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을 들으면서 앞으로의 세계관과 교육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세계관을 디지털로 바꾸고 학교의 교육뿐만 아니라 커뮤니티나 그 외의 내가 하고 싶은 분야에 대해서 스스로 학습하고 스스로 업그레이드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으로의 디지털, 빅데이터와 같은 신지식과 뉴노멀 시대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을 수 있었으며 중요성들을 느끼게 된 시간이었다. 그리고 결국은 인간의 마음 즉 인간다움과 진정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이번 강연은 몇 부분만 요약해서 설명하셔서 기회가 된다면 책 전체 부분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선진국 혁명으로 인해 높아진 허들로 앞으로 힘들어지는 취업 난이도에 대해 극복해야하는 방법 , 혁명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로 그리고 인터넷이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전혀 모르는 분야에서 성공을 이끌어낸 대표적 사례들을 봤습니다. 이전에 있던 세계관으로는 더이상 통하지 않는 현재 디지털 세계관에 대한 설명이 굉장히 와닿았습니다.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으로 유명한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생부터 죽음까지를 면밀히 관찰하고 서술하며, 저자 시오노 나나미의 분석까지 곁들여져있다.
1부는 마키아벨리가 태어나기 전의 일들을 ‘마키아벨리는 무엇을 보았는가’라는 제목으로 설명한다. 피렌체 유력가인 메디치가문이 조반니, 코시모, 피에로를 거치며 어떻게 힘을 갖게 되었는지를 말하고 마키아벨리가 행운의 사나이라 부르는 로렌초 데 메디치의 행운과 군주로서의 능력을 말하며 시오노 나나미 역시 이에 동조한다.
2부는 르네상스의 선구자였던 북부 이탈리아의 도시 피렌체에서 태어난 마키아벨리는 집안이 명문가도 아니었고, ‘비대학 출신’으로 학문에 조예가 깊지도, 큰 뜻이 있는 인물도 아니었다. 스물 여덟의 마키아벨리가 정청에서 ‘서기관’으로서 일하게 되면서 능력을 인정받아 피렌체 정부로부터 업무를 받아 각국의 정치자와 만나게 되는데 이러한 경험들을 토대로 <군주론> 등이 탄생하게 된다. 쫓겨났던 메디치가문이 다시 피렌체로 복귀하면서 소델리니 밑에서 15년간 일했던 마키아벨리는 정치 전면에 관여하지 못하게 된다. 유배되어있던 시간동안 집필을 했으며 마키아벨리는 자국의 군대와 강력한 군주를 역설하고 현실화시키고자 여러차례 노력했으나 끝내 피렌체공화국은 마키아벨리의 죽음과 같은 운명을 맞이한다.
꽤 많은 분량임에도 책을 읽는 동안은 내가 15-16세기 이탈리아에 와있는 듯한 생생하고도 즐거운 기분이었다. 마키아벨리의 공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사적인 스캔들까지도 나와있어 상당히 흥미롭게 읽었으며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때에는 나 역시도 마키아벨리가 친구로 느껴졌다. 마키아벨리의 저서를 읽을 때에 이 책과 함께 읽는다면 이해도는 배가 될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서술은 상세하며 여러 기록을 비교분석한 흔적이 있는 책이다.
군주가 정치를 할 때에는 도덕이 고려되지 않으며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 시킨다는 마키아벨리즘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쓴 시기는 ‘혼란의 시기’였으며, 마키아벨리도 군주정체를 이상적으로 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공화정체를 이상적 정치체로 보았지만 그 시기 이탈리아, 피렌체에는 강력한 군주가 필요하다는 마키아벨리의 판단인 것이다. 또, 마키아벨리는 도덕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도덕과 정치를 분리시켜 자신의 논지에 도덕을 포함하지 않은 것이다. 마키아벨리즘은 현대의 시각에서만 비춰지고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 시기에 대한 이해가 전제된다면 다시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이별이란 왜 있어야 하는 것일까, 어렸을 때부터 헤어짐이 견딜 수 없이 싫었던 나이기에 아름다운 이별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를 봐오면서, 내가 직접 경험하지 않았지만 어르신들이 해오는 말씀을 들으며, 지나가는 노래 가사로도 ‘있을 때 잘해, 후회하지말고’ 라는 문장을 많이 접해왔다.
이별에 정답이 없고, 분명 후회되는 순간도 있을 것이고 죄책감이 올라오기도 하지만, 현재를 살아가고 현재를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가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도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을 글로 썼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이별의 순간과 그 이전의 순간들을 기록하여 책에 남긴다는 것 자체가 아름다웠다.
이별의 대상과 매순간이 좋을 수 없지만, 그 순간들마저 돌아보면 찬란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책이었고,
내가 가진 이별에 대한 정의 또한도 더 생각해보고 나의 마음가짐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정립할 수 있었던 시기인 것 같다.
반려동물과 이별, 할머니와의 이별이 있었던 나는, 그 순간들이 너무나 찬란했던 것을 기억한다.
아직도 마음 한 구속에 슬픔이라는 덩어리가 가끔 날 찌르기도 하지만, 함께 했던 순간들이 있기에, 내 마음에 그들을 기억하는 따스함과 추억이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마음으로는 놓아주지만, 항상 기억하고 추억할 것이다. 아름다운 이별을 위하여
알 수 없다.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의 시간들이 존재한다.
갑자기, 원인도 제대로 알 수 없는 실명이 이어졌다.
동식물위에 포식자로서, 자연 위에 군림하고 있는 이 당당한 존재들이 한 순간에 약해졌다.
어쩌면 사람이라는 존재는 원래부터 연약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 누구도 사람에게 동식물을 함부로 하고 자연을 파괴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단지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이성과 본능을 가진 우월한 존재로 스스로를 여기며 상생이 아닌 지배적인 관계로 지구촌을 망가뜨려온 지금까지의 일들,
그 모든 것들은 다 어디에서 온 것일까?
어떻게 보면 눈이 하나 먼 것 뿐이다.
하지만 더 이상 이전처럼 우월하게, 격식있게 살아갈 수 없고
진짜 본능만 남은채로 사람인지 짐승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의 생존을 위한 노력을 간접적으로 보고, 생각해보고, 느껴가며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을 극복할 수 없고 시련을 겪는일이 많기에 피조물이라는 말을 한다는 것을 느꼈다.
사람이 절대 완벽한 존재가 될 수 없고, 그런 존재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가며 너무 자만하지도 말고,
너무 자책하지도 말고,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도 더 생각해보며 살아가야 겠다는 의미를 찾을 수 있었던 책이었다.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자정의 도서관. 처음에 책을 골랐을 때는 그저 그런 생각 뿐이었다.
판타지적인 요소가 궁금하다, 나의 호기심을 유발한 책이었다.
책을 읽으며 노라의 삶을 다시 거치고, 따라가며 그녀와 함께 했다.
나라면 이 삶을 살았다면, 후회가 사라지고 행복해질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면서도
왜인지 모르게 자꾸 공허하고 허전한 마음이 남는다는 것을 함께 느꼈던 것 같다.
삶을 살아오면서 사실 후회가 없었던 순간은 없던 것 같다.
현재에 만족하지 않을 때에는 언제나 과거에 선택을 했던 과거의 나, 혹은 그 주변인물들, 혹은 그 상황들에 탓을 돌려왔다.
그러다보니 나라는 사람은 현실을 사는게 아니라, 후회속에 살던 사람이었다.
이 책을 만나게 되고, 그 삶을 나로 함께 대입해서 따라 읽으면서, 과연 내가 그 삶을 살았다면, 내가 원하던 바대로 삶이 이어졌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선택이라는 것이 돌이켜보면 그 당시의 나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었음을 기억할 수 있었다.
나는 이 책에 조금 더 더하고 싶은 말이 있다. 현재에 만족하고, 현재에 행복할 수 있도록, 그것이 어렸을 때부터 지금의 내가 선택해온 길이기에 후회하지 말고 열심히 살으라고, 분명 그 삶에 가치가 있는 것이 맞다고, 거기에 더해서, 삶이라는 것이 일회성으로 그친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앞으로의 선택에 있어서는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은 것을 들으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내가 생각했던 그 생각들이 항상 정답이 아니었기에, 돌다리도 두들겨 가보자는 마음으로 하나씩 두들기다 보면 나에게 맞는 길을 찾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아야의 아픔에 대해 공감할 수는 없다.
다만 그 아픔이 얼마나 갑작스럽고 안타까운 것인지는 느껴질 수 있었다.
아야가 이만큼 웃기따지 1리터의 눈물이 필요했다는 말이 있었다. 만약 나였다면, 그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고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사람이 힘들고 어려운 환경이 닥칠수록 불평 불만이 늘게 된다는데 나도 작은 일 하나에 불평하고 불만을 갖지 않았을까.
세상을 살면서 하루하루 경험들이 쌓이며 느끼는 것은 아무리 잘 살고, 경제적으로 풍족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해도 사람의 본성만큼은 닦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힘든 고초를 겪음으로 더 강하게 자랄 수 있는 식물들이 있듯이 온실 속 화초로만 사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나에게 주어진 힘든 환경들도, 어쩌면 작은 것의 소중함과 일상의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그렇게 힘들고, 아파 하면서도 끝까지 삶이라는 희망을 놓치않았던 아야,
아야가 살고 싶고, 그토록 바래왔던 내일을 사는 우리들은 정말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감사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혼을 찍는 카메라가 있다면, 짓눌리고 억압받는 정신을 촬영하고 인화할 수 있는 과학이 있다면, 렌즈를 들이대고 분명히 찍어두어야 할 여성의 깊은 상흔은 일일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어디에서 어디까지를 찍어야 상처의 증거가 되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억압은 교묘하고 복합적이다. 이런 일들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일상적으로 이해되고, 그리하여 일상의 하나로 무심히 잊히는 시회는 진정 옳지 않다.
그래서 강민주가 등장했다. 낮은 포복을 혐오하고 높이 기립해서 사는 여자, 물살을 거스르며 하류에서 강의 상류로 나아가는 여자. 그런 주인공이 필요했다. 현실에는 없지만, 소설에서는, 소설이므로, 강민주 정도는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
하지만 성의 대결이나 성의 우월을 가리기 위해 이 소설이 쓰인 것은 아니다. 이 소설은 말하자면 상처들로 무늬를 이룬 하나의 커다란 사진이다. 함께 들여다보면서, 서로 대립하지 않고, 각자 동등한 자리에서 조화롭게 살아가는 길을 모색하는 데 유용하게 쓰여야 할 사진이다. 강민주의 테러가 잔인한 보복으로 끝나지 않고 가슴 더운 인간의 길로 접어든 것도 그 때문이다.
작가의 말
나의 할머니, 이모, 하물며 친구의 친척까지 여성들의 삶은 영화 한 편, 책 3권의 분량을 훌쩍 넘을 드라마를 담는다. 그것이 가장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남성의 가학과 폭력으로 인한 비극이라는 데 매번 절망한다. 양귀자 작가 소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읽으며 소설이 발행된 년도를 거듭 확인했다. 오늘날 젖은 날개를 달고 하늘로 날지 못하는 여성들의 모습 그대로를 담았고, 92년과 크게 달라질 것 없는 모습에. 그러나 어쩐지 다행스러움도 느꼈다. 적어도 지금은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물론 아직은 소수라 생각하지만) 자신 속에 강민주를 품고 산다. 세상의 폭력으로부터 더 이상 익숙해지지 않기 위해 서로를 북돋우는 목소리는 더욱 커질 것이다.
공포
「말 좀 해보시오, 친구. 무시무시하거나 비밀스럽거나 환상적인 이야기를 할 때, 우리는 어째서 실제의 인생으로부터가 아니라 꼭 유령이나 저승 세계에서 소재를 취하는 것일까?」
「이해할 수 없으니까 무서운 거지」
「아니 그렇다면 인생은 이해가 되시오? 말해 봐요, 그래 당신은 저승 세계보다 인생을 더 잘 이해한다고 생각합니까?」
(…)
「우리 인생이나 저승세계나 매한가지로 불가해하고 무섭습니다. 유령을 두려워하는 자라면 나도, 저 불빛들고, 그리고 저 하늘도 두려워해야 마땅하지. 왜냐하면 이 모두가 잘 생각해 보면 저승의 망령들만큼이나 불가해하고 환상적이니까.(…)」
「모든 것이 무서워요. 나는 천성이 심오한 인간이 못 되는지라 저승 세계니 인류의 운명이니 하는 문제에는 별로 흥미가 없어요. 뜬구름 잡는 일에는 도무지 소질이 없다는 얘깁니다.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진부함이에요. 왜냐하면 우리들 중 누구도 고기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지요. 내 행동들 중에서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가려낼 능력이 없다는 사실은 나를 전율하게 만들어요. 생활 환경과 교육이 나를 견고한 거짓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놓았다는 걸 나는 압니다. 내 일생은 자신과 타인을 감쪽같이 속이기 위한 나날의 궁리 속에서 흘러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나는 죽는 순간까지 이런 거짓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무섭습니다. (…) 내 생각에 우리는 아는 것이 거의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매일 실수를 저지르고 옳지 못한 짓을 하며 서로 비방하고 남의 일에 끼어드는 겁니다. 사는 데 방해만 되는 불필요하고 시시한 짓거리들에 우리는 자신의 힘을 소진합니다. 이것이 무서습니단 왜냐하면 이 모든 일ㅇ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필요한 것인지 나는 이해할 수 없으니까요.(…)」
(…)
<그는 삶이 무섭다고 말했지.>
나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삶에 대해 격식을 차리지 말라고. 삶이 나를 짓누르기 전에 네가 먼저 삶을 부숴버려. 삶으로부터 취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취하란 말이야.>
베로치카
술로 데워진 그의 마음은 유쾌했고, 따뜻했으며, 또한 슬프기도 했다……. 걸어가면서 그는 살아오는 동안 얼마나 자주 좋은 사람들을 만났던가를 떠올리고 이런 만나 뒤에는 추억만이 남겨질 뿐임을 안타까워했다. 지평선 위에 두루미들이 가물거리고, 산들바람이 이들의 애원하는 듯한 혹은 기뻐하는 듯한 울음을 실어오기도 했지만 몇 분 뒤에는 아무리 애써 푸른 저편을 응시도 점 하나 보이지 않고,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바로 이처럼 사람들의 얼굴이나 말도 삶 속에서 명멸하다가는 과거 속으로 가라앉아 버리는 것이다. 보잘것없는 기억의 자취만 빼고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