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조달 전략

경영학부의 최용식 교수님께서 직접 지필하신 교제이다.
자금조달전략 수업을 들으며 이해가지 않는 부분은 이책을 통해 간단히 이해될 정도로 잘 쓰여진 책이다.

용의자 X의 헌신 (容疑者Xの獻身)

히가시노 게이코의 진수를 알수 있는 명작이었다.
끊임없이 밀고 당기는 혼란스러운 사고의 흐름은 이상하게도 이책을 매력 적으로 만들었다.

29歲の誕生日, あと1年で死のうと決めた。 (스물아홉 생일, 1년 후 죽기로 결심했다)

현재를 살고 있는 많은 사람 중 죽음을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살아있어도 산 것 같지 않고 살고 싶어도 살 수 없는 사람들이 공존하며 살고 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우리는 죽음을 기다리며 살고 있는 것이다. 죽음의 시기가 명확한 사람은 두려운 것이 없다. 죽음이라는 큰 어둠이 있기에 다른 것이 상대적으로 덜 어두워 보이는 것일까. 모두가 죽음을 앞두고 있지만 왜 그들은 다른 것일까? 이 책의 주인공은 자신이 정한 죽음의 날이 명확하기에 도전할 수 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녀는 평소 자신이라면 생각도 못 했을 일들을 하나씩 도전한다. 그 일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 무모하기도 한 도전이다. 또한 부끄러운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가 평소 마지못해 쥐고 있던 것 대신 새로운 도전을 선택하면서 그녀의 삶은 크게 변한다. 그녀는 그 도전 속에서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고 또 자신의 삶을 과거와는 다른 이름으로 정의하게 되었다.


 사실 모두가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오늘을 즐기며 살고 싶을 것이다. 다만 현실 속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것에 의문이 있다. 우리는 못하는 것일까? 안 하는 것일까?
일 년이라는 시간이 정해져 있어 그녀가 한 가지 일에 몰두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면 참 슬프다. 모두에게 시간이 정해져있는데 왜 그 시간을 숫자로 정의해야만 우리는 그 사실을 피부로 와닿게 느끼는 것일까.

 이 책은 다른 자기계발서와 다르다. 다른 책들은 답을 내려주는 식이라면 이 책은 방향을 알려준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무언가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라고.
거창한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나의 삶을 좀 더 다채롭게 해줄 어떤 무언가를 찾으라는 것이다.

오만과 편견

베넷가의 딸들은 총 5명이다. 딸들의 수가 많듯, 각기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다.그 중 첫째 딸인 ‘제인’은  의젓하며 수줍음이 있는 성격이고, 둘 째 딸 ‘엘리자베스’는 여성의 지위가 낮았던 그 시대에 순응하지 않는 아주 당돌하고 당찬 성격을 가지고 있다.  따분한 영국의 한 시골 마을에 ‘빙리’씨가 이사를 오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이 된다. 빙리씨가 연 무도회에서 첫 째 딸 ‘제인’은 엄마의 바람대로 돈 많은 빙리씨와 마음이 맞게 된다. 하지만 빙리씨의 친한 친구인 ‘다아시’의 차갑고 배려심 없는 말 때문에 둘 째 딸 ‘엘리자베스’는 상처를 받고 그를 굉장히 오만하며 무례한 사람이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 후 여러 사건들을 통해 엘리자베스와 다아시는 서로에게 오해가 더 쌓여가지만, 다아시의 진심이 담긴 편지로 서로에 대한 오해를 풀고 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 책에는 낭만주의 시대 때의 여성의 지위라던지, 그 시대 풍습, 자연미를 중요시하는 요소들 등 많은 주목해야 할 요소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제목인 ‘오만과 편견’ 처럼 말에 대해 초점을 맞추어 생각을 해 보았다. 책 속에서 엘리자베스와 다아시가 서로를 오만하며 무례하다고 오해를 하는 장면들을 약간의 과장을 보태어 표현을 했다. 그러나 이들 서로를 오해하게 만드는 요소들이 지금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도 크게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누군가를 쉽게 판단하는 것이 오만한 일임을 깨닫지 못하고, 함부로 말하는 것의 무거움과 무서움을 알지 못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잘 못 했는지에 대해 미쳐 알지 못한 채 지나쳐 버린다. 자신이 정확히 아는 사실이 아닌데도 말을 전한다던지, 첫 인상만을 보고 쉽게 판단 해 버린다던지 말이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자신의 말의 무게는 어땠는지에 대해 생각 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얼굴

트라우마와 자기합리화.

 

자기 합리화라고 하면 보통 부정적인 성격이 부각되기 쉽다. 자신의 잘못을 적절한 핑계를 찾아 둘러대는 것을 우리는 보통 자기합리화라고 한다. 하지만 자기 합리화의 또 다른 성격이 존재한다. 내가 생각하는 자기합리화는, 자신의 극단적인 과거의 트라우마를 이겨내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다.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 피해를 입는 사람, 그리고 그 잘못을 명령하는 사람.

이순원의 소설 얼굴에는 이러한 세 종류의 사람들이 나온다.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의 대표적인 인물인 공수부대 소속의 김주호, 그리고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희생자들의 유가족인 박영은씨, 그리고 잘못을 명령한 사람들은 또 따로 존재했다.

 

이 소설의 전반적인 내용의 핵심은 김주호씨의 죄책감이다. 그는 우연히 특수부대에 들어갔으며, 광주에 내려가게 되면서 시위를 진압하게 된다. 그곳에서 상부의 명령을 따르게 되고, 그가 이행한 명령은 것은 대학살이었다.

 

이 대학살의 결과로써, 대부분의 사람들이 슬픔에 빠지게 된다.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당연히 가족을 잃은 슬픔과, 군인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기게 되었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인 공수부대원들도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그는 그날의 기억 속에 갇혀 산다. 그는 자신이 공수부대의 일원으로써 대학살을 집행했다고 생각하며, 그때의 기억이 트라우마가 되어 간다. 이 소설속의 그는 자신이 했었던 과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헤어 나올 용기조차 없다.

 

김주호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합리화이다. 그날의 기억, 그 사건을 기억하는 주변사람들이 생각하는 공수부대, 공수부대원들이 저지른 왜곡된 만행, 그리고 자신이 그 공수부대라는 사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김주호 자신이 아닌, 명령을 내린 사람이다. 그는 그 공수부대의 일원으로써, 명령을 이행 할 수밖에 없는 처지의 입장이었다. 그래서 그는 명령을 따랐고,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다치게 하고, 남은 유가족들에게 상처를 남겼다. 그런데 그는 그 모든 사태의 책임을 자기 자신으로 돌리고 있다. 그에게 어느정도 잘못이 있을지라 하더라도, 잘못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은 명령을 내린 사람들이다. 그런데 오히려 그들은 방어의 수단으로 사람들을 죽였다고 자기들을 합리화한다. 정작 잘못의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합리화를 하고, 명령을 따른 김주호는 합리화를 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기억 속에 갇혀있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이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 할 수 있는 용기. 그것만이 그를 그 트라우마 속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소설 속 김주호처럼 광주 민주화운동 대학살이라는 극단적인 예시는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의 트라우마가 있을 것이다. 그 트라우마는 과거에 일어난 일이다. 우리는 과거가 아닌 현재에 살고, 미래에 살 것이다. 트라우마를 자신의 과오로 생각하고 숨기는 것이 아닌, 그때의 실수, 잘못, 아픈 기억들을 인정하고, 그것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막을 수 있는 용기를 갖는 것. 그것이 바로 미래를 살아갈 우리들에게 필요할 용기 아닐까

먼 그대 (서영은 소설 선집)

p.43

하지만 H출판사 직원들이나 주위 사람들이 보기에 문자는 그저 죽은 듯이 가만히 있는 사람으로만 보였다. 그네들은 아무도 문자의 그런 침묵이 어떤 상황, 어떤 조건 아래서도 나는 살아갈 수 있다는 절대 긍정적 자신감에서 기인된다는 것을 몰랐다.”

 

문자는 겉보기에 죽은 듯이 가만히 있는 것처럼 아무런 생각도, 아무런 반응도 그냥 나약한 사람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신념이 확고하고, 남들을 신경 쓰지 않을 뿐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따돌리고 무시해도, 그녀만의 절대 긍정적 자신감을 훼손시킬 수는 없었다.

 

p.45

“(중략) 한수는 그녀에게 천 개의 흉터를 내었을 뿐, 그녀가 그 흉터를 스스로 딛고 일어선 지금에 이르러서 그는 이미 그녀의 맘속으로부터 지나가 버린 그 무엇이었다. 그가 무자비한 칼처럼 그녀에게 낸 상처 하나하나를 딛고 일어설 때마다, 문자의 정신은 마치 짐을 얹고 또 얹고 그러는 동안 자기 속에서 그 짐을 이기는 영원한 힘을 이끌어낸 불사의 낙타 같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상처를 남기는 사람을 자연스럽게 멀리한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아무리 많은 상처를 받아도, 이미 그것은 지나가버린 과거의 것이었고, 그것을 극복하고 나아갈 때 마다 그녀는 한 번 더 성숙해지는 것이었다. 이 소설속의 낙타는 문자를 완벽하게 묘사해줄 수 있는 대상이다. 낙타는 힘든 사막 속에서도, 오아시스를 발견 할 수 있는 존재이다. 또한 갈증과 같은 고통에 다른 것들 보다는 잘 견딘다. 문자도 역시 힘든 현실 속에서도, 이상향을 찾을 수 있는 존재로 여겨진다. 낙타와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현실속의 고통에 무덤덤하다. 그녀는 마치 리비아의 사람들처럼 신의 길, 푸른 물길을 찾아 사막 속으로 들어간다.

 

p. 86

리비아는 (중략) 정부에서 다산을 권장하는 한편, 사막의 오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시로 끌어내기 위해 돈다발로 유혹한다. (중략) 그러나 사막에서 살아온 유목민의 상당수가 그 유혹을 뿌리치고 더 깊이 사막 속으로 들어간다. 대부분의 인간은 시달리는 것, 즉 갈증을 몹시 두려워한다. 그런데 그들만은 갈증뿐인 사막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든다. 사막의 갈증. (중략) 그들은 무엇 때문에 이 갈증의 길을 스스로 택해서 가는가. 리비아에는 조상 적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 같은 지도가 있다. 그 지도에는 사막의 땅속 깊은 곳으로 흐르는 푸른 물길이 있다. 그들은 이 길을 신의 길이라고 부른다. 사막의 오지에서 나오지 않는 사람들만은 이 푸른 물길이 어디 있는지 안다고 한다.”

 

처음에는 리비아의 사람들이 문자와 같은 특정 인물에만 해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리비아인, 문자, 그리고 이러한 혹독하고 가혹한 현실을 이겨내는 불사의 낙타. 매일매일의 고통을 감내하고, 자신만의 오아시스를 찾아가기 위해, 고통 속에 남아 있는 그러한 인물. 그러던중에 다른 생각이 내 머릿속에 안개처럼 자욱해졌다. 리비아인, 문자, 낙타는 소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현실속의 우리들의 처지와 비슷한 것 같았다.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지 못한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말들을 들어보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것 조차도 큰 축복이라고 한다. 우리는 대부분 좋은 회사를 가기 위해, 좋은 대학을 가기위해, 좋은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서 우리의 오늘을 희생시킨다. 우리 사회는 오늘을 단지 내일로 가기위한 계단, 성장을 위한 계단으로 만든다. 우리는 사막에서 다 똑같은 오아시스를 보며 살아가는 것 같다. 누군가는 확실하게 눈앞에 보이는 오아시스를 향해 가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그것의 신기루를 보며, 오아시스라고 착각하며 오늘도 사막에 있다.

 

소년의 비애 (이광수 단편선)

사회에 적응 해가는 청년, 신기하게 바라보는 소년

 

p.18.

문호는 이제 십팔 세 되는 시골 어느 중등 정도 학생인 청년이나 그는 아직 청년이라고 부르기를 싫어하고 소년이라고 자칭한다.

 

극중 주인공인 문호는 이미 청년이 된 나이이지만, 청년이라고 불리기를 거부하고, 소년이라고 자칭을 한다. 소년과 청년. 내가 느끼는 소년의 이미지는 순수함이다. 소년들은 순수한 눈을 가지고 있다. 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소년들은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른다. 소년들에게 세상은 그저 신기할 뿐이다. 소년들에게 세상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도구일 뿐이다. 소년들에게는 당연한 것은 없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도 소년에게는 모두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다. 소년들은 이유를 알고 싶어 한다. 소년들에게 세상의 정해진 규칙은 없다.

 

p.27.

, 우리도 벌써 아버질세그려. 소년의 천국은 영원히 지나갔네그려하고 웃으면서도 눈에는 눈물이 고인다.

 

소년들도 청년들이 될 것이다. 소년들도 청년이 되는 것을 문호처럼 적극적으로 거부하지 않는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소년들은 청년들이 된다. 청년은 소년에서 어른이 되어가는 과도기적인 상태이다. 그들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어른들의 세상을 이해해간다. 이해가 되지 않아도, 많이 쓴 근육이 단단해지는 것처럼, 청년들은 세상, 즉 사회에 적응을 해간다. 그들의 호기심은 무뎌진다. 어차피 이유는 없으니깐. 문호는 이미 청년이다. 다만 소년으로 남아 있고 싶을 뿐이다.

 

p.23.

그러나 양반의 체면은 잠시 일이지요, 난수의 일은 일생에 관한 것이 아니오리까. 일시의 체면을 위하여 한 사람의 일생을 희생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하였으나 계부는 성을 내며, “인력으로는 못 하느니라하고는 다시 문호의 말을 듣지도 아니한다. 문호는 그 양반의 체면이란 것이 미웠다. 그리고 혼자 울었다.

 

청년은 사회에 적응해가면서 어른이 된다. 어른이 되어가면서, 그들에게는 자신만의 주관이 생긴다. 이제 그러한 주관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청년들에게도 보는 것 까지다. 청년들에게는 불합리함을 바꿀 수 있는 힘, 능력이 없다. 단지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을 뿐이다. 어른이 되면 그 불합리함을 조금은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p.23.

그러나 전하는 말을 듣건대 신랑은 논어 일행을 삼 일에도 못 외운다는 둥, 코와 침을 흘리고 어른께도 ,한다는 둥, 지랄을 부린다는 둥, 눈에 흰자울 뿐이요 검은자울이 없다는 둥, 심지어 그는 고자라는 소문까지 들려서 문호의 조모와 숙모는 날마다 눈물을 흘리고 혼인한 것을 후회한다.

 

소년에게 무지함은 죄가 아니다. 하지만 당시 사회에서 청년에게 무지는 죄였나보다.

소년과 청년은 나누는 명확한 기준이 나이 밖에 없다. 그 뜻은 나이가 많아지게 되면 자연스럽게 청년이 되기 때문인 것 같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사회에 적응한다.

나도 나의 소녀시절과 청년시절의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 다만 내가 몇 살쯤에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만 생각 날 뿐.

나는 문호와 같이 소년으로 남고 싶어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아니, 나이가 들면서 그런 유치한 기억을 잃어 버렸을 수도 있다. 나에게 소년과 청년은 단지 나이의 구분이였다. 나는 중학생이 되면서 청년이 되었고, 대학생이 되면서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이 소설에는 문호와 난수가 주인공이다. 그리고 난수의 결혼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당시에는 당연했던 양반의 체면을 볼 수 있었다. 지금 우리 주변에도 이렇게 불합리하다고 생각되는 관습이 남아 있지 않을까? 나에게는 소녀의 호기심이 벌써 다 사라져 버린 것 일까?.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도리언 그레이는 순수한 존재로 나온다. 그러다가 쾌락에 눈을 뜨게 되는데 젊음을 유지할 수 있던 그레이는 초상을 찢어버리고 늙어 죽고만다. 나는 이책을 읽으며 외모지상주의와 쾌락주의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아이돌이나 연예인이라는 직업이 각광받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외모지상주의를 버리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 옛날부터 고전미인이라던가 외모지상주의는 많았다. 인간이라면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게 이상한 것은 아니니까. 문제는 외모지상주의로 인해 사람들이 차별을 당하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원초적인 끌림을 없앨수는 없지만 이로 인해 사람을 차별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쾌락주의는 범법행위나 도덕적인 범위 안에서 벗어나지 않고 자신의 생활을 유지하며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좋다고 생각한다. 나도 가끔 과제를 미뤄두고 유튜브를 시청하기도 한다.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안에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어느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