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조를 기다리며
입속 지느러미(큰글자도서) (조예은 장편소설)
선량한 차별주의자
화살이 되어버린 차가운 말 ‘엄마’
차별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하물며 나로부터 시작되기도 한다. 소수, 성별, 인종, 종교, 교육, 성적지향, 출신, 장애 외에 어떤 범주에 속하는지도 모를 차별이 존재하고 모든 범주에 속할 수도 있는 역차별도 있다.
‘차별’이라는 차가운 말을 들으면 난 9살 때가 고정값처럼 떠오른다. 친구가 많고 명랑한 아이였지만, 그 내면에는 식당을 하시느라 늘 바쁜 부모님에게 서운했던 아이, 숙제를 안 해가도 죄책감이 없는 아이, 운동을 좋아해서 늘 땀범벅인 여자아이, 선생님이 부모님을 호출해도 전달하지 않던 아이가 있었다. 그 당시 그런 아이는 선생님의 우선순위에 들지 못했을 테고, 그래서 소외감마저 들었던 몇몇 에피소드가 아직도 어제의 일처럼 그려진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친구들과 놀이를 하면서 피할 수 없었던 ‘편 먹기’. 마지막까지 편에 속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엄마의 손길이 구석구석 닿은 소위 깔끔하고 공부 잘하는 아이와의 ‘편 먹기’ 경쟁에서는 역시 우선순위가 아니었으며 그때의 기분은 뻘쭘한 무기력함 같은 것이었다. 분명 가해자가 딱 정해져 있는 차별은 아니었다. 그런데 차별을 당한 것과 같은 소외감 무기력함이 남았다. 각각의 상황과 형태만 다를 뿐 지금까지도 삶을 구성하는 관계 속에서 비일비재한 일이다.
그런 일련의 성장 과정을 통해서 다수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 무탈한 것이고 그것이 고로 보편적 행복이라고 체득했다. 이것이 나에게는 보통의 삶을 위한 깨달음이자, 모든 면에서 그럭저럭 잘 해내야겠다는 동기부여가 되었다.
그래서 학업, 대학, 취업, 결혼, 출산 등 생애주기에 겪는 굵직한 관문들을 나름 보편적 스케쥴에 맞춰 잘 통과했다. 사회적 시선과 부모님의 기대 그리고 셀프 평가 기준 ‘최고’였다고 할 순 없겠으나 꽤 ‘최선’이었다.
그 다수에 속하는 행복을 꾸려나가는 일련의 과정 동안에도 차별인지 역차별인지를 따져본 때가 있었고, 반대로 나 역시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를 향해 보편적이지 않다는 차별적 시선을 전하기도 했다.
시간이 꽤 흘러 이제 나는 초등학생 아이 둘을 키우는 엄마다. 엄마라는 사람이 생각만 해도 눈이 질끈 감기는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것도 어린아이에게 말이다. ‘절대 하면 안 될 말’을 하나 절감한 사건이다.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날이 좋았던 여름 주말 낮, 아이들을 데리고 아파트 놀이터에 나갔는데 뛰노는 아이들 틈에 유독 눈에 들어오는 작은 체구의 남자아이가 있었다. 가만 보니, 아이들이 주로 학원에 가는 평일 낮에도 매일 놀이터에 있던 바로 그 아이였다. 놀이터에 누가 등장하든지 바로 친구로 만들어 신나게 뛰어노는 아이였다.
그날은 우리 아이들도 그 아이와 함께 놀이를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큰아이가 나에게 다가와 얘기했다. “ 엄마, 쟤가 우리 초등학교 다닌대. 그리고 날씨가 너무 더우니까 그만 우리 집으로 가서 씻고 밥 좀 먹재. 괜찮아?” 너무 당황스러웠다. 큰아이의 “괜찮아?” 가 거절당할 것을 예상하고 묻는 듯 들렸다. 큰아이도 그 아이의 제안에 스스로 답하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멀리서 나의 입을 지켜보는 듯한 그 아이. 그 모습에 순간 소름 끼치듯 놀라운 장면이 내 뇌리를 스쳤다.
고 며칠 전 초저녁쯤 비가 많이 내리는데, 작고 마른 남자아이가 핸드폰만 꼭 쥐고 비에 흠뻑 젖은 채 버스정류장에 서 있었다.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우선을 함께 쓰며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거절하지는 않았지만 특별한 대답도 하진 않았다. 말없이 함께 골목길을 걸어가는 내내 그 아이는 주택가 벽을 쓸고 지나가듯 구석에 붙어 걸었고 난 우산을 씌우느라 몸이 좀 불편했다. 감기 걸리겠다며 ‘엄마’한테 전화를 걸자고 여러 번 권했고 아이는 끝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아이가 입을 떼기도 전에 성인 남자의 심한 폭언이 들렸다. 함께 들었음이 너무 미안했을 정도였다. 어쨌든 집 근처까지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에 아이의 모습이 몇 번 올랐다. 3학년이라고 하기엔 너무 작고 마른 모습 그리고 노랗게 염색된 머리.
내 입을 통한 대답을 바라보고 있던 그 아이는 내가 바래다준 그 아이였다. ‘너희 집에서 씻고 밥 먹자’라는 그 아이의 제안에 바로 긍정할 수 없었다. 자동으로 핑계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빠 피곤해서 지금 쉬고 계시잖아 지금 들어가면 아빠 잠 깨겠어.” “아이스크림 좀 사 올게, 여기서 먹자.” 핑계들이 줄줄 나왔다. 부끄럽지만, 내 뇌리를 스쳤던 그 날 일이 내 핑계들 밑바탕에 깔린 것이다. 난 어떤 차별의 말 한마디도 내뱉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차별하고 있었다. 상처가 있는 그 아이를 향해.
내 대답을 듣던 아이가 아주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억울한 울음소리에 어른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쟤네 집에 가서 씻고 밥 먹고 놀고 싶은데 왜 나는 안돼!! 왜 나는 안되냐고!! 쟤네 집에 가서 놀고 싶다고!!” 억울한 하소연을 여러 번 토해내기에 애써 다가가서 말했다.
“친구야, 아줌마는 친구 엄마랑 미리 약속을 안 해서 집에 너를 데리고 가는 건 조심스러워. 그러니 다음에 엄마랑 아줌마가 약속 먼저 하면 그때 같이 아줌마 집에 가서 놀자.” 나는 엄마들 사이의 암묵적 기본절차로 잘 포장한 거절을 다시 한번 한 것이다. 아이는 대답 없이 더 크게 울었고, 우리 아이들도 그게 싫었던지 자리를 피했다.
똑같은 설득을 여러 번 하자 아이가 이번에는 더 큰 소리로 항변을 토해냈다.
“나 엄마 없으니까!! 아빠만 있는데 나더러 어쩌라고!” 모든 게 정지되는 순간이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질렸다. 그렇게 크게 토해낸 아이는 등을 돌려 놀이터 밖으로 뛰쳐나갔다. 내가 아이에게 차근히 설명했던 그 핑계들이 몹시 후회됐다. 아이의 곪은 상처를 내가 더 아프게 들쑤시고 말았다. 사과하고 싶었다. 그러나 또다시 상처 입은 아이를 볼 면목이 없었다.
아이들의 보호자 대명사를 늘 ‘엄마’라고 생각했다. 많이 부족했다. 사실 아이들의 또래 집단 소통에서 보호자, 대변인은 늘 엄마다. 하지만 아이들과의 의도랑은 전혀 무관하게 그 1순위 보호자는 엄마가 아닐 수 있다. 그다음 순으로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가 떠오르는데 이것도 아닐 수 있다. 앞으로는 엄마 아빠 대신 ‘보호자’라는 아직은 좀 입에 쉽게 붙지 않는 단어를 써야 할까? 나는 선량한 설득자인 듯 다가가 그 작은 아이의 곪디 곪은 상처를 여러 번 들췄다.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의식 없는 차별을 해버렸다. 그리고 내가 그 아이 정도로 어렸을 때 느꼈던 쓸쓸한 무기력함을 고스란히 그 아이에게로 전달했다. ‘절대 하면 안 될 말’을 하나 더 배우는데 나는 한 작은 아이를 너무 아프게 했다.
그렇게 무거운 정적을 남기고 놀이터에 있던 어른들은 모두 흩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