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의 식탁 (미래의 요리를 위한 위대한 실험)

단순히 친환경적인 재료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지속가능한 요리를 만들고 싶은 요리사 댄 바버의 요리에 대한 열정과 함께 따라가 본 <3의 식탁>은 생태계를 지키는 것을 넘어 맛과 영양, 그 사회의 문화까지 생각한다이 놀라운 여정을 따라가며 내가 지금까지 먹었던 것, 그리고 먹을 것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이 책이 독자에게 건네주는 선물 같은 질문을 통해 식문화를 바꾸어 가는 건 요리사와 소비자의 몫일 것이다

1부를 읽으며 가루 반죽용 밀이 아닌 바로 빵을 구울 수 있는 밀을 재배하고 싶었던 농부의 유기농 곡물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흥미롭고 더불어 화학비료의 위험성을 알게 되어 수확량이 많고 빠르더라도 지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2부의 마지막 부분에서 요리법이나 한 끼의 식사가 우리가 먹는 동물이 자라는 방식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한다고 하였는데 이 말처럼 닭, 오리, 돼지 등 동물의 복지와 사육 환경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챕터였다. 또한 동물의 복지와 음식의 맛이 반대된다고 생각했었는데 동물의 복지를 따라가다 보면 음식의 맛도 잡을 수 있다는 걸 새롭게 알게 되었다.

3부 바다를 읽으며 3부에 담긴 가장 큰 주제이자 저자가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은 자연의 모든 생명들은 연결되어 있다라고 생각했다. 3부 안에는 수산업의 생태계 파괴와 요리사의 해양윤리, 고급생선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으로 인해 버려지는 생선들, 어류 양식에 대한 논쟁 등 바다에서 잡히는 요리 재료에 대한 다양한 주제들이 담겨있었다. 그 중에서 해양 생태계와 조류와의 연관 관계 부분을 읽으며 해양 생물에 대한 나의 태도를 반성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나 또한 잘 알려진 생선에 대한 선호가 있었고, 생선 섭취는 육식 동물 보다는 윤리적 책임이 덜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러한 나의 태도가 해양 생태계를 해치는 것과 더불어 온 지구의 생태계를 해치는 데 일조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요리를 아무생각 없이 먹지 말고 내가 지금 먹는 요리의 재료가 무엇이고 어떻게 이 식탁위에 올라오게 되었는지 관심을 기울여야겠다고 생각했다

4부에서는 밀과 토마토 등 작물의 종자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종자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식탁의 음식을 먹으며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었다. 육종자들의 친환경적인 종자에 대한 열정을 보고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유기종자사업을 지역에서 확산시키며 사회문화를 만들어가는 클라스와 메리하월, 기업식 농업과 경작으로 인해 사라져가는 종자인 그레이엄 밀가루를 되찾아 잃어버린 요리를 만들려 하는 글렌, 상업화보다 공익을 우선시하며 맛있는 밀가루 종자 개발에 집중하는 스티브 등 내가 알지 못하고 깊이 생각해보려 하지 않았던 육종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종자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쌓으며 건강한 작물을 먹기 위해서는 우선 건강한 종자가 개발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 전통방식을 고집하느라 종자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는 요리사에 대한 자세를 반추해보는 저자를 통해 요리를 먹는 소비자의 입장에서도 종자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기회였다

<제3의 식탁>을 읽음으로써 평소에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주제인 환경에 대한 도서를 깊이 읽어보는 경험을 하게 되어서 유익했다. 특히 내가 먹는 요리에 대해 바라보는 관점이 변화하였다. 앞으로 음식을 볼 때 그 음식의 재료가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생각해보고 생태계를 해치치 않는 방식으로 자란 재료를 선호할 것이다자신이 먹고 있는 요리에 대해 새로운 관점으로 고찰해보고 싶은 현대인들에게 딱 알맞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간호사, 사람입니다 (단 한 번의 실수도 허락하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벌써 코로나19가 발생한지 1년이 지났다. 코로나19가 오래 지속될수록 힘들어지는 사람 중에는 간호사분들이 있다. 뉴스를 보면 방호복을 입고 환자를 돌보기 때문에 평소보다 배 이상으로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런 뉴스는 평소에도 잘 듣지만 그냥 힘들겠다는 생각만 드는 경우가 많고 얼마나 힘든지에 대한 공감이 잘 안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 간호사들의 일의 강도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어서 간호사를 존경하는 눈으로 보게 될 것이다. 물론 일의 강도만으로 간호사를 존경하는 것은 아니고 저자가 간호사로 일을 하면서 가진 사람을 간호하는 일에 대한 생각이나 환자를 대할 때의 마음에 감동받았다.


책의 중간에 저자가 메르스로 인한 코호트 격리를 당한 경험이 생생하고 자세히 적혀있었다. 코호트 격리는 병원에 외부인은 전혀 들어가면 안된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 책을 읽어보니 코호트 격리는 의사, 간호사, 환자 모두에게 상처를 남기게 되는데 특히 정신적인 피해가 심각했다. 저자도 자신이 메르스를 걸렸던 환자를 돌봤다는 것도 몰랐었고 나중에 알았을 때의 충격과 ‘아무리 소독을 해도 이 중환자실 어딘가에 메르스가 있을 수도 있다.’ 같은 생각으로 불안이 가득했다고 한다. 이런 생각은 당연히 간호사들에게  지속적인 스트레스가 됬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도 코로나19가 자신 주변 어딘가에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불안에 가득한 생활을 겪어봤기 때문이다. 코호트 격리는 우리가 겪었던 불안 이상으로 스트레스를 줬을 것이다. 이번 코로나19로 인해 코호트 격리가 된 병원이 여러 곳이 있었는데 정말 얼마나 힘들었지 상상도 안가고 정신적으로 받은 피해를 잘 극복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이 책은 간호사라는 직업에 대해서 말하기도 하지만 저자가 진짜로 말하고 싶은 것은 책 제목에도 쓰여 있듯이 간호사도 사람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환자들을 돌보려면 일단 자신이 건강하고 자신을 잘 돌보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책에 적혀있던 간호사의 생활은 간호사 자신의 생명을 환자에게 나눠 주는듯한 느낌을 주는 생활이었다. 환자를 돌보면서 자신은 밥을 먹을 시간도 없어서 빨리 먹거나 식사를 거르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그리고 간호사들을 힘들게 하는 원인 중 한가지는 무례한 보호자이다. 보호자 때문에 힘들어서 간호사를 그만 두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정말 책을 읽기 전까지 간호사라는 직업이 이렇게 힘든지 몰랐지만 책을 읽은 후에는 간호사의 이직률이 많은 이유를 알게 되었고 열심히 일하는 간호사에 대한 처우개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크게 들었다. 그리고 간호사들에 대한 감사를 전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제3의 식탁 (미래의 요리를 위한 위대한 실험)

  처음 환경과 음식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 계기는 아보카도였다. 아보카도가
큰 인기를 얻기 시작하고, 많은 가게에 아보카도가 들어가는 메뉴가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아보카도에 관한
많은 정보를 접하게 되었다. 여러 정보 중 인상 깊었던 것은 아보카도가 환경에 매우 나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었다. 아보카도가 유행하면서 아보카도를 심기 위해 많은 농부들이 나무를 베어서 숲이 사라지고, 다른 과일에 비해 많은 물이 필요함으로 인해 아보카도 농장 주변 지역은 심각한 가뭄을 겪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 내가 먹는 것과 환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그러다가
만나게 된 책이 바로 댄 바버의 『제3의 식탁』이었다.

  책의 저자인 댄 바버는 유기농 재료가 농장에서 출발하여 식탁에 올라오는 팜 투 테이블(farm to table) 운동을 강조한다. 책에서도 팜 투 테이블과 제3의 식탁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가 책에서 이야기하는 제3의 식탁은 한 접시의 요리 자체가 아니라 지금까지와는 다른 요리법, 혹은 요리의 조합이거나 메뉴 개발과 재료 수급, 혹은 그 전부를 포함한 개념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제3의 식탁은 우리 음식이 관계의 그물망 전체의 일부이며 단 한 가지 재료에만 집중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고 하였다. 저자는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책에 잘 담았고, 소비자로서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요리사로서의 관점으로 이야기를 해주어서 독자로 하여금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책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밀과 거위, 참치 등을
중점으로 더 건강한 먹거리를 고민하게 한다. 이러한 먹거리들을 건강하게 기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고, 자연에서 나는 모든 것들이 혼자서 자라는 것이 아닌 서로 연결되어 있고 각자의 자리에서
역할에 충실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과 환경 모두에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3의 식탁』은 미래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기에 미래에 내가 선택하는 것들이 여러 분야에 영향을 끼치게 되고 다시 나에게 돌아오게 된다. 그렇기에 내 선택이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좋은 선택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파피용 (베르나르 베르베르 장편소설)

이 작품은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희망을 모토로 한다. 장애인이 되어 모든 꿈과 희망을 잃은 엘리자베트에게 조타를 맡겨 키를 잡게하곤, 더욱이 선 외부를 희망을 상징하는 나비의 틀로 제작하기에 이른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이 책을 통하여 독자에게 알리고자 하는 것이 희망인 것을 알 수 있다.

 

희망과 기회는 언제 온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것을 받아드릴 용기와 도전 정신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20대인 우리는 성대한 꿈을 가진 모험가이자, 어린 아이이다. ‘파피용을 읽고 지구를 떠날 것인가 혹은 남을 것인가를 묻는다면, 나는 당연히 떠난다고 답할 것이다.

 

각자 자신만의 목표가 있듯이 작에서의 이브는 새로운 세상의 건설이라는 유토피아적 사회를 만드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누군가 나에게 왜 지구를 떠난다고 묻는다면,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고자 하는 호기심과 황폐화된 지구를 떠나는 사람들을 보며 느끼는 희망이라고 말하고 싶다. ‘파피용의 핵심이자 슬로건(motto)<마지막 희망은 탈출>이었다.

 

나는 희망은 한 줌의 빛과 같다고 생각한다. 항상 눈을 감고 있는 사람들은 그 빛을 보지 못하고 생을 비관적으로 살 것이며, 빛을 본 사람들은 자신들이 꿈꾸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144천명이라는 선별자들의 희망도 그와 같다. ‘파피용호는 빛이었으며, 그 들의 희망이었다. 그 들의 마음 속에 미지라는 두려움이 내포되어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들은 희망을 품고 떠났다. 다른 세계로의 도약. 그리고 꿈. 내가 떠나는 이유는 그처럼 내가 아닌 파피용호에게서 한 줌의 꿈을 보았기 때문이지 아닐까싶다.

파피용 (베르나르 베르베르 장편소설)

 기억이 나지 않는 예전부터 법과 제도가 없는 세상에 살면 사람들은 평화롭게 지낼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신호등 없는 도로, 가문이 없고 그 사람을 존중해주는 사회, 법이 없어도 살인사건이 뭔지 모르는 시대 말이다. 종종 ” 좀비의 시대는 멀지 않았다.”라는 식의 엉뚱한 말을 자주한다고 알려진 나는 “법과 제도가 없는 시대,”를 혼자 생각만 하고 있었다. 분명 ‘말도 안된다.’, ‘그런 생각할 나이는 지나지 않았냐.’라는 반응이 나올 것이 뻔히 알기에..

 그런 나에게 이 책은 마치 논문과도 같은 책이었다. 신 지구를 찾아 떠나며 과연 유토피아는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라는 의문점으로 시작하는 이 책의 내용은 나의 흥미를 자극하기에 넘쳐흘렀다. 주인공이자 파피용호의 창시자인 이브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느껴지는 지구를 탈출하여 신 지구를 항상 꿈꿔왔다. 법과 제도, 그 어떤 것도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며 파피용호를 제작하고자 했을 때 ‘현실감이 없으니까,’라는 식으로 가볍게 봤었다.
 하지만 책이 이어지면서 제작이 들어가고 점점 형태를 갖춰나갈 수록 뭔가 웅장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대리만족이라고 하겠다.(웃음) 그 제서야 내가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응원하는 마음까지 생긴 것 같았다. 1장 마지막에서 세상 사람 80퍼센트가 반대했을 때 죽음을 무릅쓰고 파피용호를 발사시킨 그 순간의 기분은 말하기 힘들정도였다.

 하지만 책을 읽힐 수록 힘이 빠진 건 사실이었다. 아직까지도 사람들의 논제로 남아있는 성악설, 성선설이 등장하는 것 같은 느낌..?
그렇게 엄선한 착한 DNA의 14만 4천명의 인구를 데리고 호기롭게 출발했던 파피용 호의 내부는 2대를 거치게 되면서 구 지구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실망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럼 그렇지…’라는 생각으로 안타까웠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지도 모른다.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 사람은 사람의 뇌를 100퍼센트 파악하지 못한다.’라는 말. 이처럼 우리는 고정관념으로 어쩔 수 없이 자리박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착한 DNA를 가진 것은 나쁜 DNA가 없다는 것이 아니고, 수치가 적은 것을 의미한다. 사람마다 개성이 다 다른데 착한 DNA만 가지고 난다고 해서 착한 사람만 태어난다는 것은 아니니까.. 씁쓸하지 않은가.
 어쩌면 나의 고집일 수도 있다.  나의 소망으로 채워진 근거없는 주장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걸지도..
 
 그렇다면 작가는 도대체 어떤 의도로 이 책을 세상에 알렸을까?? 책 속에 심경변화가 나온다. < 마지막 희망은 탈출이다.> → < 영원한 탈출은 없다. >라는 심경변화.
 사람은 변하지 않고, 새로운 환경이 주어지더라도 순환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니 내가 살아간 이 환경을 아끼고 사랑하자.라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희망은 탈출이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 처음부터 내 마음 속에 가지고 행동하면 안되는 것 이라는 것과 같았다. 최대한 노력하라고
 훌륭한 책은 여러번 읽어도 새로운 문장이 나오고, 시간이 지나서 읽으면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고 한다. 나에게 이 책이 그런 책인 것 같다.
포기하지 말라는 책, 마지막 희망은 탈출이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보라는 이야기. 먼 훗날 이 책을 읽으면 또 다른 내용이겠지?하며 조용히 책을 덮었다.

파피용 (베르나르 베르베르 장편소설)

이 책을 읽으면서 인간의 절실한 도전을 보는 거 같았다. 이 책의 주인공인 ‘이브 크라메르’는 인간의 욕망에 물들어진 지구를 벗어나 평등하고 흠 없는 자유로운 유토피아를 꿈꾸며 50세대에 걸친 여행이 가능한 우주선을 만들었다. 우주선의 이름은 ‘파피용’인데 이는 나방을 뜻한다. 나방은 주변이 변해도 빛이 모여있는 곳에 모여든다. 이처럼 이 큰 도전에 편견과 비난을 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자신의 절실한 꿈을 향해 날아가는 것을 표현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나는 간호사, 사람입니다 (단 한 번의 실수도 허락하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평소 이런 수필(에세이) 장르의
책은 잘 찾아 읽는 편이 아니었으나 최근 학술정보관에서 주최한 작가와의 만남 행사에서 장강명 작가가 소개한 나는
간호사, 사람입니다가 생각나서 겨울방학 독서클럽 주제 도서로 추천하게 되었다. 마침 지금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시대인 데다 이 책에는
작가가 메르스 사태 때 병원에서 겪은 일들을 말하고 있어서 시의적절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간호사들의 고충을 가감 없이 표현하고 있어 내가 몰랐던 삶에 대해 간접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번 겨울방학 독서클럽은
시류에 발맞추어 한 번쯤 생각해보면 좋을 문제에 대해서 조사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다.

인간 실격 (1948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초판본)

신은 생각보다 무심하고 관대하며 나는 생각보다 평범하다
박소향
“제게 제일 잘 어울리는 곡이 뭐 같으세요?”
  “…시이나 링고였나, 아무튼 그 가수의 죄와 벌 아닐까.”
  스무살의 봄. 적당히 달아오른 취기와 피곤함을 머금은 채 비틀비틀 걸었던 기억이 난다. 사실은 똑바로 걸을 수 있음에도 그러고 싶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나는 가수 시이나링고를 동경했고, 그녀가 ‘죄와 벌’이라는 곡을 비틀비틀 쓰러질 듯 노래를 부르는 라이브 무대에 그야말로 반해있었다. 시이나링고 노래의 일본어 가사 독음을 열심히 외워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무조건 죄와 벌을 불렀다. 음악을 틀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급히 이어폰을 꺼내 상대방의 귀에 이어폰을 꽂고 죄와 벌을 틀었다. 대학에 합격하고 서울에 상경하기전에 내가 좋아했던 선생님에게 나에게 가장 어울리는 곡이 무엇인 것 같냐고 물었을 때, 선생님은 고맙게도 죄와 벌이라고 답해주셨다. ‘죄와 벌은 곧 나’라는 늪에 들어갈까말까 손을 휘적이고 있었다면 그때 풍덩, 몸을 던졌다. 처음 맞는 서울의 봄은 쌀쌀했다.

   그 날씨에 나는 기꺼이 휘둘려주고 싶었고, 적당히 연속해서 적당히 안 좋은 선택들을 했다. 종이에 베인 것 같은 얕은 상처들이 점점 늘어갔다. 이렇게 상처가 많은데, 아무도 나를 보듬어주지 않았다. 상처들을 교묘히 보여줘서 사람들로 하여금 연민을 얻으려고 했다. 우울이라는 가면을 쓰며 나도 가면을 썼으니, 다른 사람들도 가면을 썼으려니. 다른 사람들의 말을 곧이 곧대로 듣지 못하면서,  숨겨진 의중을 파악하려 드는데 골몰했다. 그러면서도 믿고 싶은 것은 마냥 믿었다. 그렇게 허술하지만 꽉 막힌 나의 논리를 누군가 파고들면, 내 심연을 네가 알아?식으로 귀를 막아버렸다. 나는 심연과 우울 속에 사는 사람이야,  나는 죄와 벌 그 자체야. 그런식으로 스스로에 대한 책임감을 회피하면서 이십대 초반을 보냈고 진짜 내 모습과 가면이 헷갈리기 시작했다.
  요조는 자신을 불완전한 인간을 소개하는 양 하면서도 스스로의 행동이나 삶에 대한 감정을 섬세히 표현해 읽는 이로 하여금 아주 부정적인 평가로부터의 여지를 남긴다. 반대로 주변의 인물에 대해서는 불편함을 느끼면 그대로 마음 속으로 상대방을 비웃거나 냉소적으로 평가한다. 나는 분명 요조에게 연민을 느꼈지만 이중성이 불편하게 느껴져 그가 싫었고 책을 읽을수록 알 수 없는 불편감이 느껴져서 읽는 것 또한 최대한 미루게 됐다. 책의 마지막 장 까지 읽고 네번째 독후감에 요조에게 죄에 대한 벌, 회피와 책임에 대한 물음을 던졌을 때 동시에 나는 그런 질문을 할 자격을 있는 사람인가. 라는 또 다른 불편감과 의문을 느끼게 되면서 깨달았다. 나는 인간실격을 사물로서의  책에서 벗어나 은근히 나를 비추는 거울로 느꼈던 것이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이십대 초반의 내가 평소와 같이 상대방에게 무차별 난사로 의심과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상대방은 의심에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나를 설득하고 믿음과 진심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때, 나는 내가 쓰고 있던 우울의 가면을 벗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영원히 내 모습이 되어버려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가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후로 시간이 흘러 지금이 됐다. 사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나는 내가 가면을 완전히 벗었다고 생각하고 요조를 공격했는데, 인간실격이라는 거울을 보니 아직 가면이 모두 벗겨지진 않은 것 같다. 어제는 그 모습이 실망스러웠다.
  오늘이 되어 또 생각 해보니 내가 세번째 독후감에서 요조는 지극히 인간답게 잘못 살아왔을 뿐이라고 했고, 나도 요조와 다를바없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지극히 잘못 살아온 과거를 기점으로 결심하면 또 영원히 잘못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건 아닐 것 같다. 예전에는 시이나링고의 절규하는 듯한 목소리와 쓰러질 듯한 퍼포먼스를 떠올리면서, 괴로움은 신이 심어준 벌이라고 스스로 정의 내리며 고통에 머물러있었는데 그때는 스스로에 대한 감상에 젖어있을 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신은 생각보다 무심하고 관대하다. 쓸데없는 생각을 멈추고 다시 책임질 용기, 그러니까 죄에 대한 벌을 받을 용기를 가다듬었다.

제3의 식탁 (미래의 요리를 위한 위대한 실험)

한동안 집에서 요리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생겨 유튜브에서 [백종원의 요리 비책] 채널을 챙겨 보았다. 영상에서 백종원 씨가 돼지고기 살 때 비선호도 부위를 사세요.’라는 말을 유독 많이 하셨던 게 기억이 난다. 몇 주 전만 해도 이 말은 그저 내 지갑 사정을 고려해서 하는 말로 흘려들었지만, 지금은 이 문장 안에 담겨있는 대지 공동체의 살아있는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식탁은 우리에게 하나의 문화다. 어릴 적부터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는 게 너무 익숙했다. 저녁 시간이 되면 가족 모두가 식탁에 둘러앉아 하루 동안의 일을 서로에게 이야기하며 지친 마음을 따듯한 음식과 말들로 위로받았다. 우리에게 식탁은 가족이자 공동체를 만들어 주는 시작점이다. 하지만 우리가 나이를 들어가면서 식탁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코로나 시대를 지나면서, 우리는 갓 지은 밥과 국 대신, 스마트폰을 통해 메뉴를 고르고 배달을 통해서 음식을 전달받는 시스템에 너무 익숙해졌고, 음식을 통해 나눔이 아닌 개인의 요구를 채우는 것에 집중되고 있다. 그렇게 이러한 것이 새로운 일상이 되어 버렸다. 우리가 어렸을 적 느꼈던 식탁 공동체를 다시 되살릴 수는 없을까?

3의 식탁은 뉴욕 최고의 요리사인 댄 바버가 현재 우리의 식품 체계가 어떠한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는지에 대하여 요리사의 관점에서 적나라하게 들려준다, 그리고 이 방식이 어떻게 음식의 맛을 해치고 있는지, 그리고 떨어진 음식의 맛이 어떻게 공동체를 서서히 와해시키는지 은연중에 알려준다. 하지만 저자는 예전의 음식의 맛, 그러니까 토양과 동물과 식물과 인간이 하나로 연결되어 이루는 생태계(공동체)를 다시 복원하고 미래식품이 어떠한 것을 지향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음식을 먹을 때 항상 일정한 모양을 원하고, 항상 일정한 맛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그 일정하다는 특성이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스며들어서 당연하게 그 기대가 충족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에게 질문할 필요가 있다. ‘1년 동안에 4계절이 바뀌고, 동물은 자라나고, 식물도 각 각의 모양이 다 다른데, 어떻게 요리가 매번 똑같은 맛을 낼 수 있지?’ 여기에서 제3의 식탁이 시작된다. 즉 제3의 식탁은 공동체적 연대와 자유가 함께하는 식탁이다. 이 책에서는 특별히 이를 잘 보여주는 2개의 공간이 나온다. 스페인 데에사에 있는 에두아르도의 농장은,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프아그라를 생산하는 곳이다. 이 농장은 거위를 가두지도, 억지로 먹이를 주지도 않는다. 그저 거위들이 좋아하는 먹이인 도토리나무를 심고 스스로 먹도록 한다. 하늘에서 매가 거위 알을 노리며 날아다녀도 억지로 매를 쫓아내지 않는다. 울타리도 없어서, 거위가 날아가고 싶으면 날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오히려 야생거위들이 이곳에 정착해서 살기도 한다. 이것이 거위들이 가진 자유이다. 이 거위에서 나온 프아그라 (거위 간), 프아그라 기름지고 부드럽지는 않아도 충분히 부드러운 맛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거위가 사계절 동안 먹은 먹이와 운동량에 따라 맛이 조금씩 달라져 오히려 더 풍부한 맛을 자랑한다. 두 번째로 소개된 곳은 지금은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스페인 남부에 있는 베타 라 팔마라는 양식장이다. 이곳은 단순히 친환경적인 양식장이라 하기에는 그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 양식장은 물고기를 좁은 공간에서 인위적으로 살찌우는, 어찌 보면 그들의 자유를 빼앗는 공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양식장이 그러하다. 하지만 강 하류의 습지에 위치한 이 양식장은 그렇지 않다. 깨끗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하여 플랑크톤을 이용해 물을 정화한다. 그래서 이곳에서 양식(양식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럽게 기르는)하는 물고기 중 숭어는 진흙을 먹기 때문에 형편없다고 여겨지기도 하는데, 숭어는 대서양에서 헤엄쳐서 스페인의 베타 라 팔마로 다시 돌아온다. 또한 습지대를 살펴보면, 거대한 홍학 무리를 볼 수 있는데, 새들이 이동하면서 이곳에 물고기가 풍부하고 깨끗하기 때문에 여러 조류가 모여서 지내는 모습 또한 볼 수 있다.

스페인 데에사의 에두아르도의 농장과 베타 라 팔마가 가지는 공통점은 바로 공동체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자유를 준다는 점이다. 에두아르도의 농장은, 거위만 기르는 것이 아닌 스페인의 최고급 한몬인 하몬 이베르코 돼지와 양, 소를 같이 기른다. 그리고 도토리나무와 오크 나무를 기른다. 이 모든 동·식물이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 마치 커다란 톱니바퀴처럼 모든 게 알맞게 돌아간다. 베타 라 팔마도 마찬가지다. 플랑크톤에서 시작해서 숭어와 농어, 그리고 그곳에 모여든 새들까지 하나의 완벽한 공동체를 이룬다. 그리고 공동체를 구성하는 각 각의 생명체는 자유롭게 공동체를 구성한다.

빵을 먹을 때, 우리는 빵이 항상 똑같은 맛을 내기를 기대한다. 스테이크를 먹을 때도, 소의 특정 부위가 나오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음식에 있어 일정함이 과연 미래의 식탁을 위한 길일까? 일정함을 위하여서 생명체는 자유를 빼앗긴다. (대부분은 인간에 의해서이다) 일정함만을 중시하다 보면서 원래의 맛에서 조금씩 멀어지게 되고, 결국은 음식의 맛도 떨어진다. 음식의 일정함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항상 일정함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육류를 먹을 때 특정 부위와 특정 모양새만을 기대하는 것이 아닌, 다양한 부위에서 오는 맛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결국에는 공동체를 살리는 길이고 제3의 식탁으로 한 발자국 다가가는 길이다.

이는 비단 음식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어찌 보면 2020년 한 해 동안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독서클럽 역시 직접 모이지 못하니 화상 모임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이 화상 모임이라는 것이 물론 편리하지만, 동시에 한계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가장 첫 번째로 느낀 것이 공동체를 유지하기가 상대적으로 힘들다는 점이다. 3의 식탁에서 공동체가 중요하듯이, 우리의 미래의 삶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공동체이다. 스페인 데에사의 농장과 베타 라 팔마를 통하여서 우리는 삶의 방식 또한 발견할 수 있다. 이 두 공간이 공통점은 개별 생물들의 자유를 존중하고, 인간이 개입하여 최상의 생태계와 공동체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책의 저자는 최고의 생태계는 인간의 개입으로 완성된다고 말한다. 이 문장이 완성되려면 우리도 우리의 삶에서 서로에 대한 관심과 연결고리를 놓지 말아야 한다. 3의 식탁을 통해 모든 생명의 공동체가 새롭게 형성되기를 바란다.

인간 실격 (1948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초판본)

1. 독서토론감상문 최종보고서

 

인생사 새옹지마

 

 

회화과 1652006 박진주

 

새옹지마塞翁之馬란 인생에 있어서 길흉화복은 항상 바뀌어 미리 헤아릴 수가 없다는 뜻이다. 인생은 알 수 없다, 즉 예측불허라는 의미이다. 어릴 때에는 이 말의 뜻을 잘 몰랐으나, 나이 먹을수록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된다. 인생사 새옹지마와 더불어 내가 자주 쓰는 말은 자기 팔자대로 산다는 뜻이다. 아무리 노력하고 아등바등해도, 혹은 게으름 피우고 빈둥빈둥 대도 그것이 곧이곧대로 좋은 결과, 나쁜 결과로 이어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나중 가면은 팔자 대로이다. 빈둥대던 친구가 부귀영화를 누릴 수도 있고, 야무지고 착실하게 살던 친구가 힘들게 인생을 보낼 수도 있다.

 

인간실격의 요조의 경우도 새옹지마의 예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요조의 아버지는 지역구 의원이며 ( 정치권력은 예나 지금이나 막강하다. ) 집에는 먹을 것, 입을 것 등 필요한 것들이 가득하고 하인, 머슴 등 도 있다. 지금으로 치면 소위 말하는 금수저인 샘이다. 우리는 보통 금수저 하면 여유로운 삶, 편안하고 화려한 삶을 생각하기 마련인데 요조의 경우 여유롭기보다는 긴장의 삶, 편안하고 화려하기보다는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요조가 그런 삶을 살게 된 이유는 분명 있지만, 자신이 가진 상황에 비해 잘 활용을 못 했다고 생각한다. 반면 요조의 날티 나는 친구, 호리키는 자신이 처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야무지고 자신이 손해 보지 않는 삶을 산 것 같다. 여유로운 (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돈 그 자체로.) 요조 옆에 붙어 자신은 손해 하나 보지 않고 요조의 돈으로 술 , 계집질 등을 하며 보내고 또 자신의 몫은 끔찍이 아끼는 호리키를 보고 참 계산적이라고 생각했다. 주어진 환경 자체는 요조가 우세했지만 결론 적으로 보면 호리키 의 삶이 우세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우세함의 기준은 상대적일 수 있지만, 내 관점에서는 손해 보지 않는 삶, 평탄하고 잡음 없는 삶이 잘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호리키와 요조 중 호리키가 더 우세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요조와 주어진 환경은 정반대였지만, 계산적이고 손해 보지 않게 야무지게 살아가는 호리키를 보며 배울 점이 있다고 하기에도 애매하고 없다고 하기에도 애매하다고 생각했다. 호리키는 손해를 보지 않아도 너무 보지 않는데, 많이 계산적이라고 생각되었다. 나도 계산적인 편에 속하고, 손해를 보기 싫어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손해 보지 않고 인생을 살아가겠는가? 때때로 나의 뜻대로 안 되는 상황이 종종 오거나, 손해를 감수하고서 실행하는 경우가 오기 마련이다. 나도 그때에는 내 손해를 기꺼이 감수하면서까지 실행한다. 반면 호리키는 정말 타인만 이용해 먹고 ( 대신 그 타인이 이용당한다는 느낌을 들지 못하게끔, 같이 있으면 재밌고 즐겁다는 느낌을 받도록 상황을 만든다 ) 어떠한 경우에도 자기 손해를 하나도 보지 않으려 한다. 비록 소설이지만 너무 간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 내 지인 ( 애초에 지인으로 두지도 않지만 ) 혹은 내 주변에 있었다면 이미 연을 끊었을 것이다.

부끄러운 얘기이지만 나에게도 호리키 같은 친구가 있었다. 물론 호리키 같은 친구를 두었다고 내가 요조의 역할 이였다는 것은 아니다. 그 친구는 주변에 사람이 많았고 또 자기 자신도 화려하게 잘 꾸미고 센스도 있고 사람 관계나 연인 관계에 있어 치고 빠지기, 밀당의 선수였으며 양다리도 서슴지 않고 남자들을 줄줄이 만나고 다녔다. 그 친구는 술과 남자가 있는 곳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하며 남자 없으면 술자리를 왜 가느냐고 생각하는 친구였다. 그 친구와 같이 다니면서 나도 굉장히 재밌고 즐거웠지만 가끔씩 재밌게 놀고 집에 들어가면 뭔가 모르게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 그 친구는 절대 자신 돈 혹은 자신의 손해를 어느 상황에도 절대 보지 않고 재미나게 놀려고 하는 친구였는데, 내 기준은 재밌고 화려하게 놀려고 한 거면 그만큼 내 손해를 감수하고 내 돈을 지불하고 노는 것이 맞다 봤기 때문이다. 처음엔 그 친구가 야무지고 똘똘한 것 같다고 생각했으나 가면 갈수록 너무 친구, 연인 에게 기생충 같아 보이고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나와 가치관이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이유로 지금은 연을 끊은 상태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잘 끊었다고 생각한다. 요조도 호리키를 피하려고 노력을 몇 번 했으나 호리키가 자꾸 찾아오고 확실하게 끊어내지 못하고 흐지부지하게 끊어낸 것 같다.

 

내가 인생사 새옹지마와 더불어 종종 하는 말이 있는데 근묵자흑이라는 말이다. 검은 먹을 가까이하면 검어진다는 뜻의 한자성어인데, 먹을 가까이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검어진다는 뜻으로, 사람도 주위 환경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내가 나쁜 환경의 무리에 속하고 어울리면 나도 천성이 나쁜 사람이 아닌데도 그렇게 물들 수 있으며, 또 내가 좋은 무리에 속하고 그들과 어울리면 나도 선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먹에 물들여지지 않기 위해서는 먹 근처에 가지도 말고, 끊어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요조는 먹을 끊어낼 기회 가 종종 있었지만 흐지부지하게 혹은 연을 끊는 것에 대한 두려움일지는 몰라도 먹이 자꾸 자신에게 스며들 기회를 자신 스스로 호리키에게 내어준 것 같다.

 

인간실격의 등장인물은 어느 하나도 평탄한 구석 없이 굴곡진 이들이 출연한다. 그들의 사연을 보면 저마다 각자 그렇게 된 이유가 있고 또 그들의 가치관 또한 저마다 다르다. 하지만 인생사 새옹지마를 떠올리며 그들의 현재의 삶 과거의 삶 만보고 평탄하다 굴곡지다 단편적이게 판단하는 태도를 지양하고 각자의 삶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본다. 인생은 단거리 경주가 아닌 장거리 경주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