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성 마이 스토리 (PARK JI-SUNG MY STORY)

내가 어렸을적 가장 좋아했던 사람은 바로 축구선수 박지성이었다. 유럽 축구로 가는길이 쉽지 않은 시대적 상황이었음에도 박지성은 유럽에서 이름을 날렸고, 나는 그라운드에서 열정과 투지 넘치는 박지성의 경기를 챙겨보기 위해 새벽같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겉으로는 성공한 축구선수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보였겠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 그의 인생도 쉽지만은 않았다. 어렸을적 평발로 축구선수의 길을 고민하기도 하였고, 한국 축구팀에 지명되지 않아 축구선수를 그만둘뻔도 하였다. 선수생활중에도 인종차별, 무릎 부상 등으로 고난을 겪기도 하였다. 이런 힘든 상황 속에서도 박지성은 국민들의 응원을 한몸에 받는 축구선수가 되었고,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추억 속에 남아있는 선수이다. 박지성은 평발을 극복하기 위해 남들보다 열심히 뛰었고, 인종차별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실력으로 증명하겠다며 누구보다 경기에 매진했다. 나는 이런 그의 태도에 큰 감명을 받았다. 지금 나도 학교를 다니며 쉽지 않은 상황에 마주하곤 하는데,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할지 이 책을 읽고 힌트를 얻은 것 같았다. 열심히 하다보면 언젠가 빛을 보게 해준다는 교훈을 얻게 해준것 같았고, 지금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동기부여를 해준것 같다. 나는 무언가를 위해 그렇게 열심히 노력한적이 있었나, 하는 성찰의 시간도 가졌다. 겉으로는 성공한 축구선수였지만 그 속엔 무수한 땀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박지성의 살아온 길에 큰 감명을 받았다. 미래에 내가 살아가는 길에 어떤식으로 살아가야할지 정답을 알려줄 수 있는 교훈이 있는 책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한번씩 읽어봤으면 좋겠다.

13계단(밀리언셀러 클럽 29) (제47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

 목숨의 가치는 누가 판단할 수 있는가? 과연 죽()일 놈이란 무엇인가?

사람을 죽인 죄로 긴 시간을 한 칸 방에 갇혀 사형을 기다리는 삶. 이를 두고 사형제도는 과연 옳은 것인가 의견이 분분하다. 

 사람을 죽인 전적이 있는 난고와 준이치. 전자는 교도소로서 후자는 범죄자로서난고는 두 명의 범죄자를 사형 집행한 후 매일 밤 괴로워하며 쉽게 잠에 들지 못한다. 그런 그에게 억울한 사형수를 구해내자는 의뢰는 그가 가진 업보를 이겨내기 위한 노력이 됐다.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환생한 남자는 그 후로 한참 동안 독방 한가운데에 엎드려 엉엉 울었다. 이윽고 지도 교육 담당인 수석 교정 처우관이 곁에 웅크려 앉더니, 사카키바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 결정 뒤에는 대단한 희생이 치러졌다. 그 사실을 영원히 잊지 말도록.”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희생은 정말 희생이라 말할 수 있는 걸까? 사람을 구하기 위해 행한 일은 결국 또 다른 살인을 낳았고 난고는 스스로 종신형을 내렸다. 난고 쇼지의 쌍둥이 형 쇼이치는 동생에게 갚은 빚이 결국엔 동생이 살인자가 됐음을 알고 어떻게 반응했을까. 사람을 살렸지만, 사람을 죽였다. 이 이야기의 결말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일까.

 죄수와 간수가 협력하여 억울한 사형수를 구해내자는 어찌 보면 정의로워 보이는 표면과는 달리 결말은 매우 찝찝하다. 이 책은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어떤 근거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제도라는 허울좋은 명목으로 허용되고 있는 것에 참여하게 되는 사람들의 죄의식은 무엇으로 보상되어야 할지 성찰하게 한다. 그러나 결말이 선사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통찰하지 못했다.

 한동안은 시계를 차지 못하는 사람을 유의 깊게 볼 거 같다.

홍학의 자리 (정해연 장편소설)

정말 너무 재밌다. 글이라서 할 수 있는 이야기고 반전이다.
글만이 줄 수 잇는 최대의 재미, 흥미를 모두 보여준다. 
홍학의 자리의 이야기는 영화로도 드라마로도 할 수 없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가 재밌을 수 있는 이유는 이것이 글로 쓰여진 책이라서 이다.
그냥 이 이야기의 줄거리, 후기를 절대 읽지 말고 무조건 그냥 읽어 보기를 추천한다.
우리는 다현이를 죽인 사람을 누군지 궁금해하면서 정작 다현이 누구인지는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70만 부 기념 리커버)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라는 제목이 처음에는 무슨 뜻 인지 감이 안왔다.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이유는 그녀가 아름답고 돈이 많고 얼굴이 이쁘고 등등이 아니다.
그녀는 그냥 그녀이기 때문이고, 그녀는 세상에 한명뿐이니까.
나는 왜 나는 널 사랑할까 라는 흥미로운 주제를 더욱 더 흥미로운 방식으로 풀어냈다

만조를 기다리며

나는 평소 조예은 작가님의 책을 좋아한다.
조예은 작가님은 여름을 가장 서늘하고 오싹하고 아름답게 표현하는 방법을 가장 잘 알고 계신다.
나는 산보다 바다를 좋아한다.
이 책에서 주인공에게 산이란 어떤 존재일까 떠올리게 되었다.
산을  가진다 산을 섬긴다 산에게 소원을 빈다

입속 지느러미(큰글자도서) (조예은 장편소설)

나는 이 책을 비가 많이오던 올해 장마기간에 읽기 시작 했다. 평소 조예은 작가님의 소설을 너무 좋아하여서 신작이 나왔을 떄 바로 구매 했다. 
이 소설엔 목소리를 잃은 인어가 나온다.
우리는 이미 이 얘기를 잘 알고 있다. 그치만 뻔한 클리셰라도 조예은 작가님만의 서늘하고 음산한 독특한 색이 담기면 완전히 다르게 느껴진다.
내가 이 소설을 장마기간에 읽은 것은 정말 행운이다. 그리고 서울에 살고 서울을 배경으로 글을 쓰시는 조예은 작가님의 읽을 수 있다니 이것 또한 행운같이 느껴진다.
내가 평소에 아는 장소들에 인어라니…
생동감과 실제로 내가 인어의 허밍을 듣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매년 장마마다 이 소설을 떠올릴 거 같다.
을지로의 장마, 을지로의 인어, 을지로 지하에서 울려퍼지는 인어의 허밍.
 

선량한 차별주의자

화살이 되어버린 차가운 말 엄마

 

차별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하물며 나로부터 시작되기도 한다. 소수, 성별, 인종, 종교, 교육, 성적지향, 출신, 장애 외에 어떤 범주에 속하는지도 모를 차별이 존재하고 모든 범주에 속할 수도 있는 역차별도 있다.

 

차별이라는 차가운 말을 들으면 난 9살 때가 고정값처럼 떠오른다. 친구가 많고 명랑한 아이였지만, 그 내면에는 식당을 하시느라 늘 바쁜 부모님에게 서운했던 아이, 숙제를 안 해가도 죄책감이 없는 아이, 운동을 좋아해서 늘 땀범벅인 여자아이, 선생님이 부모님을 호출해도 전달하지 않던 아이가 있었다. 그 당시 그런 아이는 선생님의 우선순위에 들지 못했을 테고, 그래서 소외감마저 들었던 몇몇 에피소드가 아직도 어제의 일처럼 그려진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친구들과 놀이를 하면서 피할 수 없었던 편 먹기’. 마지막까지 편에 속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엄마의 손길이 구석구석 닿은 소위 깔끔하고 공부 잘하는 아이와의 편 먹기경쟁에서는 역시 우선순위가 아니었으며 그때의 기분은 뻘쭘한 무기력함 같은 것이었다. 분명 가해자가 딱 정해져 있는 차별은 아니었다. 그런데 차별을 당한 것과 같은 소외감 무기력함이 남았다. 각각의 상황과 형태만 다를 뿐 지금까지도 삶을 구성하는 관계 속에서 비일비재한 일이다.

그런 일련의 성장 과정을 통해서 다수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 무탈한 것이고 그것이 고로 보편적 행복이라고 체득했다. 이것이 나에게는 보통의 삶을 위한 깨달음이자, 모든 면에서 그럭저럭 잘 해내야겠다는 동기부여가 되었다.

그래서 학업, 대학, 취업, 결혼, 출산 등 생애주기에 겪는 굵직한 관문들을 나름 보편적 스케쥴에 맞춰 잘 통과했다. 사회적 시선과 부모님의 기대 그리고 셀프 평가 기준 최고였다고 할 순 없겠으나 꽤 최선이었다.

그 다수에 속하는 행복을 꾸려나가는 일련의 과정 동안에도 차별인지 역차별인지를 따져본 때가 있었고, 반대로 나 역시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를 향해 보편적이지 않다는 차별적 시선을 전하기도 했다.

 

시간이 꽤 흘러 이제 나는 초등학생 아이 둘을 키우는 엄마다. 엄마라는 사람이 생각만 해도 눈이 질끈 감기는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것도 어린아이에게 말이다. ‘절대 하면 안 될 말을 하나 절감한 사건이다.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날이 좋았던 여름 주말 낮, 아이들을 데리고 아파트 놀이터에 나갔는데 뛰노는 아이들 틈에 유독 눈에 들어오는 작은 체구의 남자아이가 있었다. 가만 보니, 아이들이 주로 학원에 가는 평일 낮에도 매일 놀이터에 있던 바로 그 아이였다. 놀이터에 누가 등장하든지 바로 친구로 만들어 신나게 뛰어노는 아이였다.

그날은 우리 아이들도 그 아이와 함께 놀이를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큰아이가 나에게 다가와 얘기했다. “ 엄마, 쟤가 우리 초등학교 다닌대. 그리고 날씨가 너무 더우니까 그만 우리 집으로 가서 씻고 밥 좀 먹재. 괜찮아?” 너무 당황스러웠다. 큰아이의 괜찮아?” 가 거절당할 것을 예상하고 묻는 듯 들렸다. 큰아이도 그 아이의 제안에 스스로 답하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멀리서 나의 입을 지켜보는 듯한 그 아이. 그 모습에 순간 소름 끼치듯 놀라운 장면이 내 뇌리를 스쳤다.


 고 며칠 전 초저녁쯤 비가 많이 내리는데, 작고 마른 남자아이가 핸드폰만 꼭 쥐고 비에 흠뻑 젖은 채 버스정류장에 서 있었다.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우선을 함께 쓰며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거절하지는 않았지만 특별한 대답도 하진 않았다. 말없이 함께 골목길을 걸어가는 내내 그 아이는 주택가 벽을 쓸고 지나가듯 구석에 붙어 걸었고 난 우산을 씌우느라 몸이 좀 불편했다. 감기 걸리겠다며 엄마한테 전화를 걸자고 여러 번 권했고 아이는 끝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아이가 입을 떼기도 전에 성인 남자의 심한 폭언이 들렸다. 함께 들었음이 너무 미안했을 정도였다. 어쨌든 집 근처까지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에 아이의 모습이 몇 번 올랐다. 3학년이라고 하기엔 너무 작고 마른 모습 그리고 노랗게 염색된 머리.

 

 내 입을 통한 대답을 바라보고 있던 그 아이는 내가 바래다준 그 아이였다. ‘너희 집에서 씻고 밥 먹자라는 그 아이의 제안에 바로 긍정할 수 없었다. 자동으로 핑계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빠 피곤해서 지금 쉬고 계시잖아 지금 들어가면 아빠 잠 깨겠어.” “아이스크림 좀 사 올게, 여기서 먹자.” 핑계들이 줄줄 나왔다. 부끄럽지만, 내 뇌리를 스쳤던 그 날 일이 내 핑계들 밑바탕에 깔린 것이다. 난 어떤 차별의 말 한마디도 내뱉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차별하고 있었다. 상처가 있는 그 아이를 향해.

내 대답을 듣던 아이가 아주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억울한 울음소리에 어른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쟤네 집에 가서 씻고 밥 먹고 놀고 싶은데 왜 나는 안돼!! 왜 나는 안되냐고!! 쟤네 집에 가서 놀고 싶다고!!” 억울한 하소연을 여러 번 토해내기에 애써 다가가서 말했다.

친구야, 아줌마는 친구 엄마랑 미리 약속을 안 해서 집에 너를 데리고 가는 건 조심스러워. 그러니 다음에 엄마랑 아줌마가 약속 먼저 하면 그때 같이 아줌마 집에 가서 놀자.” 나는 엄마들 사이의 암묵적 기본절차로 잘 포장한 거절을 다시 한번 한 것이다. 아이는 대답 없이 더 크게 울었고, 우리 아이들도 그게 싫었던지 자리를 피했다.

똑같은 설득을 여러 번 하자 아이가 이번에는 더 큰 소리로 항변을 토해냈다.

나 엄마 없으니까!! 아빠만 있는데 나더러 어쩌라고!” 모든 게 정지되는 순간이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질렸다. 그렇게 크게 토해낸 아이는 등을 돌려 놀이터 밖으로 뛰쳐나갔다. 내가 아이에게 차근히 설명했던 그 핑계들이 몹시 후회됐다. 아이의 곪은 상처를 내가 더 아프게 들쑤시고 말았다. 사과하고 싶었다. 그러나 또다시 상처 입은 아이를 볼 면목이 없었다.

 

아이들의 보호자 대명사를 늘 엄마라고 생각했다. 많이 부족했다. 사실 아이들의 또래 집단 소통에서 보호자, 대변인은 늘 엄마다. 하지만 아이들과의 의도랑은 전혀 무관하게 그 1순위 보호자는 엄마가 아닐 수 있다. 그다음 순으로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가 떠오르는데 이것도 아닐 수 있다. 앞으로는 엄마 아빠 대신 보호자라는 아직은 좀 입에 쉽게 붙지 않는 단어를 써야 할까? 나는 선량한 설득자인 듯 다가가 그 작은 아이의 곪디 곪은 상처를 여러 번 들췄다.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의식 없는 차별을 해버렸다. 그리고 내가 그 아이 정도로 어렸을 때 느꼈던 쓸쓸한 무기력함을 고스란히 그 아이에게로 전달했다. ‘절대 하면 안 될 말을 하나 더 배우는데 나는 한 작은 아이를 너무 아프게 했다.

그렇게 무거운 정적을 남기고 놀이터에 있던 어른들은 모두 흩어졌다.

1984

이 책이 1949년에 나왔다는게 소름끼칠 정도로 치밀하고 현실세계와 맞닿아있다. 사회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현재의 우리사회와도 별반 다르지 않은 이야기일수도 있다. 하루종일 우리를 지켜보는 CCTV와 과거를 덮어버리는 모습들, 결국 신념을 잃고 세뇌당하는 사람들을 보니 한 정치체제가 얼마나 국가에 크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준다.

1984

정치적 프로파간다, 선동에 관한 글이다. 조지오웰은 동물농장 저자로 아주 유명한 사람이다. 책은 역시 사회의 어두운 면에 대해서 열심히 풍자하고 있다. 가상의 세계관을 만들어 집필한 소설이지만 내용은 매우 충격적이고 놀랍다. 예언가처럼 먼 미래를 관통한 것 같다. 주인공 인스턴은 과거의 기사를 편집하고 지우는 일을 한다. 예를 들면, <3년전 경제성장률이 10퍼센트나 올랐다.> 라는 기사가 있으면 위에서 지시가 내려오는 대로 이 기사의 숫자를 수정하거나 삭제해서 과거의 자료들을 변조하는 것이다. 기사를 읽는 사람들은 잘못된 정보를 알 수 밖에없고 진실은 시간이 지나면서 잊혀지게 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는 말이 생각났다. 재밌게도, 주인공 윈스턴도 이 생각을 했는지 그는 이런 사실을 깨닫고 정부에 저항하기 시작한다. 정부인 ‘빅 브라더’에게 대항하면서 날조된 뉴스와 역사를 찾고 자신을 찾기 위해서 노력하는 내용이다. 극단적 전체주의의 사회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다. 나는 이 책이 너무 무서웠다. 정보화 시대에 놓인 지금도 어쩌면 내가 접하는 정보는 날조된 것 일수도 있는데 나는 그걸 평생 모르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책의 의미를 포함한 조지오웰이 우리에게 던지는 경고에 대해서 마음깊게 생각하게 되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죽음조차 희망으로 승화시킨 인간 존엄성의 승리)

저자 빅터 프랭클이 겪은, 나치수용소에서 강제수용을 했던 일을 집필해낸 책이다. 죽음 조차 희망으로 변화시키는 인간의 존엄함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책이다. 
전쟁의 끔찍함과 인간이 어디까지 추악해 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나치시절,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사람들을 학대하고, 모멸감을 주며 그저 재미를 위해서 손가락 짓 하나로도 생명을 좌우하는 모습들이 들어가 있다.
너무 세세한 묘사에 이 책을 넘기기가 쉽지 않았다. 읽다가 덮고 다시 읽기를 반복했고 책을 다 읽었을 때는 이 책을 이제라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주인공 빅터는 최악의 상황에서 신체적 자유를 뺏길지라도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는 인간의 목표(자아정체성)는 빼앗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빅터는 살아남고자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는 행동이 아닌, 자신의 의지를 선택하는 용기를 보였다. 설혹 그게 그의 죽음을 선사한다 하여도 말이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고 말하는 그의 말이 내가 꼽은 이 책의 최고의 문장이다. 
이 책은 수용소 생활의 힘든 점을 알려주며 빅터가 떠올린 자세한 생각을 담는다. 여기서 그가 알려주는 “로고테라피”는 삶의 방향을 제시해준다.
나는 이 책을 읽자마다 우울함을 겪고 있는 친구에게 추천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이 책처럼 자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