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자 (Le Petit Prince)
너도 어른처럼 말하는구나
여섯 번째 별에는 커다란 책을 쓰고 있는 노신사가 하나 있다. 그는 별을 찾아온 어린 왕자에게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지리학자는 너무 중요한 사람이어서 나돌아 다닐 수가 없어. 지리학자는 자기 서재를 떠나지 않는단다. 그러나 서재에서 탐험가를 맞이하지. 그들에게 질문을 하고 그들의 기억을 기록하는 거야. 그러다가 그들 가운데 한 탐험가가 흥미로운 기억을 얘기하면 그 탐험가의 품행을 조사하게 되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황현산 옮김,『어린왕자』, 열린책들, 2015 (전자책)
어린 나에게 『어린왕자』는 이상한 그림을 그려놓고 보아뱀이 들었다고 억지를 부리는 이야기에 불과했다. 오랜만에 어린왕자를 다시 찾아갈 기회가 생겼고, 어린왕자는 아직 그곳에 있었다. 그리곤 나에게 실천 없는 공부가 무슨 쓸모냐고 물었다. 어른이 되어버려서일까. 대답할 수 없었다. 서재를 떠나지 않은 채 방 안에서 조사만 하고 있는 ‘지리학자’를 타자화 하기에 나는 그와 너무나 닮아 있었다. 책 속으로, 이론 속으로 파고들었던 것은 해결을 위해서가 아니라 맞서기 두려워 회피한 것일지도 몰랐다.
되묻자면 문제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막연한 불안이 싫어 더 막연한 문학을 붙잡았을 뿐이다. 너는 무엇을 할 거니?라는 질문에 서로가 적당히 만족해 뒤로 물러날 수 있는 답을 줄 수 있도록 말이다. 내게 문학이란 너무 막연하지도 않으면서도 이 세상을 위해 너무 열심히 살지 않을 거라는 다짐 같은 것. 그런 거였다. 문학을 하고 싶다는 말은 너의 쓸모가 무엇이냐는 말에 대답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고, 나의 쓸모를 너에게 증명하고 싶지도 않다는 말이기도 했다.
되돌아가기에도 어색해질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대부분의 시간을 그냥 그렇게 보냈고 달라진 게 무엇이 있냐고 물으면 어른이 되었다. 라고 밖에는 대답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너와 나의 관계, 소중함 그런 것들을 잊어(혹은 잃어)버릴 정도로 충분히 급급한 삶에 놓여 버렸다. 여우 한 마리를 길들이는 데에도 내가 가진 시간과 여유를 계산하고 있었다. 너와 나의 관계가 가져올 특별함보단 내가 가진 것들 중 포기해야 할 것을 계산하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열심히는 살았다. 그런데 어린왕자의 눈을 다시 보자니 한없이 부끄럽다. 어린왕자의 억지가 이제는 억지스럽지가 않다. 그래서 어른을 위한 동화라고 했던 걸까. 문학은 오늘도 나에게 정답을 주지 않는다. 방황하다 답을 찾기 위해 들어간 곳에는 또 다른 방황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문학에서 쓸모를 찾는 내 모습을 어린왕자가 봤다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 거다.
<너도 어른처럼 말하는구나>
자존감 수업 (하루에 하나, 나를 사랑하게 되는 자존감 회복 훈련)
제목: 나에게 집중하기
자존감이라는 키워드로 이 책을 읽으려고 한 것이었는데 프롤로그를 보면서 공감되는 부분도 많았고 빨리 책을 읽고 싶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자존감과 행복은 아예 연관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행복은 다른 사람의 사랑으로 생겨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 스스로를 다져 나아가야 하는 자존감과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사랑은 감정이며 관심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나는 호불호가 분명한 편이라고 생각해서 나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필자가 구체적으로 [장점과 단점, 잘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 타인이 말하는 내가 잘하는 것]을 써보는 자존감 향상을 위해 오늘 할 일로 제시 한 것을 보고 정작 나는 나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것들에 대한 답을 바로바로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책에서는 ‘자존감 향상을 위해 오늘 할 일‘이라는 주제로 좋은 것들을 많이 제시하고 있다. 그 중 ‘자기 자신에게 사과하기’를 직접 할 때는 뭔가 울컥하는 느낌이 든다. 왜 필자가 변명이나 구실을 덧붙이지 말자고 했는지 알 것 같다. “내가 ~해서 널 미워한거야.”라고 덧붙이게 되면 과거의 자존감 낮은 상태에서 변화하지 못하고 그 상태에 머무를 뿐이기 때문이다. 그냥 “널 미워해서 미안해.”라고 말하면 내면 깊은 곳에 있는 나에게까지 마음이 전해진듯한, 울림을 주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가치 및 과정과 평가에 대한 관점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자신을 존중해야 하는 것을 알지만 다른 사람에게 쓸모 있는 존재로 인정받고 사랑받아야만 가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가치는 반드시 누구에게 인정받아야만 찾을 수 있는게 아니라고 한다. 필자는 이를 위한 방안을 제시해준다. “과정에 몰입하기”이다. 평가는 나중의 일이고 과정은 현재의 일이어서 과정에 집중한다는 것은 오늘 할 일에만 집중한다는 것이라고 제시해준다. 즉, 과정에 집중하는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의 나에게 집중할 수 있고, 자존감은 내가 내 마음에 얼마나 마음에 드느냐 이기 때문에 타인의 평가가 아닌 자신의 평가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나는 결과보다 과정이 더 가치 있는 것이라고 여겨왔다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며 과정보다 평가에 집중한 모순적인 모습으로 지내온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내 정체성은 하나가 아니다’라는 부분을 읽으면서 꽉 막혀있던 관점이 어느 정도 풀리게 되었다. 나는 사람의 정체성은 하나지만 어떤 사람이 상대방이냐에 따라 내 모습, 성격이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런 관점과 함께 들었던 역설적인 생각이 있었다. 나는 가족들에게는 너무 무뚝뚝한 편이다. 친한 친구들 앞에서는 어색하지 않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전하는 편이고 메시지를 주고받을 때도 이모티콘도 엄청 많이 쓰고 받침 있는 말투를 종종 쓰는데 가족들에게는 친구들에 비해 그렇게 많이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진짜 못되고 다중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을 항상 지녀서 힘들었다. 물론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표현을 못하는 것은 좋지 못한 모습이지만 그래도 이 글을 보면서 ‘가족에 대한 정체성은 떨어지구나..’라고 생각하며 나의 전체(정체성)를 일반화하여 미워하지 말기로 노력하자고 마음먹었다.
우리시대의 소설가 (1991이상문학상수상작품집)
불량 소설도 환불이 되나요?
우리는 사이즈가 맞지 않거나 박음질이 잘못된 옷을 자연스럽게 환불한다. 요구하는 사람도, 판매했던 사람도 어색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소설은 어떨까. 소설을 읽고 내용이 부실하다면 작가에게 환불을 요구할 수 있을까? 1991년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조성기의 <우리 시대의 소설가>가 던지는 질문이다.
강만우 씨는 소설가다. 상업화가 진행 중인 동네에 살고 있다. 그는 공장과 레스토랑이 들어서는 걸 보며 소설가가 살 만한 동네가 아니라고 푸념한다. 주변 집들이 상가로 변하고 있지만 자신의 집만큼은 옛날 모습을 유지하려 한다. 소설가라면 상업적인 행위, 이윤을 추구하는 행위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신문의 광고면을 들어내버린 뒤 ‘신문다운 신문’이 된 것 같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 강만우에게 독자 민준규가 전화를 걸어 책의 환불을 요구한다. 강만우는 거절하고 전화를 끊지만 민준규는 계속해서 전화를 걸거나 찾아와 끈질기게 책 값 3천500원을 돌려달라고 한다. 이 과정에서 강만우의 모순적인 삶이 폭로된다.
강만우는 인당 25만 원 그러니깐 150만 원이 들어오는 과외비에 문학 그룹 과외를 수락한다. ‘소설 창작을 지도하고 지도받고 하는 것보다 더 웃기는 일도 없죠’라는 자신의 말과도 정면으로 반대되는 행동이다. 또한 작가인 자신에게 환불을 요구하는 민준규에게 출판사가 더 많은 이윤을 가져가니 환불은 출판사에 요구하라고 한다. 또한 환불을 해준다 하더라도 책이 팔렸을 때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윤만큼만 환불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작가의 양심이나 책무를 중요시 여기는 듯 말하다가도 환불해달라는 말에는 이윤을 따져 대답한다. 이처럼 강만우는 상업적인 행위를 비판하는 동시에 자본의 논리를 내면화 한 이중적인 인물이다.
강만우의 모순적인 모습은 작품에 대한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쓰고 있는 소설에서 세르베투스는 “‘영원한’ 하느님”이냐 “하느님의 ‘영원한’ 아들”이냐를 두고 논쟁을 벌이다 화형을 당한다. 단어 하나가를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버린다. 하지만 소설과 달리 강만우는 자신이 산 책이 『염소의 노래』인지 『염소의 배꼽』인지도 모른다. 심지어 주인공 이름도 기억하지 못한다. ‘간택’이라는 단어를 쓴 김수옥 여사에게 단어의 뜻을 알고 쓰는지 의아해하던 모습과 달리 말이다. 자신의 책을 환불해달라는 독자를 설득하려 나간 자리에서 책 내용도 모르고 있다는 건 작가로서 최소한의 책임의식마저 결여된 상태임을 의미한다.
반면 독자 민준규는 책도 경제 구조 내에서 판매되는 하나의 상품으로 여긴다. 그렇기에 환불 요구 또한 정당한 것이 된다. 그러나 독자들의 눈치를 보는 작가의 자세에는 비판을 가한다. 신문 연재도 안 할 수 없냐 묻는다. 신문 연재는 구독률과 독자의 반응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민준규가 책을 꼼꼼히 읽고 비평하는 자세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단순히 좋다 나쁘다 식의 인상 비평이 아닌, 작가가 소신을 지키지 못하고 작품에 시대를 반영하지 못하며 작품을 관통하는 세계관 또한 구축하지 못했기에 『염소의 노래』가 불량 작품이라는 논리를 펼친다. 책이라는 상품 자체를 구매하고 환불을 요구하는 소비자로서의 권리와, 책을 읽고 의견을 제시하며 논쟁을 펼치는 자세는 독자의 바람직한 모습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실제 작가가 생각하는 소설이란 무엇일까. 명확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여러 번 등장하는 ‘신문’을 통해 추측이 가능하다. 첫째, 강만우가 처음 젖은 신문을 집어 들어 광고면을 떼어버리는 장면이다. 소설의 작품성이나 내용이 아닌 광고와 마케팅에 의존하는 방식을 비판하는 장면이다. 둘째, 남녀 상봉 지사를 넣어달라는 문화부장의 전화에 ‘아, 네’ 하고 대답하는 강만우와, 이야기를 지지부진 늘어놓는 신문 연재를 그만 두라 말하는 민준규가 등장하는 장면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신문의 본문과 광고란 사이에 해당하는 배꼽 부분에 연재소설이 위치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문학성과 상업성 사이에서 고민할 수밖에 없는 작가의 고뇌를 표현한 것이다.
작품과 작가, 문체와 내용, 완성도와 소설의 주제가 완벽히 일치하는 건 힘든 일이다. <팔 없는 사람의 명상>처럼 명상과 행동 사이의 모순은 소설가에게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필자는 상업성과 문학성을 함께 가져갈 수 있다고 본다. 그러기 위해 둘 사이의 균형을 잘 잡아가는 게 소설가의 역할이다. 그러기 위해서 작가는 자기 작품에 대한 평가와 비판에 귀를 기울이되 휩쓸리지 않을 정도의 자기 객관화가 되어 있어야 한다. 독자의 주장이 터무니없는 것이라면 마르셀 푸르스트처럼 철저히 개인성을 유지할 필요가 있고, 부족한 점이 있다면 독자의 의견을 적극 반영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갖춰야 한다. 문학이 상업성과 작품성이라는 두 다리를 딛고 서있기 위해서는 작품의 완성도와 문학성에 대한 고민을 놓지 않으면서도 창작 또한 노동이자 생계수단이라는 걸 존중하는 사회적 문화가 조성되어야 할 것이다.
소피의 세계 1
‘소피의 세계 1‘은 크게 5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자연철학, 소피스트,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이다. 먼저 자연철학에 들어가기에 앞서 고대에는 ’종교‘와 ’신화‘가 있었다. 이는 과학적 지식과 사실이 없었기에 만들어진 것이라 추정된다. 발전되지 않은 고대에는 의, 식, 주, 질병, 전쟁, 농사 등 모든 것에 대한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달기 힘들었다. 따라서 ’신이 인간을 위해 만들어주었다.‘ 혹은 ’신이 화가 나서 가뭄이 들었다.‘ 등 그 당시 사람들은 ’신‘으로 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점차 ‘왜?’라는 궁금증을 보다 철학적으로 과학적으로 접근하고자 하였고, 그렇게 탈레스는 만물이 ‘물’이라 대답하게 된다. 이후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밀레토스학파와 엘레아학파 등 다양한 사람들이 ‘이성’으로서 생각을 내뱉게 된다. 특히 파르메니데스(기원전 540-480)와 헤라클레이토스(기원전 540-480)의 생각을 주의 깊게 들어봐야 할 필요성이 있는데 파르메니데스는 모든 것은 변화하지 않으며 감각적 인식을 부정하고 ‘이성(로고스)’을 중시하였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것은 흐른다, 즉 변화한다고 하였으며 감각적 인식을 일부 긍정한다. 이것은 후에 ‘플라톤’의 철학을 설명하면서 보충하도록 하겠다.
두 번째로 소피스트가 있다. 소피스트들은 자연에 대한 궁금증 보다는 인간과 인간사회에 중점을 두었다. 책속에서는 소피스트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적진 않았는데, 내가 덧붙여 설명하자면 소피스트라는 뜻은 ‘지혜로운 자’라는 뜻이지만 당시 그리스인들은 부정적으로 ‘괴변론자’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소피스트는 ‘상대주의’철학을 제시하였는데 그 이유는 관심을 ‘인간’과 ‘인간세계’에 두었기 때문이다. 인간과 인간사회는 동일한 조건을 원천적으로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동일한 결과가 나올 수 없었으며 따라서 인간을 탐구한 소피스트들은 상대론자라 할 수 있다. 당시 아테네 사회가 바라볼 때 상대주의 철학을 내세우는 ‘소피스트’들은 위험분자로 보였고 따라서 ‘괴변론자‘라는 오명을 얻는다.
세 번째로 소크라테스(기원전 470-399)는 문답법과 대화법을 강조하였고 무지에 대한 자각을 강조하며 ‘너 자신을 알라’라고 하였다. 또 무지에 대한 인식에 그치지 말고 행동으로 이어지는 실천을 강조하였다.
네 번째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이다. 플라톤(기원전 427-347)을 보기에 앞서 질문을 한번 던지고 싶다. 한 사람이 똑같은 빵 50개를 만들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다. 같은 빵틀을 사용한다면 가능할 수도 있지만 역시 불가능인 이야기다. 하지만 속으로 상상하는 생각하는 ‘빵’이라는 개념은 같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자신의 상상 속에서는 똑같은 빵 50개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개념을 위의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에 도입할 수 있는데, 플라톤이 생각하기에 ‘감각세계(현실세계)’에서는 만물은 시간이 흐르면 소멸하는 물질이다. 이것은 모든 것은 흐른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의견과 일치한다. 하지만 플라톤은 이와 동시에 만물은 영원하고 변치 않는 초시간적 형상이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빵은 시간이 지나면 눅눅해지거나 곰팡이가 생겨 썩어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빵‘의 형상은 고유하며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파르메니데스의 철학과 일치한다. 즉 만물은 변화하면서 한편으로는 영원한 것이기도 하다. 플라톤은 변하지 않는 고유한 것을 ’이데아‘라고 칭하였는데 이데아의 세계는 감각세계 뒤편에 있는 참된 현실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의 육체는 비록 늙고 사라질 지라도 영혼은 영원한, 고유한 이데아를 쫒으라고 플라톤은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플라톤은 이데아에 대한 비유를 ’동굴‘로 들기도 하였다.
플라톤에 대해 또 한 가지 유명한 철학이 있는데 바로 ‘국가’이다. 플라톤의 이상세계, 유토피아는 철학자들이 통치하는 나라였다. 또 육신이 머리, 가슴, 배로 이루어졌듯이 플라톤은 통치자, 수호자, 상인계급이 국가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바르게 인식하고 역할을 수행하라고 하였다. 플라톤은 여성도 국가를 다스릴 수 있다는 파격적인 생각을 하였고, 또 공공 유치원과 전일제 학교를 처음으로 주장하기도 하였다. 한편 플라톤은 스파르타의 통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하였고, 그러한 생각은 그의 철학관에도 스며들었다. 따라서 플라톤의 ‘국가’는 전체주의 성향을 띄기도 한다. 플라톤의 철학 의의를 살펴보면, 그의 ‘이데아론’은 기독교와 같은 종교에 영향을 주었고, 그의 ‘국가론’은 파시즘, 나치즘과 같은 전체주의에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는 플라톤의 제자로, 이념에 충실했던 플라톤과 달리 자연현상에 관심을 기울였다.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오늘날까지도 사용되는 여러 학술어를 남겼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닭’보다 ‘닭의 이데아’가 먼저라는 플라톤의 견해에 동의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닭의 형상은 닭의 육체와 나눌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플라톤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감각으로 인지하고 지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성, 이데아를 중시하였던 플라톤과 다른 견해를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데카르트, 흄, 칸트철학 등이 궁금해서 철학 서적을 찾아보다가 이 ‘소피의 세계’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는데, 이 책은 어린아이인 ‘소피’의 시각으로 어려운 철학적 개념들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낸 책인 것 같다. 지금 읽은 소피의 세계1은 고전철학에 대해 설명하였는데, 중세와 근대를 풀어낸 2, 3도 매우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