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피용 (베르나르 베르베르 장편소설)
나는 간호사, 사람입니다 (단 한 번의 실수도 허락하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평소 이런 수필(에세이) 장르의
책은 잘 찾아 읽는 편이 아니었으나 최근 학술정보관에서 주최한 작가와의 만남 행사에서 장강명 작가가 소개한 “나는
간호사, 사람입니다”가 생각나서 겨울방학 독서클럽 주제 도서로 추천하게 되었다. 마침 지금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시대인 데다 이 책에는
작가가 메르스 사태 때 병원에서 겪은 일들을 말하고 있어서 시의적절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간호사들의 고충을 가감 없이 표현하고 있어 내가 몰랐던 삶에 대해 간접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번 겨울방학 독서클럽은
시류에 발맞추어 한 번쯤 생각해보면 좋을 문제에 대해서 조사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다.
인간 실격 (1948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초판본)
제3의 식탁 (미래의 요리를 위한 위대한 실험)
한동안 집에서 요리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생겨 유튜브에서 [백종원의 요리 비책] 채널을 챙겨 보았다. 영상에서 백종원 씨가 ‘돼지고기 살 때 비선호도 부위를 사세요.’라는 말을 유독 많이 하셨던 게 기억이 난다. 몇 주 전만 해도 이 말은 그저 내 지갑 사정을 고려해서 하는 말로 흘려들었지만, 지금은 이 문장 안에 담겨있는 대지 공동체의 살아있는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식탁은 우리에게 하나의 문화다. 어릴 적부터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는 게 너무 익숙했다. 저녁 시간이 되면 가족 모두가 식탁에 둘러앉아 하루 동안의 일을 서로에게 이야기하며 지친 마음을 따듯한 음식과 말들로 위로받았다. 우리에게 식탁은 가족이자 공동체를 만들어 주는 시작점이다. 하지만 우리가 나이를 들어가면서 식탁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코로나 시대를 지나면서, 우리는 갓 지은 밥과 국 대신, 스마트폰을 통해 메뉴를 고르고 배달을 통해서 음식을 전달받는 시스템에 너무 익숙해졌고, 음식을 통해 나눔이 아닌 개인의 요구를 채우는 것에 집중되고 있다. 그렇게 이러한 것이 새로운 일상이 되어 버렸다. 우리가 어렸을 적 느꼈던 식탁 공동체를 다시 되살릴 수는 없을까?
제3의 식탁은 뉴욕 최고의 요리사인 댄 바버가 현재 우리의 식품 체계가 어떠한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는지에 대하여 요리사의 관점에서 적나라하게 들려준다, 그리고 이 방식이 어떻게 음식의 맛을 해치고 있는지, 그리고 떨어진 음식의 맛이 어떻게 공동체를 서서히 와해시키는지 은연중에 알려준다. 하지만 저자는 예전의 음식의 맛, 그러니까 토양과 동물과 식물과 인간이 하나로 연결되어 이루는 생태계(공동체)를 다시 복원하고 미래식품이 어떠한 것을 지향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음식을 먹을 때 항상 일정한 모양을 원하고, 항상 일정한 맛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그 일정하다는 특성이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스며들어서 당연하게 그 기대가 충족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에게 질문할 필요가 있다. ‘1년 동안에 4계절이 바뀌고, 동물은 자라나고, 식물도 각 각의 모양이 다 다른데, 어떻게 요리가 매번 똑같은 맛을 낼 수 있지?’ 여기에서 제3의 식탁이 시작된다. 즉 제3의 식탁은 공동체적 연대와 자유가 함께하는 식탁이다. 이 책에서는 특별히 이를 잘 보여주는 2개의 공간이 나온다. 스페인 데에사에 있는 에두아르도의 농장은,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프아그라를 생산하는 곳이다. 이 농장은 거위를 가두지도, 억지로 먹이를 주지도 않는다. 그저 거위들이 좋아하는 먹이인 도토리나무를 심고 스스로 먹도록 한다. 하늘에서 매가 거위 알을 노리며 날아다녀도 억지로 매를 쫓아내지 않는다. 울타리도 없어서, 거위가 날아가고 싶으면 날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오히려 야생거위들이 이곳에 정착해서 살기도 한다. 이것이 거위들이 가진 자유이다. 이 거위에서 나온 프아그라 (거위 간)은, 프아그라 기름지고 부드럽지는 않아도 충분히 부드러운 맛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거위가 사계절 동안 먹은 먹이와 운동량에 따라 맛이 조금씩 달라져 오히려 더 풍부한 맛을 자랑한다. 두 번째로 소개된 곳은 지금은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스페인 남부에 있는 ‘베타 라 팔마’라는 양식장이다. 이곳은 단순히 친환경적인 양식장이라 하기에는 그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 양식장은 물고기를 좁은 공간에서 인위적으로 살찌우는, 어찌 보면 그들의 자유를 빼앗는 공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양식장이 그러하다. 하지만 강 하류의 습지에 위치한 이 양식장은 그렇지 않다. 깨끗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하여 플랑크톤을 이용해 물을 정화한다. 그래서 이곳에서 양식(양식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럽게 기르는)하는 물고기 중 숭어는 진흙을 먹기 때문에 형편없다고 여겨지기도 하는데, 숭어는 대서양에서 헤엄쳐서 스페인의 베타 라 팔마로 다시 돌아온다. 또한 습지대를 살펴보면, 거대한 홍학 무리를 볼 수 있는데, 새들이 이동하면서 이곳에 물고기가 풍부하고 깨끗하기 때문에 여러 조류가 모여서 지내는 모습 또한 볼 수 있다.
스페인 데에사의 에두아르도의 농장과 베타 라 팔마가 가지는 공통점은 바로 공동체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자유를 준다는 점이다. 에두아르도의 농장은, 거위만 기르는 것이 아닌 스페인의 최고급 한몬인 하몬 이베르코 돼지와 양, 소를 같이 기른다. 그리고 도토리나무와 오크 나무를 기른다. 이 모든 동·식물이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 마치 커다란 톱니바퀴처럼 모든 게 알맞게 돌아간다. 베타 라 팔마도 마찬가지다. 플랑크톤에서 시작해서 숭어와 농어, 그리고 그곳에 모여든 새들까지 하나의 완벽한 공동체를 이룬다. 그리고 공동체를 구성하는 각 각의 생명체는 자유롭게 공동체를 구성한다.
빵을 먹을 때, 우리는 빵이 항상 똑같은 맛을 내기를 기대한다. 스테이크를 먹을 때도, 소의 특정 부위가 나오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음식에 있어 일정함이 과연 미래의 식탁을 위한 길일까? 일정함을 위하여서 생명체는 자유를 빼앗긴다. (대부분은 인간에 의해서이다) 일정함만을 중시하다 보면서 원래의 맛에서 조금씩 멀어지게 되고, 결국은 음식의 맛도 떨어진다. 음식의 일정함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항상 일정함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육류를 먹을 때 특정 부위와 특정 모양새만을 기대하는 것이 아닌, 다양한 부위에서 오는 맛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결국에는 공동체를 살리는 길이고 제3의 식탁으로 한 발자국 다가가는 길이다.
이는 비단 음식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어찌 보면 2020년 한 해 동안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독서클럽 역시 직접 모이지 못하니 화상 모임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이 화상 모임이라는 것이 물론 편리하지만, 동시에 한계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가장 첫 번째로 느낀 것이 공동체를 유지하기가 상대적으로 힘들다는 점이다. 제3의 식탁에서 공동체가 중요하듯이, 우리의 미래의 삶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공동체이다. 스페인 데에사의 농장과 베타 라 팔마를 통하여서 우리는 삶의 방식 또한 발견할 수 있다. 이 두 공간이 공통점은 개별 생물들의 자유를 존중하고, 인간이 개입하여 최상의 생태계와 공동체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책의 저자는 최고의 생태계는 인간의 개입으로 완성된다고 말한다. 이 문장이 완성되려면 우리도 우리의 삶에서 서로에 대한 관심과 연결고리를 놓지 말아야 한다. 제3의 식탁을 통해 모든 생명의 공동체가 새롭게 형성되기를 바란다.
인간 실격 (1948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초판본)
1. 독서토론감상문 최종보고서
인생사 새옹지마
회화과 1652006 박진주
새옹지마塞翁之馬란 인생에 있어서 길흉화복은 항상 바뀌어 미리 헤아릴 수가 없다는 뜻이다. 인생은 알 수 없다, 즉 예측불허라는 의미이다. 어릴 때에는 이 말의 뜻을 잘 몰랐으나, 나이 먹을수록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된다. 인생사 새옹지마와 더불어 내가 자주 쓰는 말은 자기 팔자대로 산다는 뜻이다. 아무리 노력하고 아등바등해도, 혹은 게으름 피우고 빈둥빈둥 대도 그것이 곧이곧대로 좋은 결과, 나쁜 결과로 이어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나중 가면은 팔자 대로이다. 빈둥대던 친구가 부귀영화를 누릴 수도 있고, 야무지고 착실하게 살던 친구가 힘들게 인생을 보낼 수도 있다.
인간실격의 요조의 경우도 새옹지마의 예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요조의 아버지는 지역구 의원이며 ( 정치권력은 예나 지금이나 막강하다. ) 집에는 먹을 것, 입을 것 등 필요한 것들이 가득하고 하인, 머슴 등 도 있다. 지금으로 치면 소위 말하는 ‘금수저’인 샘이다. 우리는 보통 금수저 하면 여유로운 삶, 편안하고 화려한 삶을 생각하기 마련인데 요조의 경우 여유롭기보다는 긴장의 삶, 편안하고 화려하기보다는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요조가 그런 삶을 살게 된 이유는 분명 있지만, 자신이 가진 상황에 비해 잘 활용을 못 했다고 생각한다. 반면 요조의 날티 나는 친구, 호리키는 자신이 처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야무지고 자신이 손해 보지 않는 삶을 산 것 같다. 여유로운 (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돈 그 자체로.) 요조 옆에 붙어 자신은 손해 하나 보지 않고 요조의 돈으로 술 , 계집질 등을 하며 보내고 또 자신의 몫은 끔찍이 아끼는 호리키를 보고 참 계산적이라고 생각했다. 주어진 환경 자체는 요조가 우세했지만 결론 적으로 보면 호리키 의 삶이 우세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우세함의 기준은 상대적일 수 있지만, 내 관점에서는 손해 보지 않는 삶, 평탄하고 잡음 없는 삶이 잘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호리키와 요조 중 호리키가 더 우세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요조와 주어진 환경은 정반대였지만, 계산적이고 손해 보지 않게 야무지게 살아가는 호리키를 보며 배울 점이 있다고 하기에도 애매하고 없다고 하기에도 애매하다고 생각했다. 호리키는 손해를 보지 않아도 너무 보지 않는데, 많이 계산적이라고 생각되었다. 나도 계산적인 편에 속하고, 손해를 보기 싫어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손해 보지 않고 인생을 살아가겠는가? 때때로 나의 뜻대로 안 되는 상황이 종종 오거나, 손해를 감수하고서 실행하는 경우가 오기 마련이다. 나도 그때에는 내 손해를 기꺼이 감수하면서까지 실행한다. 반면 호리키는 정말 타인만 이용해 먹고 ( 대신 그 타인이 이용당한다는 느낌을 들지 못하게끔, 같이 있으면 재밌고 즐겁다는 느낌을 받도록 상황을 만든다 ) 어떠한 경우에도 자기 손해를 하나도 보지 않으려 한다. 비록 소설이지만 너무 간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 내 지인 ( 애초에 지인으로 두지도 않지만 ) 혹은 내 주변에 있었다면 이미 연을 끊었을 것이다.
부끄러운 얘기이지만 나에게도 호리키 같은 친구가 있었다. 물론 호리키 같은 친구를 두었다고 내가 요조의 역할 이였다는 것은 아니다. 그 친구는 주변에 사람이 많았고 또 자기 자신도 화려하게 잘 꾸미고 센스도 있고 사람 관계나 연인 관계에 있어 치고 빠지기, 밀당의 선수였으며 양다리도 서슴지 않고 남자들을 줄줄이 만나고 다녔다. 그 친구는 술과 남자가 있는 곳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하며 남자 없으면 술자리를 왜 가느냐고 생각하는 친구였다. 그 친구와 같이 다니면서 나도 굉장히 재밌고 즐거웠지만 가끔씩 재밌게 놀고 집에 들어가면 뭔가 모르게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 그 친구는 절대 자신 돈 혹은 자신의 손해를 어느 상황에도 절대 보지 않고 재미나게 놀려고 하는 친구였는데, 내 기준은 재밌고 화려하게 놀려고 한 거면 그만큼 내 손해를 감수하고 내 돈을 지불하고 노는 것이 맞다 봤기 때문이다. 처음엔 그 친구가 야무지고 똘똘한 것 같다고 생각했으나 가면 갈수록 너무 친구, 연인 에게 기생충 같아 보이고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나와 가치관이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이유로 지금은 연을 끊은 상태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잘 끊었다고 생각한다. 요조도 호리키를 피하려고 노력을 몇 번 했으나 호리키가 자꾸 찾아오고 확실하게 끊어내지 못하고 흐지부지하게 끊어낸 것 같다.
내가 인생사 새옹지마와 더불어 종종 하는 말이 있는데 근묵자흑이라는 말이다. 검은 먹을 가까이하면 검어진다는 뜻의 한자성어인데, 먹을 가까이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검어진다는 뜻으로, 사람도 주위 환경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내가 나쁜 환경의 무리에 속하고 어울리면 나도 천성이 나쁜 사람이 아닌데도 그렇게 물들 수 있으며, 또 내가 좋은 무리에 속하고 그들과 어울리면 나도 선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먹에 물들여지지 않기 위해서는 먹 근처에 가지도 말고, 끊어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요조는 먹을 끊어낼 기회 가 종종 있었지만 흐지부지하게 혹은 연을 끊는 것에 대한 두려움일지는 몰라도 먹이 자꾸 자신에게 스며들 기회를 자신 스스로 호리키에게 내어준 것 같다.
인간실격의 등장인물은 어느 하나도 평탄한 구석 없이 굴곡진 이들이 출연한다. 그들의 사연을 보면 저마다 각자 그렇게 된 이유가 있고 또 그들의 가치관 또한 저마다 다르다. 하지만 인생사 새옹지마를 떠올리며 그들의 현재의 삶 과거의 삶 만보고 평탄하다 굴곡지다 단편적이게 판단하는 태도를 지양하고 각자의 삶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본다. 인생은 단거리 경주가 아닌 장거리 경주이니 말이다.
나는 간호사, 사람입니다 (단 한 번의 실수도 허락하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셰익스피어 4대비극 5대희극 (한권으로 읽는)
일인칭 단수 (一人稱單數)
일인칭단수는
주인공의 개인적인 기록이 담긴 작은 사건의 여덟 갈래 이야기이다. 여덟 갈래에서 공통적으로 음악은 필수로
나왔던 것 같다. 따라서 몰랐던 음악도 알아가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여덟 갈래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고 인상 깊었던 회차는 ‘시나가야 원숭이의 고백’ 이었다. 시나가야 원숭이의 고백에서는 여관에서 주인공과 원숭이와
병맥주를 마시며 이것저것 대화를 하고 팁도 주고는 한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에 보니 여관안에는 병맥주는
없고 자동판매기 캔맥주밖에 없고 원숭이도 없었다. 이러한 장면도 상상속의 상상이라고 생각했고 오히려
현실성이 너무 없어서 흔한 상상력에서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대화를 하면서 원숭이가 여자인간의
이름을 훔치는 법을 알려주었는데 나중에 한 호텔에서 업무 미팅을 하다가 만난 여성 편집자가 본인의 이름을 까먹었다고 말하였을 때 주인공은 원숭이와
대화한 내용이 떠올랐다. 신분증으로 이름을 훔쳐 본인의 이름을 잊어버리게 하는 장면도 어떻게 보면 불편한
장면이다. 하지만 이름을 훔쳐 본인의 이름이 사라진다는 것은 경우에 따라 마냥 불편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결혼을 하여 아이를 가지게 되면 엄마,아빠 모두 본인의 이름으로 불리지 않고 누구누구 엄마, 아빠라고 불린다. 이 또한 본인의 무언가를 포기하였기에 소중한 무언가를 얻었다고 생각하였다. 시나가와 원숭이는 오히려 가장 현실성이 없어 흔한 상상력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여덟 갈래 중에서 창의력이 가장 돋보였고 가장 독특한 소설이었다. 공통적으로 여덟갈래 모두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일인칭단수를 읽으면서 하나 하나 깊이 생각해보고 해석하는 재미가 있다. 특히 작가가 일본작가여서 일본 특유의 분위기도 느낄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