 똑같아서 한동안 멀리했었다.

그렇게 작가를 잊어가던 중, 집에서 가족이 사온 기욤 뮈소의 ‘아가씨와 밤’을 보게 되었고 오랜만에 반가운 마음이 들어서 읽게 되었다 .

역시 이 작가는 초반 스토리 흡입력이 대단하다. 책을 읽다보면 어느순간 책에 빠져버린 나를 볼 수 있다.

주인공 시점으로 책에 집중하여 결말에 다다르면 마음의 안도가 된다.

일단 주인공에게는 해피엔딩이기 때문이다.

이제 토마(주인공)는 폴린과 행복할 일만 남은건가?

근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토마는 살인자다. 그것도 죄 없는 사람을 자신의 착각으로 죽인 살인자.(불쌍한 알렉시)

그리고 완벽한 계획을 가진 부모덕에 이제 세상에 토마가 살인자라는 증거는 없다.

그의 죄를 죽은 부모들이 대신 받은거라고 생각하면 되는 걸까..? 그러기엔 그 부모들도 살인자였다.

갑자기 혼라스럽다 .. 책 중에 가장 인간성이 없어 보이는 스테판이 지금 돌아보니 가장 인간적이였고, 도덕적인 사람같다.

(스테판은 기자다. 자신의 특종을 위해서라면 물 불 안가리는 기자)

토마는 자신의 엄마가 자기가 사랑하던 빙카를 죽인것을 알게 될까?

파니는 빙카를 자신이 죽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까?

그 사실을 모르면 파니는 스스로 평생 살인자라는 죄책감에 살게 될 것이다..

토마의 죽마고우 막심은 토마가 자신의 배다른 형제인걸 알게 될까?

토마는 막심에게 그 사실을 털어 놓을까?

결국 이 책의 최대 피해자는 알렉시와 스테판…

​책을 다 읽을 때에는 해피엔딩이라 생각했지만, 다 읽고 곰곰히 생각할수록 그런 생각이 사라졌다.

그래서 책을 다 읽고 매우 찝찝했다.

작가가 의도한게 이런 것 일까..? 그렇다고 생각하기엔 책은 너무 행복하게 마무리된다.

작가의 의도가 궁금하다.

 

나는 스테판이 살인증거를 다시 찾아서 토마가 죗값을 받게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특종으로 잘살았으면 좋겠다!!

의사 파니, 국회위원 막심, 베스트셀러 작가 토마 결국 살인자 세명이서 살인증거인멸하고 잘먹고 잘사는 내용이였다.

현실반영 된 것 같아서 씁쓸하다.

책을 다 읽고 가장 인상깊었던 구절로 마무리 !

‘누구나 세 개의 삶을 가지고 있다. 공적인 삶, 사적인 삶, 그리고 비밀스러운 삶 -가브리엘 마르케스’

책, 이게 뭐라고 (장강명 산문집)

내가 느끼는 이상함, 부조리함들, 속한 집단의 문제점은 집단 밖의 사람들은 모른다, 매체를 통해, 책을 통해, 글을 통해 알리지 않는다면 다른 집단과 그 그룹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 문제를 절대 알 수 없다는 말씀이 너무 인상 깊었고 진지하게 내 책을 만들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책이 중심이 되는 사회가 정말 현실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2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1>에 이어서 2권도 읽었다. 여기에서는 글쓴이가 병을 치료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대화를 나눈 것 같았다. 직접 있었던 자신의 경험을 통해 그 곳에서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단서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여러 시행착오들을 거치면서, 사람들과 살아가는 법, 나 자신을 대하는 방법에 대해서 배워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조금 더 내 자신을 성찰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1 (백세희 에세이)

정신적으로 힘들었을 때, 이 책의 제목을 보고 무엇인가에 홀린 듯이 읽게 됐다. 이 책에는 글쓴이가 가진 아픔을 정신과 선생님과 함께 치료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래서 나도 함께 치료하는 과정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특히나 사람의 일부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말에서 조금 찔렸다. 왜냐하면, 나도 그랬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사람의 단점을 찾아내서 혼자 실망하는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왠지 나도 여기에 나온 선생님에게 진료를 받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왜 잘하고 싶은데 잘하지 못할까? (나를 단단하게 하는 부담의 심리학)

이 책의 제목이 평소에 내가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보니 빨리 읽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읽다 보니, 이 책은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은 큰데, 막상 실전에서 잘 하지 못하는 내게 전하는 말 같았다. 이 책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그들의 뛰어난 성과에 짓눌려 실력 발휘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실전에서 어떻게 부담의 무게를 견뎌내는지 알려주었다. 그리고 스트레스와 부담감의 차이를 명확히 알려주어서, 생명에까지 위협을 가하는 부담감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이해하기 수월했다. 또한, 실제 사례들을 가지고 부담감을 컨트롤하는 방법을 설명해주어서 크게 와닿었다. 그래서 나도 실전에 적용할 수 있게 연습하겠다고 다짐했다. 특히나 숨을 천천히 내쉬는 것과 같은 방법은 부담감을 느끼는 상황 속에서 버텨낼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이 책을 읽고 놀랐던 부분 중 하나는 부담을 느낄 만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응원을 보내는 것은 좋지 않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연습하던 대로 해”와 같이 부담감을 감소시키는 말이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잘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은 듣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평소보다 잘 해야할 것 같은 생각에 갇히게 만든다고 한다. 그러한 생각으로 인해 대회나 발표를 준비할 때 열심히 연습한 것을 자연스럽게 보여줄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연습했던 때보다 더 좋지 않은 성과가 나오게 된다고 한다. 이 내용을 보고, 긴장한 친구들에게 힘이 됐으면 싶어서 응원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다 보니 왠지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친구뿐만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진짜 응원을 하고 싶으면 “열심히 해”가 아닌 “하던대로 해”라는 말이 더 좋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겠다.

미움받을 용기 2 (사랑과 진정한 자립에 대한 아들러의 가르침)

예전에 <미움 받을 용기 1>을 읽었는데, e-Book이라는 서비스 덕분에 그 다음 시리즈(?)인 이 책을 읽게 됐다. <미움 받을 용기 2>는 아들러 심리학을 현실에 어떻게 적용하는지 알려주는 내용이 많았던 것 같다. 1편을 읽었을 때에는 “나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하며 깊게 공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 2편을 읽으면서 ‘모든 문제는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즉, 이 책에서 말했듯이 한 번 아들러 심리학에 발을 들이면,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됐다. 신기하게도 거의 모든 상황들 속에서도 인간관계가 연결되어 있고, 문제를 해결할 때에도 타인과 연관이 있어 아무리 혼자서 해결하려 해도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도서관에서 도서를 대출할 때 사서의 허락이 있어야 대출할 수 있고, 그러한 허락을 받기 위해서 나의 정보를 제공하고 대출증을 받음으로써 신뢰를 얻어야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인간관계는 없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의 내용 중에서도 타인을 존중하는 방법에 대해 인상 깊게 읽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나는 타인을 어떻게 대해왔었는지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다. 진짜 ‘존중’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 해 볼 수 있는 기회 또한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 인간관계 속 스트레스를 덜어내는 방법을 찾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이토록 가까운 SF >
SF(science fiction) 라는 장르에 막연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동안 어깨 너머로 보아온 SF장르에서는 로봇이 반란을 일으키고, 외계인이 쳐들어오고, 우주에 버려지는 등. 손쓸 수 없는 거대한 재앙과 마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판타지 속 드래곤과 싸우는 얘기랑은 또 좀 다른 게, 판타지는 단어 그대로 비현실을 표방한다. 그에 비해 SF는 몇 광년씩이나 떨어져 있는 다른 은하처럼 나의 현실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데 그럼에도 과학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아주 현실감이 없지는 않아서 불쾌감이 들었다. 공포영화를 보더라도 어디 멀리 시골에 있는 폐가에서 나오는 귀신보다는 세면대 밑처럼 생활감 있는 장소에 웅크리고 있는 귀신이 제일 무섭듯 말이다. 하지만 김초엽의 소설은 그동안 내가 멋대로 판단한 SF의 정의와는 정반대의 글이다. 따뜻하고 밀접하다.
7편의 이야기 모두 현대 사회의 문제들을 똑바로 바라본다. 미래를 배경으로 현재를 이야기하고, 과학의 탈을 쓰고 인문사회적 풀이를 제시한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장애는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짧은 글을 봤다. 장애라는 단어가 사전에서 사라질 수 있도록 기술을 발전시켜야 하며 그것이 인류가 짊어진 숙제라고 설명했다. 좋은 취지로 쓴 글 같기는 한데 어딘가 아다리가 안맞는 기분이었다. 첫 번째 단편인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를 읽으니 장애는 눈에 보이는 현상 그 자체로 성립하는게 아니라 사회적 인식에 따라 결정된다는게 분명해졌다. 장애는 기술 발전만으로는 사라질 수 없다. 유전자 편집 기술로 모두가 아이큐 300으로 태어나는 세상에서 아이큐가 130인 사람은 장애인일 것이다. 소설 속 지구로 순례를 떠났던 순례자들은 그들의 고향인 차별이 없는 유토피아인 ‘마을’로 돌아오지 않고 차별과 폭력이 존재하는 지구에 남는다. 이는 세계가 양분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 디스토피와와 유토피아. 지옥과 천국. 장애인과 비장애인. 흑과 백. 케이크 가르듯 세계가 이분된다는건 지옥이 두군데 생긴다는 걸 의미할 뿐이다.
세계는 단순하지 않다. 얼핏 보면 발전의 순기능으로만 보이는 유전자 편집 기술도 차별을 야기하는 여러 문제를 낳는다. 변이 범위를 어디까지 설정해야 할지 기준도 모호하고, 현재의 문제인 의료 혜택 불평등은 당연히 유전자 편집 기술에도 이어질 것이다. 심지어는 왜소증이나 다운증후군에 환자들에 대한 제노사이드(집단 학살) 까지 가닿는다. 완벽한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곳에 가까워지기 위한 노력으로 우리는 상생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두 번째 단편인 “스펙트럼”은 종이 다른 외계 생물과의 공존을 그린다. 여타 동물들이 인간보다 멍청하다고 여겨지는건 그들의 지능을 인간의 잣대로 측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반대로 동물의 입장에서 보면 물속에서 십분도 버티지 못하고 초음파도 알아듣지 못하는 인간을 무능하게 여길 것이다. “스펙트럼”의 주인공은 낯선 행성에 떨어져 제 손으로는 끼니도 해결하지 못하는 상태로 오로지 외계인들의 이타성에 기대 살아간다. 주인공은 끝내 외계인들과 의사소통하지 못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함께할 수 있었다. 하나 하나 현미경을 대고 분석하고, 잣대를 들이대 우열을 갈랐다면 절대 쌓을 수 없을 우정이었다. 타자를 온전하게 받아들이려면 섣불리 알아내려 하기 보다는 존중하는 태도가 우선이다. 반려동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언어나 소통은 관계에서 생각보다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도 있다.
이타성은 양육강식의 법칙 속에서 살아가는 다른 동물들과 인간을 구분 짓는 특징으로 꼽힌다. “공생가설” 에서는 외계 생명체가 수만 년 전부터 신생아의 머릿속에서 공생하며 도덕, 윤리, 이타성 등 인간의 긍정적인 특성으로 꼽히는 것들을 가르치고 부여했다고 한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었던 이유는 미지의 외계 생명체와의 공생 덕분이었던 것이다. 머릿속에 사는 미지 생명체는 아니더라도 우리들이 인간답게 사는 것은 타인과 교감하고 소통하며 공생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요새 n번방과 같은 비인간적인 혐오 범죄가 많아지는 것은 기술 발달이 빚어낸 사회적 단절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인간의 껍데기만 뒤집어쓴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감정의 물성”은 내 것이지만 소유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것에 대해 얘기한다. 어떻게 해도 기분이 좋아지지 않아 당혹스러웠던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그럴 때 밥을 먹으면 기분이 나아지는 경우도 간혹 있다. 우울증도 약을 통해 어느정도 해결 되니까 인간의 감정은 물질과 연관이 깊다. 그럼에도 사실 당연하게도 수학공식을 도출하듯 답을 낼 수 없는게 인간의 감정이다. 화자는 인간이 느끼는 감정은 맥락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감정의 물성’ 이라는 제품을 통해 맥락없이 주어지는 인공적인 감정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의미를 도출하는건 이성적인 사고의 결과물이고, 감정은 이성의 대척점에 있는 감성의 결과물이다. 감정은 합리와 가장 거리가 먼 단어겠다. 합리와 효율은 경제에서 많이 따지는 단어다. 악플 때문에 자살한 연예인들 생각이 났다. 연예인이 버는 높은 수입을 운운하며 이정도 욕은 먹어도 된다고 함부로 키보드를 놀리던 악플러들은 타인의 고통을 별거 아니라 치부했던 거다. 우울증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우울증 환자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듯이 타인의 사정을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우울증에 대한 우리나라의 사회적 분위기는 개인의 고통을 일반화하여 폄하한다. 아직도 우울증을 엄살이라 생각하는 풍조가 만연하다.
여섯 번째 단편인 “관내분실”은 “감정의 물성”과 대칭적인 부분이 있다. 분명히 내 것인데 내 뜻대로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이 있다면, 분명히 내 것이었는데 나도 모르는 새 모래알처럼 손아귀를 빠져나가버린 삶도 있다. 여성의 출산 후 경력단절은 너무 고질적이어서 아직 해소돼지 않았음에도 진부해져버린 사회문제중 하나다. 국가가 져야할 사회적 책임을 개인에게로 돌린 결과는 요즘의 출산율이 말해준다. 여성은 개인의 삶을 갈아 넣어야만 엄마로써 작동할 수 있었고 그렇기에 많은 여성들은 더 이상 출산을 원치 않는다. 개인의 삶과 2세의 양육.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어느 한쪽에 가치를 더 둘 수도 있고, 둘을 동등하다 가늠할 수도 있지만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를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사회는 건강하지 않다. 강탈된 삶을 양분으로 삼아 태어난 자식과의 관계가 순탄하기란 쉽지 않다. 지민은 본인이 엄마가 되면서 은하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지민의 이해는 은하뿐만 아니라 시스템의 모든 피해자들에게로 확장되는 속성을 가진다.
김초엽의 단편들은 모두 소외된 약자들을 주목한다. 주인공들의 성별이 대부분 여자인 것도 그 이유에서일거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에서는 사회가 여성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게이는 여성스럽고, 동양인은 수학을 잘한다. 소수자에게 프레임을 씌우는 것은 흔한 폭력이다. 나이든 동양인 여성인 재경은 사회가 부여한 이분법적인 프레임인 기대와 증오(영웅주의와 혐오)를 모두 벗어던지고 깊은 바닷속으로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가윤은 재경과 친혈육이 아니다. 하지만 재경이 프레임을 전부 심해로 끌고 들어가준 덕분에 가윤은 홀가분한 마음가짐으로 자신의 길을 나아갈 수 있다. 이런 핏줄을 초월한 세대간의, 젠더간의 연대는 분명한 희망을 제시한다.
과학만큼 자본집약적인 산업도 드믈다. 자본이 만드는 빠른 흐름은 편리함을 낳지만 그 이면에는 분명 기술 발전으로 인해 일어나는 소외도 있다. 무인주문기앞에서 헤매고 있는 노인들의 모습은 자주 봤을 것이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안나도 자본에 소외된 인물이다. 사회는 경제성을 명목으로 그녀에게 져야할 책임을 회피해서 그녀는 가족을 잃었다. 개인의 아픔을 보듬어주려 하지 않고 시간이 흘러가기만을 기다리는 사회의 예는 우리 가까이에 있다. 이산가족이 그렇고 위안부 피해자들이 그렇다. 딥프리징 기술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안나가 노인으로 설정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안나는 작은 비행선에 의지해 은하로 뛰어들며 의지를 관철한다. 가능성이 보이지 않더라도 여정을 시작하는 그녀의 행보가 시사하는 바는 명확하다.
살아있는 동안 사회가 좋은 쪽으로 변하는 과정을 목도할 수 있으리란 희망은 희박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안나처럼 계속 나아가야 한다. 희망은 아직 작은 불씨다. 불어오는 돌풍이 거칠어도 꺼트려선 안된다. 그래야 언젠가 큰 불꽃으로 모두가 온기를 나눌 수 있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에서 재경의 불씨를 이어받은 가윤처럼 말이다.
김초엽의 소설은 SF 라는 장르에 충실해 딥프리징이나 마인드업로딩같은 새로운 과학 기술이 많이 등장한다. 그것들은 이야기에 없어서 안되는 양념이지만 본질은 다른 곳에 있다. 사회가 묵인해온 아픔이 그녀의 소설에는 구체적인 형태로 오롯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그녀가 제시한 것은 인간성이다. 정복하고 발전하려는 근대적 인간성이 아니라 이타성을 기반으로 상생하고 연대하는 유기론적 인간성이다.
세계는 연속성을 가지며 축적된다. 그렇기에 현재가 튼튼하지 못하면 미래는 모래성처럼 쏟아져 내리고 만다. SF는 미래를 배경으로 현재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장르라는걸 이 소설을 읽으며 알게 됐다.

너무 한낮의 연애 (김금희 소설)

정보를 얻기 위한 독서를 하다보면 문학책이 읽고 싶어질 때가 있다. 나에게 현대소설이 그렇다.
단편으로 구성된 이 책은 바쁜 일상에서 흐름이 끊기지 않고 하나씩 읽어 갈 수 있어 좋았다.
일상 속에서 가끔 이해할 수 없지만 그것이 너무도 명료하게 다가오는 경험을 하는데, 이 소설 곳곳에서 그런 분위기를 느꼈다.
눈에 박혀 잊고 싶지 않은 구문들은 따로 메모해 두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