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 유전자

고전적인 유전학에서 독창적인 통찰력을 이용한 리처드 도킨스의 유전학
유전자에 대한 진실과 저자의 통찰을 담은 이기적인 유전자는 너무나 유명하고 자극적인 이름으로 책을 즐기지 않는 사람들도 모두 알고있는 명저다.
이기적 유전자를 읽으며
‘유전자(혹은 더 작은 유전형질)가 이기적이게 진화한다는 뜻이다’ 라고 말한다면 많은 오해를 살 수 있다. 책을 이해한다면 이기적 유전자라는 이름이 얼마나 멋진 통찰력을 가지고 붙인 이름인지 알게된다. 유전자는 자연선택에 의해 기계적으로 진화하고 사라진다. 진화의 주체가 생물 개체 하나 하나라는 기존의 유전학에 대한 반박으로 유전자가 그들을 개체를 어떤 식으로 활동하게 만드는지 개미와 여타 다른 동물들을 예시로 전혀 알지못했던 방식으로 유전을 설명한다. 또한 생명체의 진화 과정에서 일어나는 희박한 확률로 돌연변이가 발생해 현재 유전자풀에서 진화하는 과정을 간단한 사고 실험으로 우리의 이해를 돕고 독자들이 과학적 사고를 하게 만든다.
이기적 유전자의 오해
혹자는 이기적 유전자를 읽으며 모든 생명의 유전자는 이기적이야! 라는 책의 주장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를 하곤한다.
이기적 유전자라는 의미는 유전자가 환경에 따라 자신의 이익을 챙기며 살아남는 것이 아닌 그의 정반대인 환경에 알맞는 유전자 만이 살아남는 현상 때문에 아무런 감정을 가지고 있지않은 유전자를 읽는 독자가 쉽게 이해 할 수 있게 한 마리의 생명체 처럼 설명하려는 의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이기적 유전자에서 배운점
리처드 도킨스의 최고 걸작 이기적 유전자를 읽으며 나는 과학자적인 사고와 통찰을 하는 법을 배웠다.  흥미를 위해 양질의 지식을 얻기 위해 읽기 시작한 책이었다. 일반인 들이 이기적 유전자에서 유전학을 배운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전반적인 유전학이라는 분야의 흐름과 방향을 조금 알게되었고 그의 책들이 흥미가 생겨 조금 더 찾아볼 생각이다. 

25년간의 수요일 (리커버 특별판)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시위, 수요시위)

  역사 시간에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배울 때마다 정말 너무 안타까웠고 할머님들의 증언을 들으면 내가 다 억울한 마음이 들었었다. 늘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성인이 되기도 했으니 조금이나마 직접적인 도움을 드리고 싶었다. 할머님들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하던 중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더 공부하고 아는 게 많아야 그만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책을 읽으며 공부를 해보려고 이 책을 빌려서 읽게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내가 아무것도 모르면서, 관심이 있다고 말로만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내가 모르는 것보다 더욱 참혹하고 가슴 아픈 이야기가 묻혀있었고, 할머님들의 생생한 증언을 읽을 때마다, 그리고 할머님들이 이 이야기를 알리기 위해 힘들게 온 세계를 다니시며 연설하셨던 것을 읽을 때마다 눈물이 났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닐 동안 매주 수요일마다 더워도 추워도 한 번도 안 빼먹고 할머님들, 학생들이 수요시위에 나와 세상에 목소리를 내었을 생각을 하니 지금에서야 이 책을 읽고 너무 늦게 공부하려 한 게 죄송스러웠다.
  따라가지 않으면 가족들의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없다는 일본군의 협박 때문에 어린 소녀들은 가족들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끌려갔을 것이다. 한창 꿈 많을 십 대, 그리고 나와 같은 이십 대의 소녀들이 일본군에 의해 억지로 가족의 생계를 이끌어야 하는 그런 상황으로 내몰렸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위안부’ 여성들이 돈을 받았고, 장교들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또 강제성은 없었다고 말한다. 그럼 소녀들이 대체 뭐 때문에 가족들을 놔두고, 고향을 버리고 일본군을 따라나선 거란 말인가? 또 그럼 지금 용기 내서 증언을 하고 계시는 할머님들은 뭐가 되는 것인가? 일본 정부의 말도 안 되는 입장은 계속해서 우리 할머님들께 지금까지도 상처를 주고 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일본 정부가 제대로 이 문제를 직면하려 하지 않고 회피하기 때문에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런 일본 정부가 너무 미웠고 무책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다. 인정하지 않고 제대로 된 사과를 하고 있지 않은 일본 정부는 당연하고 한국 정부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며 한국 정부가 할머님들의 동의 하나 없이 마음대로 해결지으려 한 경우도 있었다.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한국으로 와서 남은 생을 편안히 보냈으면 했는데, 그 당시 우리 사회는 소녀들을 따뜻하게 맞아줄 수 있는 사회가 아니었던 것 같다. 고향에 오고도 마음 편히 생활하지 못하고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했다는 이유로 눈초리를 받으며 살아온 할머님들께 냉담하고 뜨뜻미지근한 당시 한국 정부의 태도는 또 한 번 할머님들께 대못을 박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1992년 1월 8일부터 매주 수요일마다 일본 대사관 앞 평화로에서 수요시위가 진행 중이다. 가장 오래된 시위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는데, 그만큼 감사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도 수요시위에 참가하여 할머님들을 직접 뵙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도와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책임감을 갖고 더 열심히 공부해서 지금 계시는 할머님들이 단 하루 만이라도 편안히 두 발 뻗고 주무실 수 있도록 우리 세대가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리 부는 여자들

 이 책은 세 저자가 각 파트를 맡아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첫 파트에서 권사랑 작가는 비혼 여성이 안전하고 덜 외롭게 살아가는 방법으로 ‘비혼 여성 공동주거’를 제시한다. 한 집에서 함께 사는 방법도 있지만, 심리적 거리가 가까운 친구들과 물리적 거리가 가까운 장소에 모여사는 것이 얼마나 안전하고, 소중한지 이야기한다. 각자 반찬을 들고 모여 식사를 함께 하고, 혼자서는 설치하기 힘든 침대 조립을 함께 해내고, 내 소식이 뜸할 때면 어디 아픈 거 아닌지 들여다봐줄 수 있는 이들과 사는 일상들을 보여준다. 권사랑 작가의 글이 설득력 있는 이유는 그녀의 실제 삶과 말이 의심없이 같은 맥락을 향하기 때문일 것이다. 오프라인 강연에서 만난 작가는 나에게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는 이들과의 만남에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그로 인해 쉽게 실망하지 말라고 이야기 해주었다. 그의 글에서도 유사한 언급이 있다. 마음이 맞는 친구와 함께 사는 것이 언제나 행복할 수 만은 없을 거고 미래에도 어떤 이유로 공동주거 생활을 유지할 수 없을 지 모른다고.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삶에서 당연히 있을 수 있는 변수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결혼하지 않는 여성의 삶이 외로움만 남아있는 삶일 뿐이라 염려하는 이들에게 추천한다.
 두 번째 파트는 학창시절부터 여성과 관계 맺어온 평범하면서도 가슴 떨리는 서한나 작가의 이야기이다. 나는 서한나 작가의 글을 통해 나를 스쳐간 여성들을 떠올렸다. 분명 그 당시에 나를 뒤돌아보게 만들었음에도 그저 흘려보낸 숱한 순간들이 있었다. 나는 언제나 타인의 시각에서 나의 생각과 행동을 재단하였고, 어는 순간부터는 단 한 순간도 진심으로 솔직한 적이 없었다고 느낀다. 그런 나와는 다른 선택지의 삶을 살아온 그녀의 이야기가 무척 재미있어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던 것 같다. 독자에게 새롭지만 당연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을 꺼내준 작가에 감사함을 느낀다. 
 세 번째 파트에서 이민경 작가는 자신이 의식하지 않았던 어린시절의 기억으로 자신을 찾아간다. 세 가지 경우 중 나의 삶의 궤적과 가장 유사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어느순간 이성애 관점에서 벗어나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보기 시작했고 그 길에서 모든 게 새롭다 느꼈는데, 의식하지 못한 기억 속 어딘가 분명 따스한 기억이 있다. 그것이 이민경 작가에게는 강아지와 관련된 기억일테고 나에게는 피아노 혹은 다정함에 대한 집착일 듯 싶다. 
아마 이 책은 개인의 경험과 인식의 정도에 따라 감상이 천차만별일 것이다. 하지만 아주 작은 조각이라도 눈을 가리고 있다면 책의 표지만 겉돌뿐 피리 소리는 듣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이며, 어떤 길을 함께 걷게 될지 들여다보고 싶은 여성들이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그 남자네 집

학교 주변 지리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기뻤던 적은 없었다. 간간히 한옥의 형태를 띤 가옥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박완서 소설 속 성북동, 삼선교, 성신여대는 내 기억과 아주 달랐다. 박완서 역시 그곳을 다시 찾았을 당시 아주 놀랐다고 이야기한다. 
박완서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다른 시대 속 존재하지만 분명히 몸으로 체화한 감정을 표현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소설 제목 속 그 남자와 헤어진 후 남자의 누나의 간곡한 청으로 그를 다시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졸업식에서 아무리 서럽게 우는 아이도 다시 학교로 돌아가고 싶어 우는 것은 아니라고. 이별의 감정을 이렇게 완벽하게 설명하는 문장이 또 있을까 싶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는 엄마의 등에 업혀가던 ‘나’가 해가 지는 모습을 보고 밀려오는 낯선 감정에 울음을 터뜨리지만 엄마는 그 이유를 알지못해 당황스러워 한다. 말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나 역시 그 감정을 너무도 정확히 알고 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시간과 나에게 익숙한 것들이 순간 낯선 것으로 돌변해버리는 시간을 느끼는 때를. 
<그 남자네 집>이 재밌는 또다른 이유는 화자의 솔직함과 능청스러움?이라 생각한다. 전후라는 시대상 속에서 먹는 것에 집착하는 시어머니의 시집살이에 이골이 나 치마를 짧게 수선해 장보러 가는 날 결혼 전 만난 남자와 데이트를 하는 모습, 차분하고 실리밝지만 엄마가 우선인 남편과 자신에게 다정하고 순애보이지만 가족들에게 망나니처럼 구는 그 남자를 적당한 거리에서 묘사하는 부분은 놀라운 정도다. 심지어 자신의 감정상태도 재미있게 묘사한다. 
박완서 작가의 작품을 읽다보면 같은 문화를 공유한 우리만이 공유하는 그 무언가를 자꾸 발견하는 기분이다. 마냥 웃을 수 밖에 없는 소재 조차 사람 사는 이야기로 들려준다. 

키메라 (세계문학전집 240)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세 개의 신화(고전)를 패러디한 소설이다. 이야기 자체에 생명을 불어넣어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신화인지 분별을 모호하게 만든다. 생동감있는 묘사와 인물 개개인의 개성을 존 바스만의 문체로 살려낸다. 존 바스의 작품은 <키메라>가 처음이었는데 신화라는 장르에 새로 관심이 생길정도로 매력있었다. 

A가 X에게 (편지로 씌어진 소설)

“내가 한참을 살고 나서도 죽기 전에는 몇 달의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기는 시간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때는 내가 열한 살밖에 되지 않은 것 같은, 아직 알라 가야 할 일들이 많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어요.”
“아니, 우리는 누군가를 따라잡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항상 앞으로 나아가는 것, 밤이나 낮이나, 동료 인간들과 함께, 모든 인간들과 함깨 나아가는 것이다. 그 행렬이 앞뒤로 너무 길어지면 안된다. 그렇게 되면 뒤에 선 사람들이 앞에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 더이상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점점 더 드물게 만나고, 점점 더 드물게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덧없는 것은 영원한 것의 반대말이 아니에요. 영원한 것의 반대말은 잊히는 것이죠. 잊히는 것과 영원한 것이, 결국에 가서는,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들은 틀렸어요.”
“그들은 아름다워지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지. 그냥 진실하려고 했을 뿐이지만, 거기엔 아름다움도 있었단 말이야. 그건 관습이었어.”
“돌아오는 길에는 수레를 끌며 고철을 모으고 있는 배드를 만났어요. 그는 벌집에서 꿀을 뽑아내는 기술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꽃이 다 진 지금이 비로 꿀을 모으는 때인데, 그래서 그고 이야기를 꺼낸 거겠죠. 완벽하다고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지, 그가 말했어요. 하지만 완벽한 건 그다지 매력이 없잖아. 우리가 사랑하는 건 결핍들이지.”
“우리를 두렵게 하는 건 작은 일이에요. 우리를 죽일 수도 있는 거대한 일은, 오히려 우리를 용감하게 만들어주죠.”
“젊은이들은 현재 자신들이 아는 걸 그 누구보다 생생하고, 강렬하고, 정확하게 알아요. 그들은 자신들이 아는 부분에서는 전문가예요. 나머지 부분은 우리가 보여줘야 하는 거겠죠. 어쩌면 항상 그런 식이었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 현재 우리가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건, 승리는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 투쟁에는 끝이 없으며, 그러한 사실을 알고도 투쟁을 계속해 나가는 것만이, 삶이 우리에게 준 커다란 선물을 알아보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거겠죠!”
96년생 여성들의 자살률이 급증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리고 몇일 후, 자신의 권리를 용기내 이야기하던 이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관련 기사에는 너무나 혐오적인 말들이 위로를 가장한 채 떠난 이를, 그리고 떠난 이를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매섭게 내리꽂혔다. 나는 내가 얼마나 나약한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그때 읽고 있던 책이 <A가 X에게>였다. 여성인권을 공부하며 세상에 외면받는 많은 생명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상처를 주는 사람들은 아직도 그대로인데 상처받는 이들은 자꾸만 곪고 다치고 죽는다. 나는 그들이 나와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 세상이 바뀌었으면 하고 바라던 마음이 이제는 얼굴을 알지 못하는 그들과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내어 언젠가 만났으면 하는 마음이 되었다. 너무 길지는 않은 행렬에서 더 자주 얼굴을 마주하고 더 자주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고 말하는, 우리를 지치게 만드는 것은 작은 것일 뿐이라는 아이다에게 듣고 싶은 답을 들은 안도의 기분을 느꼈다. 슬픔에 잠식되는 순간, 어딘가에 분명 같은 마음으로 바뀐 세상을 기도하는 이가 있음을 알기에 움직일 수 있다. 작은 소리라도 입밖으로, 내 몸밖으로 내보낼 수 있다.

책을 지키려는 고양이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쏟아지는 스마트폰 속의 각종 알람들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 책을 멀어지게 만드는 하나의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나의 취미를 적는 공간에는 항상 ‘독서’가 빠지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도 학교가 끝나면 매일 도서관에 들려 책을 반납하고, 빌리는 것이 나에게는 습관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 나의 취미를 적는 공간에 취미가 뭔지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적은 ‘유튜브 영상 보기’라는 내가 최근 몇 년간 얼마나 책에서 멀어지게 되었는지를 일깨워 주었다.
책을 왜 지켜야 할까? 책을 지켜야만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요즘은 사실 도서관에서 책을 직접 빌려서 보기보다는 디지털 형태의 전자책, 혹은 오디오북을 더 많이 접하는 것 같다. 그리고 시간이 없다는 (어쩌면 핑계일 수 있는) 이유로, 도서 요약본을 대신 읽기도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책의 형태가 점점 더 다양해짐에 따라서 책이 가지는 가치는 어떻게 될까?
이 책 속에는 4가지 유형의 책을 읽는 사람이 나오는데, 첫 번째는 책을 읽은 개수가 많을수록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두 번째 사람은 책은 줄거리만을 알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세 번째 사람은 책은 그저 많이 팔아서 이윤을 창출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사람은, 책이 가지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현실과 타협해 버린 사람이 등장한다. 이 네 가지 유형의 사람들이 주장하는 바를 읽다 보면, 그들이 옳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온다. 책을 많이 읽는 것? 당연히 중요한 일이 아닐까?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가장 중요한 게 줄거리가 아닐까? 또 책을 출판하는 가장 큰 이유가 이익을 창출하기 위함이 아닐까?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어디서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요즘은 책을 읽으면서 지식과 교양을 쌓는다는 건 너무 이상적인 말이 아닐까? 이 네 사람의 주장은 너무 그럴듯해서 책을 지키려는 마음을 사라지게 만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은 지킬만한 가치가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인 나쓰키 린타로는 마지막에 등장하는 책에게 상처를 받은 네 번째 사람에게 이렇게 말을 한다. ‘책은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르쳐 준다.’고. 책은 사람을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저 책을 읽는 개수가 많다고 해서, 줄거리만을 외운다 해서, 잘 팔리는 책만을 출판하고 읽는다고 해서 사람을 생각할 수 있는 힘이 길러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책 속의 한 문장 하나 하나가 사람을 대변하는 마음의 소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책을 통해서 사회를 배우고 인간을 배운다. 그리고 서로 공감하고, 마음을 나눈다. 하지만 린타로가 말하듯, ‘책에 힘이 있다고 믿고 있는데, 당신이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한다면’ 책이 가지는 힘은 발휘되지 못한다.   
 책은 지킬만한 가치가 있다. 책에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책이 가지고 있는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힘이 아닐까, 생각한다. 다시금 책읽기가 나의 취미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도록 책을 읽어야 겠다.

데미안 (리커버 한정판,헤르만 헤세 탄생 140주년 기념 초호화 패브릭 양장,초판본)

데미안은 선과 악에서 분투하는 싱클레어의 성장기를 그리는 고전소설이다.

 

싱클레어는 재벌 집안에서 태어나 부족함이 없는 선의 세계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문득 선의 세계라고 느끼던 자신의 집에서 어두운 소리가 들려온다.

부엌에서 이야기하는 무서운 소문과 추잡한 이야기를 듣고 악에 대해 알게 된다.

그리고 학교에 갈 나이가 되어서 라틴어 학교에 가게 되었고 거기에서 프란츠 크로머를 만나게 된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과수원의 과일을 자신이 훔쳤다는 거짓 무용담을 늘어놓는다.

크로머는 거짓말을 알아챘고 싱클레어에게 고발하지 않을 테니 돈을 가져오라고 협박한다.

이 순간부터 싱클레어의 선의 세계는 파괴된다. 싱클레어는 돈을 가져가기 위해 부모님의 저금통을
훔치고, 돈을 가져가지 못한 날은 괴롭힘을 당하게 된다.

이후 싱클레어는 토하고 오한이 드는 등 크로머에 대한 두려움은 늘어나고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초반부의 간단한 이야기에서도 데미안이라는 책은 엄청난 흡입력을 보여주었다.

책의 전체적인 내용은 선과 악의 세계는 공존하고 거기서 살아가는 어려움을 보여주면서 진행된다.

성경의 내용인 카인에 대해서도 다루고, 끝없이 방황하는 싱클레어를 끌어내 주는 구원자와 스스로
선의 세계로 들어오는 싱클레어.

솔직히 말해서 후반부로 갈수록 내용이 상당히 심오해진다. 베아트리체와 문양, 데미안의 어머니를 만나는 이야기는 2번 읽어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나는 이 책을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싱클레어의 괴로운 어린 시절에는 우리가 어릴 때 느낀 두려움을 정확하게 전달해준다.

잘못을 저지르고 죄책감을 느끼는 순간의 감정 묘사와 두려워서 혼나는 상상을 하는 모습이 너무나 실감 나서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오르고 내가
무서움을 느낄 정도였다.

어려운 내용을 담았기에 이해하기는 어렵겠지만 감정을 묘사하는 순간은 정말 최고의 고전이라고 평가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침묵의 봄

 지난 20  동안 지구 온난화일회용품 줄이기  환경 관련 이야기를 들었을  부끄럽게도 나는  이야기로 치부하기 일쑤였다환경 오염은 관련 단체나 전문가 혹은 정부가 해결해야 하는 것이지  개인이   있는 것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그런 내가 <침묵의> 집어든  이유는 단지 내가 좋아하는 프로게이머가  책을 흥미롭게 읽었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책은 해양생물학을 전공한 ‘레이첼 카슨 무분별한 화학용품 사용이 어떻게 다시 우리에게 돌아오는지 일련의 과정을 설명한 책이다책이 출판된 1962년에 자주 사용한 화학품 DDT 주로 다루며 처음에는 해충을 잡기 위한  물질이 어떻게 토양에수질에나아가인간에게 영향을 끼치는지  경로를 제시한다.

 옛이야기를 듣듯 가벼운 마음으로 읽던  초반에는 그녀가 알려주는 모든 것이 흥미로웠다우리가 특정 식물이나 해충을 퇴치하기 위해 사용한 물질이 다시 우리 밥상에 심지어  심한 독성을 가지고 오른다는 점이 신기했다하지만 책을  읽을수록 무력함에 사로잡혔는데 내가 이런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과정을 막거나 거부할  없기 때문이었다우리를 위협하는 모든 독물을 희석하기에 개인의 노력은 너무나 미약했고 이러한 화학제품을 직접 사용하는 현장에 있는 것이 아니기에 특별히 취할  있는 행동도 없었기 때문이다설령 내가  전선에 있다고 하더라도 벌레들과 함께하는 방법보단 그것들을 제거하는 길을 택할  같았다그렇게 답답한 마음으로그녀가 보여주는 비관적인 현실에 낙담하고 있을  그녀는  말미에 해결책을 제시해 줬는데 이는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말고자연의 섭리에 의해 자연스럽게 해결되도록  천적을 활용하라는 이었다물론  방법 역시 내가 직접 활용하기에 한계가 있지만 그래도 최소한 희망이 없다는 허탈함에서는 벗어날  있었다.

 저자가 예상했듯 이제 곤충 대부분은 DDT 대해 내성을 지니게 되었고사람에게도  피해를 준다는 것이 확인되어 1972 미국은 물질을 전면 금지하였다. DDT 위험성에 대해 주를 이루는  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21세기 현대인에게  가지 사실을 전하고 있기에 의미가 있는 책이다.

 첫째인간을 제외한 다른 생물에게만 해로운 화학물질은 없다 책을 통해 우리는 유해 곤충 혹은 식물을 억제하기 위해 사용된 화학물질이 인간에게도 치명적임을   있었다그렇다면 인간  다른 생물에게만 치명적인 화학물질이 존재하는 걸까단지 이는 DDT라는물질만이 가진 특징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2016 대한민국에서  이슈였던 ‘가습기 살균제 사건에서 그에 대한 답을 찾을  있는데, ‘가습기 살균제 사건 가습기의 세균을 억제하기 위해 사용한 ‘가습기 살균제 기계 작동 과정에서 공기 중에 퍼졌고이를 마신 사람들의 폐가 딱딱하게 굳어 심한 경우 사망까지 이른 사람들이 속출한 사건을 말한다가습기 살균제 회사들은 가습기 살균제를 ‘실험 결과 가습기에서 쉽게 번식하는 균에게는 치명적이지만 인체에는 무해한 물질임이 확인된 살균제라며 제품을 홍보하였고 사람들은 이를 믿고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하였다하지만 사건이 터지고  내막을 들춰보니 기업들이 실험 결과를 정해두고  결과 도출을 위해 여러 부실 실험을 진행한 사실이 드러났다그제야 비로소 여러 전문가와 정부는 미디어를 통해 인간에게 무해한 살균제는 없음을 공식 입장으로 내보였는데 이를 확장해보면 결국 생물에게 위협적인 모든 화학제품은 정도만 다를  인간에게 해로운 영향을 준다는결론이 나온다따라서 우리의 편의를 위해 여러 독성물질이 개발되고 있으나 이러한 물질의 칼날은 결국 인간을 향하고 있음을 염두에두어야 한다.

 둘째우리의 편리함을 위한 물질들이 어떤 끝을 맞이하는지 깊게 생각해 봐야 한다이는 비단 화학물질만이 칭하는 것이 아니다 책을 읽으며 가장 먼저 떠오른 물질은 ‘플라스틱이었다플라스틱은 우리 생활에 깊게 자리 잡아 삶에 편의성을 더한 제품이지만우리가편리하게 사용하는 플라스틱이 여러 환경문제를 유발하고 있음을 모르는 현대인은 드물다일단  물질이 토양에서 완전히 분해되는 데는  100년이라는  시간이 걸린다그렇게 오랜 기간이 지나 분해가 되더라도 끝이 아닌데, ‘다이옥신이라는 사람에게 치명적인 독성물질이 생기기 때문이다다른 쓰레기 처리 방법인 소각 시에도 동일한 물질이 생긴다쓰레기 처리 방법  주로 쓰이는 해양투기 방법도안전하지 않다이를 바다에 버린다면 바다생물의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는 것은 물론이고 해양생물이 플라스틱을 먹기라도 한다면 인간은 식탁에서 다시 본인들이 버린 플라스틱을 섭취하게  것이다이렇게 우리가 먹은 플라스틱이 우리 몸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한 것은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으나부식과정에서 독성 물질을 뿜어낸다는 특징으로 미루어   우리 몸에 좋은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인 상황이다이는 <침묵의 저자가 제시한 DDT 우리에게 돌아오는 과정과 아주 유사하며결국 우리가 어떤 물질을    물질이 어떤 끝을 맞이하는가에 대해 깊게 생각할 기회가 필요함을 시사한다.

 환경문제가 날카롭게 건의되기 되는  시점에  책을 읽게 되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코로나 이슈로 잠시 시들해진 환경 이슈 관련해서 조금 귀찮은 마음이 들었던 적도 더러 있었다일정 시간이 지나면 눅눅해지는 종이 빨대 대신 플라스틱 빨대를 사용하고 싶었고카페에서 일회용  대신 텀블러를 사용하는 것이 유난스럽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그러나 책을 읽고 나니 당장 우리 앞에 있는 것만 생각했다간 그것들이 다시 우리를 위협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니 가능하다면 겸손한 마음으로 내가   있는 선에서 환경을 위한 작은 불편함은 감수해야겠다는 생각이  책이었다.

그해, 여름 손님

난 동성애에 아무런 거리낌도 없고 그사세라고도 느끼지 않음으로 가벼운 연애소설을 생각하고 읽었다. 생각보다 생각해볼거나 감상할게 많은 것 같다.

그냥 아름다운거 같다. 소설이 진행되는 그 배경도, 말들도, 여러가지가 아름다웠다.

오랜시간이 지나고도 잊지못한 그 사랑은 동성애여서였을까 유대인이어서였을까 서로 묻길바래서였을까.

“사랑은 사랑받는 사람을 사랑하게 만든다.” (불어는생략)

정사 후 욕지기를 느낀건 동성애의 후회였을까, 상상하던 그를 향한 욕망의 끝이 허무해서였을까, 앞으로 더이상 관계에 있어 나아가지 못한다고 생각해서일까, 다른 여자들과의 것들때문이었을까, 그를 갖지못한다고 생각해서일까, 유대교로서 죄악감을 느낀걸까, 충분한 사랑의 대화를 하지 못하고 욕망을 따른 결과를 후회한 거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