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 (한국 200만 부 돌파, 37개국에서 출간된 세계적 베스트셀러,새로운 시대, 새로운 정의)

정의란 무엇인가 책 중에서 이번 독서클럽 시간에는 ‘소수집단 우대 정책 논쟁’관련된 부분을 읽었다.
소수집단우대정책에 대해서 평소에도 관심이 있었기에 이 부분을 읽으면서 평소 나의 생각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소수집단 우대정책에 전부터 찬성을 하고 있었기에 관련 내용을 읽고 가장 떠올랐던 점은 ‘사람들이 만약 자신이 소수집단이라면 이 정책에 반대를 할 것인가’ 이었다.
우리는 언제나 소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소수라는 것을 작은 의미로만 보지 않아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성별, 학벌, 장애에 따른 차별 비정규직, 외국인 근로자에 대한 차별은 심각한 사회문제이다. 어떤 사람들은 단지 그 집단에 속한다는 의미만으로도 오랫동안 차별을 받아왔다면 차별을 인정하고 그동안 받아온 차별에 대한 손해를 보상해 주어야 한다. 차별받아온 사람 혹은 집단에게 적절한 보상을 제공하지 않으면 사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사회 통합, 화합을 이루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통합과 화합이 어려워지고 소수집단에 대한 일종의 존중을 해주지 않으면 사회 체제를 유지를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단순히 현재의 결과의 머물러 결과가 극적으로 좋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으로 전체적인 큰 그림을 못 보면 안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찬성 측의 입장이 강했지만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반대 측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을 해보았다.

소수집단우대정책에 대한 반박 입장 부분을 읽으면서 “과거에서 잘못한 일을 왜 우리가 보상을 해주어야 하나?’라는 의문점이 들었다.
책에서 언급한 부분인 인종별 우대 정책은 오히려 인종을 의식하게 만들어 또 다른 차별을 존재하게 한다는 점이 소수집단우대정책을 찬성하면서 생각해보지 못했던 점이라 인상 깊었다.
단순히 “소수집단은 그동안 피해를 받았으니 당연히 보상해 주어야 한다.”라는 식으로 얇게 생각한 것 같아 스스로에게 부끄러웠다.
또한 보상받는 사람이 애초에 피해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은 찬성 측의 입장이 강했던 나조차 수긍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우대 정책으로 인한 득보다 실이 더 많을 수도 있을 가능성에 대해 깨닫게 되었다.

아직 ‘정의란 무엇인가’를 전부를 다 읽지 않아 이해하는데 약간의 어려움이 존재했다.
이번 내용을 통해 나의 고정적인 소수집단 우대정책에 대한 찬성 의견보다 반대 의견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해볼 수 있던 점이 이번 독서에서 얻어 가는 점이라 생각한다. 소수집단우대정책은 찬성과 반대의 의견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이고 차별에 대해 민감한 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정의란 무엇인가 (한국 200만 부 돌파, 37개국에서 출간된 세계적 베스트셀러,새로운 시대, 새로운 정의)

 이 책은 마이클 샌델의 입장에서 정리된 정의에 관한 내용을 담은 책이다. 그중 나는 제7장 ‘소수 집단 우대 정책’에 대하여 읽고 클럽 원들과 토의를 진행하였다.
 사실 처음, 나는 소수 집단 우대 정책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소수 집단, 불우한 이웃 등을 구제한다는 목적은 좋은 정책이지만, 그로 인하여 오히려 소수집단이 아닌 사람들이 차별받는다고 생각하여, 별다른 근거 없이도 안 좋아하였다. 그렇지만 이 챕터를 읽고 다른 이들과 토의하면서 근거도 생기고 좀 더 깊게 생각해보는 시간이 생겼다.
 소수집단, 그들이 소수집단 우대 정책을 받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과거 차별에 대한 보상과 다양성 증대이다. 다양성 증대에 관해서 반박할 내용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확실하게 많은 곳에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소수자들이 존재하면, 일반 시민들은 모르는 소수자들의 불편한 점이나 생각에 대하여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고, 그로 인하여 그 소수자들의 행복이 더 증대되기 때문에 이에 대하여는 나도 불만이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과거 차별에 대한 보상이란 내용의 소수집단 우대 정책의 근거는 정말로 말이 되지 않았다. 과거의 차별에 대한 보상, 말은 좋다. 그렇지만 왜 과거의 피해에 대한 보상을 후손인 우리가 배상해야 하는가? 그리고 과거, 그 소수집단이 힘들었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보상 또한 그 과거의 소수집단에 해야 하는 것이지, 현재에 그저 그 소수집단에 속했던 사람이라고 모두 혜택을 누리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과거의 배상으로 인한 소수집단을 우대하는 것이 아닌, 현재 차별받고 있는 소수자들을 더욱 구제하는 것이 바르다고 생각한다. 소수집단은 시대에 따라 바뀐다. 그렇지만 소수집단우대정책은 바뀐 소수자들도 살리지만, 바뀌어서 이젠 소수자가 아닌 사람들까지 혜택을 주기에 잘못되었다.
 소수집단우대 정책, 분명 격차를 줄이고자한 좋은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과거의 차별에 대한 보상이라고 무조건적인 혜택을 받는 것은 옳지 않다. 시대가 지나며 소수집단이 바뀌었듯이 소수집단우대정책에 있던 소수집단도 과거의 소수집단은 버리고 현재의 차별받고 힘든 소수집단만 챙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정의란 무엇인가 (한국 200만 부 돌파, 37개국에서 출간된 세계적 베스트셀러,새로운 시대, 새로운 정의)

7장 소수집단 우대정책에 대해서 읽었다.
 소수집단 우대정책이란 미국에서 소수집단에 대한 차별을 시정하기 위해서 실시한 정책이다. 이는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이 된다. 이 책에서는 셰릴 홉우드의 사례를 들고 있다. 셰릴 홉우드는 법학 대학원에 들어가고 싶어하지만 불합격 하였고, 같은학교에 지원한 자신보다 상대적으로 성적이 낮은 흑인이 소수집단 우대정책을 이용하여 합격하였다. 이것이 정당한지 혹은 부당한지 묻는 질문으로 책의 내용이 시작한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진 소수집단 우대정책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정책은 ‘그 누구의 권리도 침해하지 않는다.’라는 로날드 로월킨의 말처럼 그 누구의 권리도 침해하지 않으며 소수자에게 기회의 평등을 제공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수자가 아닌 사람들은 역차별이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 이 정책을 시행하지 않게 된다면 소수자와 소수자가 아닌 사람들 간의 격차는 점점 커질 것이다. 따라서 나는 소수집단 우대정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반대측 입장에서는 조상들이 차별한 것을 왜 우리가 보상을 하면서 피해를 입어야하냐고 주장한다. 하지만 나는 소수자에 대한 차별은 과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까지 이어오기 때문에 이를 보상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수집단 우대정책은 여러가지 논쟁을 일으켰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찬성측 입장이 더 와닿았다. 클럽원과 토론을 진행하면서 내가 몰랐던 사실도 알게 되고, 여러가지 관점에서 이야기 할 수 있었다. 

정의란 무엇인가 (한국 200만 부 돌파, 37개국에서 출간된 세계적 베스트셀러,새로운 시대, 새로운 정의)

7장 소수 집단 우대 정책 논쟁 : 권리 vs 자격.
 셰릴 홉우드는 텍사스 법학전문대학원에 지원했지만 떨어지고 만다. 나중에 자신보다 낮은 점수를 받은 학생이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이 차별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소송을 걸었다. 나는 셰릴 홉우드의 역차별로 인한 소송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대학에서는 텍사스 법조계에 인종적 민족적 다양성을 높이기 위해 인종별 점수차를 뒀다고 말했다. 맞는말이다. 여러 인종을 섞어 놓으면 서로의 문화, 사회 등에서 많은것들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몇 문제 차이정도는 이런 장점이나 상대적으로 뒤처진 교육환경을 가진 것등을 고려해봤을때 충분히 점수차를 둘만하다고 본다. 
 대학이 경매로 입학생을 뽑아도 될까?
이 질문에 대해서 든 생각은 그래서는 안된다 였다. 대학에서 정한 제도일지라도 그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원하는 꿈에 다다르기 위해, 원하는 대학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중에 단지 부모님이 돈이 많다고 돈만 내고 들어오는것은 열심히 노력한 사람에게 공정한 기회를 주지 못한다. 정원 외로 뽑는다고 해도 경쟁을 통해 들어온 학생들보다 학업성취도가 현저히 떨어질 것이고 그것은 대학 입장에서도 불이익이다.

서촌 홀릭 (되새길수록 좋은 서울의 한옥마을 이야기)

 한국의 문화유산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어떤 문화재를 떠올릴까? 경복궁, 한복, 한옥 등등 다양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들이 있지만 이 책은 그 중 한옥을 중심으로, 그리고 우리나라의 서촌을 중심으로 글을 써간다. 무엇보다 책을 선택하면서 흥미로웠던 점은 저자가 미국인이라는 것이다. 미국인이 한국의 문화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직접 한국어로 집필까지 했다니 대체 어떤 사람일까하는 호기심이 앞서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저자에 대해서 흥미를 가졌던 것은 예상 외로 이 책을 읽기 수월하게 만들어 주었다. 책은 저자의 경험과 생각을 그대로 옮겨적은 내용이었기 때문에 저자의 서촌을 둘러싼 한국의 문화, 한옥 등에 관한 생각과 자신이 근무했던 일본의 교토, 자신의 본 거주지 미국의 미시간 등의 문화도 덧붙여 한국을 자세하게 서술했다. 고등학교 때 미국과 일본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고, 그에 관련된 문화에 관해서 소논문을 작성한 적이 있어 이 책이 더욱 흥미롭게 읽혔다. 물론 우리나라의 문화보다는 미국과 일본의 문화에 초점을 두어서 작성했었다. 우리나라는 너무 익숙하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저자의 입장에서도 한국은 외국이기 때문에 나와 같은 생각을 했으리라 믿는다. 그래서 그런지 외국인이 생각하는 한국은 어떤지 알 수 있게 해준 책이었다.
 저자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저자인 로버트 파우저는 미국 미시간주에서 태어나 일어일문학을 전공하고 언어학 석사과정을 밟았다. 1980년 초 서울대에서 한국어 공부를 시작하여 고려대 영어교육과 교수, 교토 대학교 한국어 교수, 가고시마 대학 한국어 교수,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 부교수를 맡았다. 2012년 한국어 교육 문화체육 관광부 장관 표창장까지 수여했다. 저자는 1990년대부터 한국문화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한국의 전통가옥과 한국 특유의 정서에 매료되어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인이 한국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돕는 영국왕립 아시아 학회 한국 지부 이사로, 서촌 지킴이로 활동했다. 이 책에는 1980년 대 초부터 저자 현재까지 보고 느낀 한옥마을과 한국문화의 변화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다.
 저자는 한국의 대학교가 반복적인 논문 생산을 권하는 것이 싫었다고 한다. 젊은 학자처럼 논문만 쓰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논문 쓰는 것에 회의감에 지쳐갈 때 쯤 서울에서 ‘서촌’이라는 새로운 매력을 발견했다. 2008년에 저자가 처음보게 된 서촌은 지금처럼 ‘뜨는 동네’가 아니었다. 한 세기가 새로 시작됐는데도 여전히 1980~1990년대의 정취를 찾아볼 수 있는 특이한 곳이었다. 이런 모습은 매일 빠르게 변화하는 서울에서 낙후된 것 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저자는 편안함을 느꼈다. 서울에 숨은 시골마을 같았다고 한다. 서촌이 재개발로 없어질 위기에 처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자는 보존활동을 시작했다. 
 저자는 한자를 통해서 서촌에 대해서 소개한다. 한국어와 일본어를 공부하며 글자의 개연성이 깊은 한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첫번째로 사이 간間 – ‘사람사이’라는 말이 저자가 오랫동안 살았던 경복궁 서측의  ‘서촌’이라는 동네를 잘 설명해준다. 서촌사람들은 각각의 골목처럼 어딘가에서 꼭 한번은 이어지는 긴 네트워크 안에 살고 있다.
두번째로 시간 時間 – ‘때 사이’ 서촌에는 여러 ‘때’가 공존한다. 시간의 흔적이 풍부해진다. 거리마다, 골목마다 여러시대의 흔적을 만날 수 있어 그 동네 특유의 정서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레트로(Retro)적이다’=’복고풍’ –> 레트로 때문에 서촌이 상업화되어 거주자가 줄어들어 ‘정’이 없어지는 모습은 안타깝지만 젊은이들이 레트로적인 분위기를 소비하는 모습도 아름답다.
세번째로 공간 空間 – ‘하늘에 있는 사이’ –> 물리적 장소에 있는 콘텐츠, 물리적 장소로서의 서촌은 콘텐츠로서 사람과 시간의 흔적은 물론,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을 포함하고 있다. 인왕산의 치마바위부터 북악산의 풍경까지 이어져 있다.
 

 무엇보다 저자가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은 ‘보존은 선善 이고 개발은 악惡일까?’이다. 북촌의 관광 상업화 문제에 대해서 몇몇의 상인들은 관광객들을 유치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선택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역사를 활용하고 새로운 콘텐츠를 만드는 것보다 ‘있는 그대로’가 가장 좋은 콘텐츠라고 주장하는 동네의 젊은 층들이 있었다.

 서촌은 ‘세종 마을’이라는 새로운 지역명칭으로 바뀔 뻔했다. 하지만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 되었다. 새로 만들어진 말보다 이곳에서 먹고사는 주민이 편하게 사용하는 지역명을 지키고 싶어하는 경향을 엿볼 수 있다. 이런 차이는 개발중심인 모더니즘과 무질서하면서도 유기적으로 변화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차이와도 비슷하다. 역사보존은 단순한 미적 낭만주의가 아닌 고정관념이라는 무게감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아나가는 해방적 행위이다. 중요한 것은 선악이 아니라 ‘소통의 방법’, 소통하는 과정에 ‘보존 선’에 대한 희망을 주며 공감대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태평천하 (베스트셀러한국문학선 11)

 수험생 시절에 입시 공부로 짧은 부분만을 접해 봤던 책 태평천하를 저자 채만식에 대해 관심을 갖고 알아보기 시작하면서 원문 전체를 읽어 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새롭기도 하고, 좀 더 심층적으로 책을 느낄 수 있게 된 것 같다.
 태평천하를 읽고 나면 일제 강점기 시대의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 이야기는 일제 강점기인 식민지 시대를 태평천하라고 여기는 윤직원 영감을 주인공으로 전개된다. 윤직원 영감은 과도한 구두쇠 기질을 갖고 있으며 사회적 질서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여성 편력마저 심한, 평민 출신의 대지주이다. 그는 부를 축적했지만 여전히 그에겐 신분 상승 욕구가 간절했으며, 가문의 번성을 위하여 네 가지 방안을 생각해 본다. 첫째가 가짜 족보 꾸미기, 둘째가 향교의 직원 자리 구매, 셋째가 양반집안과 혼인하기, 넷째가 손자들을 군수와 경찰서장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아들 창식은 노름에 빠졌고, 손자 종수도 방탕한 생활에 살았으니 그의 믿음은 오직 일본으로 유학 간 손자 종학을 향하게 되었다. 하지만 균열은 시작되었다. 손자 종학이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경찰에 피검되었다는 사실을 듣고 윤직원 영감은 경찰서장이 되었으면 했던 종학에게 분노하게 된다. 이 책은 결국 한 집안의 몰락 과정을 바라보고 있는데, 우리는 이 과정을 지켜보며 여러 생각을 할 수 있다. 윤직원 영감의 악행을 일삼는 모습, 소작인들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괴롭게 하는 모습, 그의 왜곡된 의식 전부와 이기적인 행동들을 따라가다 보면 분노할 수밖에 없다. 그가 일제 강점기, 식민 통치 시절 신흥 지주들의 반민족적이고 타락한 모습을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것은 결국 그 시절에 전형적인 인물상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힘들던 사람들을 착취해 가며 자신들의 쾌락을 챙기고, 친일 행각을 스스럼없이 하고, 매춘과 도박을 하는 그런 사람이 일제 강점기 지주들의 모습이었다는 게 숨이 턱 막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저자 채만식이, 비난하고자 하는 이러한 모습들을, 서민층이었던 한 인간이 지주가 되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몰락해가는 과정을 쭉 지켜보도록 하면서 서술한 것은 잘한 선택이다. 사람들을 더욱 상황 속에 빠져들게 해 공감하도록 하고 그럼으로써 더욱 분노할 수 있게 만든다. 자신이 속한 민족, 사회, 주변 환경들을 무시한 채 이익, 재산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태도를 가진 이들은 책을 읽은 후 한 번쯤 자신을 되돌아볼 필요성이 있다고 시사하는 듯하다.

도쿄 미술관 예술산책 (크리에이티브 여행가를 위한)

  여행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에 설렘과 기쁨 같은 감정들, 아름다운 풍경들, 수많은 상황들이 담긴 것처럼 떠올리기만 해도 감정과 생각이 풍부해진다. 수많은 여행 중 한 가지 주제와 테마가 있다면, 그중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분야로 이루어진 여행을 떠난다면 나의 세계가 더 깊고 다채로워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미술과 예술이라는 분야에 관심이 많고, 전 세계의 미술관과 박물관에 가는 것이 나의 인생 버킷리스트이다. 따라서 먼저 미술관 여행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생각이 궁금했고 이 책을 통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특히 이 책을 선정한 데 있어서는 책 뒤표지에 적힌 작가의 말이 인상 깊었다. 작가는 10여 년 전 도쿄의 한 미술관에서 추상화 한 점을 보고 ‘어떻게 하면 더 창조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렇듯 예술 작품은 단순히 작품을 표면적으로 경험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이에게 영감을 전달하고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예술로써 소통하는 삶, 내가 지향하는 중요한 가치이자 내 삶의 목표이기도 하다. 이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미술관 여행을 함으로써 창조자의 관점에서 미술과 예술을 대하는 시선과 태도를 배울 수 있었다.
  먼저 작가가 국립 신미술미술관에서 발견한 크리에이티브의 본질은 거창한 건축 사상도, 세계적인 명성도 아닌 소박한 마음이었다. 미술관 1층에 커다란 대기 공간을 두어 다른 모든 것보다 사람을 생각하는 순수함과 사랑을 강조한 점이 크리에이티브의 본질이라고 여긴 것이다. 작가의 생각을 읽으면서 창작자는 미적인 측면에만 신경을 쓰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넓고 다양한 범위의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 또한 넓은 시야를 가진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또한 모리 미술관에서는 이불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는데, 내장을 이어 놓은 것 같은 솜뭉치들, 토하는 개 시리즈 등 혐오스럽고 괴기스러운 감정을 유발하는 작품들에 의문을 품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한 작품을 본 순간 이전에 봤던 불쾌한 작품들은 새로운 의미와 해석으로 다가왔고, 어쩌면 이것이 크리에이티브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때때로 우리가 예술 작품을 마주할 때, 낯설기도 하고 이해 불가능할 때가 있다. 그러나 어쩌면 이것들은 새로운 감정과 생각들을 마주하고 경험할 수 있는 기회일 수도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낯설고 새로운 것들을 통해 자신이 속한 세계의 경계를 깨고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오카모토 다로 기념관에서 작가는 다로의 그림 실력이 그렇게 뛰어나지는 않다는 데 동의했다. 그림을 그리는 게 직업인 화가가 그림 실력이 뛰어나지 않다는 것은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다로는 얌전하고, 순종적이고, 대세를 따르는 것에 반대하는 확고한 신념을 지녔다. 원만한 사람의 인생은 충만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일단 만족하거나 안주해 버리면 결코 무한대의 저편까지 건너갈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란다. 그의 말은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작품이라는 것이, 특히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공개하는 전시회에 있는 작품이 꼭 보기 좋아야 하나? 외관적으로 완벽하고 아름다워야만 하나? 라는 의문을 갖게 해 주었다. 때로는 미완성, 여백, 어긋남 등 완벽하지 않은 요소들이 더 크리에이티브할 수 있고, 또 세상이 에프터를 따라갈 때, 비포를 선택할 줄도 알아야 하고, 완벽을 요구할 때 차별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용기와 결단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비록 책을 통해 글과 사진으로만 도쿄의 미술관 여행을 했지만 작가들의 시선과 생각을 따라가고 나 자신의 생각과 감정까지 돌아보니, 마치 실제로 작가와 함께 미술관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었다. 훗날 예술로써 나의 생각과 감정을 많은 이에게 전달하여 위로와 도움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진 나에게 이 책은 창작자의 시선에서 여러 작품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방법, 또 그밖에 고려해야 할 것들을 알려주었다. 특히 다양하고 넓은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의 중요성을 알게 됐고, 내가 관심 있는 분야를 잘 알고 배우기 위해서는 현재 내가 사는 세계를 넘어 더 넓은 세계로 향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또한 작품을 만들거나 그릴 때, 대세를 따라가기보다 솔직하게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작업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 객관화와 성찰을 통해 자기 자신을 알고 이해하는 것, 개성을 찾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예술에 관심이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예술은 우리네 삶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삶의 중심에 위치한 나 자신과 만나는 기회를 준다. 스스로를 돌아보는 삶은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나아가 앞으로의 삶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다음에 미술관에 갈 때는 이 책을 통해 다짐하고 배운 ‘창작자의 시선에서 미술관을 여행하기’를 실천해야겠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애거서 크리스티 에디터스 초이스, 애거서 크리스티 장편 소설)

 애거서 크리스티 전편집 중 첫번째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 나는 홀리듯 그녀의 다음 책을 찾았다. 이제야 그녀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이제라도 그녀의 세계를 접하게 되었음에 안도한다. 그런 복잡한 마음에서 펼친, 나의 두번째 애거서 크리스티,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이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워그레이브 판사를 포함한 10명은 니거섬으로 초대를 받게 된다. 그들을 초대한 사람은 오웬, 아이작 모리스, 올리버, 아그덴등 여러 이름으로 초대장을 10명에게 각각 보냈다. 그렇게 10명이 모인 니거섬의 주택에는 각 방마다 특이한 동요가 쓰여 있었는데, 10명의 인디연이 한 명 한 명 사고를 당한다는 내용이었다. 여기에 더불어 그 주택에는 10개의 흑인 인형이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기묘하게도 저택에 모인 사람들은 동요에 쓰인대로 한 명 한 명씩 죽어갔고, 그럴 때마다 탁자 위에 인형이 하나씩 사라졌다. 결국에 니거섬에 있는 모든 사람이 죽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추리소설이기에 명황하게 범인이 있고, 그 과정이 몹시 훌륭하다. 전혀 억지스러운 것은 찾아 볼 수 없었기에 책의 모든 내용을 풀어놓고 싶지만, 이 글을 먼저 읽고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읽게 될 독자들을 위해 참아둘 것이다.)
 
 존 크루비의 이야기 구조의 핵심 7단계 구조에 따르면, 작중 등장하는 인물은 7가지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7가지 요건이란, 약점(때때로 필요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욕망, 적수, 계획, 결전, 자기 발견, 새로운 균형이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는 총 10명의 주인공이 사건을 이끌어나간다. 인물들은 모두 과거에 누군가를 죽였다는 큰 약점이 있다. 그 약점이 그들이 죽게되는 표면적인 이유였다. 10명의 주인공 모두 과거 자신이 누군가를 죽였다는 점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로 인한 벌을 받는 것이라는 데에 동의를 했다. 그러므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약점은 ‘과거 누군가를 죽게 만들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야기 구조의 핵심 7단계 구조에서 욕망이란, 그들이 이 이야기에서 원하는 것이다. 이 점은 아주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그들이 처한 상황이 아주 특수하기 때문이다. 꼼짝없이 갇혀버린 니거섬에서 어제 혹은 방금 전까지 옆에 있던 사람이 죽었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반복적으로. 맨 처음에 죽은 앤터니 매스턴과 로저스 부인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의 욕망은 ‘살아남는 것’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가장 마지막에 죽는 베라 클레이슨의 대사에서도 알 수 있다.”넌 나랑 같이 가자. 우리가 이겼단다!” 라는 대사를 통해, 10명의 주인공의 공통된 욕망은 ‘생존’이었음을 알 수 있다.
 
 본 작품에서는 스토리가 진행됨에도 불구하고, 뚜렷하게 범인으로 특정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렇기에 명확한 적수도 없고, 그에 대항하기 위한 계획도 모호하다.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는 계획은 단지 그들이 단체로 몰려다님으로써 범인에게 개인 활동을 할 수 있는 틈을 주지 않는다는 것, 여럿이 섬 곳곳을 수색하는 활동 정도일 뿐 치밀하게 계획된 것은 없다. 불분명한 상대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살고 싶은 욕구는 점점 커져만 가고, 생존자 중에 살인마가 있다는 믿음 하에 생기는 ‘불안감’과 이 중에서 끝까지 살아남으면 생존할 수 있다는, 그들의 욕구가 충족될 수 있다는 ‘안도감’이 동시에 작용한다. 결국 작품의 끝으로 갈수록 남은 생존자들은 서로의 말 한마디 한마디, 행동 하나 하나에 민감하고, 예민하게 반응한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과거 자신이 저질렀던 약점을 되돌아보고, 도덕적으로 옳지 못했음을 인정한다. (작중 한 인물은 자신이 당당하다고 끝까지 주장하기는 했다. 실제로 그런 마음을 가졌는지 아니면 말로만 그렇게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마지막 단계인 새로운 균형은 다소 엽기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니거섬에 초대 받은 10명은 모두 죽었고, 그 살인을 계획한 범인까지도 자살을 하며 이야기는 마무리를 짓는다. 마지막에 밝혀진 범인은 “(…)계획적인 살인이 줄곧 저질러지고 있지만 법의 힘이 미치지 않는다(…)” 라고 하였다. 따라서 작품에서 이뤄진 새로운 균형은, 법의 테두리에서 심판하기 어려운 대상들을 심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부분에서 작가가 본 작품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법의 심판에서는 자유로웠으나, 결국 어떤 형태로든 죄에 대한 벌을 받는 것 즉, 인과응보와 사필귀정이 그녀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주제라는 것이다. 당장 뚜렷한 벌을 받지 않더라도, 언젠가 누구에게 받을 것이라는 작가의 의도를 마지막 부분을 통해 분명하게 읽어낼 수 있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는 처음에 인물 관계만 잘 파악하면, 이후에는 술술 읽히는데, 그 이유가 뚜렷한 인물의 개성과 성격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1939년에 출간되었음에도 최근 인물 이론에 넣어도 전혀 무리가 없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이들에게 살해될 수 있다는 생존이라는 공통된 압력을 가하면서, 다양한 반응을 제시한다. 이 압력에 대한 그들의 다양한 반응은 그들이 죽는 순간, 심지어 범인의 동기까지도 일관되어, 독자가 캐릭터에 몰입하거나 캐릭터를 이해하는데 무리가 없도록 한다. 한 세기 가까이 이 작품에 대한 찬사가 끊이지 않는 이유는 뚜렷한 개성을 지닌 주인공과, 이러한 개성을 성급하게 풀지 않고, 서서히 드러내는 작가의 철저한 설계라고 생각된다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1 (빛이 있는 동안,유작 소설집,완전판,애거서 크리스티 단편집)

 언젠가 추리 소설에 재미를 느끼기 위해, [모방범]이라는 작품을 접한 적이 있다. 일본의 추리 소설이었는데, 작품 묘사가 너무 생생하고 다소 엽기적인 면이 있어서 얼마 읽지 못하고 덮어버린 기억이 있다. (어렸을 때 기억이라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지금 읽는다면, 엽기적이라고 느꼈던 내가 우스울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한동안 추리소설에는 손도 대지 않다가, 그것과 별개로 소설계의 대가인 애거서 크리스티라는 작품을 하나도 접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약간 부끄러움을 느껴, 그녀의 전집 중 1권을 읽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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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권에 대부분은 추리 소설이 아니었다! 연애 소설(?)이 대부분이었고, 추리 소설 작품은 두 개 뿐이었다. 하지만 어떤 글을 읽더라도 그녀의 작품은 사람을 설레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각각의 작품에는 개성이 뚜렷한 주인공이 등장했고, 점점 무르익어가는 작품 속에서 그들이 어떻게 반응하게 될 지 궁금해서 쉽사리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카리스마 있는 작품 전개와, 캐릭터가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문체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는데, 아마도 이건 번역하는 과정에서 생긴 문체일 것이므로 ‘그녀의 문체가 좋다.’라는 말을 아껴두고자 한다. 하지만 문체가 아니더라고, 그녀의 작품은 아주 매력있었다. 특히, 작품 중에서 가장 추리소설에 근접한 작품인 [바그다드 궤짝의 수수께끼]에서 보여준 반전은 그녀의 추리소설에 대한 기대를 한껏 부풀리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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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그다드 궤짝의 수수께끼]에서 작가는 독자가 A라는 인물이 범인이라는 단서를 계속해서 던저주었다. 나 역시, A가 범인이라는 생각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주인공이 범인이라고 추리한 인물은 B였다! 그 때 두 가지 생각이 들었는데, 한 생각은 작가가 파놓은 함정에 걸려서 분하다는 것이었고, 다른 생각은 애거서 크리스티가 아주 매력적이라는 것이었다. 작품 내에서 작가가 제시하는 근거를 열심히 받아 적고, A가 범인이라는 확신에 찬 독자를 우롱하는 애거서 크리스티. 내가 아마 그녀의 작품을 계속 본다면 아마 그 원동력은 작가를 이겨보겠다는 승부욕, 그녀의 의도대로 해석하지 않겠다는 의지 정도가 아닐까 싶다. 추리 소설의 사실적인 묘사에 소름 돋아 도망갔던 독자라면, 그런 사실적인 묘사 없는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을 권해주고 싶다. 물론, 한 권밖에 읽지 않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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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그녀의 작품에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면 사건의 마무리를 종종 자살로 마무리 짓는다는 것과, 마무리를 모호하게 한다는 점이다. 우선 자살에 대해 이야기 해보면, 당연히 서사가 자살하고 끝나지는 않는다. 작품 내 인물이 죽었기 때문에 생기는 다른 사람이 변화, 그 사람이 자살하기까지 심정등 작품의 완결성을 생각하면서, 인물의 자살을 묘사하기에 부자연스러운 면은 결코 없다. 그래도 작품 내에서 인물이 그 위기를 어떻게 슬기롭게 헤쳐 나갈 지가 궁금한 나같은 독자에게는 약간 아쉬움이 남는 것은 사실이다.  두번째는 모호한 마무리이다. 이는 [벽 속에서]라는 작품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이 작품의 끝에서 주인공과 주인공의 아내의 상태를 아주 비유적으로 표현한다. 예컨데, “이제 그 벽은 그를 온통 에워싸기 시작했다. <비단처럼 부드러운 커튼.> 커튼이 몸에 휘감기자 숨이 좀 답답했다.… 그들의 손과 손 사이에 금빛 사과가 잡혔다.”라는 식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 아내가 남편을 살해했다는 뜻인지, 아내가 남편을 끌어안았다는 뜻인지 헷갈렸는데, 모호한 것이 정상이라고 한다. 실제로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고. 이렇게 결론을 내리지 않는 것이 낯선 내게 작품의 마무리가 불완전하다는 느낌이 들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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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반적으로 추리소설에 입문하고자 이 소설을 읽었다는 점에서는 약간 아쉬운 것이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소설이 추리소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애거서 크리스티라는 작가를 접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웠다. 아마 며칠 내에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중 두번째 책을 읽게 되지 않을까 싶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이 책은 내가 작년에 ‘상상력 이노베이터’라는 수업을 들으면서 발표 준비를 위해 읽었던 책이다. 정말 뜨거운 감자처럼 모두가 관심을 갖고는 있지만, 잘못 건드렸다간 아무런 소득도 없는 감정 싸움으로 끝나버리는 그 주제. 페미니즘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해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구매하게 되었다. 우선, 무엇보다 난 이 책을 읽을 수 있었음에 정말 감사하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성평등에 대한 상식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확인받은 것’이 내겐 큰 위로가 되었다. 외국에서부터 시작된 페미니즘이라는 성평등 운동은 결코 현재 한국에서 페미니스트들이 외치고 있는 언행들과 맥이 맞지 않는다. 저자 벨 훅스는 개정판을 출간하며 책에서 아래와 같이 말한다.
 

단 한 번도 페미니즘 운동이 여성들만의 것이라도, 그래야만 한다고도 생각해본 적 없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소녀든 소년이든 모두가 페미니즘에 한 발 더 다가오게 설득하지 못하면 페미니즘 운동이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확신했다.

   저자인 그녀의 말에 따르면, 페미니즘은 결코 남성을 혐오하는 운동이 아니다. 오히려 남성들과 함께 해야만하는 운동이다. 왜냐하면 이 운동은 근본적으로 성평등이라는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책에서 페미니즘을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으로 정의하고 있다. 결코 남성이 잘못이 아니다. 문제는 성차별주의다. 이 정의는 성별과 관계없이 모두가 성차별주의적 사고와 행동양식을 받아들이게끔 사회화되었다는 것을 인지하는데 도움이 된다. 또한, 여성도 성차별주의자가 될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때문에 페미니즘을 단순히 남녀가 대립하는 구도의 운동으로 인식한다면 그것은 굉장히 잘못된 발상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페미니즘의 적은 성차별주의다. 성차별주의로 인해 피해를 받은 모든 이들은 페미니즘을 지지함으로써 조금 더 나은 세상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본래의 의도는 이러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이미 잘못된 인식이 팽배하다. 페미니즘은 여성우월주의 운동이라느니, 남성혐오적 운동이라느니, 성차별적인 운동이라느니 굉장히 말들이 많았다. 단언컨대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난 이러한 인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페미니즘이라는 이름 하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남성혐오적인 발언을 공공연하게 외치고, 그것을 지지하고, 좌시했는가? 미러링이라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갖고, 자신의 혐오감 표출을 정당화시키며, 얼마나 많은 남성들을 수치스럽게 만들었는가? 특정 인물의 성차별적인 행동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남성이라는 일반화된 프레임 속에 얼마나 많은 남성들이 갖은 조롱과 무시를 당했는가? 이는 결코 성평등을 생각하는 자들로부터 나오는 언행이 아니다. 대화와 화합보단 일방적 폭언과 대립을 원하는 자들의 말처럼 느껴졌다.
 
   그렇다고 자신이 페미니스트라 자처하는 모든 이들이 위와 같았던 것은 아니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페미니즘에 대한 지식들과 자신들이 생각하는 성평등에 대해 진지하게 의견을 제시해주었고, 그것을 통해 건설적인 토론을 진행했던 경우도 존재했다. 책에도 나온 내용이지만, 그것은 내적 아름다움과 외적 아름다움에 관한 것이었다.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몸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주어 여성들도 나이듦을 좀더 긍정적인 경험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지만 가부장제 사회에서 나이든 여성으로서의 현실, 특히 생물학적으로 더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는 현실과 직면하자, 수많은 여성들이 여성미를 정의하는 고루한 성차별주의적인 기준을 다시 받아들였다.

…(중략)…

   페미니즘 운동으로 수많은 유형의 여성 친화적인 잡지가 속속 발간되었지만 페미니즘을 지향하는 어떤 패션잡지에서도 미의 기준을 대체할 만한 이상형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대안도 없이 성차별주의적인 이미지만 비난한다면 그것은 실패한 개입이다. 비판만으로는 달라지지 않는다. 사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아름다움의 기준을 비판해왔지만, 여성들은 뭐가 건강한 선택인지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을 뿐이다. 나는 중년에 접어들면서 그 어느 때보다 체중이 늘었으나 자기혐오에 찌든 성차별주의적 몸매를 목표로 삼지 않고 체중을 줄이기로 했다.

 
   이처럼 페미니즘은 기존에 여성들을 억압하는 미의 기준에 반발하며 건강한 아름다움을 추구하고자 했으나, 어떠한 특정한 외모가 아름다움이라 말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여성들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바라보는 방법을 익히고, 스스로의 만족을 통해 아름다움을 정의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위에서 언급했듯이 늙은 여성들은 때때로 그녀들의 외모가 남성들에게 매력적으로 비춰지지 않음을 인지했고, 책의 내용에 따르면 젊은 여성들과 경쟁하기 위해 기존의 성차별적인 미의 기준을 받아들이게 된다.
 
   나는 이 부분에서 많은 것을 느꼈다. 우선, 여성들이 알아야 할 것은 몸이 마른 것만으로 매력을 느끼는 남자는 별로 없다는 것이다. 가령, 기아로 굶어가고 있는 이들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매우 극단적인 예시이지만, 적어도 적은 체중이 미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반례로는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 글쓴이 또한 자신의 체중이 증가한 것을 인지하고 자신을 위해 제중을 줄이기로 했다고 한다. 이는 여성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에 대해서 충분히 많이 생각하고, 그것이 틀리지 않았다고 믿는다면 그것으로 괜찮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화장을 안 한 것만이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단발을 한 것만이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뚱뚱한 것만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자신의 아름다움의 기준을 강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앞서 말한 자신의 판단을 위해선 사회적인 선입견(예를 들자면, 성차별주의적인 미의 기준)에 보다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개인이 온전히 느끼는 바에 따라 자신의 미추 판단이 보다 바르게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현재 우리나라의 페미니즘의 방향성에 대한 내 생각을 언급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모든 운동이 그러하겠지만, 특히나 성평등에 대한 운동은 남녀 모두가 함께해야만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동행의 기폭제로서 나는 이성에 대한 매력 발산 여부가 하나의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성평등에 대해 올바른 생각을 갖고 있더라도, 돈이 없거나 외적인 매력이 부족하면 남성 연인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현재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또한, 기존의 성차별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더라도, 돈이 많거나 외적인 매력이 충분하면 아직까지도 많은 여성들에게 매력적으로 비춰지고 있다. 나는 성차별적인 기준에 반대한다는 것은 여성들로 하여금 매력적인 요소로 비춰져야 하고, 적어도 성차별적인 남성들은 여성에게 선택받지 못해야 변화가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여성들부터도 ‘남성은 ~해야 한다.’는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남성들에게 당연하게 기대하고, 요구하고 있는 것들이 있는지 생각해보자. 또한, 자신이 연인이나 배우자를 성차별적인 방식으로 대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드시 생각해보자. 일부 남성들은 페미니즘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의 존재를 극도로 혐오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이것들이 대체로 일부 성평등을 주장하는 여성들의 언행불일치로 인해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성차별을 거부하고, 성평등을 희망한다면 부디 자신의 언행을 조심하자. 어떤 글을 쓰는 것이나 어떤 말을 하는 것은 한 명의 생각에서부터 시작되지만, 그것을 읽거나 들으면서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매우 많기 때문이다.
 
   혹자는 페미니즘은 성평등과 다르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렇다. 엄연히 따지자면 둘은 다른 어원을 갖고, 다른 의미를 지니는 두 개의 단어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성평등이라 부르든, 페미니즘이라 부르든, 우리의 머릿 속에 존재하는 그 가치만은 하나라는 것에 동의해주었으면 한다. 성평등은 결코 서로가 서로를 물어뜯고, 험담하며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자 노력하며 손을 맞잡고 나아갈 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임을 알아주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