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의 차가운 손 (한강 소설ㅣ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채식주의자 (한강 소설ㅣ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인간의 본성과 억압, 그리고 내면의 욕망을 탐구한 강렬한 작품이다. 주인공 영혜는 어느 날 갑자기 채식을 선언하며, 사회적 규범과 가족의 기대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녀의 결정은 단순한 식습관의 변화가 아니라, 폭력적인 세계와 자기 몸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하려는 몸부림이다. 영혜를 둘러싼 가족들은 그녀의 변화에 충격과 분노로 반응하며, 사회가 개인에게 강요하는 폭력적 굴레를 드러낸다.
작품은 영혜의 시선뿐 아니라 그녀를 바라보는 주변 인물들의 내면을 통해 다층적으로 전개된다. 특히 남편, 형부, 언니의 시선을 통해 드러나는 영혜의 모습은 욕망과 억압, 자유와 소외가 뒤얽힌 인간의 복잡한 본성을 보여준다. 한강의 문체는 서늘하면서도 강렬한 이미지로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며, 인간의 본능적 욕망과 문명적 규율 간의 갈등을 강하게 환기한다.
채식주의자는 단지 채식의 문제가 아닌,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규범에 저항하고 자신의 본질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파괴와 자유는 독자로 하여금 삶과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사유를 불러일으킨다.
소년이 온다 (한강 소설 l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각각의 계절 (권여선 소설)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한강 시집ㅣ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이제야 언니에게 (최진영 소설)
실제로 생길 수도 있는 사건이지만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 주인공인 제야는 소설이니까 책이니까 반드시 일어날 수 있을 거라는 믿음 없이는 읽기 힘들었다. 굉장히 강한 역겨움과 동정, 위로를 느꼈다.
학교 폭력을 다룬 드라마인 ‘더 글로리’였던가 아니면 어디서 주워 들은 건지 모르겠다. 폭력을 당하지 않은 사람들은 0에서 시작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폭력을 당한 사람들을 0이라는 제자리에 돌아오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구렁텅이에 빠지기 쉽다. 스스로 빠지고 싶은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밀어넣는 자들이 있다. 도대체 밀어넣는 자들은 자(者)라고 부를 수 있을까? 들짐승이나 날짐승보다 나은 게 뭐가 있다고 그들을 사람으로 취급할 수 있을까. 또, 0보다 한참 전에 있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경멸하고 잊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역겹고 끔찍한 사람들이 너무 많이 등장한다. 소설이 역겹고 끔찍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미 이 사회에, 세상에 이런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제야의 노력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지구 끝의 온실 (여름 에디션,김초엽 장편소설)
일주일 (최진영 소설)
별 생각없이 읽었다가 많은 생각을 하게 된 <일주일>이다. 우리 사회가 숨기거나, 숨겼지만 결국 드러나는 이야기에 주목하고 있다. 청소년의 불행, 과연 이것은 누가 만들어낸 것일까? 불행은 누구에게나 오지만 자의보다는 타의적이다. 나를 둘러싼 모든 상황이 나에게 공격적인 것만 같고, 나를 향해 비난하는 것 같고, 나를 억압하는 것 같은 때. 그러한 때를 우리는 불행하다고 한다. 어쩌면 나의 탓은 하나도 없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불행을 감내하는 것은 오직 나의 몫이 된다. <일주일>에서는 불행의 책임을 스스로 져야만 하는 청소년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울고 있는 어린이를 바라보면 어린이는 점점 ‘소’라는 글자에 겹쳐졌다. ‘소’를 닮은 어린이는 자라서 열아홉 살이 되었고 혼자 울 때 이제 나는 ‘서’라는 글자와 비슷한 것 같다.’ (14쪽)
<일주일>에서 다루는 특성화고의 실습은 마치 선심 쓰듯 부당함을 강요하는 어른들의 무대이다. 청소년이라 아무것도 모른다는 둥, 원래 이런 것이라는 둥, 감사함을 모르는 애들이 많아졌다는 둥 사실과는 별개로 제멋대로 판단하는 어른이 판을 친다. 어른이니까 믿었고 어른이라서 따랐지만 그에 대한 책임은 아이러니하게도 청소년이 지게 된다. 홀로 서야한다는 의무감으로 자라나는 청소년들은 ‘어른’의 무게를 지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지만 정작 어른들은 책임을 미루기만 하는 웃긴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다. 혼자 울면서도 체념하고 홀로 서야하는 어른의 탈을 쓴 청소년이 될 것인지, 부당함에 맞서고 사회에서 차츰 소외되는 청소년이 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누구에게든 너무 가혹한 현실이다.
죽음과 상처가 분명하지만 누구도 이에 주목하거나 책임을 지지 않는 사회에 대해 가시지 않는 의문을 넣어두고 애매한 웃음(37쪽)으로 청소년의 짧은 끈기와 이기심과 불성실함에 동의해야 하는 현실. 어른들의 어리석고 이기적인, 오직 ’내가 맞다‘고 주장하는 질문이 던지는 동아줄을 잡을 수 밖에 없는 현실.
이러한 현실이 현 사회의 현 주소라는 것이 씁쓸하다.
‘나는 아니겠지’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도 똑같은 사람인 때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고충을 토로하는 이들에게 함부로 ‘버티라’고 말하던 어느 날의 내가 있었음을 잊고 있었다. 버티고 버텨서 이겨내라, 돌아오는 것은 지는 것과 다름없다는 말이 ‘돌아와달라’는 애원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사회를 살아가야할 창창한 청소년들에게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응원해야 할 것이다. 그들을 잃고 후회하지 않도록, 미뤘던 책임이 배로 돌아오지 않도록 해야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