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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작가가 대화하는 형식의 책이다.개인적으로 나에게 너무 어려운 책이었다. 이 책은 ‘감각은 이런 것이다!’라고 딱 정해주지 않는다. 그 대신 많은 사례를 보여주며 알아서 감 잡으라는 식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ㅎㅎ. 그래서 더 어렵게 느껴졌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내가 이해한 것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책 전반적으로 저자들은 기술과 감각이라는 두축을 이용해 설명을 해나간다. 그 중에서도 감각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그렇다고 해서 기술이 안중요하다곤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 기술만으로는 ‘일을 잘한다’라고 말하기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즉, 기술이 마이너스(-)에서 0으로 가게 해준다면 감각은 0에서 플러스(+)로 가게 해준다.
오직 기술만이 중요한 상황은 수요가 공급을 뛰어넘어버리는 상황뿐이다. 이 책에서는 만두로 설명을 해준다. 갑자기 사람들에게 만두가 트렌드가 되어 만두를 미친듯이 찾기 시작한다. 이때 만두를 만드는 사람이 부족해진다. 그러면서 만두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있는 사람은 굳이 다른 감각이 없더라도 돈을 벌고 일을 한다. 하지만 이렇게 만두를 만드는 기술이 각광받으면 그 기술을 배우는 사람이 점차 많아진다. 점차 그 중 가장 맛있는 만두가 주목을 받을 것이고 사람들은 점점 그 사람에게 몰릴 것이다. 즉, 감각이 있는 사람에게 몰린다. 마치 현재 코딩 기술을 배우는 현상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사람들은 이렇게 감각이 중요한 시대에서도 기술을 쫓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왜냐? 기술은 바로 눈에 보이고 측정하기가 쉽다. 그리고 명확하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영어를 유창히 잘하는 기술을 기르고 토익 점수를 내밀면 끝이다. 프로그래밍을 이라는 기술은 자격증이나 작업물로 보여주어 가시화할 수 있다. 하지만 감각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가시화하기는 어려운게 사실이다.
이렇게 감각이라는 것은 불확실하고 눈에 안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무시하려하고 한다. 심지어는 감각을 기술로 덮어씌여 버리려는 모습도 보인다. 대표적인 예로는 사람마다 좋고싫음이라는 나름대로의 감각이 있는 것인데 이것을 옳고그름이라는 과학적인 시각으로 덮어씌운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논쟁을 벌인다. 감각은 감각으로 남아야지 기술적으로 자꾸 측정하려고 하면 그것은 그냥 기술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중요한 감각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이냐?’ 라고 물으면 나도 모르겠다. 책에서 딱 잘라 말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감각이라는 것은 분명 후천적이고 키울 수 있는 것이라고 해준다. 이때 감각은 기술처럼 ‘이런 커리큘럼을 따라가 이런 기술을 얻었다’로 인과관계가 설명되진 않는다. 나중에 결과를 보고 ‘아 이걸 해서 이렇게 된거였구나’라고 나중에 인과관계를 깨닫는 것이 감각의 특징이라고 한다.
또한, 자신이 어느 자리에 있어야 빛나는 사람인지를 알아야 한다고 알려준다. 이건 오직 많은 경험을 통해 알수 있는 것이라 말해주기도 한다. 다른 어떤 적성 검사나 성격 검사 같은 것은 우리와 같은 복잡한 인간에게 의미가 없다.
책 중간에서부터는 수많은 경영자의 사례가 나온다. ‘시너지, 순열적인’ 등등 어려운 용어도 나온다. 그래서 난 알아듣지 못해 훌훌 넘기며 봤다. 결론적으로 나에게 참 아리송한 책이었다.
나는 할머니를 오랫동안 바라보고 생전 처음으로 느꼈어요. 우리가 정신 속에서 우리를 구제하지 않는다면 삶이란 끔찍한 것에 불과하다고.
소름이 끼치는 것도 너에게 해는 안될 것이다. 그것도 다 생의 일부분이니까. 우리는 추악한 것을 보지 않으면 중요한 것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어두컴컴하고도 출구없어 보이는 복도를 무한히 걸어갈 때면 너는 언제나 문을 열어주었고, 나에게 와서 햇빛이 찬란한 넓은 평야의 광경을 보여주었다. 비록 그 평야에 내가 발을 들여놓을 수는 없었으나 그 광경만이라도 나를 최후의 절망에서 구제했다.
우연인지 혹은 사람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특정한 이들’에 대한 관심(호기심 혹은 피하고자 하는)이 늘었기 때문인지 정유정의 소설을 읽기 시작하고 곧 유튜브를 통해 ‘나르시시스트 소시오패스’에 대해 알게 되었다. ‘나르시시스트 소시오패스’는 흔히 자기애와 자존감이 높은 사람과는 조금 차이가 있는 병리적 성향을 가진 사람이다. 사람들이 이들에게 관심을 갖는 이유는 결국 내가 관계한 사람들 중 ‘나르시시스트’가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들에게 분명 피해를 받고 있고 10명 중 3명은 존재한다는 이들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것인가에 대한 염려가 아닐까 한다. 무엇보다 내가 집중한 것은 이들이 가족 구성원일때, 특히 소설 속 유나와 같이 아이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는 주 양육자일 경우이다. 실제로 유튜브 검색창에 ‘나르시시스트’라고 쳤을 때 연관 키워드로 ‘부모’가 가장 먼저 따라붙는다. 그리고 댓글에는 부모가 ‘나르시시스트’라는 것을 인지하고 앞으로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내용이 심심치 않게 눈이 띄었다. ‘나르시시스트 소시오패스’가 만들어 놓은 자신만의 규칙을 따르지 않았을 때 가해치는 처벌과 한 순간에 천국과 지옥을 경험하게 하는 행동패턴은 건강한 성인조차 견뎌내기 힘든 정서적 고통을 안겨주는데 하물며 부모를 신처럼 생각하는 아이들에게 ‘가스라이팅’은 어떤 영향을 주게 될까. 우리에겐 행복할 권리와 타인의 행복에 대한 책임이 함께 있다는 작가의 말을 상기해본다. 자기애가 강조되는 요즘 공존과 타자에 대한 배려를 왜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지 고민해보았다.
처음에 이 책을 고른 이유는 지금 일하고 있는 아르바이트 사장 때문이었다. 21살부터 여러 아르바이트를 해봤지만 이렇게 아르바이트생에게 무례한 사장은 없었다. 사장은 툭하면 ‘솔직히 이 정도면 개꿀알바 아니냐?’라고 물었고, 나는 그때마다 대충 얼버무리며 답했다. 무거운 짐을 들고 오래 서 있어야 하는 일의 특성 때문에 목 신경 압박이 심해져 일을 더 할 수 없다는 의사를 표했을 때 사장은 이를 ‘그만두기 위한 핑계’로 보았고, 나는 억울한 마음에 정형외과 진료 결제 내역을 사장에게 보여줬다. 하지만 그러고도 사장은 본인이 허리디스크 걸린 경험이 있는데 그 경험상 2주 정도면 충분히 낫는다며 두 달 뒤 일거리가 많은 달에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그런 이기적인 사장에게 예의를 차린다는 명목으로 적당히 비위를 적당히 맞추면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나는 내심 누군가 “꼰대인 사장은 망하게 되어있어! 괜찮아 잘 하고 있어!”라는 말을 해주길 바랐다. 그런 와중에 내가 원하던 말을 해줄 것 같아 보이는 이 책을 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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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의하면 회사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무례하게 대할 경우, 엄청난 비용 손실이 발생한다. 무례한 대우를 받거나 그런 대우를 받는 모습을 본 부하 직원들은 정중한 대우를 받은 경우보다 업무 결과의 질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무례한 대우를 받은 사람들은 본인들도 모르는 사이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이는 폐쇄적이고 비관적인 마인드로 이어진다. 이러한 심리상태에 놓인 사람들은 피드백이나 정보를 공유하는 것을 꺼려 하는데 서로 교류가 적기 때문에 결국 예방하거나 쉽게 처리할 수 있었던 문제들도 커져서 손쓸 도리가 없을 정도로 크게 키우는 문제를 야기한다. 협력하여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음에도 그런 기회가 사라져 버리는 건 당연하다. 이렇게 발생하는 손해는 수치상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쉽게 여기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손해는 점점 가시화된다. 다행히(?)도 무례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본인이 무례한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아서 조직 구성원들끼리 서로를 향한 예의의 선을 명확하게 정의하고 이를 지키고자 한다면 해결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매너 없는 사람이 해결할 의지가 있는 경우에나 그렇다.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그 사람의 영향력을 최소화하는 수밖에 없다. 직장 내에서나 우리에 삶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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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례함은 우리 모두에게서 무언가를 빼앗아간다. 우리를 감정적 롤러코스터 상태에 빠뜨린다. 우리의 인지능력을 빨아들인다. 심지어 정신건강을 해치기도 한다. 결국 우리는 산산이 부서져 극도로 위축되고, 평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P.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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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을 때 처음에는 책 한마디 한마디에 공감하며 읽었다. 고용주는 내가 건강 문제로 아르바이트를 그만둔다고 했을 때 우선 내 말을 곧이곧대로 이해하지 않았다. 나의 건강 문제를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기 위한 핑계로 이해하였고, 의사도 아닌 본인이 나의 상황을 멋대로 진단하였다. 당연히 이는 장문의 문자로 오고 갔는데 매번 몇 줄이 넘어가는 장문의 문자였다. 이런 사람 밑에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자책을 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일에 대한 열정이 식어갔다. 어느 순간 나는 딱 ‘사장이 시키는 일만 하는 아르바이트생’이 되어있었다. 그런 변화를 체험한 것이 최근이기 때문인지 이 책이 말하는 무례함의 영향력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더욱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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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책을 읽을수록 ‘정중함’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정중함이란 타인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과 나의 적정거리를 유지하며 예의를 차리는 것, 타인과 나를 동시에 존중하는 자세여야지 타인을 과도하게 높이거나 나를 낮추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한 것은 정중함이었는가, 단순한 비위 맞추기에 불과했는가. 이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무례한 태도는 비생산적이고 나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앞으로 무례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그 사람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서 상처받을 것이 아니라 적당히 흘려듣는 처세가 필요함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는 말도 있는데 막말하거나 예의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도 없는 사람은 적당히 상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 책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읽으면 종종 육칠십년대에 청춘을 보내고, 그 당시의 거리를 걸었던 사람들만이 완벽하게 이해 가능한 정서가 깔려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누군가도 내가 속한 세대만의 완벽하게 공감할 수 있는 정서를 담은 글을 써줬으면 했다. 이 소설이 그렇다. 문장 중간에 무심하게 툭툭 서술된 유행가 가사를 직관적으로 캐치 할 수 있으려면 그 노래를 체화하다시피 들은 세대여야 한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떤 노래나 예술작품이 체화되는 시기는 보통 성장기이다.
노래 가사 같은 사소한 키워드 말고도, 너무 사랑해서 이전 세대와는 좀 다른 방식으로 (과한 교육열과 취향의 통제) 자식을 학대하는 부모나,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탓인지 제대로 아니면 그저 아직 미숙한 탓인지 상대방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감정에 매몰되는 연애 방식, 개방적인듯 하지만 여전히 미묘한 죄의식을 가지는 성관념, 기성세대에 대한 무관심과 옅은 경멸까지도. 소위 요즘애들의 특성을 디테일하게 묘사해내고 있어서 재밌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퀴어를 주인공으로 둔 퀴어소설이고, 한국사회에서 퀴어의 현실은 굳이 말 안 보태도 여전히 어둡다. 이 책은 그런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논조만큼은 발랄함을 유지하고 있어서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
가독성이 좋고 개그코드도 많아서 쉽게 읽히지만 결코 그 안에 메세지가 가볍다는 뜻은 아니다. 충분히 깊이 있게 현실에 대해 다루고 있다.
또 책을 읽으면서 공간을 따라가는 재미도 있다. 제목에서 ‘대도시’라는 공간을 상정하는 만큼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가봤을 법한 올림픽공원이나, 혜화 등 익숙한 공간이 많이 등장해서 한층 현실감을 더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읽으면 종종 육칠십년대에 청춘을 보내고, 그 당시의 거리를 걸었던 사람들만이 완벽하게 이해 가능한 정서가 깔려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누군가도 내가 속한 세대만의 완벽하게 공감할 수 있는 정서를 담은 글을 써줬으면 했다. 이 소설이 그렇다. 문장 중간에 무심하게 툭툭 서술된 유행가 가사를 직관적으로 캐치 할 수 있으려면 그 노래를 체화하다시피 들은 세대여야 한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떤 노래나 예술작품이 체화되는 시기는 보통 성장기이다.
노래 가사 같은 사소한 키워드 말고도, 너무 사랑해서 이전 세대와는 좀 다른 방식으로 (과한 교육열과 취향의 통제) 자식을 학대하는 부모나,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탓인지 제대로 아니면 그저 아직 미숙한 탓인지 상대방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감정에 매몰되는 연애 방식, 개방적인듯 하지만 여전히 미묘한 죄의식을 가지는 성관념, 기성세대에 대한 무관심과 옅은 경멸까지도. 소위 요즘애들의 특성을 디테일하게 묘사해내고 있어서 재밌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퀴어를 주인공으로 둔 퀴어소설이고, 한국사회에서 퀴어의 현실은 굳이 말 안 보태도 여전히 어둡다. 이 책은 그런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논조만큼은 발랄함을 유지하고 있어서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
가독성이 좋고 개그코드도 많아서 쉽게 읽히지만 결코 그 안에 메세지가 가볍다는 뜻은 아니다. 충분히 깊이 있게 현실에 대해 다루고 있다.
또 책을 읽으면서 공간을 따라가는 재미도 있다. 제목에서 ‘대도시’라는 공간을 상정하는 만큼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가봤을 법한 올림픽공원이나, 혜화 등 익숙한 공간이 많이 등장해서 한층 현실감을 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