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 흘리는 소설 (사회에 첫발을 내딛을 당신이 꼭 읽었으면 하는 소설)

학교에선 왜 ‘일’을 가르치지 않나요?

  『땀 흘리는 소설』은 네 명의 고등학교 교사가 ‘엮은’ 책입니다. 수록된 여덟 편의 단편은 지은이가 따로 있습니다. 왜일까요. 작가도 아닌 선생님들이 소설을 찾고, 선정하고, 작가들에게 작품 수록을 부탁하는 고생을 한 걸까요. 그건 ‘민주시민을 양성하는 학교 교육의 목표’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일을 하는데도 학교에서 ‘일’을 가르치지 않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지요. 그래서 이 세 명의 선생님들이 노동소설을 모아 책을 만듭니다. 70~80년대 노동소설이 아닌 동시대의 소설들을 모아서 말이지요. 그래서일까요. 술술 잘 읽힙니다. 하지만 재미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몰랐던 ‘일’의 가치를 되돌아보게 만듭니다. 궁금하시죠? 간단히 몇 편 소개해드릴게요.

1. 일다운 일이 뭔가요? : 김혜진, 「어비」
  ‘나’는 100평이 넘는 창고에서 책을 발송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항상 ‘제대로 취업’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이런 일은 돈이 없어서’ ‘잠시만 하는’ 거라며 ‘일다운 일’을 찾는 인물입니다. 그러다 어비를 만납니다. 어비는 말수가 적고, 남들과 거의 말을 나누지 않지만 창고에서 기르는 개의 밥그릇을 씻어줄 정도로 성실히 일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비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억지로 말을 시키거나 무안을 주기 일쑤입니다. 그러다 ‘나’는 어비를 인터넷 방송에서 발견합니다. 흔히 말하는 ‘먹방’ BJ로 돈을 벌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런 걸로도 돈을 벌 수 있다는’ 걸 놀라워하는 한편 불쾌한 감정을 느끼죠.
  일이라는 게 무엇일까요. 책을 찾아 발송하고, 생활용품을 쌓아 둔 창고에서 일하는 건 진짜 노동이고, 먹방으로 돈을 버는 건 가짜 노동일까요? 누구보다 성실히 일하던 어비가 BJ가 된 걸 변절이라고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요. 그보다 ‘일다운 일’은 무엇이고 ‘제대로 된 일’은 무엇일까요. 조금 더 나은 일을 찾기 위해 퇴근 후 학원을 다니고, 시험을 보는 청년들이 지금 당장 하고 있는 ‘일’은 어떤 의미일까요. 혹시 ‘일다운 일’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해야만 하는 청년들이 ‘어비’가 아닌, 이 시대에 불쾌함을 느낀 건 아닐까요.
 
2. 노동에도 윤리가 있나요? : 김세희, 「가만한 날들」
  「가만한 날들」은 노동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나’ 블로그에 업체 광고를 개인의 포스팅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올리는 일을 합니다. 처음에는 국문과라는 전공과도 잘 맞는 것 같고, 적성에도 잘 맞는듯해 퇴근 시간 이후에도 글을 올릴 정도로 열심입니다. 어느 날 쪽지 하나가 옵니다. ‘나’가 올린 글 중에 가습기 살균제 광고 글이 있었던 것이지요. 해당 제품을 사용한 뒤 피해를 입은 피해자가 글을 보고 걱정되어 연락해온 겁니다. 게다가 네이스가 블로그의 알고리즘을 변경하면서 다니던 회사마저 하루아침에 망하고 맙니다.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혹은 상사의 지시에 의해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행위가 사회적으로,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배운 적이 없습니다.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한다는 당위는 알고 있으나 내가 그 상황에 처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는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개인의 선택으로, 책임으로 떠맡길 뿐입니다. ‘나’는 블로그를 삭제해버리고 스스로를 정당화하지만 상처는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노동의 윤리와 책임에 대해 가르치지 않은 우리 사회의 잘못이기도 합니다.

3. 가사노동은 여성의 몫인가요? : 서유미, 「저건 사람도 아니다」 
  「저건 사람도 아니다」는 여성의 노동을 다룹니다. ‘나’는 퇴근 후에도 쉬지 못합니다. 아이를 돌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회사에서는 ‘화장 좀 하고 다녀’라는 핀잔을 듣습니다. 일도 잘하고 애도 잘 키우고 자기 관리도 잘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덧붙입니다. ‘나’의 말처럼 정말 ‘사람 같지도 않은 것들’이나 가능한 일이죠.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요? ‘나’는 우연히 로봇 가사도우미의 존재를 알게 됩니다. 말 그대로 ‘완벽한’ 사이보그가 존재했던 것이지요.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노동은 여러 문제에 부딪힙니다. 임신을 하게 된다면 경력 단절을 걱정해야 하고, 출산을 한 후에도 육아의 책임이 여성에게 더 많이 부과됩니다. 실제로 여성의 출근시간이 남성보다 더 적은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여성이 육아와 가사노동을 위해 다른 조건을 포기하더라도 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가사노동과 회사일을 모두 해내는 ‘완벽함’을 요구하는 것이지요. 마치 로봇처럼 말입니다.

왜 노동을 가르치지 않는 걸까요?
  우린 대학을 가기 위해 초중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그렇지 않은 분들도 분명 계실 겁니다. 하지만 설명을 위해 일반화의 오류를 무릅쓰겠습니다.) 좋은 대학에 가는 게 목표였습니다. 그렇게 대학에 왔습니다. 그랬더니 취직을 해야 할 시기가 왔습니다. 하지만 우린 왜 일을 해야 하는지 배운 적이 없습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하고 있는 아르바이트가 어떤 의미인지 깊게 생각해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우리 중 대부분이 일을 할 거라는 걸, 노동자가 될 거라는 걸 학교에서는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사회에 첫발을 내디디고 나서야 우리 사회의 ‘노동’이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를 깨닫습니다. 막연히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 달라 당황하기도 하고, 참다 참다 일을 그만두기도 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일을 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일이 무엇인지, 일의 가치가 무엇인지 가르치지 않는 걸까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월급 155만 원을 받는 아르바이트생의 존재가, 1차 회식비만 못하다는 게 불합리하다고 생각하신다면 잠깐 시간을 내 이 책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노동은, 우리의 존재는 언제든 빼고 넣을 수 있는 부품이 되기 위한 게 아니니깐요.

나를 보내지 마 (모던 클래식 3)

 요즘 4차산업혁명이라는 말을 뉴스, 신문 등 곳곳에서 자주 볼 수 있다. 하루는 신문을 보다가 책을 소개해주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그 기사에서 4차산업혁명과 AI에 관한 책으로 이 책을 소개하고 있었다. 보고는 책의 구성이 독특하고 소재가 흥미로워서 읽어 보기로 하였다.

 주인공인 캐시는 간병사로 11년 동안 일해 왔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어린 시절 자랐던 헤일셤기숙학교를 추억하면서 시작한다. 처음에는 이 헤일셤이 평범한 영국의 시골 학교와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캐시는 자신의 친구인 루스. 토미 그리고 다른 친구들과 같이 놀고, 다투며 여러 추억을 쌓는다. 헤일셤에는 특별한 전통이 있는데 매 해 판매회를 열어 학생들이 자신의 작품(그림, 조각 등)을 제출하고 교환하였으며, 그 중 최고의 작품은 외부에서 화랑을 운영하는 마담이라는 자가 가져가곤 했다. 이는 학생들의 창의성과 예술성을 평가하는 하나의 잣대로 여겨져 왔다. 그러던 중 캐시는 토미와 오묘한 감정을 쌓게 되지만 토미는 루스와 사귀게 된다. 어느 날 루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그들은 장기이식을 위해 복제된 존재라는 이야기를 하게 되고, 그 후로 이들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그러면서 그들은 성장하고, 기증자가 되거나 간병사가 되기로 선택한다. 케시가 간병사로 생활하던 중, 기증자가 된 토미와 루스를 만나게 되고 케시와 토미는 서로 진정한 사랑을 했단 것을 깨닫는다. 그 둘은 화랑을 운영하던 마담의 주소로 찾아가 둘의 사랑을 증명하고 기증자가 되기 전, 3년간의 세월을 벌고자 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 곳에서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장기기증을 위하여 탄생한 복제인간들도 영혼이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하여 헤일셤은 끊임없이 노력해 왔지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복제인간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없에지는 못했다. 그러면서 차츰 후원이 끊기게 되었고 결국 문을 닫게 된 것이다. 그들은 진실을 듣게 되고 우리에게 단 한 번밖에 없는 삶이라고 비통해한다. 그리고 토미의 마지막 기증날 까지 서로 사랑하다 토미는 4번째 기증을 마치고 목숨을 다한다

 헤일셤의 교사들이 말한 것처럼, 헤일셤의 아이들은 알고 있으면서 알지 못한다. 또한 독자들도 알고 있지만 진실로 알지는 못한다. 이 책의 인물들은 모두 복제인간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독자가 그것을 알지는 못한다. 케시가 헤일셤의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것에서 갑자기 맥락 없이 복제, 기증, 등과 같은 단어가 튀어나올 때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이 들지만, 작가는 그러한 의도된 단어배치를 통해 우리가 헤일셤의 아이들처럼 알고 있지만 알지 못하는기분을 느끼도록 해준다. , 처음부터 케시와 토미와 루스, 그리고 헤일셤의 모든 아이들을 복제인간이 아닌 그저 기숙학교에서 자라는 평범한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묘사하면서 그들에게 독자가 편견을 가지지 않도록 유도한다. 하지만 갑자기 등장하는 차가운 단어들로, 독자가 진실을 마주했을 때 큰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있도록 일종의 장치를 심어놓은 샘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헤일셤의 아이들이 자신이 복제인간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노골적으로 알게 된 그 순간의 기분을 조금 헤아릴 수 있었다.

 또한 이 책은 생명 복제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게 만든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4차산업혁명 시대에 살고 있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책속의) 클론들은 인간의 이중성으로 인해 결국은 장기기증자로서 앙상한 모습으로 인생이라고 할 수도 없는 짧은 순간을 거치고 사라지게 될 것이다. 몇 달 전 비글 복제견 메이가 영양실조로 인해 폐사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뉴스 기사가 나온 적이 있다. 이 뉴스를 보면서, 케시와 토미가 생각이 났다. 헤일셤은 그들도 영혼이 있다는 것을 알리려 노력했지만, 세상은 여전히 그들을 복제본, 하나의 부매품처럼 여긴다. 복제견 메이에 대하여서도 이러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닐까? 복제된 생명이니 인간의 유용성을 위해 동물실험을 당해야 하고, 굶어가며 죽어도 상관이 없는 걸까? 아니, 생명에 대한 복제는 허용되어야 할까? 참 어려운 질문이다. 아직 나는 여기에 대한 명쾌한 답을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복제된 생명이라 해도 나와 같이 심장이 뛰고 눈이 반짝이는 생명이 인간의 이기심으로 죽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참 마음이 아팠다. 이 책을 읽게 된 후로, 이에 대하여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될 것 같다.

 인간은 우월한 존재인가? 인간이 다른 생명체보다 우위에 있나? 생명은 그 단어 안에 엄청나 깊이를 담고 있다. 생명은 신비롭고, 경이롭기까지 한 것이다. 인간은 그러한 생명을 존중하고 아끼는 것을 하나의 커다란 규칙으로 세워 지키고 있다. 따라서 나는 모든 생명을 지키고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21세기에 사는 우리는 과학기술이 발달하여 4차산업혁명 시대라고 말을 한다. 그리고 그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자연을 가공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과학기술 뒤에 숨어있는 인간의 이중성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과학기술을 통해 인간사회를 이롭게 하지만, 다른 생명을 해하고 있지는 않은지, 항상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참 깊은 여운이 남았다. 인간, 사랑, 생명, 과학기술 등 여러 가지에 대해 생각을 할 수 있었고, 나는 4차산업혁명 시대에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생각하게 해 준 책이다. 게다가 재밌기까지 하니 미래 사회에 살아가게 될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해주고 싶다.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을 읽고나서 저는 왜 그를 아름다운 영웅이라 표현하며, 그 문구를 제목으로 썼는 지 깨달았습니다. 대부분 영웅이란 단어는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큰 공을 세워 국민의 안전에 기여를 한 사람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추가적으로 아름다운이란 수식어를 붙였는데 그 이유는 그가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낮은 자세로 봉사에 힘쓰며 사회적 약자의 힘이 되어온 그의 따뜻한 마음이었습니다. 
이 책을 통해 독자는 김영옥 대령님의 뛰어난 두뇌와 통찰력을 통한 전략가적 발상과 병사들을 이끄는 훌륭한 리더쉽만을 볼 것이 아닌 그의 인간적인 면모와 자기 희생 정신 또한 보고 배울 수 있습니다. 
그는 동양인이라 군인이 되기위한 신체검사조차 받지 못했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병력이 필요한 시점에 자원하여 입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종차별이 더욱 심했던 당시 상황에서 흔하지 않은 동양인의 존재를 다른 병사들은 좋게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대담함과 통찰력을 통해 불가능했던 작전을 성공시키고, 여러 훈장을 받는다.
후에 전쟁이 끝나고 김영옥 대령님은 전역하고 코인 세탁방의 개념을 새로 도입하여 사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코인세탁방은 외국에서 들어왔기 때문우리나라 사람의 생각이였다는게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김영옥 대령님은 사업적으로 큰 성공을 했음에도 한국에 6.25전쟁이 발발했단 소식을 듣고, 모국을 지키기 위해 다시 군복을 입습니다.
그는 한국에 와서 6.25전쟁으로 생긴 환자와 고아들을 보고 안타까워 했고, 한국에 ‘경천애인사’라는 고아원을 설립하여 전쟁고아를 양육하였습니다.
또한 한국에서도 전투의 여러 공을 세우고, 가장 먼저 3.8선을 돌파한 부대를 만들었지만 불행하게도 아군 전투기의 오인 사격으로 부상을 입어 40번의 큰 수술을 받았습니다.
군복을 벗은 뒤엔 한국 군사 고문의 신분으로 우리나라의 최초의 미사일 부대를 만들었습니다.
이런 그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의 이름을 딴 김영옥학교가 로스엔젤레스에 지어졌습니다.
이 처럼 사회는 김영옥 대령님의 명예와 자세를 높히 평가하였지만 안타까운 것은 한국에서 그 동안 여러 위인을 들었지만 김영옥 대령님에 대해서는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도 김영옥 대령님의 이름을 못 들어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6.25 시기의 참전자들과 아름다운 영웅의 희생 끝에 존재하는 나라에 살면서 그들의 고마움을 잊고 산 것을 반성하게 되었고, 그 분들의 충성을 기리는 현충일날 저뿐만이 아닌 모두가 그 분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는 것을 권하고 싶어 리뷰를 작성했습니다.

폭풍의 언덕

어떤 책은 사람의 취향을 만들고 감성을 만든다. 지금의 나로서 새로운 책을 읽는 희열도 크지만 어릴 때 읽은 책이 평생의 취향을 좌우하는 것은 그 시절에 정말로 사랑하는 책을 만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다. 내게는 ‘폭풍의 언덕’이 그런 책이다.
처음의 화자는 여행 중에 궂은 날씨를 만나 워더링 하이츠 저택에 묵게 된 남성으로, 첫날 새벽에 방에서 유령이 나오는 경험을 한다. 자신이 캐서린 언쇼라며 들어가게 해 달라고 애원하던 유령을 내쫓고 그는 집안의 하녀 넬리로부터 이 집의 사연을 듣게 된다. 이 때부터는 화자가 넬리로 바뀌어 하녀의 시선에서 본 언쇼 집안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캐서린의 아버지 언쇼 씨가 여행길에 주워온 인디언 혼혈 남자아이는 성도 없는 ‘히스클리프’라는 이름을 받고 캐서린과 오빠 힌들리와 함께 자란다. 캐서린과 히스클리프는 점차 격정적인 사랑에 빠지지만, 출신 문제로 캐서린은 에드거 린튼과 결혼하게 된다. 히스클리프는 분노에 차 집을 나가고, 작품에 서술되지 않은 어떤 일을 거친 후에 성질 나쁜 부자가 되어 돌아온다. 어려서 자신을 학대했던 힌들리와 자신을 버린 캐서린, 그녀의 남편 에드거에게 복수심을 갖고 있던 그는 후 세대까지 이어지는 복수극을 꾸미는데, 바로 뭣도 모르고 자신을 좋아하게 된 에드거의 여동생 이사벨라를 유혹해 달아나는 일이었다. 불만족스러운 결혼생활 때문에 정신 착란을 겪고 있던 캐서린은 그가 돌아온 뒤 증상이 악화되어 열병으로 죽음을 맞는다. 삶의 의미였던 캐서린이 죽자 히스클리프는 자신의 복수 계획에 이후 세대까지 끌어들이고 그녀의 딸 캐시와, 이사벨라와 자신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린튼을 결혼시켜 그들 모두의 재산을 자신의 이름으로 돌리려고 한다. 그러나 린턴이 병약해 일찍 죽자 자신이 보호하던 힌들리의 아들 헤어턴을 대신으로 내세운다. 그가 예상하지 못했던 한 가지는 정말로 그 둘이 사랑에 빠져 어린 시절의 캐서린과 히스클리프를 닮아가는 것이었다. 주인공은 여기까지 듣고 이튿날 저택을 떠나 몇 달 후에 돌아와 집주인 히스클리프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다. 덧없는 복수심과 괴팍한 성격만 남게 된 그는 점점 더 심하게 스스로의 정신을 파괴했고, 캐서린의 무덤을 파헤치는 등 기괴한 행동을 일삼다 그가 사랑한 캐서린과 똑같이 열병으로 사망한 것이다. 주인공은 캐서린과 히스클리프, 힌들리가 묻힌 언쇼 가의 무덤 앞에서 그들의 평화를 빌고 자리를 떠난다.
이 책을 온전히 즐기는 방법을 말하자면 감성으로 읽는 것이다. 내용적 면으로는 평범한 치정극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나 이 책의 진정한 매력은 휘몰아치는 야생적인 문체와 분위기에 있다. 격정적이라는 말로는 표현하기 부족한 그 야성이 책 전체를 휘어잡고 그들의 광기 가득한 사랑 속으로 독자를 끌어들이는 흡입력은 가히 책의 제목처럼 폭풍을 연상케 한다. 폭풍의 언덕이라는 이름처럼 항상 비바람이 불고 먹구름이 태양을 가리는 워더링 하이츠의 사람들은 그 공간만큼이나 어둡고 예측 불가능하며, 그 속에서 깨달은 자신의 감정에 무섭도록 맹목적이다. 캐서린이 폭풍우 치는 밤, 에드거와의 결혼을 고민하며 히스클리프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는 장면은 지금까지도 광기 로맨스의 표본이 되고 있다. “넬리, 내가 바로 히스클리프야. 그는 언제까지나, 언제나 내 마음 속에 있어. 나 자신이 반드시 나의 기쁨이 아닌 것처럼 그도 그저 기쁨으로서가 아니라 나 자신으로서 내 마음 속에 있는 거야.” 하지만 히스클리프는 이 이야기를 듣지 못한 채 집을 나가고 두 사람은 서로를 갈망하면서도 영원히 오해 속에 엇갈리게 된다.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서로의 악인이며, 사랑하면서도 원망하고 분노하며 서로에게 정신적 폭력을 일삼는다. 얼핏 보면 무언가에 미쳐 있는 사람들인가 싶을 정도로 그들의 언행은 과격하고 단순하고 이기적이지만 들여다보면 그것들이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솔직하고 맹목적인 감정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삶에는 오직 수직선만 있다는 듯이 몰아쳐 달려가다 소리없이 사라지는 그들의 인생이 마치 폭풍우치는 싸늘한 밤 같다는 점은 이 책에서 태양빛이 내리쬐는 장면이 마지막에 화자가 죽은 이들의 무덤을 내려다보는 것밖에 없다는 데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작가인 에밀리 브론테가 당시 시대의 편견에 오빠 이름으로 책을 발간했으며 평생 청교도로서 남성을 접해 볼 일이 많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어떻게 그런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 이렇게 파괴적인 소설을 쓸 수 있었는지에 대한 놀라움이 들었다. 어린 시절의 내가 이 작품을 사랑한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이 책이 가진 모든 로맨스 장르로서의 파격과 의외성, 그리고 날것 그대로의 야생적인 감정을 작품 자체의 특성으로 만든 표현력에 지금의 나 또한 매료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프랑켄슈타인

인간이 인간을 과학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까? 만약 가능하다면, 그를 만든 인간은 신의 영역에 가까워지게 될까?
만들어진 생명체가 정말 사람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느낄 수 있게 된다면, 그 존재는 자신이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메리 셜리의 <프랑켄슈타인>은 인간의 존재와 창조, 그리고 오만에 대하여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 책의 도입부는 북극에서 주인공 ‘빅터 프랑켄슈타인’을 발견한 뱃사람이 쓴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다음 장부터는 화자가 빅터로 바뀌어 직접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과학으로 신이 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자신의 성에서 죽은 인간의 시체를 꿰매붙여 번개로 살려내는 실험에 몰두한다. 수 년간의 연구 끝에 실험은 성공했지만 되살아난 창조물이 성을 달아나 자취를 감추고, 몇 년 후 빅터의 남동생이 그 창조물에게 살해된 채 발견된다. 괴물은 빅터의 앞에 나타나 왜 자신을 만들었는지를 물으며 그에게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말해준다. 산 속 노인의 집에서 말하고 읽는 법을 배워 자연의 신비를 깨달았지만 결국 노인의 아들 부부에게 심한 냉대를 받고 쫓겨난 괴물은 어떤 여자아이를 구해주다가 주변 남성에게 거세당해, 분노에 못 이겨 빅터의 남동생을 살해한 것이다. 모든 이야기를 듣고 빅터는 자신의 욕망을 열변하며 그에게 악담을 퍼붓고, 동시에 비참한 괴물의 인생에 대해 묘한 동질감과 두려움을 느낀다. 괴물은 완전한 인간으로서 짝을 맺기 위해 자신 같은 여자를 만들어달라며 그를 협박하고, 빅터는 또다른 여성 창조물을 만들지만 최종 완성일에 괴물이 나타나자 그들의 존재가 위험하다고 판단해 그 앞에서 그녀를 죽여 버린다. 고통에 울부짖던 괴물은 복수를 다짐하며 빅터의 신부 엘리자베스를 살해한다. 몸과 마음이 모두 망가진 상태로 괴물을 찾아 북극을 헤메던 빅터는 도입부의 편지를 쓴 뱃사람에게 구조되었고, 혼자서라도 괴물을 찾아 복수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배에서 죽는다. 그 후 빅터의 시체 앞에 나타난 괴물은 자신의 죽음으로 이 모든 것을 끝낼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배 밖으로 뛰어내린다.
흔히들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을 괴물의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는 그를 만든 사람의 이름이었다. 인간의 욕망에 의해 만들어져 축복도, 사랑도 없이 창조주의 이름을 쓴 괴물에게 독자는 일말의 동정심을 느낄 수밖에 없지만, 동시에 부자연스럽기 그지없는 그의 존재 자체와 악행에 대해 본능적인 공포감을 느끼게 된다.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낸 존재가 자신에게 통제되지 않고, 심지어 직접적인 위해를 가한다는 공포감은 어쩌면 새로운 생명에 대한 인간의 근본적 두려움과 맞닿아 있는지도 모른다. 이는 작가 메리 셜리가 출산과 임신을 거치며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그녀가 직접 느꼈을 생명의 환희와 두려움을 독자 또한 자신의 일처럼 생생하게 전해받는다. 또한 이 책의 주제가 되는 것은 기괴한 설정 자체가 아니라, 과학으로 신에게 다가서 보겠다는 인간의 오만함이다. 빅터는 독일 유학 중 많은 교수들에게 영감을 받고 그들을 뛰어넘어 보겠다 다짐하지만 정작 욕망의 근간에는 자만과 이기심이 깔려 있다는 것을 자신도 부정하지 않는다. 오만으로 똘똘 뭉친 인간은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해 온갖 의미를 부여하지만 결국 자연이 주는 재료로 자연의 흉내만 낼 뿐인 것이다. 마치 괴물이 자기가 해 온 살인의 이유를 설명하지만 어쨌든 그것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악행이었던 것처럼. 작가는 그 점에 대해 인지하고 있는 듯이 괴물과 창조주에게 덧없는 복수심과 처참하고 외로운 죽음만을 남겨 준다.
얼핏 보면 허황된 이야기나 낡은 비극처럼 보일 수도 있고, 무언가에 취해 있는 듯 장황한 문체가 진입 장벽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현대까지도 의미를 갖는 이유는 생명의 창조를 과학과 연결지어 논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이런 발상은 오컬트 모임에서 거론되는 음지 문화였지만, 호러 공상과학 소설의 양식으로 출간되어 그 당시 대중에게 ‘인간이 과학으로 자신 같은 존재를 만들어낸다면 그건 성취일까, 파멸일까?’라는 철학적 논제를 던진 것이다. 인간의 형태로 말하고 행동하는 안드로이드와 인공지능이 4차 산업 혁명의 주체로 떠오르고 우리의 삶까지 파고들어오는 이 시대에 메리 셜리의 <프랑켄슈타인>은 모방과 창조, 그리고 그 본질에 대해 생각해보게 할 것이다.

구글의 아침은 자유가 시작된다 (구글 인사 책임자가 직접 공개하는 인재 등용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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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인사관리라는 분야에 대해 관심이 없던 과거를 되돌아보게
된다. 책을 읽으며 가장 많이 생각했던 고민은 과연 내가
이 책을 읽는 이유는 무엇이지?’, ‘HR은 기업을 이끌어 나갈 인재를 선별하는 부서니까 중요해. 그렇지만, 앞으로 취업 걱정을 앞두고 있는 20대 청년의 입장에서는 이 책이 전달하는 메시지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향후
경제생활을 해 나갈 주체로서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창업을 할 수도 있고, 회사 내 조직에 들어가서 주어진 일을 할 수도 있다. 두 가지 경우
중 어떤 선택을 하든지 간에, 성공적인 생활을 해 나가기 위해서는 공통적으로 조직의 정체성을 파악하는
것은 필수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창업의 경우 사업의 정체성, 사업이
궁극적으로 목표하는 바를 구체화할 수 있어야, 구체적인 행동 방식에 대한 어떻게 할 거야?’라는 고민이 이어지면서 그 밖에 디테일한 내용들까지도
다룰 수 있을 것 같다. 조직의 내부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다. 제아무리
개인적인 성과달성능력이 뛰어날지라도, 회사가 추구하는 사명이라든지 목적의식 등을 파악하지 못하면, 그저 그런 평범한 인재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더 나아가, 조직의 가치관 못지않게 중요한 부분이 개인의 가치관이라고 생각한다. 조직의
가치관과 개인의 가치관은 언제나 같을 수 없기에, 사람들은 각자에게 더 맞는 조직을 찾아나선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읽어야 할지 고민이 많이 되었는데, 읽으면서 책에 대해 의미부여가
된 건지, 감상평을 쓰면서 의미부여가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책에 대해 나름의 의미부여를 한 것 같다. 사회에 일어나고 있는 문제들을 짚어보며, 그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하는 과정 자체가 앞으로 수많은 일들을 겪으며 살아갈 우리들을 더욱 단단하게 해 주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든다.

 

 

 

아가미 (구병모 장편소설)

  어느 깊숙한 산 속 호수에서 누군가 자식을 데리고 동반자살을 하였다. 그 아버지는 죽었지만 아이는 살아남았다. 아가미를 달고서. 그 아이는 자신을 구해준 할아버지와 성격이 괴팍한 소년 ‘강하’와 같이 살게 된다. 강하는 아이에게 ‘곤’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곤과 강하는 외로운 소년들이었다. 강하는 어려서부터 엄마에게 버림받아 할아버지와 살고있었고, 곤은 아가미가 생기기 전의 기억은 모두 잊은 채로 강하의 괴롭힘을 받아들이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강하는 곤에게서 이상한 질투심과 아름다움을 느꼈다.  곤을 괴롭히지만 곤을 가장 많이 챙겨준 사람도 강하였다. 그리고 곤이 갑자기 사라질까봐 늘 불안해했다. 곤이 살아줬으면 좋겠어서 모든 희생을 안고서 곤을 멀리 보내버린 사람도 강하였다. 강하는 곤을 사랑한 것 같다. 하지만 어떤 이유가 있었든간에 강하는 가해자이고 곤은 피해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사랑은 비판의 여지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곤의 인생을 생각하면 먹먹해진다. 아가미가 있는 기이한 모습으로는 평범한 생활은 당연히 하지 못하였고 밖에 나갈 때도 후드를 뒤집어 쓰거나 목도리를 착용했어야 했다. 거기에 강하의 괴롭힘까지 더해져 소극적이고 조용하게 자랐다. 강하가 괴롭히지만 곤의 인생에서는 강하 밖에 없다는 것이 마음이 아팠다. 강하와 곤이 행복해보였던 순간은 책에서 한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강하가 ‘그래도 살아줬으면 좋겠으니까.’ 하고 말하는 순간에 곤이 기뻐하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책을 읽다보면 어디선가 습습한 물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곤이 강하의 시체를 찾기위해 바다를 떠돈다는 엔딩이 여운을 길게 남겼다.

빙과

이 소설은 고전부 시리즈중 1권으로 첫 출발을 알리는 책이다. 고전부 시리즈는 미스터리 혹은 추리소설이라고 하지만 다른 여타 소설처럼 누군가가 살해당하거나 가치가 큰 물건들이 도둑맞는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 벌어지는 사소할수도 있는 의문점을 풀어가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 책은 다른 고전부 시리즈보다 더 무거운 소재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한 사람의 실종에대한 의문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주인공 오레키 호타로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여행을 간 호타로의 누나로 부터 고전부의 OB인 자신이 고전부가 부원의 부족으로 폐부되는 것을 두고볼수 없다며 고전부에 가입하라는 편지를 읽으며 시작한다. 호타로는 자신의 인생을 잿빛이라고 하며 적극적으로 살아가기보다 수동적으로 살아가길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런 호타로는 누나의 압박으로 고전부에 입부하려고 하나 어느 여학생(치탄다 에루)가 있어 여학생과 대화를 하다가 그 여학생이 잠겨있어야할 강의실에 들어와있다는 사실을 알고 여학생은 그것이 신경쓰인다며 같이 의문점을 풀자고 한다. 사건의 원인은 학교 관리인이 교실을 점검하면서 열어놨다가 한꺼번에 잠구는 것을 보여주며 관리인이 다른교실을 관리하던 도중 여학생이 들어왔음 알려주며 사건을 해결한다. 그러한 주인공을 본 여학생은 고전부에 가입하라고 계속 권유하고 이미 여학생이 고전부여서 입부를 포기하려던 주인공과 사건도중 합류한 주인공의 친구도 입부하게 된다.
이렇게 학교생활에서 사소한 의문점들을 해결하며 시간이 지나던중 여학생에게 여학생의 외삼촌이 실종됐음을 알게되고 곧 장례식이 진행됨을 알게된다. 여학생은 예전에 삼촌에게 고전부에대해 여러가지를 들었지만 33년전 어떠한 일에대하여 때를 써서 들었는데 자신이 잊어버렸음을 알려준다. 그 내용을 알고싶어 주인공에게 부탁하게 된다.
그렇게 여학생의 삼촌에 대하여 여러가지 알아보고 고전부에대해 알아간다. 여학생이 외삼촌에게 물어봤던것은 빙과의 뜻이라는것을 알게되고 그러던중 외삼촌이 학교를 떠나버린 그해의 문집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것의 이름은 <빙과>였다.
사건이 진행되면서 33년전 학교축제가 축소될 위기였음을 알게되고 또한 학생들도 시위를 했음을 알게된다. 시위도중 학생들의 부주의로 학교 건물이 타버리게 되고 그 책임으로 시위의 주동자였던 여학생의 삼촌이 학교를 나오게 되었음을 알게되었다. 그리고 그 주동자로 지목된것도 원해서 된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되며 또한 퇴학당하기전 고전부 문집의 이름을 빙과로 정했는데 그것만이 여학생의 외삼촌이 정했다는것을 알게되었다. 주인공은 모든 사건의 결말을 알게되고 빙과의 뜻을 알게되는데 그것은 빙과를 영어로 읽으면 아이스크림이 되는데 그것은 icecream을 뜻하는게 아니라 i scream을 뜻한다고 모두에게 말해준다. 그렇게 사건이 마무리되고 여학생은 외삼촌을 떠나보낼수있게 되었다. 그리고 여행을 떠났던 주인공의 누나에게 고전부의 현 상황에 대하여 편지를 보내며 끝을 낸다.
추리소설들에 나오는 탐정들은 전부 가치가 높은 물건이 도둑맞거나 누군가 살해당한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소재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런 무거운 소재가 아니라 학창생활을 하며 사소하지만 의문점이 드는점들이 사건이 된다. 이러한 점이 이 소설이 다른 추리소설과의 차이점이고 신선했다. 추리소설중 무거운 소재가 좋은 사람에게는 추천하지 않으나 가볍게 추리소설을 읽고싶거나 입문하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다.

15소년 표류기

SF작가로 유명한 쥘 베른의 소설이다. 이 소설은 초등학교나 중학교에서 독후감 후기에 많이 선정되는 책중 하나이다. 사실 리뷰를 쓰고있는 나도 초등학교때 독후감으로 쓴 적이 있다. 그정도로 유명하며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이 읽어도 어려운 점이 없을 정도로 쉬운 책이다. 그래서 성인이 된 지금 다시 읽는다고 다른 느낌이 드는지 알고 싶어서 읽기 시작하였다.
소설의 시작은 15소년들이 한달동안의 휴가를 즐기기 위하여 부모중 한명의 배를 빌려서 부두에서 기다리는 중 이였다. 15소년은 배위에 있었고 나머지 선장과 선원들은 시내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어느 알 수 없는 이유로 배를 묶어두었던 밧줄이 풀리고 말았다. 그렇게 15소년이 탄 배는 항구를 미끄러져 나갔는데, 배는 항구에서 멀어지고 나중에는 폭풍우까지 만나 배가 거의 침몰할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러다가 육지를 발견하게 되고 육지로 향하다가 암초를 만나 좌초하게 되고 15소년은 섬에 고립되었다.
소년들은 섬에 도착한 뒤 섬을 돌아다니는데 예전에 어떤 사람이 이 섬에 좌초당하고 살았던 곳을 발견하게 되고 그곳을 주거지로 생활하게 되었다. 그러던중 어느날 다수의 소년들이 대장으로 삼은 브리앙가 맘에 들지 않은 도니판파는 그들과 떨어져 지내게 된다. 그리고 머지않아 천둥이 몰아치는 밤 도니판은 미국에서 온 배가 표류하다가 섬에 도착한 것을 보았는데 근처에 사람이 없는것을 보고 누군가가 이 섬에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한편 브리앙은 연을 만들어 근처에 육지가 있는지 알아보려고 하려던 참에 같이 표류하게 된 개가 어느 여인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여인은 어느 여객선에 타고 있었는데 납치를 당했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배에 불이나 구명정으로 납치범들과 함께 탈출하게 되었는데 그것을 들은 브리앙과 소년들은 떨어져 나간 도니판들이 생각나서 그들을 찾아나선다. 한편 도니판은 자신들이 살곳을 향하다가 야영중여였는데 갑자기 재규어가 습격하여 도니판을 죽일뻔 하였으나 그 순간 그들을 찾으러 나선 브리앙이 그들을 구하였고 그 둘은 화해하게 되고 브리앙의 동생 자크가 항구에 묶여있던 줄을 풀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섬이 더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된 소년들은 납치범을들 찾으려고 연을 사용하여 그들이 야영중인 곳을 찾아내었으나 연을 회수하지 못하여 납치범들에게 자신들이 있다는 것을 알리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에반스란 사람이 찾아왔는데 에반스는 여인과 같이 납치당한 사람중 하나였다고 여인이 알려주고 이 섬이 육지와 얼마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또한 납치범들은 구명정이 있어 수리만 하면 육지로 갈 수 있다는 소식을 들은 소년들은 탈출 계획과 납치범과 싸울 준비를 한다. 그리고 얼마뒤 납치범들이 먼저 접근하였고 소년들은 한명을 사로잡는데 성공하였으나 한명이 도망쳐 싸움을 준비하게 된다. 이틑날 소년들과 아이들은 싸웠고 도니판이 위험에 처하자 잡혀있던 납치범중 한명이 소년을 구하고 죽고 나머지 납치범들도 죽는다. 소년들은 구명정을 수리하고 섬을 떠나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15소년 표류기를 성인이 되고 다시 읽자 다른 느낌이 들기 시작하였다. 예전에는 글 내용 자체에 집중하면서 읽었다면 지금은 글의 상황을 살펴보기 시작하였다. 소년들의 국적이 다 똑같지 않고 영국 프랑스 미국등 여러 나라로 나뉘어져있는데 작가의 국적인 프랑스인은 대장 그와 대립하는 소년의 국적은 영국 그 둘을 저울질 하는 미국인 소년을 보면 그때 당시 세계 열강이였고 대립했던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그 둘을 저울질하는 미국등 세계정세를 보는듯한 기분이 들었다(작가의 국적이 프랑스란점이 브리앙이 많이 활약한 이유같다). 또한 부유한 집안의 자제들이 표류당했고 표류된 상황에서 가장 도움이 될 선원또한 견습선원인데 표류당한 상황에 쉽게 적응하고 단순히 책으로만 알던 내용을 그대로 실 상황에서 손쉽게 적용하는점등 현실적으로 미묘한 점이 많다. 그리고 납치범과 싸우는 장면에선 15명의 소년들과 어른 2명(남자1명,여자1명) 그리고 총이 포함되었다 해도 여객선을 손쉽게 납치한 건장한 성인 남성들을 상대했는데도 사상자 2명(사망1명,부상1명)이라는점이다. 심지어 싸움을 전부 총으로 한것도 아니고 칼싸움도 있었다. 그런데도 납치범들은 다 죽고 소년들은 전부 살아남았다. 그리고 악인이라고 한들 사람을 죽이고 그 장면을 보았음에도 정신적인 충격이 커보이지 않는다. 이 시대의 소년들은 멘탈과 전투력이 엄청난것 같다. 이렇게 미묘한 점이 많은 소설이지만 소설적 허용으로 보고 내용만 보면 유치하지만 재미있다. 그래도 이 소설은 성인보다 어린이나 청소년이 읽는게 좋을것 같다.

우리의 월급은 정의로운가

우리의 월급은 정의로운가라는 책은 직장인들을 비롯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학생들이라면 이름부터가 흥미롭게 느껴질 것이다. 책은 적정임금, 임금격차와 최저임금 크게 세 가지 카테고리로 이루어져 있다.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순서대로 읽지 않고 목차에서 가장 흥미롭게 느껴졌던 최저임금부터 읽었다. 책은 2017년에 쓰여져 17년 최저시급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2년이 지난 2019년 현재는 최저임금에 대한 논쟁이 훨씬 더 붉어지고 있다. 기존에 최저임금에 대해 가지고 있던 견해는 “이 정도면 그만 올려도 되지 않을까?”정도였다. 작년까지는 느끼지 못했지만 이번년도를 지내면서 확실히 작년에 비해서 월급이 높아졌음을 많이 실감했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크게 담론이 되는 문제들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어서 더 깊은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사실 책을 읽은 후에도 “최저임금을 인상해야만 한다!”, “최저임금을 더 인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등의 확고한 견해가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저임금에 대한 문제가 이렇게 큰 문제이며, 다시 한 번 더 생각해봐야겠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한 것은 책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경제 상으로 최약체인 소상공인들과 근로자들끼리의 임금 협상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며 좀 더 넓게 보고 ‘최저임금위원회’를 ‘임금위원회’로 바꾸는 등 정책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가 노사간의 입장 차이를 좁힐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제일 인상 깊었던 부분은 버락 오바마의 연설이었다. “이제  시간이 됐습니다. 지금 의회에서  여전히 최저임금 인상을 반대하시는 모든 의원분들에게 이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풀타임으로 일하면서 1년에 만오천달러 임금으로 가족을 부양할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는다면 한 번 그 돈으로 살아보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미국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수백만 근로자들의 임금을 올리는 데 찬성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말이다. 대통령들의 연설을 들은 적이 없어서 그런진 모르겠지만 정말 크게 와닿았다. 글로써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저 말을 듣고도 임금 인상이 단 1%도 되지 않았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최저임금에 대해서는 누구나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느끼는 것이 있었지만, 적정임금과 임금격차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하고 견해도 없기 때문에 무엇을 느꼈다라기 보다는 내용을 보며 대부분 “맞는 말이지”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였다. “생각이 완전히 없다기보다는 당연히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임금격차를 줄여야지 좋은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은 하지만 이를 증명할만한 논거가 하나도 없어 “사회적 논제들에 대해서 좀 더 관심을 가져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