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걸이 (BESTSELLER WORLDBOOK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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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었을 때 순간의 허영심이 부부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놓았다는 소설의 줄거리는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 나와는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나는 겉 치장에 신경 쓰는 편도 아니고 허영심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허영심이 조금도 없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마틸다의 허영심을 나무라지만 누구나 가지고 있는 허영심이 마틸다는 좀 더 강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에는 마틸다처럼 자신의 분수 이상으로 사치를 부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고 된장녀와 같이 이들을 일컫는 신조어도 탄생했다. 사람들은 이들을 나무라고 욕하기만 할 뿐 왜 이들이 무리하게 자신의 겉모습을 치장하는지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을 이렇게 만든 건 이 시대의 우리가 아닌가 싶다. 겉모습으로 사람을 쉽게 평가하고 차별 대우하는 우리들 말이다. 그러므로 된장녀된장녀라 부르기 전에 우리 자신부터 우리가 그런 태도로 남을 대하지는 않았는지, 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사실 나도 외모지상주의적 태도가 잘못되었으며 고쳐져야 한다고 생각해서 스스로 나를 성찰하고 의식적으로 노력하지만 가끔 외적인 부분을 중요시 여길 때가 있다. 물론 첫인상은 3초 안에 판결이 난다고 할 정도로 보는 것은 인간의 오감 중 하나이고 가장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나 또한 꾸준히 외적인 것에 치중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할 것이다.

 

   이 책이 인상 깊었던 이유는 순간의 선택이 인생 전반을 바꾸어 놓았다는 점인데 성인이 되면서 내가 선택하고 내가 책임을 지는 일이 많아지게 되었다는 것을 요새 들어 느끼고 있다. 순간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고 사소해 보이는 선택이라도 그것이 나중에 나에게 어떻게 다가올지 알지 못하므로 신중히 선택해야 한다고 깨달았다.

 

   또한 마틸다의 남편 루아젤도 꽤나 멋진 남편이라고 생각되었다. 파티를 좋아하는 마틸다를 위해 어렵게 파티 초대권을 구해다 주고 파티에 마땅한 드레스가 없다며 불평을 늘어놓는 아내를 위해 친구들과 사냥을 가기 위해 마련할 권총을 살 돈을 선뜻 내어놓는 모습에서 아내를 위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또한 마틸다의 실수로 잃어버린 목걸이를 갚아나가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고생해야 할 것을 알지만 끝까지 마틸다의 곁을 떠나지 않고 함께 고난을 헤쳐나간 점이 굉장히 멋있게 느껴졌다. 만약 나라면 남편의 실수로 나의 청춘을 바쳐야 하는 상황에서 남편 곁을 지킬 수 있을까라는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이 소설의 묘미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 반전은 나에게 크나큰 충격과 허탈함을 안겨주었다. 목걸이 값을 지불하기 위해 다신 돌아오지 않을 젊었을 시절의 고생은 그 무엇으로도 보상받을 수도 없고 돌릴 수도 없다. 소설에는 나오지 않아 마틸다가 제인에게 진짜 목걸이 값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받았다고 하더라도 마틸다는 찬란한 젊음이라는 시기를 놓쳐버리고 만 것이다. 고등학생 때는 입시 때문에 느끼지 못하였는지 몰라도 스무 살이 된 지금 나는 나의 스무 살이, 이 젊음이 너무나도 좋다. 나만의 꿈을 꾸고 그 꿈을 위해 열정을 쏟을 수 있고 마음대로 꾸미고 어디든 놀러 다닐 수 있는 건 젊은 시절이기에 더 가치있게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안 그래도 치장하는 것을 좋아하고 주목받는 것을 좋아하는 마틸다에게는 10년이라는 고생의 세월은 특히나 더 지옥 같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틸다의 사정이 너무 안타깝고 마틸다에게 연민의 감정이 더욱 많이 들었다.

 

   나의 스물한 살이 벌써 반이나 지나갔다. 나의 이십 대는 아직 8년하고도 반년이나 남았지만 뭐든지 처음이고 그래서 더욱 풋풋한 스무 살,스물한 살이 이렇게 빠르게 지나가버린 것에 요새 나는 하루하루가 아쉽게만 느껴지는 요즘에 이 책을 읽고 내 젊음을 소중히 여기고 누리며 살아야겠다고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다.

자기 앞의 생 (문학동네 세계문학,에밀 아자르 장편소설)

 처음 작가는 이 책의 제목을 ‘돌들의 사랑’으로 하려했다고 한다. 모모와 로자아줌마가 돌이란 말인가. 그랬을수도 있다. 물론 우리들 눈에만. 대다수의 소설책이 그러하겠지만 이 책은 사랑을 다룬다. 하지만 여느 소설의 사랑과는 다르게 상당히 보잘 것 없다. 창녀의 아들로 태어나 버려진 모모와 그 아이를 대신 길러주는 살이찌고 늙어 인간이 걸릴 수 있는 모든 병에 걸린 로자 아줌마의 이야기. 비록 그들은 혈육관계는 아니지만, 진심을 다해 서로를 위하고 걱정한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소외 계층들이다. 즉 보통의 사람들에게 소외되어 외로운 그런 존재들. 그들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도움을 주는 사람들은 오직 그들과 같은 사회적 소수자들 뿐이었다. 어린 모모는 이런 말을 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너무 지독한 냄새가 나지 않는 이상 쳐다도보지 않았다.”  책을 읽으며 생각해봤다. 만약 이들이 내 옆에 있었다면, 나는 진심어리게 그들에게 관심을 가졌을까? 솔직히 말하면 책을 통해서는 그들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었지만, 만약 이 둘이 실제로 내 옆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있었다해도  난 이들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았을 것이다. 
 
 인터넷에 이 책을 검색하면 ‘모모와 로자 아줌마의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라는 이 책의 소개글을 볼 수 있다. 쓸데없이 태클을 거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나는 이 소개글이 아주 싫다. 심지어 화가 치밀어 오른다. 왠지 이 소개글을 보면 뭔가 보통의 사람들(자신들이 ‘모모’와 늙은 ‘로자 아줌마’보다 훨씬 나은 상황,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딱한 그들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척 하며 우롱하는 것 같다. 즉 모모와 로자 아줌마를 진심으로 대하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든다. 물론 소개글을 쓴 사람은 그들을 우롱할 마음없이 그저 우리들에게 그들을 소개해주고픈 마음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게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쩌면 내가 그들을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갚이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걸렸기때문인 것 같다.  아마 내가 괜히 소개글에 화풀이를 한 것은 이렇게 책이라는 수단을 통해서만 남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는 나 자신에게  역겨움을 느껴서 그랬던 것 같다. 부끄러운 마음뿐이다. 결국 보잘 것 없는 것은 그들의 사랑이 아니라 이 세상 속 ‘그들’에게 진심어린 관심을 갖지 않던 나였다.

  제목 이야기로 시작했으니 제목 이야기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작가는 이 책의 제목을 ‘돌들의 사랑’에서 ‘자기 앞의 생’으로 바꿨다. 자기 앞의 생,  즉 여생.  여기서  ‘자기’는 누구일까. 모모일수도 아니면 눈을 감기전의 로자 아줌마일지도 , 혹은 나 일지도 아니면 이 글을 읽고있는 여러분일지도. 우리들 앞의 생은 어떤 것일까. 생의 내용대신, 생 그 자체를 제목으로 한 것을 보면  작가는  삶 속의 특별한 내용보다 각자의 생  그 자체를 축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길 건너 저 카페 앞에 앉아있는 할아버지가 빅토르 위고 일수도, 북적한 시장 속 과일가게에서 몰래 옷주머니에 과일을 훔치는 저 꼬마는 모모일수도, 지하철 역 계단을 헉헉대며 오르는 아주머니 이름이 로자일수도 있는 이 생은 그 자체로도 가치있는 것인가보다. 심지어 책을 통해야만 그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는 형편없는 나의 생마저도!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The Postman Always Rings Twice)

  떠돌이 프랭크는 자기에게 선뜻 일자리를 준 닉의 부인 코라와 사랑에 빠진다. 프랭크와 코라는 닉을 없애고 도피할 계획을 세우지만 경찰에게 덜미를 잡히게 된다. 마지막에 코라는 교통사고로 죽고 프랭크는 사형에 처하게 된다.
  이 책이 출간된 당시, 폭력과 성애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는 이유로 판매 금지를 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은 나에겐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번역가가 원본을 순화해서 옮겼는지는 잘 모르는 일이다. 작품해설을 보면, <포스트맨>은 하드보일드(hard-boiled)소설이다. 하드보일드소설은 1930년대 새롭게 등장한 사실주의적 기법의 미국문학인데 대표적인 작가는 허밍웨이가 있다. 이 책의 저자 케인도 그 흐름을 따른다. 이런 기법의 특징은 수식어구 없이 문장이 짧고 간결해서 거침없이 읽히고 사실을 파악하는데 빠르다는 것이다.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라는 제목은 소설의 내용과 별 관계없어 보이지만 저자가 실제로 있었던 ‘스나이더-그레이 소송 사건’에서 기본 줄거리를 따왔으며 평소 자기에게 자주 오는 우편배달부가 확인차 벨을 두 번을 울리는 걸 반영했다. ‘스나이더-그레이 소송 사건’은 스나이더의 부인 루스와 그녀의 불륜남이 스나이더를 살해 후 남편의 보험금을 탄 사건이다. 그 안에는 루스가 우편배달부에게 남편의 보험 지급증서를 배달할때 그 신호로  초인종을 두 번 울리라는 부탁이 담겨있다.
  소설의 두 중심인물 프랭크와 코라가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데 전반적으로 안정적이고 부드러운 내용은 아니다. 실제의 사건이 모티브인 만큼 어둡고 차가운 내용이다.
코라는 젋고 예쁘다. 코라는 남편 닉을 개기름나는 늙은이로 표현한다. 그와 결혼한 건 사랑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에게 눌어 붙어서 살려고 한 것이다. 프랭크는 방랑자다. 소설의 처음에 프랭크는 침대가 아닌 건초 트럭에서 잠을 깨고 코라를 사랑하는 중간에도 다른 여자와 여행을 가기도 한다. 그래도 코라를 사랑한 건 진심이었기 때문에 죽음의 끝에서 코라를 생각한다.  그 두 인물은 닉을 살해하는 걸 계획했어도 그다지 똑똑하지 못했고 본능적이고 충동적이었다.  그점이 경찰에게 덜미를 잡히게 한 것이다.  프랭크의 끝이 사형인 것은 잘못에 대한 현실적인 처벌이라고 생각한다. 사형을 기다리는 프랭크에게 동정심이 생길지라도 그는 살인범, 공범이다. 세상에 프랭크와 코라같은 사람은 많다. 왜냐하면 그런 부도덕함이 모든 우리 마음 속에 조금이나마 있기 때문이다.

늑대토템 1

주변 어디를 둘러보아도 빽빽하게 세워 진 빌딩이 보인다. 20대를 살아가는 현재. 나는 콘크리트의 정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물론 이것이 불편하거나 나쁘다는 것은 결단코 아니다. 과학의 발전은 인류에게 평안한 삶과 편리함을 주었고, 이는 삶의 질의 향상을 불러왔다. 이 모든 것의 수혜자인 내가 이것을 불평한다면 상당히 뻔뻔하지 않은가. 그렇다 하더라도 내 마음 속 한켠에는 자연에 대한 동경이 숨어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드넓은 초원, 국내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지평선, 군 생활을 제외하고는 본 적도 없는 별 무리에 휩싸인 밤하늘. 현실의 자연이란 그렇게 낭만적인 것이 아님을 잘 알면서도 동경을 하게 된다. 들끓는 벌래, 중구난방 자라있는 잡초들, 걸어도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벌판. 그렇다 하더라도 동경이 사라지지 않는다.
 
 
이 작품 늑대 토템은 중국 문화 혁명 당시 대학생이었던 주인공 ‘천전’ 이 몽고의 말 목장으로 강제로 보내지면서 겪는 이야기 이다. 그는 몽골의 드넓은 자연의 삶 속에서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그들의 삶을 배운다. 늑대의 삶이 바로 그것이다. 사회주의에 순응하던 주인공을 ‘문명화된 양’ 이라 본다면 그에게 필요한 것은 거친 야성인 늑대의 투쟁이라 여긴 것이다. 작 중 주인공은 마을의 촌장을 스승으로 여기며 자연에 순응하며 공존하는 유목민의 삶을 배우게 된다. 그것은 광활한 초원의 숨소리와 거친 늑대의 생명력으로 가득 찬 삶으로 표현된다. 사회의 축으로 모든 것을 순응 하는 삶만 살던 주인공은 늑대를 보고 늑대의 삶을 배우며 점점 변해간다. 인류의 대부분의 저서, 이솝 우화 부터 시작해 어린아이에게 들려주는 동화에서 조차 늑대는 악역으로 등장한다. 로마시대, 중세 유럽 언제든 늑대는 늘 신성한 종교의 대척점에 존재 하였고 우리는 항상 악인에게 늑대라는 낙인을 찍었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늑대는 자연의 정령이며 전쟁의 신이다. 언제나 무리를 위해 희생을 하며 초원의 어머니이자 강인한 정신력이다. 그들은 늙거나 약한 일원을 버리지 않는다. 또한 자신의 암컷과 새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유일한 동물이며 기아와 탐욕을 절제할 줄 아는 영리한 동물이다. 주인공은 몽골의 위대한 초원에서 늑대의 삶을 보고 배우며 동경하게 된다. 이는 현대의 삶을 살며 초원을 동경하는 나로서는 공감을 느끼게 하는 큰 요소였다. 흔한 대학생이었던 천전이 늑대의 삶을 배우면서 몽골인들과 어울리며 자연에 순응하는 삶을 사는 것을 보며 나는 일종의 대리 만족을 느꼈다. 나 또한 그들과 같은 삶을 살고 싶다 생각 했다.
 
 
콘크리트의 정글에 지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자연을 동경하게 된다. 문명화된 도시는 분명 우리에게 편리함을 주었지만 우리는 원초적인 자연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시끄러운 경적을 울리는 차량, 바삐 울리는 핸드폰, 시덥잖은 소리를 내뱉는 tv를 떠나 아무것도 없는 초원에서 멍하니 지평선을 바라보며 하릴 없는 시간을 보내고 싶어지는 거다. 이 소설은 그러한 욕구를 충족시켜준다. 드넓은 초원을, 고고한 늑대를 야생 그대로를 옮겨 놓듯이 묘사한다. 나도 언젠가 글 속의 주인공 처럼 훌쩍 몽골로 떠나 초원의 삶을 느껴보고 싶어진다.

카인 (주제 사라마구 장편소설)

종교라는 것은 부조리하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머릿속을 읽을 수 있는 전지전능한 신이 존재한다면 그는 어째서 인류가 겪는 무수한 비극을 외면하기만 하는가. 종교라는 것에서 얼마나 많은 분쟁이 시작되었는가. 십자군 전쟁부터 마녀사냥, 중세 시대의 종교라는 이름으로 자행 된 수 많은 죽음들. 사랑을 울부짖었던 예수의 가르침은 인류에게 도달하지 못했다. 전지전능한 우리의 어버이이신 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볼 수 있을 지언데, 그는 외면한다. 전지 전능.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행하는 것은, 과거와 미래를 통틀어 알 수 있고 행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 만으로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전지 전능 그 자체라면, 나는 이러한 존재가 우리의 곁에 항상 우리를 지켜보며 죽음 이후의 삶에서 우리를 판결한다는 것에 공포감 마저 느낀다.
 
 
흔히 종교는 우리의 인식의 영역 밖에 존재 한다고 한다. 즉 신의 생각은 우리의 차원을 넘어선 고차원적 정신이기에 우리는 신이 행하는 일에 대해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부조리함의 끝이라 생각한다. 이 작품 또한 작가는 그렇게 느꼈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야훼교, 카톨릭,아니면 크리스쳔의 최초의 살인자에 대한 이야기 이다. 우리는 흔히 원죄를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태초에 존재한 선악과를 먹은 우리는 무지가 아닌 지식을 쫒게 되었고 그러 인해 신에게 낙인 찍히게 된다. 인류는 유토피아에서 쫒겨나 황량한 들판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친다. 그리고 위대하신 야훼 께서는 이를 시험이라 말한다.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그분께서는 한낱 자신의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에게 친히 시험을 하신 것이다. 우리가 죄를 저지를 것을 알기도 하고, 그것을 막을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면 이것은 우리의 잘못인가. 부조리 하다. 작가는 자신의 저작 ‘카인’ 에서 구약 성경의 이러한 부조리한 면모를 꼬집는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신께서는 어째서 동생을 죽이라고 부추기는 가. 모든 것을 행할수 있는 신께서는 어째서 자신을 믿고 있는 아브라함 에게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잔혹한 시험을 내리는가. 작 중 이삭은 자신을 제물로 받치려는 아버지에게 말한다. 신을 이해할수 없다고. 나 또한 그렇다. 신을 이해할 수 없다. 주제 사라마구는 최초의 살인마 ‘카인’ 의 시점에서 구약 성경 내의 신의 부조리함을 꼬집는다. 작가는 최초의 살인자 카인과 전지전능한 신의 대립을 통해 종교에 관해 역설 하고자 한 것이다. 
 
 
흔히 종교의 세계에서는 인간의 잘못을 신이 판단하는 경우가 있다. 이집트의 경우는 아누비스의 천징, 야훼교의 경우에는 천사의 심판 등등.그러나 현재 우리의 기초적 도덕을 지탱해주는 것은 인간이 역사로 쌓아 올린 위대한 지성의 결과물인 ‘법’ 이다. 알량한 믿음과 약간의 현금으로 죄를 사하여 주는 신이 아닌 것이다. 만일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신이 존재한다면 우린 어떻게 될까. 아마 우리는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소설 속 등장 인물과 같아 질거라 생각한다.. 주변에 있는 종교인들만 봐도 느껴지지 않는가? 모든 것은 신의 안배요, 신에게 향하는 믿음 일지니. 내가 잘되는 것은 신의 은총이요, 내가 불행한 것은 내 믿음이 부족한 탓이다. 이 소설은 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아울러 더 나가 종교를 배제한 인간의 주체적인 인생에 관한 고찰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어준다. 

사람에게 돌아가라 (아닌 척하지만 사실은 너무나도 외로운 당신에게)

제목: 외로움 안정제, 먼저 다가간 나의 한 발짝

 

 이 책의 머리말을 읽었을 때, 눈물이 찔끔했다. 필자에게 들었던 생각을 나도 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외로운 사람은 너 혼자만이 아니야라는 말은 위로가 되지 않았다는 점, 깊은 고민은 누구에게 털어 놓아야할지 몰라 혼자 그대로 마음에 묻어버린 적이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추상적인 외로움보다는 삶의 현장에서 맞닥뜨린 외로움에 대한 조언을 해준다는 것이 기대도 되었고 한편으로는 의문도 들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필자에게 나를 들킨듯한 기분이 종종 들었다.

 고독사 이야기와 이웃과의 단절에 대한 이야기, 비교를 통해 생기는 열등감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서 어쩌면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나 스스로 만드는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또한 어느 순간부터 이웃들에게 인사하지 않았다. 남이라는 이유로 벽을 치고 지내왔기 때문에 몇 호에 사는지도 모르며 상대방도 말을 건네지 않는데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인사하면 상대방이 어색하지 않을까라는 이기적인 생각과 몇 년 동안 해오지 않은 어색함 때문인 것 같았다. 열등감과 관련된 이야기 중 나의 단점과 타인의 장점을 비교라는 부분에서 나는 그 어떤 책보다도 이 감정이 생기는 이유를 더 쉽게 이해되었던 것 같다. 관점을 바꾸면 세상이 달리 보이듯 나만의 중심을 잡는게 어렵지만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야 흔들리지 않고 한결같은 사람이 될 수 있기에..

 

 외로움을 더 커지게 만드는 것 역시 나 자신과 관련되어 있었다. 나는 미래에 대한 걱정을 너무 하고 두려움도 많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실재하는 고통이 아니다. 또한 필자는 내일은 내일에 대한 염려가 있을 것이니 그날의 나쁜 일은 그날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지친 하루라는 노래 중 오늘 이 기분 때문에 모든 걸 되돌릴 수 없어라는 가사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망쳐버린 오늘로 내일까지 피해를 줘서는 안 되겠다고 다시금 다짐했다. 그리고 편견에 대해 이야기 한 것들 중 나 자신에 대해 스스로 규정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편견을 만들어 준다는 부분이 인상 깊었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내성적이다, 약간 부정적인 편이라며 나를 규정했던 것 같다. 더불어 내 성격은 이렇게만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번에 초등학교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새로운 나에 대해 알게 되었다. 2학년 친구가 선생님 왜 이렇게 밝아요? 원래 이렇게 밝아요?” 라고 물어 보았다. 나는 이 물음에 적잖이 당황했다. 나는 밝지 않은 줄 알았으니까.. 1학기에 수업을 같이 들었던 선배도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 선배가 밝아서 그런 것이라고, 말하는 상대방에 따라서 감정표현이 달라지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생각을 조금 달리하게 되었다. 나에게도 저러한 면이 있구나, 너무 스스로 나를 옭아매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고정적인 생각과 말이 나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도 나를 옭아맬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에 조금 무서워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집착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한결 생각을 유연하게 할 수 있었다. 나는 노력과 성공은 비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늘 비례하길 믿으며 살아온 것 같다. 그래서 원하는 결과물을 얻기 위해 안 되면 어떡하지라는 불안감도 컸다. 필자가 표현한 모기 물린 데를 계속 긁어대면 부어오르는 것처럼, 오랜 시간 걸려 세운 도미노가 무너질 수 있다는 것처럼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성과에 대한 집착에서 유연한 마음을 갖고 정말 아무리 애써도 안 되는 것이라면 집착하지 않고 놓을 줄도 아는 내가 되고 싶어졌다.

 

 또한 진정한 관계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겨온 것에 대한 역설적인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내가 생각했던 진정한 관계란 책에서 제시된 것처럼 깊은 감정과 내면의 생각에 공감해주고 토닥토닥 보듬어주는, 사랑스러운 눈빛을 지어주는 등의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것들은 너무나도 이상적이며 나를 위한 기준임을 알게 되었다. 현실적으로는 의견이 항상 일치하지 않을 수도, 우선순위가 항상 같지 않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내 편이라는 의미를 지금껏 나와 같은 생각, 가치를 가져야한다고 생각했다. 이 책을 읽고 나서는 내 편이지만 다른 생각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름을 인정한다는 것의 속뜻도 이제 어느 정도 알게 된 것 같다. 그리고 누군가 내 험담을 할 수 있겠다는 의심과 자존감 낮은 생각이 외로움을 조장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책에서도 나오듯 말은 말일 뿐 내 인생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다. 이전에도 종종 들었던 말이지만 세상이 나에게 전부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며 그들은 자신 생각에 바쁘니까, 내가 나 자신 생각에 바쁜 것처럼 말이다.

 

 마음의 지옥도 내가 만들고 있었다. 누군가에 대해 분을 품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은 아무렇지 않다. 그 사람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분의 무게에 나만 아프게 되므로 마음만 무겁게 된다. 후회 또한 마찬가지로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할 걸이라는 후회의 감정을 떠올리게 되면 그 부정적 감정을 복습하게 되기 때문이다. 과거에 얽매여 소중한 순간을 낭비하지 말고 현재에 감사하며 충실히 살아야겠다. 그리고 기대감과 실망감에 대한 필자의 생각에 공감한다. 이 책의 다이아몬드에 비유, 종이와 칼에 벤 아픔의 비교에 비유는 너무 와닿았다. 다이아몬드는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가까이서 보면 수많은 흠집과 잡티가 있다고 한다. 또 종이의 단면은 울퉁불퉁하지만 칼의 단면은 매끄럽기 때문에 종이에 베였을 때 아픔이 더 크다고 한다. 필자는 이를 관계에도 적용시켜 이야기한다. 나 또한 더 잘,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이 나에게 작은 상처를 주면 가까운 관계가 아닌 사람보다 실망과 상처가 크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이제부터는 다이아몬드의 세밀한 흠집이나 종이 단면의 울퉁불퉁함 그 자체에 신경 쓰고 상처받기보다 나를 위해주는 소중한 사람이라는 점을 더 크게 생각하려고 노력해야겠다. 필자는 외로움의 특효약이 사람이라고 한 부분에서 헨리 애덤스의 말을 인용했는데 맞는 말 같았다. “평생에 벗이 하나 있으면 많은 것이다. 둘이면 매우 많은 것이며, 셋은 거의 불가능하다.”라는 말이다. 정말 진정한 벗은 되기도, 사귀기도 어려운 것 같다. 진정한 사람 만나기가 내가 추구하는 행복임에도 이 부분은 어려운 삶의 숙제인 것 같다.

 그렇지만 진정한 관계를 위해서, 외로움이라는 감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상대방에게 내가 먼저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책을 읽으면서 많이 깨달았다. 방어적인 태도를 벗고 내가 이러한 말을 했을 때 상대방의 반응이 어떨지 미리 판단하거나 걱정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책에서도 언급되었듯 그 이야기가 나를 다 보여준 것이 아니므로 상대방이 건성으로 들었다고 느낄지언정 그 반응에 연연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오베라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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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누구 에게던 공평하게 다가온다. 그것은 늦든 빠르든 항상 우리의 곁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그 죽음에 대비 해야 한다. 그것이 자신의 죽음이 아니라 자신의 지인의 죽음이라 하더라도. 공평한 죽음일지라도 그것이 슬프지 아니 할리가 없다. 우리는 늘 상 가까운 누군가의 죽음에, 슬픔에 짙눌려 살아간다. 그리고 그 슬픔은 망각이라는 서글픈 파도에 휩쓸려 마모 되어 작은 모래알이 된다. 잊힌다는 것이다. 그러나 망각에 휩쓸려 잊혀진다 할지라도 그것의 잔재는 남아있다. 모래알이 되어서 라도 확실히 그곳에 존재한다. 사라지지는 않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것이 그렇다. 아무리 닳고 닳아도 작아질 뿐 사라지지는 않는다. 마음 속 한 켠에 모이고 모여 모래밭을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 오베는 노인이다. 그는 긴 마라톤 같은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죽음을 겪어왔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남은 사랑 또한 죽음의 곁으로 떠나버렸다. 그것은 부조리한 죽음이었다. 오베가 상상하지 못한 죽음이었으며, 그가 버틸 수 있는 죽음 또한 아니었다. 그의 나이는 망각이라는 것을 버틸 정도의 기력이 남아있지 않았으며 그것을 원하지도 않았다. 너무나 소중했기에 그는 잊혀지기를 원치 않았다. 오베의 시간은 그녀의 죽음에 의해 끝나 버린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라는 슬픔에 짙눌리고 그 절망에 헤어 나오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이다. 그는 그녀가 죽기 전의 일상을 계속 겪는다. 언제나의 일상 이건만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의 무덤에 들린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다. 슬픔에 짙눌린 그는 그녀의 그림자가 가득 찬 집에서 자살을 시도한다. 소설의 시작이다.
 
 
 물론 이 소설, 비극은 아니다. 비극은 커녕 아주 가벼운 희극과 같은 글이다. 글을 읽는 내내 유쾌한 기분이 끊이질 않았다. 슬픔에 묻힌 노인인 주인공 오베는 우리가 상상하는 ‘꼰대’ 라는 이미지 그대로 였고, 소설의 주된 줄거리는 오베라는 이 남자의 새로운 황혼기를 다루는 이야기 이다. 죽음을 원하는 노인의 이웃으로 오는 유쾌한 가족들을 시작으로 점점 엮여 오는 인간관계들. 그들은 오베라는 인간의 관점으로 보면 한심한 사람들 이지만 그들은 도움을 원한다. 인생의 전환점이 될만한 깊은 고민일 때도 있으며 새로 산 이케아 옷장을 조립하는 사소한 고민일 때도 있다. 오베는 자신의 평안한 죽음을 위해 그들을 돕는다. 그리고 자신의 필요를 입증한다. 그가 한심하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그가 살아갈 이유가 되어주는 것이다. 이는 그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망각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덮어 씌우는 것이라 생각했다. 오베는 소설이 끝날 때 까지 그녀를 잊지 않는다. 항상 그녀를 떠올린다. 이는 회상으로도 나온다. 그녀는 무채색이었던 오베의 삶을 화려한 색을 칠해준 사람이기에.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하던 사람이기에. 그녀를 잊는 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기에 그는 죽음을 유예한다. 오베라는 남자가 불행을 가득 안고 죽기 직전에 그를 필요로 하며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죽음을 유예 한다. 그리고 이것은 불행한 죽음을 맞이하려 한 오베에게 행복한 죽음을 주게 된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얼마나 울고 웃었는지 모르겠다. 오베라는 남자의 지고 지순한 사랑에 울었으며 그의 미워하지 못하는 유쾌한 이웃들을 보며 웃었다. 이 소설은 누군가 에게 무엇인가 큰 교훈을 주거나 문학적으로 큰 획을 남긴 그런 소설은 아니다. 주변에 있을 수도 있는 이웃의 이야기 이며 한 남자의 지고 지순한 사랑을 담은 이야기이다. 그냥 그 뿐인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나에게 얼마나 큰 의미로 다가왔는지. 나는 이 책을 군대에서 진중 문고로 읽었다. 사회와 유리된 군대 생활 속에서, 불 꺼진 밤 혼자 모포 속에서 옅은 불빛에 의지해가며 훌쩍훌쩍 읽었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물론 이 책이 내 인생의 지침서가 되어 준 것도, 군 생활에 도움 될만한 지식을 준 것도 아니다. 그러나 군대를 전역한 지금도 가끔 씩 낡은 모포 속에서 읽었던 이 소설이 떠오르며 흙빛으로 가득 찬 군대 생활도 할 만은 했다고 생각하게 해주는 걸 생각하면 그래 이 책은 나에게 인생 지침보다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누군가 에게도 그렇게 다가왔으면 좋겠다. 힘든 일상을 잊게 해주는 쉼터 같은 책이 되기를 바란다.

신 1 (우리는 신)

  ‘프랑스의 천재작가라는 수식어가 붙는 그는 베르나르 베르베르. 그의 작품을 읽어보지 못한 사람들조차 그의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러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개미, 타나토노트, 천사들의 제국, 나무같이 유명한 작품들이 있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우연히 우리 학교 도서관의 프랑스 문학 서가를 돌아다니게 됐는데, 문득 여태까지 내가 읽어보지 못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명작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내 눈에 띈 것은 바로 . 책 뒤에 요약된 줄거리를 읽어보니 주인공 미카엘 팽송이 신이 되기 위한 수업을 듣고 또 신이 되기 위한 경쟁에 뛰어드는 모험 이야기였다. 판타지 장르의 모험 이야기라니, 줄거리는 흥미를 불러일으켰으나 은 무려 6권이나 되는 장편 시리즈였고 선뜻 시작하기가 망설여졌다. 그럼에도 내가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와 여러 종교의 설들을 바탕으로 한 신선한 내용과 이를 잘 살려주는 그의 필력 때문이었다


  어렸을 적 만화로 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참 재밌게 읽었었는데 이를 토대로 만들어낸 판타지 소설 은 그와는 또 다른 재미를 주었다. 어렸을 적 읽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는 인간계와 신계가 명확히 구분되어 있으며 신의 입장이 중심적으로 다뤄졌다, 때문에 이를 읽을 때 나는 인간인 내가 신들의 입장이 되어 인간의 역사를 바라본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반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은 인간의 입장에서 바라본 신들의 세계를 서술하고 있었고 이는 내가 신들의 세계를 무지의 상태에서 염탐한다는 묘미를 느낄 수 있었다. 또 베르나르의 소설 속 세계관에서는 신계와 인간계가 철저하게 분리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의 과정처럼 엮어져 있는데 이 점에서는 기존 서양의 철학이 아닌 동양의 사상을 엿볼 수 있어서 재밌었다.

  그의 소설에는 불교의 사상이기도 한 윤회가 존재한다. 인간은 환생을 거듭하다가 일정한 경지에 이르면 환생을 멈추고 육신을 벗어나 영혼만 남게 된다. 이렇게 육신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 영혼은 천사가 되어 다시 인간 세상에 남겨진 사람들을 나름의 방식들로 돌본다. 영매를 통한 도움이라던지, 꿈이나 고양이를 활용하는 등 그 방법 역시 흥미로웠다. 이들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돌보던 인간들의 환생을 끝낼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이렇듯 생()이란 그 초입을 인간으로, 중반은 천사로, 마지막으로는 신 지망생으로 보내는 것을 의미한다. 천사의 역할을 다한 영혼들은 다시 육신을 얻어 올림푸스라는 신들의 세계에 도달하게 된다. 영혼들은 스승 신에게 수업을 듣게 되고 그 중 월등한 1명 만이 신이 될 수 있다. 일종의 신이 되기 위한 경쟁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자유롭게 천공을 날아다니던 영혼들은 육신에 갇힌다는 불편함과 영문모를 상황에 놓이게 됨을 두려워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주인공 미카엘 팽송은 경이로움을 느끼기도 하고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아마도 베르나르는 그가 창조해낸 세계 속에서 그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 인간들이 사는 세상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나는 책을 읽으며 이 겉보기에는 신과 해괴한 괴물들 그리고 영혼이라는 현실성 없고 거짓말 같은 얘기를 논한다 싶었지만, 그 이야기를 깊게 따라가다 보면 결국 인간이란 존재가 어떤 것인지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그의 작품 속에서 신 지망생이 된 천사와 탈락 후에 온갖 괴물들로 변한 존재들까지도 그 시작은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들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파과

 고등학생때 도서관에서 우연히 읽은 책인데 그 당시에 재밌게 읽어서 덕분에 구병모라는 작가에게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최근까지도 구병모의 책이라면 나오는 족족 찾아 읽을 정도로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는 작가인데, 서점을 갔더니 표지가 팝아트 식으로 리뷰얼된  파과가 재출간되어 나와 있어서 예전에 한번 읽었던 책이지만 다시 읽어보았다. 그런데 오랜만에 다시 읽은 책은 전에 읽을 때와는 전혀 다르게 다가오는 주제의식과 메세지를 담고 있었다. 과거에는 발견 못한 이런 점들이 흥미로워 독후감을 작성하게 되었다.
 
 간략하게 줄거리 소개을 해보자면 청부 살인을 업으로 삼으며 평생을 살아온 60대 여성 킬러 ‘조각’은 나이 때문인지 스스로 갈무리하지 못한 실수와 변수에 의해 작업중에 부상을 입는다. 노쇠로 인해 연약해 진 것은 신체 뿐만이 아닌지 우연히 자신을 치료해준 의사 ‘강과장’을 마음에 담게 된다. 그리고 그 사실을 조각을 오래 지켜봐온 젊은 남자 청부업자 ‘투우’에게 들키게 된다. 조각에게 악의를 가진 투우는 강과장의 아이를 인질로 조각에게 싸움을 걸고 조각은  자신과 아이, 주변을 지키기 위해 싸움에 응한다.
 
주인공이 냉철한 청부살인업자인 영화나 소설은 벌써 다수 존재한다. 그들의 사랑과 액션을 그리는 스토리는 헐리우드에서만 백번쯤 나왔을 것이다. 이 소설은 그 냉철한 킬러가 노년의 60대 여성이라는 데서 차별점을 주지만 그것 뿐만이라면 다시 책을 읽었을 때 크게 와닿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과거에는 그저 60대 여성 킬러의 미묘한 애정전선과 영화로 나와도 손색없을 정도의 긴장감 넘치는 액션씬이 재밌어서 가상캐스팅 까지 해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었는데 사실 이 책에서 중점을 두는 부분은 거기가 아니다.   
 
 ‘파과’ 라는 다소 생소한 이 단어는 여러가지 뜻이 있는데, 첫번째는 파과지년 -여성의 나의 16세를 일컫는 말이고 두번째는 흠집이 난 과실을 일컫는 말이다. 생물의 노화야 그 끝이 죽음인 만큼 남, 여, 개, 기린, 사자 가릴 것 없이 모두에게 서글픈 것이겠지만, 사회적으로 여성의 노화는 바로  여성성의 상실로 이어지기 때문에 더욱 슬프게 다가온다. 파과지년, 꼭 16세가 아니더라도 어느 꽃같은 시기를 지나쳐 중년, 노년을 다다르면 여성은 여성성을 상실하고 폐경까지 겪고 나면 사회적으로 더 이상 재고할 여지 조차 없게 된다. 냉장고 안에서 잊혀진채 방치되는 복숭아처럼 조금씩 문드러지며 죽음을 향해 나아갈 뿐이다. 그러나 조각의 이야기는 여기서 부터 시작된다. 오히려 조각은 노화 덕분에 그동안의 냉철하고 차가운 마음을 허무러트리고 더욱 인간적인 삶과 생활에 마음을 연다. 기억력이며 신체 기능은 예전만 못하지만 새로운 것을 받아 들이고 새로운 감정을 느끼며 배움도 얻는다. 조각은 노화를 통해 더 좋은 쪽으로 변화하고 발전했다.  이는 노화가 시사하는 것이 반드시 종말만은 아님을 보여준다. 노화는 신체의 쇠락일 뿐 인간 전반을 주도하는 정신의 영역과는 별개일 수 있는 것이다.
 
 예전에 읽었을 때는 무심코 지나쳤었는데 다시 읽으니 많은 생각을 하게 했던 장면은 조각이 화려한 네일 아트를 받는 장면이다. 사회는 노년에 대한 부정적 편견이 팽배하면서도 또 획일적인 이미지만을 요구한다. 좋은 노년은 모두 인자하고 사회에서 한 걸은 뒤에 서 있다. 우리 모두 언젠가 노년이 될 것인데, 하나같이 다른 개성의 사람들이 노년에 다다라서는 개성을 잃은 ‘노인’으로 뭉뚱그려지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수수한 노인이 있으면 화려한 노인이 있고, 인자한 노인이 있으면 까칠한 노인도 있을 것이다. 나도 언젠가는 나도 노인이 될 텐데 신체의 퇴화와 사회의 요구에 정신까지 휩쓸리지 않고 나다운 노인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괴물이 된 이십 대의 자화상)

  이 책은 사회학 강사가 그의 수업을 기반으로 하여 느낀 여러가지를 책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그의 직업 덕분에 작가님은 내 나이 또래를 접할 기회가 많았다. 자연스레 20대가 내포하고 있는 문제점, 그리고 더 나아가 이러한 문제적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하여 고민하게 되었다고 한다. 평소 나는 자기계발서를 전혀 읽지 않는다. 그 유명하다던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던지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조차도 읽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꼬여있던 나는 아프면 아픈거지 그게 청춘이랑은 무슨 상관인가 하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와 다른 대다수의 이십대들은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자기계발서를 찾아 읽은 모양이다. 실제로 두 책은 오랜 기간동안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자리를 굳건히 지켰으니 말이다. 
  저자는 이십대들의 자기계발이 온전히 자기를 위한 것인지 묻고 있다. 그러면서 현재 이십대들의 자기계발은 취업을 위한,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한 행위가 아닌가 답하고 있다.  맞는 말이다. 만약 특정 기업에서 토익 내지 여러 어학 자격증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수많은 대학생들과 취준생 중 본인의 만족을 위해서 학원에 등록하여 공부할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자기 계발은 비교의 성질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계발(啓發)은 ‘슬기나 재능, 사상 따위를 일깨워 줌.’이라는 뜻이다. 자기 계발이란 잠재되어 있는 자신의 재능이나 사상을 일깨운다는 의미이다. (네이버 국어사전 참조)내가 나의 재능을 발견하기 위해 주말에 집에 누워서 넷플릭스로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 역시 자기계발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를 자기 계발로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왜냐하면 요즈음 이십대들의 자기 계발이란 취업을 위한 것으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우리는 코미디 영화 한 편을 보는 것은 토익 학원에 나가 영어 공부를 하는 것보다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이십대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발을 들여놓게 되는 공간은 대학이다. 이 곳에서부터 , 어쩌면 그 전부터도 이십대들의 학력 줄세우기는 시작된다. 우리는 나보다 대학 서열이 높은 곳에 합격한 친구 앞에서는 “나 수능을 망쳐서.. “라는 말로 자기방어를 시전하고 나보다 서열이 낮은 대학에 다니는 친구 앞에서는 은근한 우월감을 가진다. 가끔은 나보다 서열이 낮은 대학에 다니는 친구 앞에서 그를 배려해 나의 대학을 말하지 않는 어쭙잖은 관용까지 베풀기도 한다. 길거리에서  과잠을 입고 다니는 학생을 보면 은근슬쩍 확인해보려 하고 나보다 낮은 서열의 학교 로고가 박혀 있으면 내심 안도함과 동시에 우쭐해 하곤 한다. 이것은 나의 모습이자 나 말고도 다른 이십대들의 모습이다. 무서울 정도로 적나라해서 이 부분을 읽는 내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십대들을 이렇게 만든 직접적인 원인은 사회인데 정작 이십대들은 눈 앞에 닥친 취업과 자기계발에 빠져 정작 사회구조의 모순은 저편으로 사라져버린다.
  이 책은 어떠한 결론을 내리는 책은 아니다. 그러나 현재 사회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문제를 제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여성의 참정권이나 아이들의 교육, 장애인의 복지 모두 사회적 모순을 느낀 개인에 의하여 발의되어 개선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길을 선택하기보다 돈이 되는 길을 선택해야만 하는 길들여진 이십대의 모습에서 벗어나야 한다. 변해버린 이십대의 현재 모습을 과감하게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 이십대의 사회인식의 변화와 동시에 연대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리고 나 역시도 변화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인간다움이 지켜지는 사회를 꿈꾸고 있다.