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편견 (세계문학전집 88)

제인 오스틴은 당대 문학가들이 사회를 비판하는 글을 쓰는 등 교훈을 주려는 글을 많이 썼던 것과는 달리 단지 18세기 영국 중 상류층 여성들의 삶에 대해 그리고자 했다. 이는 현대에 제인오스틴의 글을 읽는 우리로서는 당시 사회상을 정말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이것이 소설의 장점이 아닌가 싶다. 모두다 사회를 비판하는 글만 썼다면, 우리는 그 시대의 단편적인 모습만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글의 시대적 배경은 산업혁명 이후 시골 젠트리계급의 삶을 다루는데, 그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결혼이다. 
이는 글에 나타난 당시 여성의 지위를 보면 알 수 있다. 
여성은 직업을 가질 수 없고, 오로지 가능한 직업은 하찮은 직업 혹은 가정교사이다. 돈도 여유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여성을 굳이 일을 하려 하지 않았다. 남성보다 지적인 면과 다른 모든 면에서 아래로 취급받았고, 가사일에만 전념해야 했다.
여성의 지위가 낮고 결혼을 통해서만 성공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소설 내에서 주인공 엘리자베스의 친구 샬롯이 콜린스와 결혼하는 이유는 그녀의 나이가 많고, 돈을 벌 수 있는 길이 딱히 없기 때문이었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부분은 결혼관이었다. 현대 결혼관과 비슷한 점도 있고,  다른 모습 역시  보이는데, 당시는 중산층이 출현해서 가문보다는 남자의 경재력을 중요시하기 시작했고, 모든 여성의 목표는 경제력이 좋은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되었다. 소설에서 군인들이 그 시골마을을 방문하니 모든 여성이 짝을 찾기 위해 무도회에 가는 등의 장면을 보이는데, 이는 군인이 안정적인 급료를 받고 육체적으로 건강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는 4쌍의 부부의 이야기를 다루는 로맨스 소설로, 단지 러브라인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위컴 같은 악한 인물을 넣어서 소설을 읽는 내내 입체감 있는 모습이 좋았다. 
주인공 엘리자베스와 그녀의 가족들은 자아인식이 중심이 되어, 각자 총명하고 지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따라서 자신을 최상위의 존재로 평가하는 오만과 편견에 빠져있다. 개인의 욕구와 무관하게 움직이는 사회질서와 충돌을 일으키며 다양한 갈등을 경험하게 된다.
이후 서로 이해하게되어 자아인식을 통해 각자의 결점을 깨닫고 상대방의 진정한 모습을 이해하여 상호보완적 인식을 통해 조화로운 결합을 맺으며 이야기는 끝나게 된다. 
독서토론 4주차때 다 같이 모여 소설과 영화를 비교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내가 인상깊어했던 엘리자베스와 다아시의 로맨스를 잘 풀어내서 굉장히 만족스러웠지만 어느부분에서는 소설이 가진 장점을 영화에서는 잘 표현하지 못한점이 아쉬웠다.
전반적으로 왜 이 작품이 꼭 읽어야하는 뛰어난 작품인 지 알게 되었고, 영국에서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뛰어난 작가로 제인 오스틴이 손꼽히는지도 알게 되었다.

7년의 밤

이 책은 최현수가 자신의 딸을 죽였다고 판단한 오영제가 복수를 위해 일어나는 사건이 중심 내용이다. 
최현수는 음주운전으로 인해 오영제의 딸 세령을 죽게 하였다. 이에 최현수는 세령을 강물에 내던지는 ‘선택’을 하였다.
이 선택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면 최현수는 더 이상 자신의 실수로 인해 가족이 고통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세령을 죽인 것을
밝히지 않고 강물에 내던졌다. 본인은 이 선택이 절대 옳은 선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선택은 결국 오영제의 복수를 불러일으켰고 가족을 오히려 더 큰 위험으로 가게 하였다. 그리고 7년 후, 
서원은 오영제와 오영제의 딸, 그리고 자신의 아내를 죽였으며, 마을을 수장시켜버린 최현수의 아들이 되었다. 
이러한 결과를 보았을 때 7년 전의 선택은 옳았다고 볼 수 있을까?
한순간의 실수로 인해 파멸의 질주를 멈출 수 없었던 한 사내의 이야기이자, , 누군가에게 있는 자신만의 지옥에 관한 
이야기 이며, , 물러설 곳 없는 벼랑 끝에서  자신의 생을 걸어 지켜낸 무엇에 관한  이야기이다.
라는 작가의 말이 인상깊었다. 이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지만, 본인이 지키고자 했던 서원을 위해 질주를 
멈출 수 없었던 최현수의 상황을 더 잘 보여주게 하는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위대한 개츠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살면서 모두 한 번쯤은 들어봤을 ‘위대한 개츠비’. 나 역시 살면서 꽤나 많이 들어봤지만 정작 영화나 책 어떤 작품도 보지 못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작품을 알고 있는 데에는 그만한 작품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독서클럽이라는 명목으로 영화와 책을 둘 다 보고 싶었다. 책을 본 후에 영화를 봤었는데 영상이 글보다는 친숙하기 때문에 더 인상깊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오히려 책이 개츠비라는 인물에 대해 상상하면서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책이 더 흥미롭게 다가왔다. 다 본 후에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제목을 드디어 이해할 수 있었다. 개츠비… 남자로서 봤을 때 정말 멋있는 남자다. 사실 미국의 경제적 호황 속에서 금전적인 성공을 이루기 위해 범법이 만연했던 시대에서 개츠비는 순수한 사랑을 추구해서 ‘위대한 개츠비’라고 지어졌다는 이유가 있지만 ‘개츠비’라는 인물을 현 시대에 반영해도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는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 시대. 예를 들어, 서울만 생각해도 다를 바가 없다. 물질만능주의가 만연하며 사람을 다양한 조건으로 재가면서 만나는 세상이다. 어쩌면 그 당시나 지금이나 굳이 사랑이 아니어도 ‘순수함’이라는 단어를 무언가에 대입시키는 것 자체가 정말 어려운 게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사랑은 순수했지만 이 사랑을 위해서 개츠비가 일삼았던 비도덕적인 행동들은 당연히 옳지 않다. 허나 그래서 더 개츠비의 사랑이 빛나보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를 비롯한 누군가에게 살면서 이 정도로 사랑했던 사람이 있고 이를 위해 그런 행동들을 할 수 있냐고 물어보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런 개츠비가 사랑하는 대상인 데이지. 데이지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도 다양하나 개인적으로는 크게 인상깊은 바는 떠오르지 않는다. 어쩌면 떠오르지 않는 이유가 개츠비에 대한 인상이 너무 강해서 그러지 않나 생각한다.

삶을 살아가면서 무엇이든 과한 것은 좋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중용의 덕’처럼 말이다. ‘위대한 개츠비’라는 소설이 재미있는 이유는 앞서 말했던 그 시대 상에서나 현 시대에서나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작품 자체나 작품 내 대사들이 굉장히 은유적인 표현들이 많기 때문에 개츠비의 사랑을 더 위대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The Hunger Games (School and Library Binding) (헝거게임)

우선 영화의내용을 책으로도 볼수있어서 너무좋았다. 영화특성상 몰입하다가 놓치는부분이나 다시보고싶은 내용이 생기기마련이다, 책을통해 의아했던 부분들이 다소 해소되었다. 헝거게임을 영화로볼때는 액션의 이펙트들이 눈에띄었다면, 책으로볼때는 등장인물들의 대사나, 성격들을 좀더잘 파악할수있고 느낄수있는 장점이 있었던것같다.

주홍글씨 (문예세계문학선 12)

 책의 초반에는 인물들에 대한  묘사가 잘 나타나있다. 헤스턴프린은 이 책의 주인공으로 화려한 외모를 지니고 있지만, 실수를 저지른 불륜의 여인이다. 로저칠링워드는 지성인이지만 육체적 결함이 있는 인물로 등장한다. 인물들의 묘사가 단순히 등장인물의 겉모습만을 보여주는 것뿐만 아니라, 내면의 성격도 독자로 하여금 예측할 수 있게 한다.                                                                
 
책의 중반부에서는, 칠링워드가 딤즈데일 목사를 치료해준다는 명목으로 목사와 동거한다. 칠링워드는 목사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목사를 괴롭게 만들고 그 스스로가 점점 추악하게 변한다. 이 때문에 딤즈데일 목사는 죄책감에 괴로워하게 된다. 심지어 딤즈데일 목사는 죄책감에 괴로워하다 스스로 처형대 위에 올라가기도 하고, 그 위에서 헤스터와 펄의 손을 잡고 생기를 느끼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 헤스턴프린의 A가 원래는 ‘adultery’ 간통을 의미했지만, 그녀가 이웃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봉사를 실천함으로써 ‘angel’ 천사를 의미하는 단어로 바뀌었다. 미움이 사랑으로 변화하여 그녀에 대한 평판이 긍정적으로 바뀐 것이다. 이는 헤스턴프린의 본연의 선한 성품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고, 이 책의 궁극적인 주제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책의 후반부에서는 딤즈데일 목사가 처형대에 올라가 자신의 죄를 고백한 후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딸인 펄은 그가 죄를 고백하기 이전에는 어린아이 같지 않은 야성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목사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다. 하지만 목사가 죄를 고백하자 펄은 동정심이 생기고 목사에게 입을 맞춰주었다. 이 책에서 펄은 딤즈데일 목사와 헤스턴프린의 사랑의 결실이자 그들의 죄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목사가 자신의 죄를 고백한 후 펄이 변화한 모습은 작가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왜 세계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 (유엔인권자문위원이 손녀에게 들려주는 자본주의 이야기)

2019-2 독서클럽

 

 

독후 감상문

 

 

1611146

문헌정보전공 임소연 

 

 

  지난번에 이 책의 기초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을 읽었기 때문에, 이번 책은 조금 더 쉬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다. 또한 자연스럽게 두 권의 책을 비교하면서 읽을 수 있었다.

  책 내용 전반에서 느껴졌던 것은, 장 지글러가 처음에 쓴 책보다 더 솔직히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책 속에서 그는 계속 소리치는 것 같았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에서 민감한 주제가 나왔을 때 온건한 어조를 사용했던 것과 달리, 이 책에서는 회피하지 않고 직접적이고 강한 문체로 말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1, 2장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전 세계가 자유주의에 입각한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선택하여, 정치적으로는 자유를 얻었으나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자유를 얻지 못했다는 그의 주장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작가의 주장이 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이끌어내기 어려워 보였다. 현재 경영학, 경제학, 인문학 등 수많은 학문에서 마르크스의 사상을 공부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르크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학문에 대해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개방적이라는 미국 사회에서도 유사한 사회적 통념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면, 장 지글러의 주장은 더욱 지지를 받기 어려울 것 같다. 그리고 작가 역시 이를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집필활동을 하는 이유는, 그가 언급했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다.’ 라는 작가의 소신 때문일 것이다.

  사람이 소신 있다는 것은 벌이기도 하다. 그러나 개인의 힘으로 해결이 불가능한 일에 무모하게 부딪히는 사람들 때문에 세상은 바뀌는 것 같다. 곧 사회인으로서의 첫 발을 내딛게 될 나에게, 어떤 태도로 살아갈지 영감을 주는 책이었다.

 

햄릿 (창비세계문학 50)

이대로냐, 아니냐, 그것이 문제다.
어느 쪽이 더 장한가, 포학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마음으로 받아내는 것,
아니면 환난의 바다에 맞서 무기 들고 
대적해서 끝장내는 것?
-<햄릿> 3막 1장 57:91 中 일부
본래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로 알려진, 햄릿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이고, 햄릿을 읽어보지 않은 이들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구절이다. 죽는 것은 다만 잠드는 것, 그 뿐이라면 두려울 일은 없으나 잠든 후 우리가 꿈을 꾸듯, 사후에 보게 되는 것이 악몽일까 두렵다는 햄릿의 대사는 몹시 시적인 표현임에도 불구하고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햄릿의 심정에 공감하는 것이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햄릿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을 꼽으라면 나는 햄릿의 이 대사와 거트루드가 오필리아의 죽음을 알리는 대사 사이에서 한참을 방황할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멋진 글을 쓸 수 있는 걸까. 한 번이라도 글을 쓰기 위해 자리에 앉아 고민해본 사람이라면 셰익스피어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실로 언어의 마술사라해도 좋았다.
어린 시절 처음 햄릿을 접했을 때 내가 본 것은 지금과 같은 것이 아니라, 초등학생, 중학생을 위해 이야기글로 편집되어 나온 것이었다. 자극적인 내용이 모두 순화되고, 아름다운 언어들을 고쳐낸 책에는 지금같은 매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나머지 작품들도 그랬다. 오셀로, 리어왕, 멕베스, 로미오와 줄리엣. 나는 비극을 싫어했기 때문에 더 그럤을지도 모른다. 소설을 몹시 좋아하던 고등학생 시절에도 처음 접한 인상은 변하지 않았어서, 셰익스피어가 천재라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었다. 사실 그때에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전부 소설이 아니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어렴풋이 들어는 봤던 것도 같지만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우연히 접한 그의 작품, <템페스트>에서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러니까, 햄릿도 원래 소설이 아니라 극본인 거군요? 하고. 템페스트에 대한 인상은 흐릿하지만 그 뒤 찾아보았던 그의 다른 작품에 대한 인상은 꽤 선명하다. 햄릿, 십이야, 뜻대로 하세요, 말괄량이 길들이기, 한여름밤의 꿈, 베니스의 상인. 모두 어린 시절 소설로 읽었던 때와는 달랐다. 그것은 그 문장들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음에도 몹시 난해하고, 내가 이해하기 곤란했다는 것 외에도, 내용이 그랬다. 
지나치게 차별적이었다!
일단 남녀차별이 끔찍했다.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별 생각 없었다. 당시에 미약하게 나마 그런 이야기들이 나오는 중이었음에도, 나는 사실 사회문제에는 늘 관심이 없었다. 단지 그런 내게도 느껴질 만큼 철저하게 차별적이었다. 거트루드에 대한 햄릿의 그 수많은 폭언, 가여운 오필리아를 향하는 냉대는 사랑하는 이를 끊어내려는 것보다는 화풀이에 가까워 보였다. 햄릿은 지나치게 신경질적이고, 늘 화가 나 있는. 이해할 수 없는 남자였다. 아니 어머니가, 그것도 왕비인데. 재혼 좀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걸 그런 식으로 저열하고 폭력적인 언어들을 사용해 질타해야했나? 오필리아는 대체 뭘 잘못했다는 말인가. 나는 도저히 아름다운 문장들에 심취할 수 없었다. 가여운 여성들의 처지, 의외로 괜찮은 왕인 것 같은 클로디어스 등을 보다보니 햄릿이 좀 더 이성적이었으면 괜찮았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아 도저히 내용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러나 최근들어 다시금 햄릿을 읽어볼 기회가 생겼다. 이제 더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기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나는 또 깜짝 놀랐다. 나도 글을 한 번 써보겠다고 이리저리 궁리했던 날들이 지난 후라 더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고등학교 시절에 봤던 것보다 이 번역이 훨씬 훌륭해서 일수도 있겠다. 다만 나는 이 말들이 매우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오로지 대사로 밖에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행동지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간과하게 되는 여러가지 상황들. 그리고 뚜렷하게 드러나지는 않는 상황들을 고려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다만 햄릿은 고등학교 시절의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독선적이고 예민한 인간은 아니었다. 그는 분명 미숙한 데가 있는 젊은이었으나, 치열하게 고민하고 슬퍼하는 아들이고 왕자였으며, 인간이었다. 오랜만에 다시 펼친 책에서 등장인물들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꽤 즐거운 경험이었다.
나는 햄릿을 세 번에 걸쳐 읽었다. 처음은 초등학생 무렵이었고, 다음은 중고등학생 시절, 그리고 대학생 시절.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같은 책을 읽어도 느끼는 바가 다르다고들 한다. 나의 경우에는 완전히 같은 책을 읽은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감상은 비슷할 것이다. 처음 읽은 햄릿은 재미가 없었고, 다음에 읽은 햄릿은 이해할 수 없었으나, 비로소 이제야 나는 그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슬픔, 똑같은 사람을 잃었는데 어째서 당신은 나만큼 슬퍼해주지 않느냐는 원망, 연인의 부정을 의심하는 괴로움, 누구도 신뢰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고통, 그런 삶에 대한 회의와 그럼에도 느끼는 죽음에 대한 공포. 그의 여러가지 감정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꽤 놀랍다. 어째서 이런 차이가 생겼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독서의 즐거움이 아닐까. 언젠가 또 많은 시간이 지나서 다시 한 번 이 책을 읽었을 때. 그때의 나는 어떤 생각을 할까가 기대가 된다. 그러니 그때를 위해서, 짧은 글이나마 내가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남겨놓는 것이다. 

쇼코의 미소 (최은영 소설)

 

상상력인재학부 1991318 조민

 

20192학기에 진행된 독서클럽에 참여하게 되면서 최은영 작가님의 쇼코의 미소란 책을 읽었다. 이번 독서클럽에서는 쇼코의 미소와 미카엘라라는 작품을 중심으로 활동을 진행하였는데 그중 먼저 쇼코의 미소를 읽은 소감을 말하려고 한다. 쇼코의 미소를 보고 처음 든 생각은 감정이 정말 잘 느껴진다.”였다.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쇼코를 찾으러 다니는 것 같았고 쇼코가 내게 기대어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표현들이 섬세해서 감정이 잘 와닿았다고 생각한다. 난 소유가 쇼코를 통해 많은 것들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 쇼코를 생각하면 그애가 나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을까봐 두려웠었다.” 이 말을 통해서 느낄 수 있었다. 소유에게 쇼코란 정말 큰 존재였구나. 물론 소유는 그걸 완전하게 인식을 못 한 것 같았지만 난 그렇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소유가 쇼코를 통해 할아버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쇼코 덕분에 소유는 할아버지와 더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소유와 쇼코가 미스터 김에게 인사드리는 장면이 정말 인상 깊었다. 그 둘 사이의 관계에는 정말 많은 감정들이 얽혀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내 경험을 떠올리게 되었다. 나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항상 두려운 점을 찾아 고민했던 것 같다. 늘 상대방의 감정을 더 중요시했었다. 하지만 소유와 쇼코의 우정을 통해서 서로의 감정 교류가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얻게 된 감정의 소중함을 잊지 않기로 결심했다.

다음은 미카엘라에 관한 소감이다. 이 작품은 딸의 관점, 엄마의 관점을 둘 다 엿볼 수 있는 구성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더 애절하게만 느껴졌다. 딸은 항상 자신을 먼저 생각하지만 어머니는 딸을 먼저 생각한다. 서울에 올라와서 마땅히 잘 곳도 없으면서 딸에게 거짓말을 하고 찜질방에서 주무시는 엄마를 보며 마음이 우울했다. 세상의 정말 많은 엄마들은 자식을 위해서 이렇게 사는구나, 비록 소설이지만 이 소설 속 어머니는 우리들의 엄마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찜질방에서 만난 동무를 찾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이야기도 정말 인상 깊었다. 세월호 사건으로 손녀를 잃은 할머니의 동무의 이야기를 접하고는 마음이 정말 아팠다. 세월호 사건은 내가 중학생 시절에 일어난 사건이라서 난 그 사건을 기억할 수 있다. 그리고 난 지금 그 사건 속에 있던 분들보다 더 나이가 많은 어른이 되었다. 그분들도 나처럼 어른이 될 수 있었겠지라는 생각이 들어 먹먹했다. 이 작품에서 아빠는 다수의 선한 사람들의 세상에 대한 무관심이 세상을 망친다고 말한다. 정말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안타까운 사건을 우리는 그저 안타까워하기만 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앞으로 사람들이, 세상이 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아이는 부모의 삶을 지키는 천사라고 생각했다. 나도 작가님이 말하고자 하시는 것처럼 누구도 그 천사를 데려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을 통해서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고 변화의 필요성을 느낄 수 있었다.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통해서 용기를 내어 변화하기를 바란다.

헝거 게임

[독서클럽2-헝거게임조] 팀장 1931107 김시은
  ‘헝거게임’이라는 영화는 내가 한창 영화를 보기 시작한 중학교 시절 보았다. 이 영화를 보기 시작하면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헝거게임의 1편인 판엠의 불꽃은  주인공인 켓니스가 헝거게임이라는 게임에 참여를 하면서 벌어지는 다사다난한 이야기이다. 헝거게임이란 배틀필드 같은 형식으로 구성되어있는 어느 구간에서 최후의 승자가 나올 때까지 서로를 죽이는 게임의 형식이다. 극 중 주인공인 켓니스는 헝거게임을 하는 사회 자체에 불만을 가지는 주인공이다. 하지만 1편에는 게임자체의 부정과 사회의 악폐습에 대한 혁명적 의지가 보이지 않고, 단순한 형식의 영화로 액션에 집중적으로 구성되어있다.
  사실 독서클럽에서는 아니였지만 원작소설도 읽어보았는 데 원작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왜? 헝거게임을 시작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철학적인 부분의 설명전개가 부족하야서 우리 사회에서는 처음보는 일이기 때문에 그 영화 자체가 이상한 것처럼 공감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의 연기력과 카메라 무빙, CG가 화려하여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액션 영화의 매력을 가득 담고 있는 영화라고 생각했고, 후에 나온 2,3,4편을 모두 보았더니 헝거게임이라는 영화는 캣니스라는 주인공이 그러한 사회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본질적으로 접근을 하였고, 개연성이 점점 맞아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심지어 반전을 주고 투쟁을 하기 위한 위법과 대가 그리고 권력과 정치의 악행이 적나라 하게 들어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영화는 앞서 말했다 싶이 소설을 영화로 표현했기에 부족함이 있었다. 차라리 드라마 시리즈로 하는 것이 좀 더 완벽한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