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 유전자 (40주년 기념판)
그가 말하길, 우리가 항상 알고자 했던 인간 본질의 목적에 대한 질문은 의미가 없다고 한다. 사람의 존재이유는 없고 다만, 우리는 유전자에 의해서 설계된 것 뿐이다.
우리는 모두 유전자(DNA)의 생존기계에 불과하다.
그러나 생존기계는 종류에 따라 그 외형이나 체내기관이 매우 다양하다.
원숭이는 나무 위에서 유전자를 유지하는 기계이고, 물고기는 물 속에서 유전자를 유지하는 기계이다. 기계는 수명이 존재하지만, 유전자는 그렇지않다.
말하자면 유전자는 불사신인 것이다.
유전자는 자기의 목적에 따라 자기의 방법으로 몸을 조절하며, 몸이 노쇠하거나 죽음에 이르기 전에 죽을 운명에 있는 그들의 몸을 차례로 포기해 버림으로써 세대를 거치면서 몸에서 몸으로 옮겨간다. 즉, 유전자는 자손번식을 통해 부모기계에서 자식기계로 옮겨가며 불멸한다는 뜻이다.
매우 충격적이지 않은가? 이는 우리의 통념을 송두리째 날려버리는 가설이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사람에게는 영혼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귀신을 봤다는 얘기,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얘기가 떠도는 것이다. 나도 또한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이고, 무언가 태어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처음에는 이 책을 상당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 책을 계속 읽어보았더니 매우 합리적인 근거들을 가지고 구체적인 설명을 동반하기에 신뢰성이 높다는것을 느끼게 되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2019-1 독서클럽
독후 감상문
제목 : 문명화된 전쟁
1611146
문헌정보전공 임소연
학창시절에 처음
이 책을 읽고, 이번 독서클럽을 계기로 4년만에 다시 한
번 책을 펼쳐보게 되었다. 처음 읽었을 때는 ‘아, 그래. 세상에는 참 불쌍한 사람들이 많구나.’ 하고 다소 관조적인 시선으로 책에 나오는 사람들과 국가를 바라봤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다시 책을 읽었을 때는,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은 마음이
얼마간 들었다. 나이가 들어 공감능력이 늘면서 난민들의 처지를 더욱 공감하게 된 것도 있고, 스스로가 너무 무기력하게 느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장 지글러는 22장과 25장에서 도시빈민의 현황과 확산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식민정책의 폐해를 세네갈과 부르키나파소의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현재 세계적으로 ‘농촌사회의 종언과 지구규모의 도시화’라는 혁명이 진행되고 있는데, 농지의 피폐화나 농업의 자동화 등 다양한
이유로 도시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고 대도시의 개수가 많아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시로 이주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갈 곳이 없어 빈민촌에 정착한다. 때문에 정규적인 수입이 없어 안정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는
‘비공식 부문’의 사람들이 되고 만다.
한편 20세기 유럽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제국주의 식민정책으로 인하여 식민지들은 단일 경작을 하도록 강요받았다. 이로 인해 식민지들은 세네갈처럼 독립을 한 이후에도 식량을 자급자족하지 못하고 다른 나라와 무역을 통해 해결하는
경우가 많은데, 국가는 농민들에게 헐값으로 농산물을 산 뒤 수출가격은 올려 부당이득을 챙긴다. 그래서 농민들은 농사를 하고 판매를 했음에도 배를 곪게 되는 것이다. 부르키나파소
역시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로 사정이 비슷했는데, ‘상카라’ 라는
영민한 지도자가 이를 개혁해보려 했으나 결국 외세 간섭으로 인한 내부분열로 실패하였다.
힘 센 나라가
약한 나라로부터 식량을 빼앗고, 한 나라 안에서도 권력이 있는 자들이 힘없는 람들의 식량을 빼앗고 있다. 어쩌면 문명화된 시대에 새롭게 탄생한 전쟁의 방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인류는 청동기 시대부터 끊임없이 서로 죽고 죽이는 역사를 반복하였다. 비록 21세기가 들어서면서 비교적 평화로운 시대가 도래했다고는 하나, 소리
없는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식량이 바로 이러한 전쟁 방식에서 좋은 무기가 된 것은 아닐까. 강대국은 그들보다 힘이 약한 나라를 확실히 짓밟으면서도, 직접적으로
대량 살상무기를 사용한 것은 아니니 도덕적인 책임을 피할 수 있다. 위선을 떨 수 있는 무기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류는 과연 선(善)에 다가갈 수 있을까. 제도적,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직접적인 해결책이고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조금 다른 맥락으로, 문화 컨텐츠가 또 하나의
해결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측해보았다. 많은 국가가 더 이상 능지처참과 같은 잔인한
형벌을 사용하지 않고 사형제도도 폐지하는 것을 보면, 인간의 공감능력은 느리지만 조금씩 발전하고 있는
것 같다. 이와 위해 소설이나 영화와 같은 매체가 중요하고, 파급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나라의 이야기에 감동하고 눈물 흘리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한다. 그래야 자신은 굶고 있지 않더라도 저 지구 반대편에서 굶고 있는 타인에 대해서 가슴 아파할 줄 알게 될 것이다.
성공한 국가 불행한 국민 (한국경제를 새롭게 이해하기 위한 안내서)
책을 읽기 전, 제목에 관심이
갔었다. 성공한 국가 불행한 국민. 이것은 정확히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책을 펼쳐본 이후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현재 대한민국은 개국 이후로.
1인당 국민소득 1천달러 달성까지 15년, 그리고 2만달러에 도달할 때까지 총 48년이 걸렸다. 이는 세계 경제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엄청난
압축 성장의 결과이다. 대한민국과 비슷한 수준의 인구를 가진 국가 중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에 미치는 국가가 7개국 정도이니, 외형적으로 대한민국은 엄연히 선진국에 반열을 올린
국가이며 경제적으로 엄청난 성장을 한 이례적 국가이다.
하지만 ‘외형적’ 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린다. 현재 우리나라는 저소득층으로 고통받는 국민이 상당수이다. 약 50%의 국민들이 스스로 저소득층이라 여기며 경제적인 문제로 고통받고 있다. 경제
선진국이라 불리는 국가에서 절반이 넘어가는 국민이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은 모순이 아닐까? 그 해답은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적 상황을 돌아보면 찾을 수 있었다. 무리한
OECD 가입 이후 발생한 IMF와 부채로 인한 기업 파산, 그와 함께 등장한 실업문제, 빈익빈 부익부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채 숙제로 남아있다. 가장 문제되고 있는 고용안정을 해결하기 위하여 정권이 바뀔 때마다 많은 정책들을
시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들 또한 겉으로 보기에 해결이 된 것만 같은 상태이며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의 정책이다. 근본적인 실업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경제 불황 상태는 해결될 수가
없다. 비정규직의 증가와 이른 정년퇴임의 문제, 자영업의
증가로 인한 문제는 곧 사회로 진출할 90년생들에게 다가올 현실이다. 소득이 분배되는 정도 또한 심각하다. 로렌츠 곡선을 살펴보면 소위 잘 사는 상위 20프로의 사람들이 GDP의 80퍼센트를 점유한다. 결국
나머지 80프로의 사람들은 20퍼센트의 지분을 나누어 갖게
되고, 외형적인 GDP 수준은 높을 수 있지만, 국가 내에서 경제불황이 더 심각해지는 것이다. 나는 IMF 당시에 태어나 구전으로 전해만 들어왔지 실제로 몸소 체감을
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사회에 나가야 하는 준비를 하는 지금, 20여년 전의 문제가 여전히 청년들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고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시작도 하기 전 좌절을 맛보게 해 주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고
국가의 주요 산업 등 많은 것들이 변하고 있다. 여러 방향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애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1970년 1월 1일, 칠레의 좌파 정당과 노동조합이 연대한 ‘인민전선’이라는 동맹이 101가지 행동 강령을 발표했다. 그중 제1항은 대통령 선거에서 자신들의 후보가 승리할 경우, 15세 이하의 모든 어린이들에게 하루 0.5리터의 분유를 무상으로 배급하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칠레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 중의 하나가 많은 아이들의 영양실조였다. 1970년 9월 드디어 대통령선거가 실시되었고, 인민전선의 후보인 살바도르 아옌데가 36.5퍼센트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칠레 내부에서는 분유와 유아식을 판매하여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있던 다국적기업 네슬레가 분유시장을 독점하고 있었다. 아옌데는 아이들에게 분유를 무상으로 배급하기 위해서는 네슬레와의 원활한 관계가 필요했다. 아옌데는 결코 네슬레에게 분유를 공짜로 달라고 하지 않고 제값을 주고 사려고 했다. 그러나 1971년 네슬레 본사는 칠레 민주 정부와의 협력을 모두 거부했다. 사회주의적 개혁 정책을 선택하고, 외국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칠레의 자립성을 높이고, 국내적으로 사회정의를 실현하려는 아옌데 정권의 개혁 정책이 제대로 추진되면 네슬레가 누려온 많은 특권들이 침해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아옌데의 공약은 수포로 돌아갔고 수만 명의 아이들이 다시 영양실조와 배고픔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 글을 읽고 ‘사람의 이기적인 마음이 이 정도까지 커질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이 죽든 말든 자신만의 이익만을 생각한다면, 사람이 사회적 동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여기서 문뜩 네슬레 회사의 입장을 생각해 봤다. 내가 만약 네슬레 회사의 사장이라면 어땠을까? 네슬레가 칠레 민주 정부와의 협력을 모두 거부한 이유를 두 가지 생각해보았다. 첫 번째는 시대적 상황이다. 저 시점은 냉전시대이며,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미국과 소련이 보이지 않는 전쟁을 하고 있었다. 서구에 본사가 있는 네슬레는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다. 하지만 아옌데는 공산주의를 채택했다.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가 그들의 연결고리를 막은 것이다. 두 번째는 네슬레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다. 아옌데의 공약은 네슬레에게 오히려 불안감을 심어줬을 것이다. 외국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칠레의 자립성을 높이는 아옌데 정권의 개혁 정책은 시간이 지나 안정화가 된다면 네슬레의 독점을 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네슬레 말고 다른 다국적 기업들의 분유 시장 개입 허용, 독점에 대한 강력 규제, 자국 분유 기업 격려 정책 등의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네슬레는 미래에 자신들이 지금의 특권을 계속 누릴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칠레에 대한 협력을 거부한 것이다.
물론 네슬레가 협력을 거부함으로 인해 수만 명의 아이들이 영양실조와 배고픔에 시달리며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얼핏 보면 한 사람의, 한 회사의 이익을 위해 수많은 사람이 희생당한 것처럼 보인다. 협력을 거부한 두 번째 이유 또한 회사의 이익을 위해서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자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숨어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네슬레는 자본주의가 원하는 방향으로 판단을 한 것이다. 네슬레가 자본주의가 아닌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니면 그 당시에는 없었던 새로운 이데올로기에 있는 회사였다면 어땠을까? 결국 우리는 네슬레를 비판하기보다는 그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게 맞지 않을까? 그리고 현재에 우리의 판단들이 이데올로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판단이 되고 있지 않은지 생각을 해봐야 될 것 같다.
이번 기회를 통해 기아, 빈곤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데올로기가 우리의 판단, 선택에 있어서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알게 되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왜 굶주려야 하는가
1635063
경제학과 원창민
기아 란 굶주림 즉 ‘먹을 것이 없어 배를 곯는 것‘을 뜻한다. 이는 현대 지금도 진행중이고 과거 중세에도 그랬고 19세기 중국, 아프리카, 러시아, 오스만 제국 등에서 수십만 명이 굶어 죽었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산업혁명으로 생산성이 향상되자 그제서야 ‘물질적인
결핍‘ 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다 현대사회에서 왜 아직도
기아 문제는 해소되고 있지 않은지 의문이다. 저자인 장 지글러는 문제의 핵심을 사회구조로 본다. 식량 자체는 충분하게 있으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확보할 경제적 수단이 없어서 라고 바라본다.
그런 식으로 분배될 수단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공평하게 분배 받지 못해서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있는 현실이다. 1984년의 농업생산력으로만 보더라도 120억의 인구를 먹여 살릴
만한 양이 있었다. 지구 인구가 60억인걸 감안하면 거의 2배에 달하는 사람을 먹일 수 있는 양이다. 식량이 제대로 배분되면
굶어 죽는 사람이 안 생긴다는 신기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지속되는 이유는 부자나라 사람들이
믿는 ‘자연도태설‘ 이다.
인구가 과잉됨에 따라 스스로 과잉의 생물을 제거한다는 논리인데 국제 기구 책임자들 까지도 이런 말을 믿고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도 놀랐다.
처음에 이 논리를 들었을 때는 사실 엄청난 충격이었다. 모든 인간은
동등한 권리를 지닌다고 배우는 현 시점에서 누가 어떠한 이유로 어떠한 기준에 의해 자연 도태되고 있는가 도 생각해보게 되는 계기였다.
강한 자는 살아남고 약한자는 죽는다는 자연도태설 여기에서 장 지글러는 ‘무의식적인
인종차별주의‘가 담겨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빈민국들 같은
경우 내전이나 이런 형태로 인해서 구호물자나 식량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전달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단순히 전쟁때문에 전달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집권하고 있는 소수의 사람의 이해에 의해서 구호물자가 개인의 손으로 들어가고 자국민을 볼모로
삼아서 행동하는 이들을 바라보면서 단순히 선진국의 논리에 의해서만 이들이 굶주리고 있는 것은 아니구나 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분명 지원을 하면 그 소수의 사람들에게 많은 몫이 들어가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서 구호를 계속한다 라는 구호단체의 말이 정말 멋있게 와 닿았다.
그러나 원초적인 기아의 문제의 해결을 진실로 원한다면 무분별한 지원 보다는 선진국에서 이런 독재권력이나 자원을
독점하고 있는 소수의 권력집중 구조적 틀을 깨뜨려 주는 것이 필요하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앞서 말했던 ‘자연도태‘가 생각나면서 선진국에서 일부러
이런 현상들을
방관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장 지글러가 직접 현장에서 뛰면서 경험한 것들이라 그의 안타까운 감정 같은 것들이 글에 녹아
있어서 잘 전달되었고
글을 읽고 느낀 점은 세상은 너무나도 차갑다 라는 것이었다. 물론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지만 사회에 나갔을 때 내가 이러한 문제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해야
겠다 라는 생각 또한 들게 되는 책이었다. 독서클럽을 하면서 좋은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어 좋았으며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또 해보고 싶다.
마션 (어느 괴짜 과학자의 화성판 어드벤처 생존기,스페셜 에디션)
무엇이 예술인가
아서 단토의 ‘무엇이 예술인가’는 그의 평론가로써의 활동보고서 같은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술의 확장된 개념에서부터 복원에 대해서라든가 예술의 이해나 앞으로의 미학적 미래에 대해서 다루는 일종의 총망라된 예술비평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그의 견해에 따른 내용을 읽다보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설득되어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나 독서토론에서 다룬 책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다양한 시각에서 토론하기도 하고 또 서로 공감해가는 과정을 겪기도 했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끼는 것 같다. 책에서는 예술 중에서도 특히 회화나 조형 같은 미술에 대해서 어려운 용어가 등장하기 때문에 이를 전공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실제로 회화과를 전공하는 입장에서조차 미술사조나 개념을 찾아가며 읽어야 할 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책에서 언급했듯이 마르셀 뒤샹이나 앤디 워홀같은 작가의 선택만으로도 작품이 되는 세상에 살고 있고 더이상 예술작품이 미학적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않아도 가치가 존중되어야 한다는 현대예술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더더구나 공감하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가 친절하게도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논리적인 설득을 하는 것은 물론 부연설명이나 사례들을 잘 기술하였기 때문에 충분히 어려운 예술세계에 대해서 이 책을 통해 사유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다. 특히나 미술비평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대해 접해 볼 수도 있었고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시각도 얻는 경험이 되어서 좋았다. 아무래도 회화과를 전공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고민해야하는 내용이 담겨있어서 더 와닿았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